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여행-趣,美,香...

탑> 신라 전성기 삼층석탑에 대하여...1 070516

姜武材 2007. 5. 16. 14:03

* 여전히 길어졌다... 해서 1,2,3편으로 나눈다...

  1편은 전성기 삼층석탑(680년 경부터 800년 사이)에 대한 개략적인 정리,

  2편은 무협영화를 보다가 생각난 통일신라론에 대한 잡념 정리,

  3편은 최근에 돌아 보았던 이 시기의 삼층석탑의 사진 정리...

 

  그래도 길다고 생각해서 1편의 마무리하는 말을 맨 처음으로 올렸다...

  시간없으신 분들은 삼층석탑을 바라보는... 제 모습만 봐도 만족...^^* 

 

 

 

신라 전성기 삼층석탑 1     070517



1. 신라계 삼층석탑을 생각하면서...

2. 신라시대 전성기 삼층석탑의 지역적 분포에 대한 생각...

3. 답사여행에서 신라시대 삼층석탑을 바라보는 이유...

4. 신라시대 전성기 삼층석탑들...

5. 신라시대 전성기 삼층석탑의 특징들...

6. 신라시대 전성기 삼층석탑의 시대적 배경...

7. 신라시대 삼층석탑을 바라보면서...





7. 신라시대 삼층석탑을 바라보면서...


처음 삼층석탑을 바라보던 때를 기억한다...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요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양식이 되고, 자극으로 작동하기에는 작지 않은 관심과 시간이 필요했다.

 

<감은사탑... 그 장중하고 웅장한 카리스마를... 눈물없이 볼 수 있는 여유를...^^> 

 


 

좋다는 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기울였다.

건축과 역사라는 이름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고,

국보와 보물이라는 관리기준에 한정되어 느끼지 못했다.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라는 것은 그렇게 허허롭고 자유스러운 법...


그 자유의 공간에 마음을 열지 않고, 몸을 맡기지 않으면서

기준과 평가와 분석의 잣대를 가늠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접근인가...

보이지 않은 것을 느끼는 것은 자유로운 상상과 새로운 창작이 필요했는데...


어느 날, 그 탑을 만든 이들의 손결이 느껴지고

그 탑을 주문하고 기획한 이들의 정신이 보이던 날...

나는 대화의 의미와 아름다움이란 미감을 느꼈고, 마침내 웃을 수 있었다...

 

<석가탑... 석탑의 지고미... 미소없이 이 탑을 가만히 음미할 수 있을까?> 

 


 

이제 석탑을 보면서 사회를 이야기하고 시대를 뜯어보고

그리고 역사를 판단하려고 한다... 비약일까?

분절된 파편과 화석화된 상징에서 나는 생명의 향기, 시대의 정신을 찾고 있다...


견란이구시야(見卵而求時夜)...

그들이 만들었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들이 꿈꾸던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정신과 자세를 가졌을까...

말하지 않는 계란을 보면서, 나는 닭의 울음소리를 훔치려 하고 있다...




1. 신라계 삼층석탑을 생각하면서...


지난번 담양을 다녀오면서 고려계탑과 백제계탑에 대해 이야기했다.

맨 처음 탑에 대한 아름다움이란 미감을 느꼈던 게 신라의 탑임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의 역사를 대표하는 탑도 신라의 탑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신라의 탑에 대한 이야기를 늘 비껴갔다...


너무나 유명해서 조심스럽고, 너무나 많은 자료가 있어

나의 한계가 금방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열암 박종홍이라는 이가 석굴암을 보면서 썼던 말이 기억난다...

야나기 무시요네의 <조선과 그의 미술>이란 책을 보고

그보다 잘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국미술사를 포기했다는 고백...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은 본존불로 인해 완성된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의 모든 장치가 묶여서...> 

 


 

철학자이자 교육가이며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는 것밖에 모르지만

충분히 공감되는 고백...

그렇다고 내가 어린 피카소의 재능에 스스로 붓을 꺾은 피카소 부친(?)처럼

대신해야할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유스러운 자격인지라

나의 정리가 탑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에게 굳이 누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해 본다...^^


단지, 너무나 잘 알려지고 흔하게 분포하는 문화적 상징에 대한 접근이기에

오늘은 무겁고 투박하게 시작해 보려 한다...

답사에 대한 나의 감상을 메모하는 글이 아니라

내가 접근하고자하는 방향에서만 생각을 전개하기에 나 스스로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


오늘 정리해보고자 하는 탑은 신라 전성기 시절 탑들이다...

삼층탑을 정리하면서 시기 구분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통일신라라고 말하기가 거북스러워 그냥 7세기, 8세기라고 카테고리를 나누었지만

조금은 상쾌하지 못한 분류임은 사실이다...

(통일신라론에 대한 내생각은 2편이나 3편에서 별도로 설명할 예정...)




2. 신라 전성기 삼층석탑의 지역적 분포에 대한 생각...


서울, 경기를 비롯해, 충청도, 전라도에서 삼층탑을 보신 분들~~~

없는 게 아니라 마땅히 내놓을만한 탑을 고르기가 쉽지가 않다.

그만큼 삼층탑은 신라의 전쟁이전 영토적 공간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와 강원, 그리고 그 경계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성주사지... 신라의 이름으로 백제 지역에 정착하기가 그만큼 힘들었을까?>  

 


 

서울, 경기와 전북, 충북지역은 전무하다시피 하고,

충남지역에서 신라시대의 탑을 보려면 성주사지 삼층석탑이 거의 유일하고

그나마 전남지역에는 신라시대의 삼층석탑들이 남아있는데

화엄사의 사사자석탑을 비롯해, 목탑형식의 백장암 삼층석탑을 빼면,

실상사의 늘씬한 미인 같은 삼층쌍탑, 선암사 삼층쌍탑과 금둔사 삼층석탑,

대둔사 삼층석탑과 보림사 삼층쌍탑 등 대부분이 9세기 이후의 작품들이다...

 

<해남 대둔사 삼층석탑... 기단부 판석도 처마의 반전도... 그래도 아담한 모습...> 

 


 

그나마 충주 탑평리 칠층탑과 제천 장락동, 여주 신륵산 전탑이 있어

석탑으로 신라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고, 나머지 전라도 지역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인

월남사지나 무위사, 금곡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탑들이다.

결국 경상도와 강원도를 벗어나 분포하는 신라시대 삼층석탑은

성주사지, 실상사, 보림사 등이 신라말 구산선문의 중심지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역을 통해 신라시대 삼층석탑을 살펴보는 이유는

석탑 조성과정이 단순히 종교적 상징과 요구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변동과 그에 따른 문화사조의 대응과 설립주체들의 경제적 기반,

그리고 시대적 배경이 함께한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실상사... 직지사, 봉정사와 함께 늘씬한 삼층석탑을 갖춘 곳이다...> 

 


 

정치적인 권력과 종교 권력의 주도층의 의도와 상징체계의 동원도

결국은 지역적인 정서와 역사, 그리고 예술적 감성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토속적이고 토착성이 짙은 지역의 혹은 시대적인 차별성을 띄게 되고,

탑의 양식을 변화시키고, 또 그렇게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지 않았을까?


7세기 중엽이후 몰락한 백제와 고구려(이 지역은 잘 모르는 게 사실이지만)지역에는

7세기 말엽부터 등장하는 신라시대 전성기 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없다.

조금 더 나아가 8세기, 9세기 초엽까지 건 200여년의 기간 동안에도

신라 중심지인 경주의 양식이 도입되지 못했고, 그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보림사 삼층쌍탑과 석등... 역시 시대의 흐름이 느껴지지?...> 

 


 

오히려 라말여초, 선종이 보급되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는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의 나라, 혹은 왕조가 성립되고 발전하고 퇴락하는 과정이 결코

전국적으로 혹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며

일상생활 하나하나를 결속하고 통일하여 체제내로 편입시키기에

우리가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의 증거일 수도 있다.


같은 불교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불교가 단순한 종교가 아닌

정치권력의 기반이 되고, 일상 삶의 주요한 방편이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넓지 않은 한반도에 신라의 석탑양식이 전국적으로 동일한 양식으로 정착되기에

공간적인 거리감은 결코 가깝거나 시기적으로 짧지 못했음을 생각해 본다...




3. 답사여행에서 신라시대 삼층석탑을 바라보는 이유...


내가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 이후의 신라시대 삼층석탑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의 문화적 혹은 예술적 상징은 분명 시대정신을 내포하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문학(책, 글씨, 시 등)작품을 비롯해, 회화, 조각뿐만이 아니라

생활용품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도자기, 그리고 많은 장식품들과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선도하는 자와 집단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읽는 지성인들에게 경향을 제공한다.


또한 그들의 필요와 요구로 만들어진 문화적 생산품들은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이들의 생활과 삶이 투영된 수준과 깊이를 가지게 되고,

또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감상하면서 기억할 수 없는 시대를 읽고

전달받지 많은 문화적 기호와 기표들을 가늠하게 된다...

 

<부석사... 화엄사, 통도사, 불국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가람건축의 공간경영을 대표하는 곳...> 

 


 

상징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말하지 않은 것에 철학적 깊이를 간파하고,

보이지 않은 것에 예술적 수준을 가늠하며,

듣지 못한 것들에 정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

내 답사여행의 오랜 물음이고, 또한 마음을 열어 채우고 싶은 목적이기도 하다...


글로 접하고, 그림으로 느끼며, 영상으로 빠져드는 것의 한계는

굳이 간접경험이란 단어를 명찰하지 않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백문의 감상도, 일견의 감동을 극복하기 어려운 법이다...

게다가 나의 시간과 관심으로 가능한 일견의 의미를 애써 가볍게 여길 이유가 없다.

 

<화엄사... 명산에 명찰이... 그나마 지리산의 산세와 이름에 눌리지 않은 당당한 모습...> 


자유로운 선택과 열린 영감을 위한 여행이

자칫 무거워지고 부담스러워질지 모르나,

이 역시 나의 애정과 안목이 감당할 일이지

원칙과 목적의 경중을 탓할 바는 아니다...




4. 신라시대 전성기 삼층석탑들...


이제부터 그러한 신라시대 전성기의 삼층석탑을 찾아보자...

신라시대 680년대(문무왕, 신문왕)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전성기 신라의 삼층석탑은

감은사(682년, 높이13m, 국보112호)탑과 고선사(688년,국38호,9m)탑에서 시작하여

불국사(751년부터)의 석가탑(8.2m,국21)과 다보탑(10.4m,국20)

(다보탑도 엄밀히 삼층석탑이다!!?)에서 완성된다.

 

<고선사탑... 2층, 3층 옥개선의 손상만으로도 감은사탑과 그만큼 차이나는 미감으로 다가온다...> 

 

<다보탑... 방형의 이층기단에, 팔각과 원형의 답신이 올라선... 쌓아 올린탑... 내려온 탑일까?> 

 


 

조성연도가 확실한 경주의 황복사지(692년,국37호,7.3m, 구황리탑으로도 불린다) 탑과

창녕 술정리 동탑(5.75m,국34), 청도 봉기동 탑(5.74m,보113),

경주 천군동 절터 쌍탑(7.5m,보물128호), 울산 간월사터 쌍탑(6m,미지정),

상주 화달리 탑(6.24m,보117), 월광사터 서탑(5.5m,보129) 등이

동 시기에 거의 비슷한 양식으로 조성된 탑들이다.

 

<황복사지... 구황리탑으로 불리며, 석가탑으로 가는 과정에 조금씩 단순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전성기 신라시대 삼층석탑은

경복궁의 김천 갈항사터 쌍탑(758년,국99호,4.3m)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동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으로는 먼저 삼층을  벗어나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14m,국6)과 나원리 오층석탑(9.76m,국39)과

 

<경복궁 갈항사지 쌍탑... 다소곳한 크기에 단아한 모습... 크기의 변화가 주는 미감을 즐길 수 있다...> 

 


 

몸돌에 장식이 남아있는 이형석탑으로 경주 장항리 오층석탑(9.5m,국236),

그리고 경주 원원사지 삼층쌍탑(7m,보1429호, 2005년 드디어 보물로 지정)과

화엄사 사사자 석탑(5.5m,국35)이 8세기를 전후하여 조성된 탑이라 생각하며,

 

<원원사지 쌍탑... 나는 이탑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음을 보고 놀랬었다... 아름다운 탑...> 

 

 


이 시대를 벗어나면서 만들어진 탑들이 경주 미탄사지(6m,미지정),

팔공산 기성동 탑(5.2m,보510)이나 경주 창림사 탑(855년,6.5m,미지정),

양피사지 서삼층탑(5.6m,보124)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경주들판의 미탄사지... 미지정이지만 세련됨과 우아한 멋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기 시작한 석탑의 흐름으로 또 다른 경로는

목조건축의 번안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모전석탑 계열이 있는데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서탑(7세기초,현존14.25m 추정26m,국11)을 시원으로 하고,

신라에서는 군위 탑리 오층석탑(7세기중,9.6m,국77)에서 시작하여,

선산의 죽장동 오층석탑(10m,국130)에서 완성된 모습을 보이며,

그중 최고의 이형탑으로 정혜사지 십삼층석탑(780년,국40호,5.9m)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혜사지 십삼층탑... 세련되고 정연함을 갖춘 탑...>

 

<탑리 오층석탑... 강직함과 견고함이 우선 생각나는 탑이다...> 

 

 

 

이러한 모전석탑 계열의 아류로 볼 수 있는 삼층석탑들이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8m,보469), 경주 남산동 양피사지 동삼층석탑(7m,보124),

그리고 고려대의 군위 빙산사터 오층석탑(8.15m,보327)과

유일하게 전라도 지역에 남아있는 강진 월남사터 삼층석탑(7.4m,보298)이 있다.

 

<죽장동 오층탑... 크기에 압도되지만 그 맛마져 둔중하거나 위압적이지는 않다...> 

 


 

모전석탑에서 탑리 오층석탑과 함께 시원으로 거론되는

경주 분황사 삼층석탑(661년-추정,국30호,9.3m)은 목조건축의 감실구조와

감실주위의 인왕상의 조각양식을 통해 7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조금 더 후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하며, 탑리 오층석탑 등과

형식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고 판단하여 논외로 했다.

 

<분황사탑... 분황사에서는 원효를, 황복사에서는 의상을, 원원사에서는 김유신을...ㅎㅎ> 




이밖에 동 시기와 비슷한 양식을 따르고 있는 탑들이 없지 않은데

안동 옥동 탑(5.79m,보114), 창녕 술정리 서삼층탑(4.5m,보520),

그리고 경주 구정동 탑 등이 생각나지만 미감에서 너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기에서는 논외로 구별하고자 한다.

 

<경주 구정동 삼층탑... 몸돌과 지붕돌의 비례가 틀려지면 탑의 미감이 흐트러진다...>

 

<술정리 서삼층탑... 위 사진과 비슷한 미감이어서...> 

 

 


그리고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의 삼층석탑도 신라하대(9세기경)로 보지 않고

7세기 후반, 늦어도 8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인데,

그 이유는 백장암 석탑에 새겨진 난간의 문양은 안압지(674년)에서 사용된 모양이고,

또 동일한 문양이 사용된 일본 나라의 법륭사 오중목탑의 중건 시기가,

안압지 동궁 창건시기와 비슷하고, 이 문양이 사용된 곳은 세곳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상사 백장암 삼층탑... 내가 목탑식 석탑이라고 부르는...^^> 

 

 

<일본 법륭사 오중탑의 난간 문양... 기묘한 일치다...>

 

 

 


 

5. 신라시대 전성기 삼층석탑의 특징들...


대체적으로 내가 보는 신라시대 전성기의 탑은

시대적으로 660년대에서 700년대 후반의 기간으로 상정하고 있고,

삼층석탑은 감은사, 고선사탑에서 시작하여 석가탑, 술정리탑에서 완성되고,

양피사지 서탑, 기성동탑, 정혜사 탑을 통해 변화한다고 정리하는 셈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삼층석탑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 다층탑이나 이형탑,

그리고 모전석탑 계열의 탑들도 조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술정리 동삼층탑... 우아함에 빠져서 한참을 헤메였던...^^> 

 


 

이중, 내가 주목하는 전성기의 탑은 황복사탑부터 석가탑 시기에 조성된 탑인데,

공통적인 양식으로는 이단 기단부가 안정적으로 강조되었고,

대체적인 크기는 상륜부를 제외하고 5~7m로 적절한 높이를 유지하며,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져 단순함과 통일성이 제고되었고,

직선의 긴장감과 안정된 가운데 상승감이 강조된 체감률을 가진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경주 천군동 쌍탑... 넓은 벌판을 지키는 당당한 장수처럼 듬직하고 강건한 모습...>

 


그리고 이 시기 삼층석탑의 세부적인 특징으로는

상층 기단부의 탱주가 2주이며, 양끝의 우주가 조각으로 대체되고,

하층기단부와 상층기단부의 판석은 2단의 굄대로 마무리 되었고,

지붕돌은 5단의 층급받침을 따르고 있고, 전각이 두툼하며,

지붕돌의 추녀선이 직선을 이루고, 낙수면과 전각의 반전이 완만하다는 점 등이 있다.

 

<청도 봉기동 삼층탑...>

 

<상주 화달리 삼층탑... 기단부가 약해져서 전체적으로 불안정해 보이지만 당당한 권위는 여전히...> 




6. 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시대적 배경...


결국 내가 말하는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은 감은사탑(682년)에서 시작되어

석가탑(742년이 가장 최근의 추정치)에 완공된 기간 중에 조성된 석탑들을 말하며

석가탑은 모든 삼층석탑의 최고의 정점에 위치한 석탑이라 생각하며,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통 털어 석가탑만한 탑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최고의 정점에서 완성된 탑은 더 이상의 완결과 지고미를 허락하지 않았다...

인생의 최고에서, 혹은 산의 정상에선 사람에게 남은 일은 내려가는 일뿐...

 

<월광사 서삼층탑... 바로 옆에 동삼층탑은 조금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가탑이 조성된 시기를 전후해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이형탑들이 조성되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정치적 결집과 문화적 역량의 집결은

삼층석탑 하나의 규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실험과 상상들이 현현되고, 그것이 석탑으로 상징되었다.

 

<화엄사 사사자석탑... 생각할수록 괜찮은 탑이다... 화려함에 눌리지 않은 정연함이 있어서...>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일이 그리 만만했을까?

나는 결코 고구려,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영토 확장이 신라의 번영을 보장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피폐화된 산하와 민초들의 정신적 공황은 일정한 시간을 요구했고

또한 사회정치의 지도층이나 지식인들에게도 새로운 구상이 필요했으리라...

 

<장항리 오층탑...> 

 

 

누적된 전시체제의 피로감과 생사와 승패의 갈림길에 섰던 긴장감을 털어내고

새로운 사회의 비젼이 민초들의 마음에 자리 잡기에 신라는 2~3대의 시간을 투여하고

경제적 안정의 의미와 번영을 추동할 수 있는 정신적 사상적 결집을 이루어내는 시기...

교종으로서의 화엄종이 정착하고 새로운 도약의 시기에 신라석탑은 전성기를 맞는다...

 

<나원리 오층탑... 하얀 살결을...^^ 하지만 너무 크다...ㅎㅎ>

 


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전성기는, 신라라는 왕조 번영의 귀결이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새로운 출발은 이미 이루어낸 것들의 정지작업을 전제하고

결국 출발은 변화를 의미하는 선언이다.

 

<충주 탑평리 칠층탑... 그 기단부에 장치된 판석의 비례에 감탄을... 너무나 멋진 준수한 탑이다...> 



남는 것은 향유하려는 자들과 이제야 재기를 꿈꾸는 이들의 갈등과 긴장...

새로운 대립이 일어나고 삼층석탑은 그렇게 해체되고 이상향은 축소되고

내면의 모든 절제와 목적지향은 외연을 향하고,

치장을 향하고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

 

<경주 남산동 양피사지 서삼층탑... 비례와 균형감은 전성기탑을 꼭 빼닮았다...>

 

<의성 관덕리 삼층탑... 몸돌장식을 가졌지만 양피사지 탑과 금방 비교되는 조금 후대의 탑...> 

 


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전성기가 과연 신라시대의 전성기를 의미할까?

전성기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문화적 가치를 향유했을까?

그들이 내세웠던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

장중함과 웅장한 무게를 덜어내고 선택한 우아함과 아름다운 기품,

그리고 정연한 모습에 절제의 단순미와 안정된 상승감은 어떻게 삶에 투영되었을까?

소위 전성기 신라의 삼층석탑들을 보면서 늘 물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