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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삼층석탑 4>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의 미감차이...1304

姜武材 2013. 4. 25. 22:17

 

 

 

 

 

 

전성기 통일신라의 700년대 삼층석탑에 대한 메모...

 

3.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의 미감 차이

   - 실패한 백제계 석탑들을 통해 살펴보는 건축적 결구와 공예적 구조, 그리고 질감의 개념 정리.

 

 

1)

 

고구려의 석탑이 백제와 신라석탑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확인하기로 하고, 이제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으로 꼽히는 백제시대 석탑을 건축적 공예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우리나라 초기 석탑의 주요한 양식과 구조를 정리해 보고, 그 세부 양식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을 정리하기 위해 너무 돌아간다는 느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석탑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뿌리와 줄기를 외면하고 꽃만 보는 우를 범할 수도 있고, 신라석탑의 완성도에 취해 여타의 미감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편협한 시선이거나 절름발이 인식에 머무를 수도 있다. 때문에 백제 혹은 백제계(흔히 정림사지 오층석탑 계열이라고 부른다) 석탑과 비교를 통해 신라석탑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과정은 석탑의 건축적 성격과 공예적 성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며, 석탑 본연의 미감을 이해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석가탑/750년... 석가탑은 통일신라가 만든 삼층석탑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건축적 특징을 버리고 공예적으로 완성된 최고의 미감을 가진 석탑이다...>

 

 

 

 

현재 메모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은 목탑과 전탑에서 출발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석탑의 결구(세부부재를 연결하는 구조)와 기법, 체감이 달라지면서 점차 돌이라는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여 구조적으로 안정되고, 석재의 질감을 살려가는 다양한 실험을 거쳐 미술(美術)적 공예적 완결성을 갖춘 석탑으로 정착한다고 말했다.

이를 풀어 1)목탑과 전탑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석탑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2)그 정체성이란 돌이라는 소재에 맞게 구조를 변형하고 질감을 살려나가는 방향이었다. 3)그 결과 의미와 상징으로서의 탑이 건축으로 표현되다가, 차츰 공예적 조각적 형태로 질적으로 변모했다. 4)이는 인도의 스투파가 목탑(중국→한국→일본)→전탑(중국→한국)→석탑(한국)으로 변하는 동아시아의 보편성과 함께 한반도의 독자성을 갖춘 사례가 되며, 5)사리봉안 장치로서, 불법의 상징으로서 출발했던 탑, 본연의 의미로 귀결됐다고 정리한다면 너무 재미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신라석탑의 변천과정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탑의 변천사이며 또한 이 글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경주 남산, 양피사지 삼층석탑/800년대 중반... 석가탑을 만든지 100여년이 지나 신라의 삼층석탑은 또 한번 변할 수밖에 없었다... 불상이 중시되는 가람배치에서 석탑은 조형적 의미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면 개념적으로만 이해되는 건축적 결구와 공예적 구조의 차이는 무엇일까? 또한 석재의 질감이 제대로 살아났다는 말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비단 이 문제는 개념정립 차원을 벗어나 석탑을 바라보는 시선과 미감을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의 근본적 차이점을 내재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한 이 개념들이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된다면, 통일신라의 석탑은 백제석탑의 무엇을 전승했고, 앞으로 어떻게 변해가면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는지도 해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면 백제의 석탑과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여기서부터 출발해 본다.

 

<안동 관덕리 삼층석탑/900년대 전후... 이제 신라의 석탑은 장식이 가미된 완전한 공예품이 된다...>

 

 

 

2)

 

 

 

우리들은 석탑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이도 백제와 신라의 석탑을 다르게 느끼거나, 그런 설명에 쉽게 수긍을 한다. 또한 이에 대한 전문적인 해설 없이도 구별이 가능하다면 한번은 그 이유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이 객관적일수록 우리는 각 시대별 탑의 특성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며, 백제계 석탑의 존재의의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의 미감이 우리들 보편의 완성태로 인정받기까지 무엇을 극복해 나갔는지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해서 사족일지 모르겠지만, 실패한 백제계 석탑들을 골라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의 특징이 혼용되거나 무차별적으로 조합/타협했을 경우, 백제식 결구와 신라의 질감을 오독함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는 어땠는지 찾아본다.

 

<영광 불갑사/현대... 옛 백제지역의 석탑은 정림사지 석탑의 영향을 전승하며 끊임없이 재생된다... 그러나 겉모습과 실루엣을 갖췄다고 백제의 미감까지 살리지 못한 사례들은 적지 않다...>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은 완전히 다르다. 미감이 다르고, 결구가 다르고, 체감이 다르다. 백제계 석탑이 신라석탑의 원초적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찾기 힘들뿐 아니라 두 계열의 차이는 엄격하다. 흔히 백제의 미를 ‘선의 우아함’에서 찾고, ‘균형 잡힌 비례와 안정된 구조’를 신라의 미감으로 정리한다. 이는 비단 석탑만이 아니라, 건축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신라의 산지형 가람에 비교해 백제식 가람은 철저히 평지형이다. 백제인들은 절터를 잡을 때 부석사처럼 절대 산기슭까지 올라가지 않았으며, 깊은 산에 들어가서도 평탄한 곳(법주사 등)을 절터로 잡거나, 심지어 연못이 있으면 기필코 메워서(미륵사지 등) 평지를 만들었을 정도로 백제의 가람은 평지형을 지향했다.

 

 

<법주사 전경...  법주사가 만들어진 게 경덕왕대 750년경이면, 백제멸망 100여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백제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던 진표율사는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면서도, 그 깊은 산골을 찾았으면서도 백제의 양식을 고집했다...>

 

 

건축기법도 마찬가지... 정교한 디테일에 강한 공예성을 가진 수덕사 대웅전과 전체적인 비례와 구조적 아름다움으로 대변되는 부석사 무량수전도 그렇고, 무위사 극락전과 봉정사 극락전 비교에서도 그렇다. 그 건축들이 백제와 신라를 벗어난 고려시대의 건축임에도 그 지역적 특성과 기술의 전승은 철저히 보수적이었다. 우리들 사투리가 서울생활 몇십년만에 변하지 않듯이 말이다.

 

<수덕사 대웅전... 고려시대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제의 미감을 찾는다... 그 이유가 뭘까?>

<부석사 무량수전... 우리나라 고건축을 대표하는 두 건물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지만, 분위기와 미감에서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신라와 백제의 영향은 그렇게 깊은 것이었을까?>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단면도/화성박물관... 단면도로 보면 두 건축물의 깊이, 즉 세로폭과 높이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사진으로보나, 현지에서 보면 건축물 규모가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유가 뭘까?... 부석사는 가람의 정점까지 올라가서 느껴야 했다면, 예전의 수덕사는 대웅전 안마당에 들어가서 올려다봐야 했다... 예전 수덕사 대웅전 앞에 요사채가 살아있을 때는 좁은 앞마당을 꽉채운 대웅전의 위용과 장중함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수덕사 대웅전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공간이 있었을 때 이 건축물은 제 맛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당은 넓어지고, 부석사처럼 급한 경사의 계단을 올라가면 곧바로 대웅전을 볼 수 있다. 가람배치가 깨지면서, 건축물의 극적인 등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역시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이 지금보다 좁거나 넓다면, 혹은 앞마당에서 보이는 안양루가 지금보다 컸다면 무량수전에서 바라다 보는 감동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결국 건축과 가람배치, 그리고 공간의 구획은 단일한 기획의도 속에서 조형되는 것이지, 건축 그 자체만으로 완결 될 수 없다. 물론 앞 건물이 헐림으로써 대웅전 본연의 건축은 살아났을지 몰라도, 예전의 감동은 그만큼 감소됐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최고의 건축임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무위사 극락보전/1430년/조선초... 비교를 위해 추가로 올려본다...>

<봉정사 극락전/1200년대... 여기서보면 앞마당을 좁게 형성했던 수덕사와 봉정사는 하부기단이 높고, 무위사가 보통의 높이, 이미 충분히 올라와 무량수전 앞마당을 포괄하는 무량수전 기단부가 비교적 낮다... 기단부도 건축물의 위계 뿐만 아니라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공간경영의 일환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맛배지붕 건축물들은 측면 구성이 아름다운데 전체적인 느낌을 우선 비교하기 위해 전면 사진만 올린다...>

<봉정사 극락전과 무위사 극락보전 단면도도 함께 올려 본다... 부석사 무량수전 건축년도가 1376년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중수시점이므로 대략 150년을 뺀 1220년 경이 최초 건축년도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무위사 극락보전을 빼면 모두 1200년대 만들어진 건축으로, 고려건축과 우리나라 건축의 백비로 꼽히는 건축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쉽게 말해 백제계 석탑의 볼륨이나 실루엣에 신라계 석탑의 특성을 살린다거나, 신라계 석탑의 볼륨이나 실루엣에 백제계 석탑의 특성을 살리는 방식 말이다. 심지어 백제계나 신라계 석탑을 고려의 미감으로 풀어도 완전히 달라지는데, 상호 기법과 결구를 비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백제탑이 백제답지 못하고, 신라탑이 신라답지 못하고, 고려탑이 고려답지 못했을 때 어떤 모습과 평가를 받을까? 그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익산 미륵사지 동탑과 귀신사 삼층석탑, 그리고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은선리 삼층석탑 등을 통해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수덕사 삼층석탑/현대... 언젠가 세워졌다가 언젠지 모르게 옮겨진... 가람배치는 물론 주변 건물과 잘 어울리는가를 묻기 이전에 석탑으로서 충분한 완성도를 갖추었는지 의문이 가는 탑... 이 탑을 보면서, 석탑이 갖춰야할 정체성과 석탑이 담아야 할 많은 상징과 의미를 살리면서 미감까지 갖춘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느껴 볼 수 있다... 오히려 축서사의 석탑은 맛이라도 살아나던데...>

 

 

 

3)

 

 

먼저 20세기 최악의 복원이라 불리는 미륵사지 동탑부터 살펴볼까? 1993년, 화강암 2,700톤, 27억원의 세비, 그리고 연인원 4만5천명이 동원되어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은 왜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1,400여년 전, 손으로 다듬었던 석탑을 기계를 사용하여 가공했기 때문이라거나, 세월의 연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너무 정갈한 모습 등이 흠으로 지적됐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미륵사지 서탑과 너무 달라 백제석탑의 미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 때문일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만 생각하고 십수년을 그렇게 외면했다. 그렇지만 과연 지금의 형태를 손으로 다듬고, 세월이 흘러 풍화도 일어나고 이끼 등 때가 끼면 미륵사지 동탑의 맛은 살아날까? 나는 부정적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백제계 석탑을 신라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원인을 외면하고 표면적 느낌과 감각적 판단에 의지한다면, 미륵사지 동탑 같은 실패작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동탑/1993년... 이 탑을 처음 본 이후, 이 사진 외에 사진다운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내 스스로 외면했고, 그래서 버려지고 잊혀진 탑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미륵사지 동탑은 백제계 석탑의 결구와 구조가 아니다. 철저히 석재의 단조로운 질감만 살아있다. 모목석탑(模木石塔)이라 부를 수 있는 미륵사지 서탑은 목조건축의 축조방식을 재현하듯, 조각조각 가공된 부재를 하나하나씩 조립하며 쌓아 올렸다. 우주/탱주라 불리는 기둥이 별도 부재고, 문지방과 창방도 한칸 한칸 가구를 맞추듯 짜여있으며, 공포구조를 형상화한 층급받침도 하나하나 적층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돌덩어리로 깎아 통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백제계 건축과 석탑의 특징인 디테일이 살아날 길이 없다. 가구식 조립이 아닌 형상 즉 실루엣의 복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비교에서 지적했지만, 세부 디테일의 공예적 장식은 사라지고 구조적인 안정과 전체적인 비례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얼마나 흉한가! 단순한 형태와 모형이 아닌 신앙의 표상으로, 예술적 형상으로 탑이 완성됐을 때 줄 수 있는 생동감과 긴장감, 그리고 경외심이 살아날 여지가 하나도 없어져 버렸다.

 

<미륵사지 서탑/부분/639년... 미륵사지 서탑은 체감과 실루엣에서 성공한 석탑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제석탑이 하나 하나의 돌들을 어떻게 결구하고 적층하면서 조화를 이뤄나가는지 모범답안을 갖추고 있다...>

 

 

 

 

미륵사지 동탑이 실패한 이유는, 900년대 전후의 신라석탑 조형기법으로 600년대 초반의 백제석탑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부재의 수는 최대한 줄이고, 세부기법은 최대한 생략하고, 결구방식은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고... 결국 석재의 질감만 살아났을 뿐, 미륵사지 석탑이 제대로 복원될 턱이 애초 없었다. 27억원이 아니라 270억이 투입되어도, 45만명의 손길로 다듬었어도, 앞으로 천년이 지나도 미륵사지 동탑에서 서탑의 향기는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레고 조각을 조립하여 만든 모형 비행기와 찰흙을 주물러 만든 비행기 모형이 같을 수 있는지... 미륵사지 서탑이 레고로 조립했다면, 복원된 동탑은 비누를 깎고 다듬어서 만든 것과 같다. 결국 복원의 실패란 기획과 안목의 실패였지 자금과 시간, 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미륵사지 동탑과 해체된 서탑 부재들/연이님에게서 빌려 온 사진... 이렇게 많은 부재들이 조합된 석탑을, 저렇게 단순하게 만들었으니 백제탑의 미감이 살아날 수 있었을까? 부적절한 경화, 간화는 애초의 미감까지 훼손시킬 수 있다는 대표적 사례가 아닐런지...>

 

 

 

 

 

이와 반대로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귀신사 삼층탑은 어떤가? 귀신사는 신라왕실의 후원을 받아 의상대사의 제자에 의해 조성된 화엄십찰(팔공산 미리사, 계룡산 갑사, 웅주 가야협 보현사, 삼각산 청담사 등이 포함돼 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6곳만 기록돼 있다)중 하나였다고 한다. 만약 이말이 사실이라면 백제지역 관리를 위해 당시엔 의도적으로 신라식을 고집하여 불사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실제 귀신사는 같은 모악산에 위치한 금산사처럼 백제식 평지가람이 아닌 신라식의 산지형 가람이며, 탑이 있는 곳까지 이르려면 최소 2단 이상을 올라야 한다.

 

 

<귀신사 가는 길... 평지형 가람배치는 백제 초기의 가람들이 도심 집중형 구조였기 때문도 있지만, 주변 자연환경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제 귀신사 삼층석탑/고려시대... 귀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넓은 평야를 내려다 보는 곳도 아니고, 지금으로서도 흘러가는 길목의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석탑이 자리잡고 있는 곳도 현재 귀신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엔 보물급 수준의, 그러나 뭔가 어색한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귀신사의 이 같은 시대적, 가람배치의 특성을 생각하면 색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마 백제식, 소위 정림사계 석탑 중 유일하게 우아함, 또는 날씬함, 또는 경쾌함... 어느 것도 느낄 수 없는, 오히려 너무나 우람하며 당당한 석탑이 아닐까 싶다. 강건한 이미지에 안정적인 모습이 왜 그렇게 낯설게 보일까? 혼자 내린 결론은 삼층석탑의 세부기법과 결구방식은 백제식인데, 전체적인 체감과 실루엣은 완전히 신라식이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귀신사 석탑이 실패작은 아니지만, 미륵사지 동탑과는 반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 그 엇박자만큼 이 삼층석탑 역시 조잡하지 않은 매끄러움과 정교한 솜씨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귀신사 삼층석탑 부분... 일층 지붕돌에는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처럼 우동이 살아있고, 지붕돌 층급받침은 정림사지탑 느낌이 확연한데, 매우 뛰어난 석공이 다듬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스럽고 미려하게 다듬어진 석탑이 왜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을까?...>

<귀신사 삼층석탑... 언발란스? 그 이유는 기법과 구조의 부적절한 타협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결구와 기법, 체감과 질감은 아무렇게나 섞어도 조화와 미감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구조와 비례도 마찬가지.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은 백제계 결구를 고려식 미감으로 풀어놓은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 석탑의 미감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다양하지만, 장중하다기 보다는 둔중(鈍重)하거나, 날씬하다기 보다는 가는(細) 형상에, 비교적 높고(高) 김(長)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신복사지를 비롯해 월남사지 등 옛 백제지역 몇기를 제외하면 삼층석탑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는 특징도 있다.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고려시대... 고려시대 석탑의 미감을 살려보고 싶어 가늘고 긴 느낌이 들도록 찍어 봤는데...^^>

 

 

 그 몇 기의 삼층석탑 중 하나가 은선리탑인데, 전체 탑신의 절반(전체 탑 높이의 1/3)이 일층몸돌 높이(2m)일 정도로 가늘고 높고 길다는 느낌이 강조되어 있다. 즉 삼층형식은 신라의 전통이고, 각층의 결구는 백제식인데, 미감은 고려식... 한마디로 짬뽕식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소박함? 어쩌면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편안하지 못한 어색함? 낯선? 느낌이 솔직할 거 같은데, 이점 역시 안정되지 못한 비례 때문이라기보다 일관되지 못한 계통의 부조화가 주는 혼란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은선리 삼층석탑... 가끔, 일층몸돌과 이,삼층 몸돌의 석질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처음엔 오층석탑이었는데 어느 시점엔가 무너졌고, 나중에 복원하면서 삼층으로 만들다 생긴 차이가 아닐까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석탑의 안내판에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계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비슷한가??^^>

 

 

 

 

4)

 

 

 

결국 석탑이 석탑으로서 완결성을 갖추고 공예적 미감을 가지려면, 기법과 결구에 맞는 디테일과 실루엣을 갖추거나, 질감과 구조 역시 이상적인 조화가 필요로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립없이 혼용하거나, 하나의 의도를 위해 다른 양식을 무차별하게 수용하는 게 얼마나 어색한 방식이고 완성도를 깨뜨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공이 사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신라식 방식으로 백제의 미감을 잘 살려낸 장항리 오층석탑이나 보원사지 오층석탑, 신라식 삼층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계 특징을 완벽하게 살린 장하리 삼층석탑, 신라계 석탑처럼 하나의 부재로 지붕돌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계 미감을 잘 살린 담양 읍내리 오층석탑 등이 그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출발은 탑리리 오층석탑이나 감은사/고선사 삼층석탑에서의 성공에서 출발했음을 기억한다면 새로운 미감의 창출은 형식의 조합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통해 가능했다. 즉 진정한 성공은 생동감으로 드러나며, 그것은 물리적 조합이 아닌 화학적 융합에서 출발했다는 말이다.

 

 

<경주 장항리사지 오층석탑/700년 전후... 나는 이 탑이 감은사지 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해서 맘 같아서는 600년대 후반이라 쓰고 싶은데 참았다...^^ 아무튼 내 생각엔 백제의 여운이 남아있는 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탑의 미감은 한마디로 정의 되지 않는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신라말... 장항리 오층석탑 250여년 후에 만들어진 탑이다... 비슷한가? 처마가 깊어지고 지붕돌이 얇아진만큼, 백제석탑의 미감에 가깝다...>

<여기에도 그런 설명이... 물론 지붕돌 전각 하부의 반전을 특히 강조했지만...>

 

 

 

 

아무튼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은 엄연한 차이를 가지며, 백제석탑이 시원적인 형태라고 해서, 그것이 원시적인 저급함이나 후진성을 의미하지 않았다. 즉 시기적 선후의 문제가 완성도의 고저 혹은 척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백제계 석탑은 돌을 목재처럼 가공하여 목재처럼 조립하는데서 미감이 살아났고, 신라계 석탑은 돌의 특징인 양감과 괴체감을 최대한 살려나가면서 미감을 완성해 나갔다. 백제계 석탑은 각각의 부재들을 공예적으로 가공하여 세부 디테일을 살려나가는 세련됨을 보였다면, 신라계 석탑은 이상적인 탑의 모형을 돌을 이용하여 공예화하는 방식에서 비례와 조화를 이루어나갔다. 결국 백제계 석탑은 석재를 사용하여 선을 살리면서 건축적 표현을 완성해 나갔다면, 신라계 석탑은 석재를 사용하여 구조적 완결성을 꾀하면서 탑의 모형을 완성해 나갔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어여쁜, 혹은 세련된 도회지 아가씨같은 느낌... 백제석탑의 결구로 삼층탑이 만들어졌지만 독특한 미감을 지녔다... 나는 대단한 변화라고 보는데...^^>

<물론 여기에도 빠지지 않고 정림사지 오층석탑 양식임을 부연하고 있다...>

 

 

 

 

이제 정리해보자. 백제계 석탑은 우리가 어렸을 적 미술시간에 가지고 놀았던 수수깡으로 만든 탑과 같을지 모르겠다. 긴 수수깡을 하나씩 잘라서 이어 붙여 나가는 놀이 말이다. 이에 반해 신라계 석탑 만들기는 비누공예일 거 같다. 파내고 깎고 갈아내고... 당연히 수수깡으로 만들면 건축적 결구가 우선할 것이고, 비누로 탑을 만들었다면 조형-실루엣과 질감이 우선했겠지. 무엇이 건축적이고, 무엇이 공예적인지, 그리고 소재의 질감이 살아있는지 무시되는지 차이 또한 분명해진다. 또한 앞서 지적했듯이 백제석탑은 신라석탑의 시원적 형태이면서 자기 완결적인 완성태를 지향했고, 신라석탑은 백제석탑의 재해석과 발전태임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으로 진화했다. 시대와 정신의 차이가 미감과 결구의 차이를 결정했지만, 이점들 역시 상호 불가촉의 영역은 아니었고, 신라인들은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말이다.

 

 

<석가탑... 다시 중수되면 더 완벽해지려나?>

 

 

 

 

백제의 석탑은 돌 하나하나를 살렸고, 신라 석탑은 돌을 응축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백제석탑 앞에서면 아직 살아있는 많은 것들이 생각나고, 신라석탑을 바라보면 지금을 위해 버린 많은 것들이 생각나는 거 아닐까? 백제석탑을 바라보면 채워지지 않은 것들, 추억속의 상상이 나래를 펼친다면, 신라석탑 앞에서는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절제, 혹은 정지된 시간을 느끼는 거 아닐까? 신라인들이 돌을 다듬어 탑의 생명을 끌어냈다면, 백제인들은 석탑을 만들면서 돌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 돌을 다루고 탑을 바라보는 마음의 차이, 백제석탑과 신라석탑의 차이는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정림사지 오층석탑/500년대 중반... 나는 여전히 이 탑 조성시기를 석가탑과 200여년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사달의 6대 할아버지가 만든...ㅎㅎㅎ 석가탑과 비교를 위해, 예전에 안 올렸던 사진 중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550년대... 위 석가탑 등 백제와 신라의 미감 차이를 느껴보기 위해 올린다... 탑만 오려 붙인 거 같은 느낌이 나는... 이런 사진이 정말 기분 좋타. 핀이 딱 맞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