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고 담백하면서도 세련된 미감을 갖춘 당간지주...
의외의 곳에서 마주한 당간지주를 보면서 여기에 맞는 미감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단아하다고 말하기엔 4m가 넘는 육중한 무게를 감당하기 부족하고,
마냥 우아하다고 말하기엔 나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떨어진다.
그럼에도 담백한 선과 정성스런 손놀림이 주는 차분함은 기품으로 다가오고,
화려한 치장이나 구성이 없으면서도 꽉 차 보이는 건 우아함을 비껴가지 않는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해서 골라본 단어가 <전아(典雅)>하다는 말...
단정하고 반듯하면서 기품있는 아취가 흐르는 게 우아함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당간지주를 대표하지는 못해도, 한지역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없는 완결성은
전아한 느낌으로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1.
세종시에 다녀오는 길...
편리한 고속도로에만 의지했던 여정들은 늘 아산을 지나치게 만들었던 거 같다.
괜찮은 탑을 보려면 소백산맥을 넘을 수밖에 없고,
다양한 불상을 보려면 충청도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지 한참인지라,
아산이란 지역 역시 항상 돌미륵들을 위한 여정으로만 남겨 두었는데,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삼태리 마애불을 거쳐 아산에 이르렀다.
<아산 광역도... 천안이나 예산에서 평택과 당진사이의 바다(현재 아산만)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아산(옛 온양)은, 조선시대에 세곡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창 역할을 했었던 거 같다...>
입춘 즈음의 짧은 오후에 곧장 떨어지는 주홍빛 황혼은 늘 아쉽게 마련이고,
퇴근시간에 걸릴 수밖에 없는 고단할 상경길은 조급한 마음을 재촉하기 마련...
그래도 주차하기 전부터 모습을 드러낸 당간지주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생각보다 괜찮네...
<아산 읍내리 당간지주...국도변에서 이면도로로 한바퀴를 빙 돌며 마주 한 당간지주의 첫느낌은 단정함이었다...>
이런 단정함은 어디서 느꼈지?
아마 원주 법천사지 당간지주가 그랬겠다 싶다.
둘다 불국사로 대변되는 경상도 계열이나 미륵사지로 대변되는 백제지역 당간지주들과 달리
무미건조하다할 만큼 표면에 아무런 굴곡과 문양 혹은 돌출선문양 등이 없는,
통일신라 초기에 경주에서 조성되기 시작해 경상북도와 강원도 지방에서 유행했던 무문형 당간지주이지만,
<보은 법주사 당간지주... 백제지역 당간지주들(청주 용두사지를 비롯, 천안, 서산, 공주, 홍성, 부여, 익산, 김제, 부안, 담양, 나주 등)은 고려/조선 등 후대에 내려와서도 측면에 돌출된 선문양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그렇다고 춘천 근화동이나 안성 죽전리(봉업사지) 당간지주처럼 투박하거나 거칠지 않다.
또한 두 당간지주의, 잔다듬으로 마무리한 표면은 미끈하다는 생각이 어색하지 않을만큼
익숙한 장인들이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정교한 치석수법을 보여 매우 정성스럽게 보인다.
<원주 법천사지 당간지주... 아산 당간지주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당간지주다...>
<안성 죽전리 당간지주... 같은 무문형 당간지주임에도 이들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똑같은 단정함 속에서도 날렵하지 못하고 묵직하게 다가왔던 법천사지 당간지주와
아산 읍내동은 사뭇 다른 느낌, 기품까지 다르게 느껴진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와 법천사지, 죽전리 당간지주는 각기 전혀 다른 미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거의 비슷한 규모의 부석사나 숙수사지 당간지주처럼 경쾌하거나 날렵하지도 않다.
(참고로 각각의 높이는 아산 읍내동이 4.1m로 3.9m의 법천사지보다 크고,
부석사(4.3m)나 숙수사지(3.9m)도 이와 비슷하다. 또 미륵사지 당간지주도 3.95m이다)
무슨 차이일까?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불국사, 굴산사지와 함께 우리나라 당간지주를 대표하는 전범으로 굴산사지를 제외하면 이들은 비슷한 규모와 규격으로 조형되었다...>
2.
먼저 당간지주의 두께 차이일까? 아니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폭은 55cm로 53cm의 법천사지와 같거나 오히려 더 크다.
또 매우 가늘고 늘씬하게 보이는 부석사 당간지주의 폭도 55~56cm로 이들과 비슷하니
같은 높이와 두께를 가지면서도 상반되거나 현격한 미감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규모와 규격의 문제는 당간지주 미감을 결정하는 근본 지표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참고로 육중한 느낌이 앞서는 이 당간지주의 폭은 77cm 가량으로 이들보다 두껍다...>
그러면 이 당간지주들과 어떤 차이가 있어 서로 다른 미감을 자아내게 되는 걸까?
아주 미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법천사지에 없는 모죽임이 아산 당간지주에 있고,
(모죽임 ; 모서리를 45도 정도로 깎아 마감한 형태로 건축/기계분야에서는 모따기라 부르고,
경주 망덕사지(685년 창건) 당간지주에서부터 보이는데, 망덕사지는 위쪽 2/3만 모죽임이 돼있다)
상단 공굴림에서도 차이를 드러내는데, 아산쪽이 사분원(1/4)에 훨씬 가깝게 보인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정면에서 45도 방향으로 바라보면 모죽임이 보이다... 그리고 상단부는 미륵사지 및 불국사 등에서 사용된 2단 굴곡이 아닌 1단 공굴림으로 마무리 되어 훨씬 간결하게 보이는데, 형태만으로는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이지만 화려한 전성기 양식이 퇴화되는 과정에 조성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지적하자면, 좌우 당간지주의 간격도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법천사지에 비해 아산쪽이 훨씬 넓어, 정면에서 바라보면 느슨하거나 허술하게도 보이는데,
당간지주의 간격은 초기 당간(석재 혹은 철재당간)의 규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부재의 높이나 폭, 두께 등과 어우러져 당간지주의 미감에 매우 큰 요소로 부각되는 거 같다.
<갑사 당간... 좌우 당간지주 간격은 당초부터 기획된 당간의 규격에 의해 결정되었을 것이고...>
<막상 당간까지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상태라면, 당간지주는 전체 조형물에서 하나의 부속으로 위상이 축소된다... 특히 이 당간에 깃발, 즉 당이 휘날리고 있었다면 우리의 시선은 그것에 모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와서 당간지주에 대해 이래저래 살펴보는 것은, 같은 동북아지역의 불교문화에서 중국/일본과 달리 석재로 만든 당간지주가 전국적으로 유행한 유일한 문화를 갖추고 있어 당간지주만으로도 우리의 문화적 원형질을 읽어볼 수 있는 역사유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뜯어보는 것이고...>
<부석사 당간지주... 아산과 거의 같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서서히 좁아지는 부석사는 법천사지나 아산 당간지주와 전혀 다른 미감이다... 참고로 부석사 당간지주 간격을 보면 당간의 크기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 힘들지만(철당간 지름만 1m다), 당간지주만 남은 상태에서 높이와 두께에 비해 너무 넓은 간격 때문에 완성도나 미감은 크게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결국 당간지주의 미감은 자체 규모와 규격 외에도, 문양이나 상단의 공굴림, 그리고 모죽임과
당간지주의 간격 등이 알게 모르게 어우러져 밀도와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아산 당간지주는 정교한 치석으로 단정한 미감을 갖추면서 법천사지에 비해 세련돼 보이지만,
자체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게 벌어져 밀도가 떨어지고 조금은 느슨하게 보인다.
<정면에서 바라 본 아산 당간지주... 실제 아산 당간지주는 부석사와 비슷한 간격으로 당초에 조성된 당간의 규모가 상당히 굵고 그만큼 높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데, 당간지주의 당당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정면에서 바라보면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면에서 바라본 법천사지 당간지주... 그에 반해 법천사지 당간지주 간격은 좌우 지주 두께보다 약간만 넓어, 아산이나 부석사보다 상대적으로 밀도도 높고 짜임새 있게 보인다...>
<양주 회암사지 당간지주... 법천사지에 비해서도 더 좁은 간격이어서 참고로 첨부하는데, 그만큼 답답하거나 궁색하게 보인다...>
3.
그리고 마지막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가 이들과 다른 결정적인, 즉 환경적인 요소가 있는데,
아산 당간지주는 애초 높이가 아니라 지면보다 아래에 있어 제 멋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땅 속에 묻혀있던 하단부를 들어내기 위해 60cm 정도를 파내 제 높이를 거의 찾았지만,
현재도 인근 도로지면보다 1m 정도 낮아 4m가 넘는 규모를 느끼기에 한계가 있다.
<현재 노출된 높이만으로 4m 면, 최소 6m 이상의 석재를 잘라내서 가공해야만 하는 엄청난 크기의 석재와 그만한 인력이 동원되었을 작업이다... 그러나 현재 모습에서 그런 위용을 느끼기는 어렵다...>
게다가 현재도 원좌의 윗부분만 노출되어 있어 간대는 물론 기대면/기대석과 지대석을 감안하면
아직 40cm 이상 매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 현 GL(그라운드 레벨)이 당초 GL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당간지주 구조도... 사실 깨끗하게 그려진 그림이 없어 인용했지만, 애초 이 구조도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간지주 기단부에 지주괴임이나 갑석은 별석으로 만든 사례도 거의 없고,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당간지주가 기단부 위에 올려진 것처럼 생각하고 그렸다고 보이는데, 이는 석탑의 구조이지 당간지주의 구조가 아니다. 당간지주의 지대석과 기대석은 상부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강재 역할을 했지, 기단부 역할을 위해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구조도를 첨부하는 건 세부명칭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참고로 이 구조도의 괴임+갑석+안상까지를 기대석이라 부르고, 안상이 새겨진 면을 기대면이라 부른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하부... 딱 원좌까지만 노출되었다... 왜 덜 팠지?...>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하부... 이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원좌가 있는 간대는 당간의 무게를 지탱할만큼 상당한 두께를 가진 부재여야하고(상부 압축력에 견딜만큼...), 당초 기대석에 가려져 있었을 하부는 표면 다듬이 매우 거친데, 아산 당간지주는 그 부분까지 노출되지 않았다...>
결국 농지개량 및 도로조성 등 인위적인 성토가 있었겠지만, 천년이 넘는 세월이 만들어낸 퇴적작용은
아산 당간지주의 규모와 위용을 다 드러내기에 너무 안타까운 환경적인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진입로에서 올려다 봐야할 장소에 위치한 비슷한 높이의 부석사에 비해 상승감이 떨어져 보이고,
독립된 위치에 놓여 석재의 괴체감을 온전히 살릴 수 있는 법천사지에 비해 중량감이 떨어져 보인다.
<현재 도로보다 낮은 지면으로 유입되는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작지 않은 크기의 조적식 석축을 쌓았는데, 석재 고유의 질감과 괴체감을 살리려면 밝은 색의 작은 타일로 마감하는 게 좋을 듯싶다... 즉 주변이 이질적인 질감에 작은 크기, 그리고 밝은 마감이었다면 석재의 괴체감이 더 살지 않았을까 하는 말이다...>
4.
그러면 이 당간지주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현재 당간지주에서 북쪽 야산까지 자연스럽게 남북방향의 축선이 형성되는 것으로 짐작하면,
이 일대는 상당히 넓은 사찰부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별도의 문화재 발굴조사가 없어서인지,
사적도 없고 석탑이나 기와파편 등의 유구도 없어 제작편년을 추정하는데 어려울듯 싶지만,
천안 천흥사지, 공주 반죽동, 부여 무량사, 서산 보원사지 등 동서남북 인근지역의 당간지주들과 달리
미륵사지 계열의 돌출 선문양(종문대라 부른다)없고, 오히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원주 법천사지와
비슷한 양식으로 조형된 것을 감안해서인지, 안내문에는 고려시대로 설명되고 있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안내문...>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 상부... 921년 왕건에 의해 창건돼 1010년 대대적인 불사가 이루어진 천흥사지 사적을 감안하면 이 당간지주의 상한선은 라말려초가 되고, 하한선은 고려초가 된다...
<이 미륵사지 계열의 돌출 선문양은 천안은 물론 청주와 충주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청주 용두사지(962년) 선문양은 철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중간을 끊어서 가공하는 등 고려시대에는 더욱 기능적인 문제가 부각됐다... 결국 문양의 유무를 비롯한 양식과 유형은 문화적 특질광 원형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편년을 좌우하는 결정적 근거는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해 첨부해 본다...>
물론 사적이 없는 조건에서 양식적 특징과 분포가 복합된 당간지주만큼 시대 구분이 어려운 유물도 없을테고,
옛날 아산지역의 중심지에 평지가람으로 조성된 것을 감안하면 고려시대 추정이 무리가 아니지만,
내게는 왠지 통일신라시대의 미감이 느껴져서 흔쾌히 동의되지가 않는다.
먼저 높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던 신라의 산지형 가람경영이 말기에 확산된 선종 덕분으로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때 평지에 조형된 가람이라면 고려시대 조성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옛 백제지역의 주요 사찰 가람배치가 평지형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그 전통은 이어졌기에 때문에
평지가람만으로 고려시대를 하한선으로 잡는 것은 비약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위치... 당간지주에서 북쪽 야산까지 상당히 넓은 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민가들과 아파트. 어쩌면 우리는 선조들의 무덤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돌출된 선문양이 없이 미륵사지 계열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600년대 후반의 경주는 물론
영양 현동 당간지주처럼 800년대에도 무문형 당간지주들이 조형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2단 굴곡이 없는 무문형 양식이라고 무조건 후대로 편년을 끌어내리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를 보며, 나는 통일신라의 정제된 미감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도 당간지주를 갖춘 사찰이었다면 한지역을 대표하기에 충분한 규모고,
당대 적극적인 행정적 경제적인 지원이 있었다면, 이곳이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현재 당간지주가 있는 읍내동은 조창이 필요했던 바닷가 연안이 아니라 육로교통의 길목인만큼
결국 조성된 시기는 고려나 조선시대가 아닌, 고려초나 그 이전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산 중역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가 있던 곳이 초기 및 육로가 중심이었던 시기 온양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이름부터 읍내동이다...^^). 그리고 그 이후 해운이 필요하던 조선시대에는 읍내동보다 서쪽(바다에 가까운)의 신창면이나 선장면에 조창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아산만 북쪽의 아산리 등에 유물들이 조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 현재 아산 중심지는 이들 지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온양인데, 근대 들어와 이 지역이 급격히 확대된 것은 온천과 근래의 신도시 개발 때문인데, 이지역은 그 이전까지 나대지로 방치된 곳이었을 것이다. 지도를 자세히보면 온양은 바닷물이 드나들던 삼각주 같은 퇴적지로 염분으로 인해 농사를 짓기에 부적당해, 예전에는 온양온천 개발로 인한 상업지로 부상했을뿐 행정적 중심지로 부상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보다 통일신라의 발휘됐던 미감이 더 많이 느껴진다.
즉 화려하면서 문약하거나, 혹은 둔중하면서 투박한 양 극단의 미감이 공존했던 고려시대보다
담백하지만 정제된 격식과 기품에 절제된 미감이 선호됐던 통일신라의 기운이 더 많이 풍긴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미감은 한 시대의 산물일 수도 있고, 하나의 유물을 조형하고 가공했던 개인의 기질일 수도 있으나
내게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조성에 훨씬 친연성이 높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시대라는 객관보다 미감이라는 주관을 선호하는 내 기질의 문제겠지만, 나는 통일신라 후반기에 조성된 게 아닌가 해독한다...>
5.
느낌과 의문은 순간이지만 이렇게 글로 정리하고 사진으로 편집하는 것은 역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의 조우에도 불구하고 여운이 길었던만큼 이것저것 자유롭게 더듬어 봤다.
그래야 기억으로 남고, 다음에라도 미숙함과 아쉬움을 채울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워놔야 넓어지고, 모아봐야 부족함을 알 수 있겠지...
이제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를 정리해 본다.
<올려다 본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어쩌면 과거의 선조들은 이만한 시야의 각도에서 당간지주를 올려다 봤을지도 모른다... 위축됨을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하고 강건한 느낌...>
지면보다 낮은 위치로 인한 아쉬움,
좌우 지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간격으로 인해 흐트러진 짜임새,
동쪽 당간지주 상단의 파손으로 인해 무뎌진 완결성,
그리고 지대석까지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발굴 복원의 한계가 있음에도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가 가지는 기품이 훼손된 건 아니다.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한편으론 단정하고, 또 보면 차분하고... 정제된 격식에 절제된 짜임새는 요란하게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음에도 우아한 미감을 은근하게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단정함에 그치지 않는 세련된 미감,
장대함이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느낌,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결함이 생동감으로 승화된 우아함까지,
전아한 느낌의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는 한 지역과 한 시대를 대변하기에 손색이 없는 수작으로 꼽을만하다.
* 아산과 온양에 대해 충분히 몰랐던 상태에서 쓴 글이라 몇가지 수정이 필요했다...1504
평택과 아산, 천안, 당진 등에 출장이 있어 읍내리 일대를 몇차례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현재 아산시는 1914년 아산군과 온양군, 신창군을 묶어 아산군으로 개편하고 군청소재지는 온양에 두었다고 한다.
즉 현재 아산시는 맨 북쪽에 아산, 서쪽에 신창, 그리고 남쪽에 온양을 묶었는데, 본래의 아산은 백제때부터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조창역할을 했던 곳은 신창이었기 때문에, 아산 읍내리 당간지주가 있었던 곳은 구 아산이 아닌 구 온양 읍내리의 중심지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이 부분을 수정하였다).
그리고 유적 분포를 보더라도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의 주요 유적들은 천안에 인접한 구 아산 - 현재의 아산리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고, 개발이 가장 늦었던 신창(도고온천이 있는 곳)이 가장 적을 것이라는 추정은 틀리지 않았으나, 현재 아산시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했던 읍내리 당간지주는 오히려 온양에 있었다는 사실에 글의 흐름이 약간 틀린 점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를 전부 바로잡지는 못했다.
참고로 이 지역 출신으로는 조선초기 명재상 맹사성과 세종 때 장영실,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구한말 윤치호 등이 이 지역 출신이며, 현재 아산시 동쪽에 위치한 배방읍은 백제 개로왕(475년)때 활약했던 성배, 성방의 이름을 땄다고 하며, 의자왕 때 충신 성충이 이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다음엔 조금 더 충실히 살펴볼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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