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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53> 800년 전후 사상적 변화 - 선종 성장의 객관적 조건 (1)...1311

 

 

 

 

   2) 780~828년 불교내부의 흐름과 변화 - 선종이 등장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의 형성기 

 

그럼 당시 사회를 주도하던 불교는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었을까? 나는 이 시기가 다불전 시대를 열어간 통일신라의 통섭적 학해불교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600년대 초반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법사가 일으킨 신역불교는 동북아시아 대승불교를 한차원 끌어올리면서 중국문화에 완전히 소화된다. 즉 구마라습에서 시작한 구역불교의 한계까지 일시에 털어내고 불교의 논리적 체계를 완벽하게 정립하고, 인도불교로부터 열등감에서 벗어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이상주의적 체계를 스스로 형성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때 많은 저술을 남기며 법상종의 개창조가 된 규기와 함께 현장법사의 좌청룡 우백호처럼 그를 보위하면서 직접적인 번역과 막대한 양의 소, 찬, 초 등 저술을 남기며 서명학파를 이끈 중국 유식학의 대가가 원측인데, 그가 바로 신라의 진골출신 왕족이다(규기와 함께 유식학의 정통성을 다툰 원측은 생전에는 자은학파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으나, 규기보다 14년 늦은 696년 끝내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입적, 결국 규기와 함께 서안 흥교사 현장법사 사리탑 좌우에 나란히 봉안된다).

 

<흥교사 현장법사 사리탑/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에서... 사진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사리탑 좌우에는 1/3 정도의 축소된 규모의 규기와 원측의 사리탑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원측의 존재는 신라출신 승려들이 당나라 신역불교 확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700년대로 넘어와서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727년)을 지은 혜초 외에도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한 승려들의 전기인 ‘대당서역 구법고승전’의 15%가 신라출신(그외 이름이 확인된 승려만 80인이었다고...) 이었고, 진골출신(왕자)으로 796년 입적 후 지장보살로 추존된 교각스님(김지장이 그의 이름이다) 등 상당수가 활약했으나, 그들이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당나라에서 입적했다는 것은 한편으론 신라인들이 얼마나 국제적 흐름에 민감했는지 이해하게 하면서도, 골품제와 6두품의 한계에서 벗어나려 했던 청년 지식인과 인재들의 국외 유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혜초의 순례도/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정은주.박미란.백금희/창비/2006년/P370에서... 1908년 둔황석굴에서 발견된 왕오천축국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기 중 하나로, 700년대 초반 인도와 이슬람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중세 세계사 연구에도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아랍제국을 최초로 대식국이라 기록했으며, 경전을 번역 주석하며 당나라 밀종불교의 맥을 잇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787년 80여세 나이로 장안에서 입적했다...>

 

 

일연의 삼국유사 <귀축제사歸竺諸師> 편에는 <구법고승전>을 인용하며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을 찬한 시가 있어 소개한다. 제목에서 귀(歸)자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본래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맞는데, 일연의 눈에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 설혹 돌아왔더라도 결국 죽어서는 그곳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자구 선택이 이 정도면 일연의 문학적 성취만이 아니라, 세상이치를 바라보는 그의 철학적 깊이를 보는 거 같아 인용한다...

 

 

천축천요만첩산 天竺天遙萬疊山 천축이라 하늘 끝 만산이 겹쳐진 곳,

가련유사역등반 可憐遊士力登攀 가련한 유사들이 힘써 오르려 하는구나.

기회월송고범거 幾回月送孤帆去 몇 번이고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띄워 보냈는가,

미견운수일장환 未見雲隨一杖還 구름따라 지팡이 짚고 돌아오는 이 보지 못한다.

 

* 제목에서는 스승 사(師)를 썼는데, 찬문에서는 놀 유(遊)에 선비 사(士)를 쓴 게 재밌다.

 

<혜초 인도 구법여행 상상도/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 P369에서... 혜초 역시 고국 신라에 대한 향수와 고난이 절절히 베인 다섯편의 시를 왕오천축국전에 남겼다...>

 

 

 

 

 

 

 

 

 

여기서 그들의 존재와 활약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새로이 번역된 모든 경전들이 실시간으로 신라에 유입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때의 주요한 통로가 의상 등 재당 유학승과 유학생(837년 한해 당나라 유학생만 216명이었다니 대부분 유력가문의 자제들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과 그 제자들이었음을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이들보다 중요한 존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원효다. 이미 앞서 충분히 이야기했지만, 현장의 권위에 맞짱 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가 해동성자로 불린 원효였고, 이때의 주요 흐름이 유식학이었으니 당대 원효의 논리는 고승들과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환상적인 논리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였겠는가. 한마디로 청산유수였을 것이다. 게다가 자은학파의 번역상 문제점까지 지적하며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은 원측이나, 현장의 논리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근본적인 차원에서 논리를 전개한 원효가 있었으니, 600년대 후반부터 700년대 중반까지 그 정도의 청산유수와 주체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면 고승이라고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이란 점이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필사본/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박태원/한길사/2012년... 이 필사본도 둔황석굴에서 발견되었다... 교통로와 전략적 요충지란 교역과 군사적 목적 외에 경제와 사상, 문화와 문물교류의 집적지이자 충돌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게 모여 역사가 되는 것이고... 길목의 의미다...>

 

 

 

 

 

이에 자극받아 통일신라의 승려들은 당나라의 번역본에 만족하지 못하고 폐쇄된 북방 실크로드 대신 개발된 해상루트를 따라 직접 인도로 구법여행에 나서게 된다. 왜냐하면 751년 고구려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탈라스(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로, 알렉산더 동정의 동북쪽 귀착지이기도 하다)전투에서 아랍-투르크 연합군에 패하면서 이슬람은 불교를 대신해 중앙아시아의 지배적인 종교로 정착할 수 있었고, 종이가 아랍세계에 전파되지만 초원의 길 즉 북방 실크로드(당시까지 비단=실크는 17세기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됐다는 도자기만큼 비싼 최고의 사치품이었다)가 폐쇄되기 때문이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과 탈라스강 전투/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P363에서... 알타이 산맥과 텐산산맥을 넘어 아랄해 상류에서 벌어진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는 패한다. 4차례 서역원정에서 승리한 이후 패배였지만 그 의미는 남달랐다... 당나라는 서역진출의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겨 양잠기술의 외부유출을 꺼려한 당나라는 비단길을 폐쇄했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동쪽 국경을 안정시킨 아바스(압바스) 왕조는 751년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까지 진출하며 최대로 확장된다... 그는 재기를 위해 안록산의 난 진압을 위해 다시 출정하나 누명으로 사망한다...

 

5차 원정에서 패배한 뒤 고선지 장군이 남겼다는 시 ;

만리라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번개보다 더 빠른 거 세상이 아는데

청사로 갈기 딴 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길 다시 달릴까....>

 

<종이의 전파도/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P240에서... 탈라스전투에서 패배한 당나라군의 포로가 2만이 넘었다고 하며 그 중 일부가 제지기술자였다는 추정에서, 이 전쟁이 유럽으로 종이가 전파된 계기가 됐다는 설이 만들어진다...>

 

 

 

 

 

이런 변화의 여파가 확산된 750년대 통일신라의 불교는 어땠을까? 고도의 논리적 체계를 갖춘 관념성의 극치를 달렸을 것이다. 모든 게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해석없이 그들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었고, 또 유학의 경전이 충분히 이해된 주자의 성과를 바탕으로 훈고학이 등장했듯, 불경의 자구해석 하나하나가 그들 사이의 우열을 가렸을 것이다. 훈고학 다음의 대부분 사상체계는 교조주의에 빠지게 된다. 교조주의는 형식과 권위를 중시한다. 교단은 수직적 체계로 재구축되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유학이 예학이 집중했듯이 필연적으로 불교의 예법이 신앙과 실천의 모든 것이 됐을 것 같다. 다불전 시대를 연 당대의 통일신라의 특징인 통섭적 학해(學解)/교학(敎學)불교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불국사... 이렇게 750년대 통일신라의 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기록과 정황에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어 이해되는 것들이다... 건축공간의 복원은 시대상과 문화상뿐만 아니라 사상사의 복원에도 가장 유력한 매개가 된다...>

 

 

 

 

 

한마디로 사변적(그들의 구법행위는 치열한 실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변적이었다. 다만 이를 관념주의로까지 보지 않는 이유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세계관과 인간의 논리를 구성하는 인식론, 그리고 사회구성과 발전법칙에 대한 체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이었고, 당나라 입장에서 번역한 경전(이를 역경(譯經)이라 한다)을 벗어나려는 주체성 또한 중시 됐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신라 내에서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다만 그들은 원효(그런 점에서 원효역시 통섭적 사상가임에 분명하지만, 관념주의적 체계까지는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를 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닐 뿐이다. 또 700년대 중후반이 넘어서면 당나라에 다녀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에게 사사 받았는지가 그들의 계보를 만들게 되고, 그렇게 종파들이 고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종파불교). 권력화된 불교의 체계화는 그들의 사변성을 더욱 촉진하면서 통일신라의 5교가 정착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