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동생과 함께했던 북한산행... 961203
참 오래된 글이다...
예전 카페에 올렸다가, 블로그에 스크랩 했는데 수정이 안 된다...
해서 조금 쪼개서 다시 올린다...
예전, 그날 사진도 같이 올리고...^^
그리고 95년에서 97년 사이에 찍었던 서울과 지리산 사진도 같이 첨부한다...
너무 묵은 글이라 낯선면이 많을지도 모른다...ㅎㅎ
10년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ㅎㅎㅎ
북한산행 96.12.03.
어제는 북한산엘 다녀왔다. 동생과 함께.
모두들 일하는 시간에 등산배낭을 메고 지하철을 탄다는 게
무척 어색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동생과 둘만 산행을 한다는 게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산행도 1월 1일 무등산 중봉에 다녀온 이후 간만이다.
<96년 1월 무등산 중봉에서... 이렇게 굽이치는 일망을 참 좋아했던 시절이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조선시대의 택지(풍수,도참)와 측량에 관심을 가진 이후
늘 북한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길 바랬는데,
정작 산행 중에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한 가지는 동생에 대한 관찰에 방점을 찍은 때문이고,
또 하나는 통쾌한 기분에 넋이 좀 나가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스모그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몇 년간의 회사생활에서 나는 못된 것(?)을 하나 배웠다.
사람의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로 그 사람의 일하는 모습이나 관심사항이나
그 깊이를 먼저 살펴보는 간접적인 평가방법을 택한다는 점이다.
긍/부정을 떠나서 약간은 겉멋이 든 그런 방법이다.
나는 동생의 산행에 대한 여러 가지를 통해
‘나와는 독립된 동생의 생활에 대해’ 알고 싶었다.
즉 관찰하려 했다는 거다.
건강, 심리적인 분위기와 정신적인 건강함, 최근의 관심사,
준비성과 추진력, 결단력과 경험... ...
사실 북한산보다도 나는 동생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서 산행을 약속했었다.
<97년... 안산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북한산... 북한산맥은 낙산, 백악산, 인왕산, 안산으로 펼쳐진다... 그 날 저 북한산 어디쯤을 헤매고 있었을 터...^^>
나는 동생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못되게 굴었던 미안한 감정(?),
당연히 형으로서 가져야할 의무감(?)
나보다 어린 사람에 대한 기대감과 애정(?)과는 무관한
그냥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좋아한다?!
- 이런 의미에서 나는 ‘감정’이 주는 묘한 매력을 인정하는 편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라는 비교나,
누구는 싫어하지만... 이라는 차원과는 무관한 ‘단순한 감정’,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것을 인정했나 보다.
매우 주관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발상(?)이지만
그런 감정에만은 충실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니 충실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소모적이거나 소비적이라 하여도
나는 충실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경험이 별로 없고,
앞으로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에게 활력이 될 소중한 감정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평가에도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함께 하고 있는 것,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것만큼 즐겁고 유쾌한 것은 없을 것이다.
길든, 짧든, 깊든, 얇든... ... 과거, 현재, 미래에 관계없이,
그런 만남만큼 ‘좋은 것’은 없다 !
만약, 만약에 한 가지 더 바란다면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욕심인줄 알면서도 그런 관계를 바란다.
오해의 소지도 많고, 관계의 정형도 없다.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었으면...
조금이라도 내게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걸러지고 정제되고 표현방법을 몰라서 놓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관계가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
아무튼, 그런 만남들을 많이많이 갖고 싶다.
그러나 지금까지 느껴왔고, 지금도 느끼고 있지만,
이것은 현실이 아닌 순전한 나의 욕심이다 ! ?
인간인 이상, 사람이 주는 향기만큼 감미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분위기, 일, 그 모든 것을 사람의 향기는 변화시킨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 이란 말을 해석하고
노래하고 이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내가 ‘달콤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필시 인간관계에서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일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영취봉에서 백운대로.
북한산을 자주 다녀본 동생의 안내를 받아 그냥 따라가는 것이 준비의 전부였다.
영취봉으로 해서 백운대까지가 산행의 코스였다.
처음으로 암벽등반(?)을 경험해 본 것 같다.
너무 과한 표현이고 바위등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날 찍은 사진... 힘겹게 사진기를 들고 다녔지만 제대로 찍힌 사진이 하나도 없었지...ㅎㅎㅎ>
동생에 대한 믿음은 ‘등산로 아님’ 이란 푯말의 의미를 무디게 했다.
조금 더 나아가서 무시무시한 협박문을 보았다.
‘1992년 50대 사망, 19**년 *명 사망, 19**년 *명 중상 ’
속으로 ‘아니 저런 불쾌한 푯말을 등반로에 문짝 만하게 만들어 놓다니...’
뒤에서 잠깐 소리가 들린다.
‘여기 등반로 맞아요?, 등반 많이 해봤어요? 처음 가는 길이면 안 가는게 좋아요’
바위타기가 시작하고, 영취봉의 2/3정도 올라가서 다리에 쥐가 났다.
이유? 이런 산행은 처음이었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으며,
카메라에 대한 과민신경 때문-부딪히지 않게-이었다.
밑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 매달려 잠시 생각했다.
‘더 올라갈까 말까?’ 경험이나 준비보다는
다리에 쥐가 났다는 게 커다란 부담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코스일건데 다리에 힘을 주지 않고
팔힘 만으로 버틴다는 것은 자신감을 갉아 먹는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발밑 낭떠러지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사람은 죽지않는다고 생각하는 나의 순진함은,
이런 곳에서 떨어져도 낙법으로 충분히 덜 다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했다 -
설사 그곳이 10,000M 상공의 비행기였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총에 맞더라도...
그런데 밑이 보이지 않으니 (떨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될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 볼 수 없다는 것은 항상 두려움을 준다. ?
<아마도 이쯤에서 매달려 사진을 찍었을 것 같다... 상상 되시는지... 밑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ㅎㅎㅎ 그래서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 뛰어 내릴까 말까 고민하느라...ㅎㅎㅎ 그래도 끝까지 증거를 남기려 사진기를 꺼냈다는 게 재밌다...^^ 황산은 이런 가파른 절벽에도 계단을 만들었던데...^^>
일단 올라간다.
내려올 때의 문제는? 그건 그때의 문제다.
다시 다리에 쥐가 나면? 그땐? 모르겠다.
쥐가 난 사이 뒤따르던 일행이 우리를 추월해 영취봉 정상까지 먼저 오르고.
이곳이 정상이다는 기쁨을 만끽하기 전,
앞선 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선발로 두 사람이 먼저 코스를 찾았으나 자신이 없다며 포기하자고 한다.
담배들을 한 대씩 피운 다음, 이제는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를 상의 한다.
어찌됐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장비나 자일도 없는 상태에서 어렵지 않겠냐는 분위기다.
10여분 후, 40중반으로 보이는 한분이 우리를 지나친다.
모두가 귀를 기울인 그 아저씨의 가벼운 말씀.
“이 코스를 계속 택한다면, 지금까지의 길보다는 조금 더 험하다.
처음 가는 길이고 준비가 없다면...” 그리고 나선 훌쩍,
정말로 훌쩍 절벽을 타고 올라간다. - 그 날렵함이란...^^-
간편한 옷차림, 단단한 체구(?), 그리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발이었다.
우리 같은 등산화는 애초 무리였다고 느껴지는 신발의 차이,
그것을 보는 순간 앞의 일행도 우리들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곳도 정상은 정상, 매서운 바람에 시원한 전망이 괜찮다.
조금을 내려가다가 나는 그제야 카메라를 가방에 넣는 것을 생각했다.
그것도 몸을 돌릴 공간도 없는 곳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아니다.
배낭을 다시 메는 것은 왜 그렇게 안 되는지...
- 물론 나는 그 상황에서도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카메라가 혹시 망가져도 필름은 남으니까.
<동생이 찍어준 사진... 정상이라고 하지만 하늘과 가깝다는 의미일뿐 넓은 공간이 아니다...ㅎㅎㅎ 표식도 없고, 깃발도 없이 바위끝에 서보는 것... 그것이 정상... 넓은 공간이 아니라, 넓게 볼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을 참 좋아한다...^^ >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코스를 다 내려오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백운대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했다.
산허리를 돌아서 백운대를 향했다.
그리고 이때는 등산로를 따라 간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잡고서 무작정 가는 길이었다.
바위타기.
동생은 내가 바위타기를 예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북한산도 몇 번 다녀간 것으로 생각했고,
내가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이 코스를 택했다고...
물론 나는 산을 좋아했다.
정상을 오르기 보다는 그냥 산에 몸을 담는 것!
그것을 좋아하고 바라고 애착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은 산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자연 그 자체를 좋아하고 즐기려 했던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좋아한다고 늘 생각했다.
동생과 함께 자연을 공유하는 것... 그런 시간을 원했다...
지리산을 제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결행해 본적이 없다.
-불일폭포를 본 것은 코끼리 꼬리 만지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연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게 없다.
단지, 산행과 등산을 위한 준비나 사전지식이 부족함을 인정할 뿐이다.
<지리산 불일폭포... 산을 좋아하시는 지인의 사진...^^ 내가 손에 꼽는 폭포중 하나다...>
동생은 몇 번의 바위타기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등산화로는 어려우니 포기하라는 길을,
돌고 돌아서 올라 본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 경험 이후 전문가는 아니지만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바위틈에 매달렸을 때 들었던 생각 ;
‘차라리 뛰어 내리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
바위에서 구르면 더 크게 다치고 떨어지면서 이미 정신을 잃게 되지만,
차라리 뛰어 내려 운이 좋으면 나무에 걸려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크게 웃었다.
비슷한 조건에 처해 있을 때 받는 유혹(?)이란 거의 비슷한 내용을 갖는 모양이다.
동감한다는 말도, 이해된다는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크게 웃었을 뿐이다 - 람보도 뛰어 내렸잖아...ㅎㅎ-
“백운대는 ?” 나는 물음에 동생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2,30분 정도 ? 산허리를 돌 때 보다는 조금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동생이 앞장서고 뒤따랐다.
힘들고 힘들지 않고의 차이는 역시 약간의 주관이 개입하나 보다.
왜냐하면 백운대를 오르는 길은 어쩌면 평이한 난이도였으니까.
이제 마지막, 와야로 등반로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이다.
악산에 면장갑과 스틱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밧줄타기를 하듯이 그냥 오르면 되는 길이 백운대 오르는 길이다.
백운대에서
설악산은 악산이다. 지리산은 육산이다.
그러나 절반은 악산이라고 한다.
북한산도 악산이지만 작은 것은 사실이다.
나무도, 숲도, 깊이도. 그러나 정상은 트인 맛이 있다.
사방으로 트인 호방한 맛이 분명 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수차례 올라와 봤을 백운대.
지하철 딸 때마다 북한산 - 북악산 - 남산 - 관악산을 한 선으로 그려본다.
조선시대의 측량수준과 양택지의 관점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곤 한다.
한 시대를 열어간, 한 나라를 경영할 뜻을 담아서 선조들은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 호방하고 호탕한 뜻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보지 못했다.
하나는 오염 때문에 북악산 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또 하나는 잔뜩 풀어진 내 마음 때문에 보지 못했다.
<97년 사진... 서울을 한눈에 담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남산과 관악산, 청계산 자락...>
북한산 서편으로만 수리가 있다고 말한다.
하늘에 떠있는 두세마리의 새들. 혹시나 ? 까마귀였다.
동생은 까치보다는 까마귀가 훨씬 좋아 보인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동생은 삼족오를 모른다고 한다.
삼두오(?)도 모른다고 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네가 그걸 모르니 ?
글세, 그것은 내 바램이겠지. 아무튼,
<영릉에서 샀던 삼족오... 예전 조선시대 양반집 대문에는 삼족오나 호랑이 그림이 붙어 있었지?>
<97 보광사... 언제부턴가 곰은 사라지고 호랑이가, 봉황은 사라지고 용이 우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같은 맹금류이지만 까치의 날개 짓보다는 까마귀의 비행이 마음에 든다.
수리처럼 여유롭고 한적한 날개짓이 마음에 든다. 크기도 적당하고.
삼족오에는 힘이 있다. 기상이 있다.
그 까만 빛깔에는 태양의 강렬함이 숨어 있다.
그 올곧은 자세, 그것을 좋아한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대문 앞에 붙였던 머리 셋 달린 검은새로
-까마귀가 아니라 수리일 수도 있다- 왜? 언제부터 변했는지 모른다.
단지 매나 수리보다 조선의 지배층과 선비들은 학과 원앙을 더 많이 그리고 동경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우리네 민초들의 허위의식으로 고착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삼족오의 눈빛은 분명 강렬하게 태양을 삼킬 수 있었으리라
현대의 나는 믿고 있다.
지리산과 베토벤
북한산세. 높고, 깊고, 장중하지 않지만 갖출 것은 갖춘 산이다.
그리고 악산답게 기개도 있고.
나는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무등산 중봉에서 내려 보는 그런 전망을 좋아한다.
적당한 거리의 공간과 깊이, 그리고 원경으로 펼쳐지는 굽이굽이의 흐름을 좋아한다.
<97년 지리산... 심원마을 어디쯤이 아닐런지... 천왕봉에서 바라본 운해사진은 없다... 가보지 못해서...ㅠㅠ>
동생은 노고단에서의 전망과 운해를 이야기 한다.
앞으로 섬진강과 들판이 펼쳐지고 그 뒤로 산맥들이 굽이굽이 전개된다고.
나는 또 웃었다.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약간의 메아리가 치게.
내가 바라던 전망이 좋아하는 산에 있다니...
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
‘역시 지리산엘 꼭 가봐야 할까보다.’
우리네 모든 산은 금강산에 비유된다.
어쩌면 산중의 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부의 산들은 또 설악산에 비유된다.
그렇지만 지리산과 비유되거나 비교되는 산은 없다.
꼭 지리산의 어디 같다는 말을 우리는 하지도 않으며, 또 들어보지도 못한다.
왜 그럴까 ?
산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지리산은 멀어지지만,
사진작가도 산사람들도 지리산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지리산은 비교를 싫어하지만 나는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베토벤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뉴에이지나 크로스오버, 퓨전재즈 등의 가벼움보다 클래식의 깊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나의 상태에 따라 선택하고자 음악은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바하,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멘델스존, 슈베르트 등등의 음악과
베토벤의 음악을 비교하기를 재미있어 한다.
하늘에 떠있고, 정열이 없고, 긴박함이 떨어지고,
세련됨이 덜하고, 스케일이 다르고, 졸리웁고 등등등...
그러나 1번부터 9번 교향곡을 틀어놓고 설명하라면 못한다.
단지 다른 곡들과 비교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베토벤의 음악은 정말 좋다.
지리산이 꼭 그럼 셈이다.
어설프게 알면서도 그냥 마음속에서 그려보는 지리산, 그것이 좋다.
동생의 영향으로 조용히 내려왔다.
메아리를 위해, 서울의 소란스러움을 위해,
북한산신을 위해, 목소리를 위해,
그리고 기를 위해 나는 소리치지 않았다.
<그날의 사진은 대개 역광이었다... 남쪽으로 완전히 넘어 오지 못해서...>
많은 산사람들이 그러해 가듯이 동생도 산에서 함성을 지르지 않는다.
새들을 위해, 짐승들을 위해, 인간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산을 위해.
사람들의 외침과 무관한 자연계의 판단과 결과는
항시 우리들의 의도와 무관한 파괴로 나타났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란, 그런 파괴를 먼저 계산하지 않거나,
손익판단을 뒤로 미룬다는 점이다. - 지금의 자신들을 위해.
동생의 작아진 목소리만큼이나 자연은 조금 더 보존될 것이다.
나의 세 번째 웃음
나는 이번 산행에서 세 번 웃었다.
한 번은 동생과 함께하는 시간의 고마움을 위해서,
두 번째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눈에서 느껴졌던
나의 평범함을 위해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 말하려고 하는 통쾌한 경험 때문이다.
영취봉에 오르는 길에 잠시 머뭇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리면서 웃었다.
나에게도 이런 점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통쾌한 일이었다.
자신감을 잃어서였을까?
앞일을 걱정해서였을까?
나에 대해 회의를 한 것일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무슨 이유였을까?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회피 ! 피하고 싶다는 생각 ! 그래 바로 그 생각이었다.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ㅎㅎㅎ
회피가 무엇인가 ?
포기하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가.
포기를 생각한다는 것, 포기 ! 포기. 포기... ...
그래 분명 포기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포기를 생각하다니. 포기란 개념을 떠올리다니. 세상에...
영취봉에 오르는 길에 나는 회피와 포기란 개념을 생각했다.
회피와 포기, 그건 자신감의 문제다.
확고한 믿음과 계획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아마도 나라는 인간은 자신감이 없었음에 틀림없다.
부끄러움 ? 어처구니없음 ? 안타까움 ?
허전함 ? 허탈함 ?
... ...
백운대로 돌아가는 산허리 춤에서 웃었다.
백운대에 오르는 와야에 매달려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바위타기와 지리산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작은 메아리가 들렸다.
그것은 통쾌함이다. 통쾌함 !
얼마만에 느껴보는 감상인가.
<서울을 선택하기 위해 개성을 나서면 이 길로 북한산을 바라보며 서울로 들어왔을 터... 그때 이 건물들과 길이 없었을 때... 그 들은 무슨 생각과 어떤 마음으로 산을 오르며 택지를 선정했을까...?>
회피를 생각하고 포기를 생각했다는 것.
강**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그것은 아직까지 상정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
산에 오르고 못 오르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리에 쥐가 나고 나지 안고가 중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회피하려하고 포기하려했다는 생각.
그것이 순간적이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가능한 발상이었다고 하더라도
회피나 포기를 떠올릴 일은 분명 아니었다.
다리에 쥐가 나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고, 더 오르기가 힘들고,
잘못 헛딛어 떨어져 죽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포기나 회피란 개념을 생각할 일은 아니다.
그 조건에서 최선이 필요한 것이고 해결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생각함이 옳다.
작은 나(小我)와 큰 나(大己)
아무것에나 집중하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고, 그럴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
집중하고 혼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하는데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회피나 포기와 무관한 상황에서 그런 것을 생각했다는 것
그것이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 번의 회피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포기하려는 마음에는 결코 자신감이 생길 수가 없다.
한 번 무너지면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
어찌보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들까지 포기하게 된다.
오히려 쌓아둔 많은 것들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되어 포기를 재촉하게 된다.
한 번의 회피는 타협을 부르게 되고,
타협은 더 이상의 전진과 발전을 담지 할 수 없다.
타협은 안주를 부르게 되고 편함을 부르게 되고 객관을 부정하게 한다.
관계를 부정하게하고, 자기에 갇히게 만든다.
거기에는 건강함도 여유로움도 호연지기도 있을 수 없다.
아무것도 없다. 자기밖에 !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자기란 몸둥아리 밖에.
이것이 현재의 내 모습이며, 실체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영취봉 정상까지 올랐지만, 더 이상 그 코스를 고집하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의사표현을 포기’했다.
앞에 보이는 겸재의 금강산도의 일부를 떼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을 보면서,
사방으로 트여 불어오는 바람의 차가움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음에 따라 내려왔을 뿐이다.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내려가는 길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백운대까지의 길은 사실 잠깐 이었다.
<그때의 상황과 마음이, 이 사진에 찍힌 내 얼굴 표정과 일치하는지... 모르겠다...ㅎㅎ>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싶어 정말 즐거웠다.
아니 본래의 내 모습이 이렇게 작다싶어 정말 통쾌했다.
문제는, 내가 작다는 것을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내 모습이 아니라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본 모습이었다면 이제서야 새로운 나를 만들어야 한다.
백운대에 올라 북한산을 감상하는 것보다 필요했던 것은,
‘버릴 것인가? 아니면 만들 것인가?’ 였다.
말장난으로 느껴져도 사변적 관성이라고 무시해도 중요한 일이다.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 아니면 새로이 시작해야 되는가 ?’
동생은 왜 웃었느냐고 자꾸 묻는다.
사실 웃을 일은 없었다.
산허리를 돌면서,
백운대 오르는 와야에 매달려서,
그리고 정상에 앉아서 나는 즐겁게 웃었다.
부분, 부분 나를 볼 수 있어서 웃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감의 문제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별로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려는 표정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내 관심은 작은 나를 버릴 것인가 ?
아니면 큰 나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해진 길을 내려왔다. 동생이 묻는다.
“산에서 氣를 많이 받은 것 같은가?”
“기?!” 어둠속에서 또 웃었다.
“지금의 내가 너무 통쾌해서 즐겁다. 너는?”
“항상 산에 오르면 뭔가를 기대하면서 오르는데 오늘도 뭔가를 느꼈고,
생각했던 만큼은 받은 것 같애”
“그게 기일까?”
“형도, 형이 받은 그 즐거움, 그 웃음, 그것을 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가?”
“산에서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산사람들은 기라고 말한다네”
“북한산에서 받은 기? 그래... 그것 참 통쾌해서 좋다. 하하하하하”
나는 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