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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늘> 느리거나 혹은 빠르거나...081023

늦거나 혹은 빠르거나

 

 

1.


내가 잘못 교육 받은 것 중 하나는

<시간은 금>이라는 격언이다.

그리고 효율성은 높을수록 좋은 것이며,

집단적 이성, 혹은 합의된 양심은 올바르거나 우리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는 명제 역시

내가 잘못 받은 교육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2.


살아오면서, 혹은 일을 하면서 참 많은 조사들을 받아본 것 같다.

경찰, 검찰, 국세청을 비롯해 은행과 신용평가회사, 심지어 리서치 회사까지.

물론 어떤 내용과 강도, 그리고 목적으로 진행되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나의 준비가 어느 정도이고,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는가 여부에

역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점은 조사의 시기, 즉 타이밍의 문제인 것 같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사에 경황이 없던 며칠...

무수한 상념과 잡념들이 범벅된 가운데,

나의 의도와 무관하지만 이도 해결해야 될 일인 만큼 충분한 대비가 필요했다.

수준과 내용, 강도를 확인하는 일에서부터, 대처의 전략과 전술을 준비하는데

나 역시 그리 자유롭지 못한 상황...

나의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사람을 만나고 정리 혹은 생각해보는 것으로 하루가 지나간다.




3.


계획되지 않은 술자리에 낄 일은 거의 없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위한 술자리를 피할 이유는 없다.

양주 한 병을 위해 우후죽순 늘어나는 맥주를 섞으며 몇 순배의 잔들이 비워졌다.

(그들은 마음에 폭탄을 세례하기 위해 늘 “만다(밥을 국에 말듯이), 비빈다”는 표현을 즐기고,

나의 맥주잔에는 항상 컬러풀한 음료수나 탄산음료가 채워져 있지...^^)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의 속도만큼, 취기에 달아오른 몸도 빨리 풀어진다.

“그만”이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붙들지 않는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늘 지루하다.

미처 비우지 못한 병들에 이름을 새기며 기약없는 상봉을 기다리는 술꾼들의 마음은

달콤한 입술에 취해 포근한 이불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낯설지도 모르겠다.


괜시리 길어진 여름을 탓하지만, 역시 저녁은 가을의 무게를 벗어나지 않는다.

짧지 않는 거리에 비틀거리는 네사람과 피곤한 두다리의 내가 밤을 배회한다.

내가 말이야~~~

남자와 의리의 상관관계는 신도 검증한바 없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의리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사회생활의 상징처럼 들먹여지는 가운데

밤도 깊어가고, 시간도 흘러간다.


아직도 집에 담아놓은 맛있는 과일주와 양주가 손님을 기다린다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대부분의 안주인 마님들도 따라 들어온 손님을 반길리는 만무하다.

눈짓으로 살짝, 몇 사람에게 던져놓은 신호는 그렇게 먼저 일어선다는 인사가 되고,

못 다 나눈 이야기가 고파서 깜박이는 신호등을 불빛삼아 한동안 길거리에 머물렀다.


길지 않는 거리에 짧지 않은 시간...

밤거리를 배회하는 기분이 상큼하다.

시간은 금이다?

이렇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음이 오히려 반가운 밤공기.

그렇게 효율과 휴식을 배반하는 나의 마음이 낯설지 않고 좋았던 이유가 뭘까?


늦거나 혹은 빠른 발걸음...

얼마만에 걸어보는 밤거리일까?

기억에도 없는 추억을 쥐어 짜내며 한동안 밤하늘을 탐미한다.

아쉬움 반틈, 나누고 싶은 마음 반틈...

내게는 생각이 머무는 시간이었다.




4.


1) 답답한데 올라와서 이야기나 하자.

결론없는 이야기를 위해 서울로 달려갔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께 있음이 편안한 시간...

또다시 나는 효율과 목적과 생산의 지상명령을 거부하는 또다른 목적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


밤늦게, 아주 늦어버린 밤시간은 침침한 눈과 피곤함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원주로 내려오는 이유를 한참 물어봤다.

왜 가까운 집을 놔두고서 그 먼 밤길을 달려 내려왔을까?

혼자 있고 싶어서일까?

아니... 혼자 있기 싫어서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2) 답답한데 올라와서 얼굴이나 보자...

다시 하루가 지나고 똑 같은 이유지만, 다른 일을 위해 서울로 출근한다.

머릿속을 거니는 무수한 상념들이 들춰내는 네트워크는 약속을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결론, 결정할 수 없는 결과를 강요한다.

무엇인가 하고 있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보다 덜 답답하기에 몸을 혹사시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진다면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담배를 물고 있겠지.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고

나의 바람이 부질없음을 충분히, 오히려 뼈저리게 느낌에도 불구하고 일에 매달릴 때가 있다.

아니 매달려야 할 것 같은 때가 많다.

결정권에서 벗어나 있고, 시작과 끝을 지켜봐야만 하는 무기력함을 느낄수록

몸부림쳐야만 편할 때가 많은 게 우리들의 시간이고, 우리들의 일이다.


다시 또 묻는다.

왜 집에 가지 않고 원주로 내려 오냐고...

늦은 시간, 그렇지만 어제보다는 늦지 않은 시간에 길거리를 떠도는 달을 본다.

뜨는 반달인지, 지는 반달인지 모르지만

아직 대지의 품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훨씬 크다.

그 달에게 다시 묻는다.

왜 달리고 있냐고...



3) 부슬 보슬 내리는 가을비에 또다시 서울로 향한다.

출퇴근 시간의 번잡함은 모든 사람에게 서둘러야할 이유를 변명해 준다.

늦게 출발함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늦지 않은 도착이 모든 것을 용서하기 때문이다.

늦거나 혹은 빠르거나...

길거리에 쏟아진 모든 차들은 자신들에 적합한 속도를 유지할 이유와 경험이 분명하다.


나는 나 보다 빨리 가는 차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바 없다.

나는 나 보다 늦게 가는 차를 싫어하거나 욕해야할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빨리 달린다.

그리고 그 이유는 빨리라는 효율성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도 분명하다.


많은 차들이 밀려 있는 고속도로의 맨 앞은 텅 비어 있을 때가 많다.

옆 차선의 차보다 빠르지 않은 속도의 차가 추월선을 한동안 유유자적 달릴 때도 많다.

그러나 그 이유로 늦게 가는 차들이 욕을 먹어야 하거나

추월하는 차에 의해 심각한 경고를 받아야 할 이유도 분명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부분 그들 차를 앞지른다.


왜 달리고 있지?

시간은 금이어서?

빨리라는 효율성이라는 지상명령에 충실하기 위해서?

내가 빨리 달리는 이유, 어쩌면 유일한 이유는 혼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뉴스 채널에 고정된 라디오를 돌리며 볼륨을 올린다.

너무 시끄러워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밤길...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것도 남들 보다 빨리 달리는 유일한 이유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회식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직원들이 묻는다.

왜 그렇게 빨리 달려요?

나는 혼자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적이 없다.

운전하기 싫어서...

혼자서 그냥 달리는 것이 생각을 멈추는 여러 방법 중 하나라고 대답한 바 없다.

쉬고 싶어서...



 

5.


하루 밤을 느리게 걸었다.

사흘 밤을 빠르게 달렸다.

늦거나 혹은 빠르거나 나는 늘 혼자의 공간으로 침잠한다.

생각이 머물거나 생각이 멈추거나...

혼자라는 생각이 시간을 배회한다.


느리거나 혹은 빠르거나,

시간이 비면, 나의 생각도 멈춰진다.

걷거나 혹은 달리거나,

텅빈 길에,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오늘, 단풍을 처음 봤다.

오늘, 떨어지는 낙엽을 처음 봤다.

오늘은 유독 혼자라는 게 많은 것들의 변명이 되고 있다.

오늘 꿈에는 어제처럼 혼자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