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1-5> 내가 좋아하는 - 지광국사현묘탑(3)...080425
(6) 현묘탑과 현묘탑비에 새겨진 단서들...
(6-1)
이제 현묘탑으로 돌아가볼까? ^^
혹여 욕하지 마시라...
비록 짧은 시간에 정리하는 글이지만 이 탑을 봐 온지는 십수년이 되었으니...^^
도대체 지광국사는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이유로 이런 형태의 부도탑을 만들었을까?
왜 이렇게 화려하고, 독특한 그림들은 무슨 내용일까는 오래된 고민이니까...
<08년 1월...>
먼저 전무후무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페르시아풍 커튼양식의 의미 해석이 아닐까?
나는 이 모습이 요나라, 거란인들에 의해 수입된 <가마의 지붕장식>이라고 생각한다.
<02년... 사리함이 들어있을 몸체 옆면에는 인도풍의 아치가 새겨져 있다... 어쩌면 불교인들에게 인도는 영원한 고향일지도 모른다...>
요나라 왕으로부터 왕과 왕세자가 타는 가마를 선물 받았다는 기록도 있고,
송, 요, 일본인, 셀주크투르크인 등이 참여했을 국제적 행사인 연등제, 팔관회에서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가마가 만들어지고 부서졌을지 생각한다면
고려왕이 탔던 가마 지붕의 처마를 형상화했다는 주장이 그리 낯설지 않았을 듯...
물론 자물쇠가 채워진 상층 탑신 뒤쪽에 이슬람풍 아치가 새겨져있어
먼 서역 페르시아풍이라는 주장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이것은 서쪽, 부처의 고향인 인도에 대한 동경이며, 인도의 아치도 이와 비슷하다.
결국 사리함을 안치한 상층 탑신은 인도를 형상화 한 것일 수 있다.
<08년 1월... 두구의 가마가 새겨져 있다... 내 의견은 사실 이 상징들을 뜯어보면서 생긴 것... 어떤분들은 오른쪽에 가마 든 사람들을 외국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나는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입장... 아무튼 자세히 보시면 왼쪽 가마와 현묘탑비가 비슷하게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래쪽 탑신에는 각각 한구씩의 가마가 새겨져 있는데
왼쪽 가마의 형태는 현묘탑 상단의 탑신과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오른쪽 가마는 양식도 약간 다르고 사람의 모습도 다르다.
혹 화장전 가마와 다비식을 치른 이후 수습된 사리를 옮기던 가마의 차별화 아닐까?
<08년 1월... 용발톱 부분... 이 힘이 있어 현묘탑은 전혀 다른 미감이 된다... 사진에서 이 용발톱을 지우고 바라보면 너무나 착실한 샌님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현묘탑의 하이라이트 용발톱 네 개...^^
가마를 들던 들대가 아닐까?
결국 나는 이 탑의 모습이 지광국사의 사리를 옮기던 가마 형태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성과 조각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종교적 상상으로 채우고,
그 형태와 모습은 실제 있었던 현실의 경험으로 재현한 모습...
지광국사란 이름이 만든 전무후무한 사리탑은 15년전 다비식의 기념비일지 모른다.
나는 이걸 말하기 위해 당시 고려의 국제관계와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거론했다...^^
<02년... 아직 경복궁 복원공사가 한창일때... 뒤편에 가설 울타리가 그대로 보인다...>
(6-2)
두 번째는 조각과 그 구성에 대한 보완이다.
이미 가마라는 형식과 관련하여 가마를 든 모습에 대해서는 의견을 말했고
사리함이 들어있을 몸체의 자물통은 누구나 이해할 것이고
인도풍의 아치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남는 것은 잘잘한 조각들의 상징인가?
<08년 1월... 현묘탑은 뜯어볼수록 그 섬세함과 꽉찬 정성에 놀랄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지붕돌 아래쪽에도 수없이 많은 문양들이 꽉차있는데... 이런 정성때문에 현묘탑은 우리나라 석조조각의 마지막을 장식할만한 명품으로 자리할만 하다 하겠다...>
여느 탑과 다르게 쪼개어지고 작아진 연꽃잎과 무수한 보살, 불상과 새, 비천상들...
한마디로 가마를 타고 지광국사가 도달할 도솔천의 상징이 아닐까?
생각해 보라...
열반에 들어 가마를 타고 구름을 넘고 바다를 건너 도솔천으로 향하는 지광국사...
아래로는 연꽃향으로 뒤덮이고, 위로는 사방으로 가르빙가의 노래가 가득 찬 천지...
바다에서는 용이 춤을 추고, 하늘에서는 봉황이 날고,
수많은 보살과 부처들이 마중을 받는 가마...
미륵보살이 살고 있는 도솔천의 모든 상징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곳 하나 빈틈을 두지 않았다...>
무수한 중생들을 이끌고 도솔천이 당도하지는 못했지만
고려는 아직 불국으로 이르는 과정에 있는 그는 미륵의 화신이었을지 모른다.
왕실을 감화하고, 귀족들을 아우르며, 백성들로부터 추앙받은 국사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모든 이 땅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고 추존할만하지 않았을까?
열반후 문종이 하사한 시호가 바로 ; 지혜의 빛, 지광(智光) 아닌가...
고려의 불화가 꽃피우기 이전 조각으로 담을 수 있는 모든 상징을 현묘탑에 담았다.
사람들의 소통이 긴밀해지고 직접적이 되어 발전하는 미술과 음악 이전에는
건축이라는 공간과 조각이라는 상징이 중시되고, 그 마지막에 현묘탑이 존재한다.
결국 나는 이걸 말하기 위해 고려의 불교에 대해서 언급해야만 했다...^^
(6-3)
또한 문종은 지광국사 현묘탑비를 만들면서 고려의 자존과 독창성을 주창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고려의 건국 자체가 신라를 뛰어넘어 고구려를 승계한다는 의미를 담았고,
거란의 부흥으로 멸망한 발해 지배층과 부흥운동에 실패한 유민들이 고려로 귀순한때가
광종대이며, 이때 고려왕은 스스로 황제를 건칭했고 독자 연호를 주창했다.
<97년 여름... 법천사지의 지광국사현묘탑비... 철책내부까지 들어가 열심히 설명하시는 분... 혼자 떠돌다보면 운좋게 이런 분들의 설명을 귀동냥하게도 된다... 끝까지 경청하지 못했지만 내게는 이것 저것 살이 되고 정보가 되고...^^>
후백제와 신라를 흡수하고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인 불교나라 고려는
한족의 송나라와 동이계열의 요나라, 일본 등을 염두한 국가적 정체성이 시급했다.
때문에 풍부한 그림이 들어간 현묘탑비는 불교의 상징에만 의존하지도 않았고
신라대에 정착한 당나라 풍의 귀부와 이수 양식을 따르지도 않은 실험을 계속했다.
<97년 여름... 현묘탑비 부분... 이수라 불리는 비신의 지붕에 용들이 사라졌다... 그 용들은 비신 측면 좁은 공간으로 물러났는데, 참 귀엽고 해맑게 조각 되어 있다... 다정하게 서로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리고 비신 상단에 보이는 희미한 그림 같은 조각을 아래 탁본사진으로 살펴본다... 사실 5m가 넘는 현묘탑비에서 이 조각을 눈으로 확인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ㅠㅠ>
1020년에 만들어진 북한 국보 40호인 현화사비에서 일차 실험을 하고,
1060년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488호)에서 한층 다듬은 다음 만들어진 현묘탑비는
귀부의 독창적인 모습과 이수의 화려한 완성을 보인 외에도 삼족오 문양 등을 수용했고,
다시 1125년에 만들어진 북한 보물 36호 영통사 대각국사비에 이르러 퇴화된다.
<개성의 현화사비와 현화사 오층탑 전경... 현화사비 전문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요순시대를 추종하는 문구부터 당시의 생각과 사회사를 읽을만한 꺼리들이...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현화사비 안내표식... 선유도님 블로그에서 스크랩... 인사도 못드리고 가져와서 죄송...^^ 삼족오 그림과 계수나무 토끼를 금까마귀와 옥토끼라고 표현한 북한의 설명이 재밌다...^^>
현묘탑비를 조금 더 살펴보면...
여의주를 다퉈야할 이수부위는 가마의 지붕처럼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비신 옆면으로 물러난 용들도 여의주를 다투지 않는 독특한 형태이며
거북은 땅을 향해 기어가는 게 아니라 바다를 헤엄치듯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97년 여름... 거북이의 발이 없지? 자세히 보면 파손되거나 숨겨놓은 게 아니라 파도문양의 물결속에 헤엄치는 동작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귀부를 받치고 있는 판석에도 파도문양이 새겨져 있고...>
또한 지금은 중국신화로 고착된 북방의 신화와 전설들을 불교적 상징에 수용하였는데,
미륵보살과 관련된 용화수와 수미산, 그리고 향로를 받쳐든 비천상 외에도
오른쪽에는 그려진 해에는 동이족,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가 새겨졌고,
왼편의 원에는 항아란 이름의 계수나무 아래 토끼를 새겨 달을 상징하게 했다.
<원주 시립박물관 간행 책자 부록에 담긴 비신 탁본 사진... 수미산 위에 보석달린 용화수(보리수라 표현할지도 모르겠지만...)부터 어느 한곳 빈틈이 없이 온갖 상징들이 아름답게, 정말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비천상이 받든 향로에서는 꽃문양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달속에 토끼는 항아, 혹은 상아로 불리는 "예"라는 신의 아내였다... 서왕모로부터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났는데 달에 이르자마자 토끼로 변했다는 신화가 있다... 사실 이런 신화는 고대 동이족의 천지탄생 신화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가 로마에 흡수되듯이 동이족이 주도권과 주체상을 상실하는 순간, 중국의 한족은 자연스럽게 동이계열의 신화와 전설들을 그대로 흡수하여 자신들의 고사로 정리하고 자신들의 신화로 흡수했다... 이러면에서 한족은 동이족보다 문화적 수준이 분명 높았다... 왜냐하면 누가 만든 신화였는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중의 우두머리 제준과 그의 아내 희화 사이에는 열명의 아들이 있고, 그 열명이 모두 태양이었다... 하루에 한명씩 여행을 나오는데 그게 바라 인간세상의 낮이 되는 시간이란다... 그러던 어느날 열명의 아들이 모두 여행에 나서는 바람에 세상은 불바다가 되고, 이때 활을 잘 쏘는 예가 한명만 남기고 아홉개의 해를 활로 떨어뜨린다... "예"가 떨어뜨린 해가 바로 삼족오다... 결국 검정 세발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한다는 말... 고려는 고구려의 상징을 받아들이면서 또다른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겠지?...>
용이 춤을 추고, 봉황이 날고, 영기문양, 당초문이 새겨지고,
빈틈없이 채워진 구름, 보상화문, 넝쿨무늬, 그리고 봉황의 새끼같은 문양 등에서
불교와 도교의 상징뿐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 문양들이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결국 다양한 상징을 모두 담은 현모탑비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염원이 함께하여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고려의 건국부터 인종대에 이르는 200여년 고려사를 살펴본 이유가 이 때문이다.
(7) 고려시대의 한계와 현묘탑의 정중동...
(7-1)
유독 현묘탑과 현묘탑비에는 물결무늬가 많다.
그의 어렸을 적 이름과 살아있을 당시의 이름 때문인지도 모른다.
샘물이 용솟음치고 하천물이 넘실거리는 태몽에서 붙여진 수몽(水夢)이란 이름,
불교의 경전을 깨치면서 얻은 바다의 상서로운 기린이라는 해린(海麟)이란 이름...
그러나 지광국사 현묘탑과 현묘탑비는 개인의 추존만이 아니라,
당대의 국제관계와 정치상황, 그리고 철학적 흐름을 모두 담은 문화의 총체다.
후삼국시대와 요나라의 침입에 피폐한 고려인들에게 도솔천의 아름다움을 그려주고
알고 있는 모든 나라의 문물을 조합하여 사치스러운 화려함의 극치를 실험하고
전설과 신화를 불교식으로 해석하고 통합하여 탄생시킨 기념비적 유물이다.
<07년 여름...>
근육질의 우락부락함이 거세된 차분하고 사치스러운 문양들은 문벌 귀족의 욕구였고,
움켜진 용발톱의 강건함은 고려왕실의 자존과 염원을 기원이었고,
불교를 벗어난 신화의 수용은 지난 역사를 계승하려는 고려인의 긍지였고,
독창적이며 실험적인 창작은 한시대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7-2)
참 차분하고 정교하다.
그렇다고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고 호사스럽지도 않다.
화려함을 갖추면서 강건함도 잃지 않았다.
디테일에 함몰하지도 않았고, 볼륨감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한편에서는 문약하다는 평가도 있는 모양이다.
현란하고 현학적이며 너무 정적이고 氣運生動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고려의 귀족적이며 방어적이며 수동적인 정책과 사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비단 고려의 특징이라기보다 신라부터 이어져온 경향일수도 있고...
호전적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와, 대외교류와 자기과시가 중시된 백제의 미감은
신라의 통일과 함께 절제되고 응축적이며 자아완결로 침잠하는 문화로 바뀌게 된다.
더 이상 이땅에는 대일통론적 천론과 우주론이 사라지고 부국강병의 논리도 거세된다.
오로지 기론과 인성론, 의리론과 덕재론만이 남게 된다.
고려의 불교와 유교는 그렇게 신라의 사상을 완결하고 조선으로 바톤을 넘긴다.
<고려불화... 일본소장... Daum 이미지 스크랩... 부국강병의 진취적 기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호사와 화려함의 극치인 미술과 공예가 자리한다... 사치란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차분하며 자기완결적인 현묘탑은 고려의 시대를 반영하여 정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나는 애써 용발톱의 의미를 강조한다.
사실 그 장치가 없었다면, 현묘탑은 정성스럽게 만든 탑모양의 부도에 그쳤을지 모른다.
가마의 화려함과 정성스러운 몸태, 그리고 당당한 용발톱...
아무튼 현묘탑은 우리 역사의 석조유물 중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그나마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1348년 충목왕 시절 만든
경천사지 10층석탑이 있지만, 화려함과 섬약해짐으로 나아갈뿐
더 이상 웅혼한 기상과 진취적인 카리스마를 토해내지 못한다...
게다가 예술사적으로도 상징적 조각의 의미는 퇴색하던 시기가 되기도 했고...
<07년 11월... 경천사지 십층석탑... 개인적으로 십층석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중의 기단부를 각각 3층으로 나누고, 탑신은 7층으로 만든 경천사지 칠층석탑이 본래 이름이 아닐까? ㅎㅎ 신라의 탑은 3층이 주류를 이루고, 고려의 탑은 5층이 많다... 9층은 가끔씩 조성되었고, 7층은 드물게 만들어졌고... 음의 수이면서 수의 완성이란 의미인 10을 쓴 경우는 없다... 화수미제(火水尾濟), 주역의 64번째 마지막 괘처럼 완성은 불안함이고, 또다른 시작이므로 진정한 완성으로 보지않은 동양철학이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려불화... Daum 이미지 스크랩... 이때쯤 가장 화려한 관세음보살도가 그려졌겠지?>
<08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 청자는 쇠퇴기에 들어가게 되고...>
(7-3)
지광국사 현묘탑을 바라보면 <정중동>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당당하고 의연하면서 세심하고 화려한 모습을 갖췄다.
더하고 덜함을 논할 여지를 남기지 않아 포용력을 극대화시키지 못한게 흠일까?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너무 완벽하고
추앙하고 받들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고 끌어당기는 힘이 부족하다.
왕권과 불교계와 유교에 기반한 문벌귀족이라는 불안한 정치구조...
미륵보살과 관음보살과 선종계열이 얽힌 불안한 정신구조...
그리고 한족과 북방족(동이계열의 거란, 여진 등 만주족)과의 불안한 국제관계...
그 묘한 중층화된 삼각관계의 균형 속에 고려는 한계를 가지고 유지되었다.
어느 한편에서 진행된 파열음은 곧바로 고려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파멸의 계기가 되었다.
<00년 11월...>
시대를 거슬러 뜯어보는 현묘탑의 정중동에는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다.
한 시대의 절정에서, 한 시대의 완성을 상징하는 그런 의미의 조용함...
고려의 정중동은 포용력을 갖추지 못한 지배계급들의 사상을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정중동...
참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발전을 위한 추진력과 (현실을 위한) 넓은 포용력,
그리고 주변을 강제하는 영향력을 갖추지 못하면 참으로 허망한 개념이기도 하다.
내가 현묘탑의 완결적인 정중동을 좋아하면서도
제일의 미감으로 꼽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땅을 욺켜 쥐고 당당히 서있는 현묘탑...
하늘로 뻗어나갈 진취적인 기상을 아직은 숨겨놓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