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삼층석탑 5> 1)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은? - 백제석탑의 탄생...1305
4.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은 무엇일까? 미륵사지 서탑일까? 정림사지 오층석탑일까?
- 백제 석탑의 탄생 ; 정림사탑, 미륵사탑, 왕궁리탑
1) 우리나라 최초 석탑 논란과 관세음응험기
백제석탑과 신라석탑의 미감차이에 대해 정리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백제석탑에 대해 알아볼까?
600년대 전후에 들어서야 분황사에서 전탑을 흉내 내고, 목탑기술을 전수 받는데 고심했던 신라와 달리,
①고구려의 적석총 전통(풍납동,방이동,석촌동고분)을 이어받아 석단에 목조건축을 융합했던 백제인들은,
②양자강유역 중국남조와 깊은 연관을 맺어 벽돌고분(무령왕릉)을 만드는 등 이미 전돌 생산에도 뛰어났고,
③500년대 초반부터 수많은 불사를 이루며 4~100m 높이의 목탑(능사,법륭사,미륵사,황룡사 등)을 세웠다.
④이런 다양한 문화를 총합, 결국 불상(예산 태안,서산,익산 등)뿐 아니라 탑도 석재로 만들기 시작했다.
<부여 능사/부여 백제문화단지 복원... 사탑이 많은 나라 백제의 수도 사비에는 이런 규모의 사찰이 수없이 많았을지 모른다... 사비 천도를 전후한 백제는 그게 가능한 역사적, 사상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 백제에서 만든 석탑은 어떤 것들이 있고, 그 조성시기와 순서는 어떻게 될까? 내 생각을 먼저 밝히고 시작한다. 제일 먼저 500년대 중후반 만들어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하 ‘정림사탑’이라 한다)은 목탑 축소판으로 최초의 번안석탑이면서 우리나라 최초 석탑이 되었고, 639년 조성된 익산 미륵사지 서탑(‘미륵사탑’이라 한다)은 석재를 목탑 결구방식으로 가공하여, 목조건축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만든 유일한 모목석탑이었다. 그리고 639년 이후, 이런 경험과 양식을 통합하여 백제 특유 석탑을 완성한 게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왕궁리탑’이라 한다)이다. 즉 신라가 630년대 분황사에 모전석탑부터 세웠다면, 백제는 500년대 중후반 정림사에서 모목석탑을 만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의 우리나라 석탑조성 순서는 정림사→분황사→미륵사→왕궁리→탑리리→감은사 이 순서가 되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오늘은 차분히(?) 시작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나는 왜 이 탑을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보는 걸까?>
나는 왜 통상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미륵사탑보다 정림사탑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또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왕궁리탑까지 백제 때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걸까? 이유? 물론 처음엔 순전한 감이었고, 차츰 호기로 바뀌다가, 지금은 진실이라 굳게 믿어 의심하고 있지 않다.
사실 현재 대부분 자료들은 미륵사탑이 앞서 있다고 말하면서 그 시기를 600~640년 사이라 규정한다. 그래서 항상 미륵사탑 조성연대를 600년대 ‘초’로, 정림사탑은 600년대 ‘전반’으로 표기했고, 왕궁리탑에 대해서는 고려제작설, 통일신라조성설, 661년제작설(고유섭 선생), 그리고 백제설까지 분분한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성급할지 모르지만, 전성기 통일신라 삼층석탑과 우리나라 탑 역사를 정리하려면 더 이상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니라 생각된다. 그러면 이제 그 이유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지금까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최초 석탑으로 입지를 굳혔던 미륵사탑... 그러나 최근 해체과정에서 제작년도가 밝혀지면서 석탑역사는 수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97년 사진인 거 같다>
모든 고미술 감정에는 선후경중의 선택이 문제겠지만,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함께 사료의 기록과 전승된 설화와 구전까지 포괄하는 다원적 접근이 필요하다. 백제석탑에 대한 감정도 다를 바 없어, 사료 기록과 전승 설화가 없는 정림사나 왕궁리보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서동요 설화가 남아있는 미륵사지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즉 조성순서의 기준년표는 미륵사 조성연대를 언제로 볼거냐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1970년대)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관세음응험기>가 새로운 단초를 제공하고, 정림사지와 왕궁리사지 발굴과 함께 미륵사탑 해체가 완료되면서 상당히 많은 의문들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관건은 설화적인 기록들이 고고학적이며 미술사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적확성과 실체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지만 말이다.
<익산 미륵사지 전경/NAVER 스크랩... 사리봉안기 해독결과 삼국유사 기록은 선화공주 부분을 제외하곤 대체로 틀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지...>
먼저 이 사료들과 전승되고 있는 설화를 정리하면 ; 선화공주와 관련된 서동요 설화(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설로 공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 익산천도설과 서동요설화를 연결하여 웅진시대인 동성왕대부터 익산천도를 검토했다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익산은 무왕의 정치적 배경이기 때문에, 600년대초 무왕이 익산 천도를 기획(국내 기록자료는 없지만, 관세음응험기 등 일본측 사료를 근거로 익산으로 천도했거나, 계획했다는 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황수영 박사가 주장했고, 익산 왕궁리 유적발굴에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하는 과정에서 미륵사를 조성했다. 자연스럽게 미륵사탑 제작연대는 600~640년이 되고, 또한 미륵사탑의 제작기법은 가장 원시적인 모목석탑이었기에, 미륵사탑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 된다는 근거가 되었다.
<미륵사지 복원 모형... 미륵상생, 미륵하생, 미륵성불의 미륵삼부경을 근거로 3원3탑의 동아시아 유일한 구조다>
그러나 최근 미륵사탑을 해체하면서 최소 세가지 문제가 명확해졌다. 먼저 639년 사리함이 봉안된 기록에 근거 미륵사탑 심초석이 세워진 시기가 밝혀졌고(무왕대 조성설은 확인됐다), 조성의도는 아쉽게도 선화공주와 무관하다는 점이었다(내 말이 맞았지?!!...ㅋㅋ 나는 여전히 신라공주 유혹사건은 백제 무왕이 아니라 동성왕이거나, 김유신의 아버지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하나는 미륵사탑 사리함 봉안장치의 구조와 방식 및 사리장엄구가 왕궁리탑과 같다(미륵사탑과 왕궁리탑 조성시기는 거의 비슷하다는 의미가 된다)는 점이었다.
<미륵사지 서탑 해체 전경... 네 모서리에 기둥이 있고, 한가운데 심초석이, 그리고 심초석에 사리구가 뚫려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전경/1965년/왕궁리유적전시관 간행... 규모가 작아졌을뿐, 같은 양식의 기단부와 심초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초석에 사리장엄구가 뚫려 있는 것까지 동일한 구조로 두 탑에서만 발견 된 양식이다... 이번 미륵사탑 해체와 함께 왕궁리탑의 관련성이 밝혀지면서 제작년도는 재정립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근래 들어 왕궁리탑 제작시점 역시, 고려(일제 강점기에 주류를 형성했고, 황수영박사는 태조 조성설도 주장했으며,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에도 고려설이 명기돼있다) 또는 통일신라(65년 왕궁리 발굴 이후부터 우세)라는 기존설을 뒤집고 백제말기 조성됐을 거라는 강우방 교수의 주장(강교수도 처음엔 통일신라설을 주장했었다)이 힘을 얻는 시점에서 객관적인 근거가 확보된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륵사지와 정림사지 발굴조사 자료를 종합하면, 정림사지 조성시기가 미륵사지보다 100여년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는 점이다.
<황수영박사의 왕궁리탑 고려태조 제작설/1977년10월17일/동아일보... 고유섭선생은 661년 제작설을 주장한데 반해, 우현선생에게 사사를 받은 황수영 박사는 일제 강점기 다수설(일부 일본학자들은 통일신라설을 주장했고)에 가까운 고려제작설을 주장했었다... 고려시대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 사리장엄을 근거로 했는데, 너무 실증고고학에 갇힌 주장이 아니었나 싶다...>
<왕궁리 오층석탑 상륜부/위 같은 책에서... 그리고 석탑의 양식을 기준으로 통일신라석탑들 보다 왕궁리탑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가장 실증적인 근거가 있으니, 바로 왕궁리탑의 상륜부 노반이다... 고선사/감은사탑 등 통일신라석탑에서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겠지만, 왕궁리탑까지 석탑의 노반은 정형화 되지 않았다... 즉 이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반이라 부를 부재는 낮은 육면체의 두겁석에 가깝게 마감되어 있고(상징적이거나 탑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기능적인 목적에만 충실한 형태다), 복발은 완전한 반구형을 갖추지도 않았다. 다만 풍화가 많이 되었지만 앙화는 초기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에반해 고선사/감은사탑부터 통일신라석탑은 완전한 형식의 노반을 갖추게 되고, 이 양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변하지 않는다... 만약 황수영박사 말처럼 이 탑이 고려시대 만들어졌다면 노반은 이런 형태일 수 없다... 때문에 전체적인 체감이나 양식을 떠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왕궁리탑의 심초석 구조나, 심초석에 사리공을 두는 방식 등과 함께 노반의 형태는 왕궁리탑이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가장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 1953년 교토 천태종 청련원문적에서 발견된 두루마기 형식의 판본
(정림사, 왕궁리, 미륵사의 발굴 자료들은 이미 자료화 되어 있지만, 공교롭게 미륵사탑에 사리함이 봉안된 연도와 같은 시대인 639년, 익산천도와 관련된 기록이 있어 1973년부터 익산천도설의 근거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된 관세음응험기가 있는데, 이 부분은 왕궁리탑의 조성연도와 직결된다고 판단해 관세음응험기 중 제석정사(帝釋精舍) 관련기사을 발췌해 소개한다. 왕궁리탑의 백제조성설과 정림사탑, 미륵사탑의 선후문제 고찰과 양식비교는 별개일 수 있지만, 백제조성설은 모든 정황을 훨씬 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왕궁리 발굴 전경/왕궁리유적전시관 참조... 미륵사지는 11시 방향 5km 거리에 있고, 제석사지는 2시방향 발굴현장 인근에 있다...>
... ...
百濟 武廣王 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백제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수도를 옮기고 새로이 절집을 꾸렸다.
以貞觀十三年歲次己亥 冬十一月 정관13년(639년) 기해년 겨울 동짓달
天大雷雨遂災 帝釋精舍 하늘에서 큰 벼락과 비가 내려 제석정사를 불 태웠다.
佛堂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消盡 불당일곱계단부도 회랑과 방 모두 타버렸다.
塔下礎石中 有種種七寶 탑 밑 주춧돌 가운데에 여러 가지 일곱 보물,
亦有佛舍利 睬水精甁 부처님 사리가 있는 수정병,
又以銅作紙 寫金剛波若經 또 구리로 만든 종이에 필사한 금강반야경을
貯以木漆函 發礎石開視 悉皆消盡 옻칠한 나무함에 넣었는데, 주춧돌을 발견해 열어보니 모두 타버렸다.
唯佛舍利甁與波若經漆函 부처님 사리가 든 병과 반야경이 든 옻칠함과
與故 水精甁內外徹見 수정병 안팎을 살펴보니
盖亦不動而舍利悉無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리만 없어졌다.
不知所出 六個悉 見於是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리) 6개를 보고
大王 及 諸宮人 대왕과 여러 궁인들은
倍加敬信發卽供養 更造寺貯焉. 갑절로 받들어 발원하고 공양을 올려 다시 절을 짓고 담아 두었다.
... ...
관세음응험기를 읽으며 상상력을 동원해 당시의 백제를 추정해본다면 ;
①639년도에는 절을 중국식의 寺(사)와 인도식의 정사(精舍)를 혼용하여 사용했고, ②佛堂七級浮圖 乃至廊房을 내 식으로 해석하면 이미 당시 백제사찰에서는 칠당가람제가 전형화 돼있었고, ③사리함은 목재 옻칠함으로 만들고 수정병과 금동판에 불경을 필사하고 칠보와 함께 봉안하는 방식이 일반화 되었으며(왕궁리탑과 미륵사탑 사리장엄구도 동일한 양식),
<왕궁리탑 사리장엄구...>
<1917년 조선고적조사보고... 기단부가 완전히 묻혀 있고, 일층몸돌 판석은 자리를 이탈한 상황... 이 사진을 보면 왕궁리탑 기단부는 완전히 흙으로 덮여 있고, 일층몸돌이 옆으로 벌어져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탑은 자중에 의한 압축력 때문에 서서히 내려 앉고 있어 기단부를 보강하기 위해 흙으로 기단부를 덮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결구가 취약하거나, 심초석이 상층 탑신을 받치는 구조로 취약했다는 걸 반증한다... 결국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단부가 상부 압축력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함을 갖춰야 한다는 말인데, 구조학적으로 이는 압축력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인장력이 필요한 문제... 결국 석탑 기단부 결구방식으로 목탑에서 차용한 심초석으로 기단부나 일층몸돌을 만든 미륵사탑이나 왕궁리탑 방식은 견고함이 떨어진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더더욱 왕긍궁리탑은 미륵사탑과 동일 시대에 만들어진 탑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신라석탑은 이 문제를 해결할 여러가지 실험 후 전형화 됐다...>
<1942년 왕궁리탑 실측도... 저 상태에서도 꽤 오랫동안 버텨왔다...>
<1965년 왕궁리탑 일층탑신부 해체 전경...>
④당시 사찰은 화재로 인해 빈번한 보수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 ⑤그리고 이 기록이 관세음보살 체험기인만큼 제석정사의 주불상은 아미타여래불상이라는 점과, 당시 백제의 불교는 아미타사사상과 미륵사상에 관세음보살 신앙(태안 마애삼존불의 구성에서 보듯 관음보살이 작지만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의 중심에 서있음)까지 혼재될 정도로 완전히 독창적으로 대승불교가 정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안 마애 삼존불/백제 600년 전후 추정... 당시 관세음신앙을 참고하기 위해 올려본다...>
여전히 남는 문제는 ; ①무광왕이 누군지, ②지모밀지는 어딘지, ③제석정사는 어딘지, ④다시 지은 절은 어딘지, ⑤실제 천도했을까? 등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전체의 흐름이 해석되겠지?
①639년이 밝혀진 이상 무광왕은 무왕이 분명하고, ②지모밀지(枳募蜜地)는 과거 익산 금마면을 일컫던 지마마지(只馬馬知) 지모(支牟) 금마저(金馬渚) 금마(金馬) 건마(乾馬) 중 하나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다. ③문제는 제석정사로, 한쪽에서는 639년을 근거로 제석정사가 미륵사지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화재 후에 다시 지었다면, 미륵사지는 그 이전에 이미 완성됐었다는 말이 되겠지만 이번 발굴된 사리봉안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즉 미륵사지는 연못을 메워 신축한 것이지, 불탄 폐사지를 재건한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왕궁리탑 동북쪽 언덕 아래, 매우 가까운 폐사지에서 제석이란 명문이 찍힌 와당파편들이 발견된 걸 보면 제석정사는 별도로 실재 했고(통일신라시대에도 유지됐다),
<제석사지 출토 기와... 제석사는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시대에도 사세가 유지되었다...>
④이때 수습한 사리장엄구를 다시 봉안한 곳은 왕궁리가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왕궁리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도 기록과 일치하고, 궁인들과 함께 공양했다면 왕궁 속에 만든 사찰인 왕궁리오층석탑일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⑤그렇게 본다면 천도여부도 일부 해결된다. 완전 천도를 했다면 백제정도의 강국이 익산이나 금마면 일대에 대한 도시계획과 사전정비(당시 사비의 인구는 13만호가 넘었다) 없이 천도를 단행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금마면 일대에서 그런 유구의 흔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왕궁리탑이 있었던 주변으로 왕궁터가 조성된 게 확인됐으니, 왕궁까지 만들고 천도는 멈췄든지, 익산의 왕궁은 행궁이나 별궁정도의 규모와 수준이었다는 말이 아닐까? 혹시 천도를 염두에 두고 왕궁까지는 조성했지만, 사비에 근거를 둔 사택씨(미륵사지 서탑의 주인공도 사택왕후다) 등 귀족들과의 타협(미륵사지 조성에 왕후의 사재출연 등)으로 중단한 건 아닐까? 아무튼 백제의 멸망이 결정된 최후의 전쟁은 사비(부여)의 부소산성이었지, 이곳 익산 금마 왕궁이 아니었다. 천도는 시도만 되었을 뿐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왕궁리 유적 배치도... 산을 깎아 평탄작업을 하고, 경계(분홍색)에는 1.2m 가량의 낮은 석축을 둘렀다... 격자식으로 매우 계획적으로 배치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건물들이 중첩되어 있다... 왼편 하단 공방에서는 금/금속 공방지로, 왕실에서 사용한 장신구들을 궁내에서 직접 제작(능사지에서도 금동대향로를 제작했을 것으로 보이는 공방이 확인 되었음)했음도 확인됐다... 이곳에 공동 화장실과 관로도 발굴되어 당시 위생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를 이렇게 살펴본 이유는, 백제말기 무왕대의 불교문화와 백제의 사리장엄 양식, 그리고 익산지방을 정확히 이해함과 동시에 왕궁리탑의 백제기원설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는 왕궁리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를 근거로, 해방전까지 지배적이었던 고려시대 제작설이 1965년 이후 통일신라시대 조형설로 바뀌었다. 백제의 금동대향로가 발견되기까지 왕궁리탑에서 출토한 화려하고 수준높은 금속공예품은 신라에서만 제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미륵사탑 사리장엄구들이 발견되면서 삼국시대의 금속공예 역사(왕궁리터에서 금가공 공방도 발굴되었다)와 함께 백제의 문화는 재조명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륵사탑 해체 가설건축물... 외부엔 사리장엄구 사진이 걸려 있는데, 무령왕릉에 이어 백제 금속공예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아울러 미륵사탑과 왕궁리탑의 사리장엄 방식과 내용이 비슷하고 심초석 조성방식까지 똑같은 점을 추가한다면 왕궁리 오층석탑의 백제기원설은 이의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단 제석정사가 불탄 이후에 왕궁리탑이 만들어졌으니, 조성시기는 639년 이후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거 같다.
<이런 근거들을 종합,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백제시대때 조성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그 전에는 감으로만 주장했었지...ㅋㅋ>
물론 위에서 꼽은 세가지는 내가 수년전부터 믿어왔던(주장할 처지는 못 되니...^^) 것들만 고른 것인데, 무엇보다 왕궁리탑의 백제기원설이 명백해지고 있으며(관세음응험기에서의 익산천도설, 미륵사지와 동일한 기단부 심초석, 가장 고식(古式)에 속하는 단층의 기단부와 기단부 비례 및 노반의 유형, 백제 무왕대 유행했던 연꽃잎 문양이 사리기 내함에 새겨진 흔적 등), 그리고 정림사탑이 미륵사탑보다 앞설 수 있는 개연성이 확인됐다는 점이 그것이다(고고학과 미술사학은 기록자료 확보와 함께 직접적인 발굴만큼 객관적인 것은 없지만, 인문적 상상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실증사학에 머무를 경우 오히려 방법론에 실체가 묻힐 수도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앞선 다른 글들에서 말했지만 500년대 중반 위덕왕 시절은 백제문화의 절정기이자 황금기(확장기가 아닌 안정기라는 의미. 특히 수나라 등장과 함께 중국 거점을 모두 잃었지만, 축소된 상태에서 수습을 위해 안정을 도모했던 시기)였다. 중국이나 신라보다 100여년 앞서 겸익의 율종을 중심으로 불교 체계를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유물들과 법륭사와 동대사 등이 소장하고 있는 불상과 유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백제의 불교문화 수준과 품격은 충분히 확인된 바 있다. 즉 백제인 스스로 석탑을 만들 수 있는 객관적 조건도 충분히 성숙돼 있었다는 말이다.
2)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미륵사지 서탑의 체감 및 양식 비교
이제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수준을 비롯해 미륵사탑과 왕궁리탑에 대한 관계는 대략 설명 됐으니, 이제 정림사탑과 미륵사탑 관계로 넘어가 볼까? 먼저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이 600년대 전반부터 후반에 한정되는데 반해, 정림사지 발굴현장에서는 500년대 초반부터 600년대 중반까지 제작되거나 중국에서 건너온 유물(남조 양나라가 아니라, 북위와 교류한 흔적들까지)들이 지속적으로 분포,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즉 정림사지 조성시기는 500년대 초(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538년설이 요즘 강조되고 있다)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림사지가 만들어진 시점과 석탑 조성된 시점이 동일한가의 문제와, 미륵사지석탑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개연성만으로 실제 석탑 조성양식이나 방식이 시원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라는 점이다.
<백제문화관... 백제계, 통칭 정림사계 석탑 도판들이 한 곳에 모여있어 재밌었다... 멀리 금곡사지 삼층석탑까지 포함했음도...>
또한 석탑 발전역사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간략화 되고 경직되어가며, 소규모로 바뀌어 간다는 것은 공식이다. 그런 이유로 정림사지탑은 시원적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형태는 아니라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그 첫 주창자가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태두이자 석탑연구의 선구자이신 고유섭 선생이었다. 또한 선생은 무왕대 절정에 달했던 신라에 대한 공격의 염원을 담았다는 기록에 근거, 정림사(定林)을 平定(평정)鷄林(계림)의 약자로 보고 미륵사탑을 만든 이후에 정림사탑이 만들어졌다고 시대적 배경까지 첨언했다.
조선 미술사학의 태두 - 우현 고우섭 선생에 대한 짧은 메모...
사실 이번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을 정리하면서 고유섭 선생의 논문들을 봤다는 건, 참 행운이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지, 스스로 선생의 논문을 찾아보는 수고는 아꼈는데(?) 드디어 그걸 해소했기 때문이다. 이유? 소위 조선탑파 연구의 선구자이며 최고봉으로 불리는 분이니, 내 스스로의 안목을 갖기 이전에 그분의 논문을 본다면 나는 고유섭 선생의 체계와 분석적 틀에 갇힌 앵무새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나처럼 취미삼아, 여행의 일환으로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은 전문가도 아니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자연, 첫 정보가 평생의 규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론화된 미술사학과 계보를 먼저 알고 유물을 접하는 것도 좋겠지만, 나 같은 비전문가들은 무조건 많이 보고, 자주 보고, 무차별적으로 상상하면서, 잡다하게 섭렵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고, 나만의 잣대와 관점이 설정되기 전까지 우현 선생의 논문읽기는 뒤로 미뤘던 것이다(물론 이래저래 병행됐겠지만...^^).
<인천 시립 박물관...>
어째든 나는 대중적으로 검증된 유홍준씨를 첫 멘토로 삼고, 최완수 위원을 통해 미술사학의 안목과 개념을 따라잡으려 노력했다. 물론 내 식견이라는 게 그 양반들을 벗어나기 힘들 수 있겠지만, 그로부터 부족한 점들은 나의 관심과 정도의 문제로 내가 상상과 유물과 대화를 통해 채워갈 문제였지, 멘토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들과 학자를 호불호를 기준으로 취사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근대적 의미의 한국미술사학계 흐름을 나름대로 그려보고 있는데, 고유섭/전형필선생을 1세대로, 최순우선생과 황수영박사를 2세대로, 정양모/김원룡 관장과 강우방/남천우 박사 등을 3세대로, 최완수/유홍준씨를 그 다음으로 보고, 문명대/안휘준/이태호 교수와 신영훈/전흥수 대목장을 참고하는 방식으로 맥을(석탑을 비롯한 불교미술만이 아니라 건축, 도자기, 회화 등 분야에서)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현 선생의 글을 읽었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물론 여기서 우현 선생에 대해 깊이 있게 평가하는 건 무리가 따르지만, 내 견해를 간략하게 메모해 보면 ;
①체계적인 서양과 일본 미술사학을 교육받은 첫세대로 한국인의 정서와 언어로 조선미술사학을 연구하여, 일본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일방적으로 규정되던 조선미술사학에 논쟁을 일으킨 첫 조선지식인이었다. ②선생의 연구분야는 고구려 고분벽화, 도자기, 회화 등 고미술과 민예품 전반에 이르는 조선미술사학의 체계를 잡으려 노력했고, 특히 조선탑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③그리고 분청사기의 시대적 흐름을 설파하면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구수하고 고소한 큰 맛’ 등 한국의 미를 개념화하여, 한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미를 찾던 1960년대 재조명 받으면서 한국미술사학의 태두로 평가 받았다.
④그러나 중국과 일본에 차별성과 독자성을 강조했지만, 서양미술사학 체계와 일본사학자들의 방법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비애와 적조의 미’, ‘백색의 미’ 등 한국의 문화미를 민예적인 것, 소극적인 것, (중국에 비해)변방적이고 (일본에 비해)지방적인 것으로 규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⑤마지막 조선탑파의 역사는 선생이 제시한 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측면도 많지만, 지속적인 고고학적 성과와 함께 허실이 드러나면서 보완되고 있고, 내 생각과 다른 점들도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또 그런 의미에서, 7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선생의 글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두 석탑이 양식적 차이와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 절대적 시간에서 말이다. 먼저 우현 선생의 말처럼 정림사가 평정계림을 뜻한다면 신라와의 동맹이 깨진 이후 국가적 열망을 드러냈다는 말인데, 그것이 과연 한 개인의 문제였을까? 오히려 나는 성왕의 전사라는 국가적 치욕이 더 큰 계기가 아니었을까 추론한다. 당연히 사비천도를 단행했던 성왕의 전사로 왕위를 이어받은 위덕왕대에 평정계림, 즉 신라정벌은 국가적 과제였고, 사비에 그런 염원을 담은 상징적인 불교건축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라정벌을 다짐하는 영구불변의 기념비... 그게 새로 이전한 백제의 수도 사비(부여)에 세운 정림사지 오층석탑 아니었을까? 또한 백제와 신라의 국가적인 경쟁심과 적대적 감정은 무왕이나 의자왕대에 갑자기 증폭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된 이후부터, 가야를 잃고 한강유역까지 빼앗긴 백제의 자존감 회복과 직결된 사안이었다. 정림사란 이름이 태평8년(1028년)명 기와파편에서 유례 되었지만, 우현 선생의 뜻풀이가 맞다면 정림사 창건시기는 무왕이나 의자왕보다 위덕왕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정림사 모형... 그 때 분위기를 상상해 보려고...^^>
또한 불상도 그렇지만, 석탑의 변화를 추적하다보면 하나의 양식이 변화하는데엔 절대적인 시간(한세대-30년)이 필요하다. 즉 요즘처럼 시차의 질적 응축이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불국사와 석굴암 착공과 완공에 3~40여년이 걸리고, 석가탑 하나를 위해 신혼부부였던 아사달과 아사녀가 평생 해우하지 못할 정도로 수십년이 필요했던 것만큼, 당시 석탑조성에도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639년... 사리함에 기록된 이 년도가 미륵사지 서탑의 심초석만 완공된 때인지, 미륵사지 서탑 전체의 준공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미륵사지 서탑이 준공된 이후에 양식적 변화를 일으켜 정림사탑을 만들 겨를(660년 멸망)이 백제에 있었을까? 나는 절대적 시간에서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왕궁리오층석탑의 백제조성설이 맞다면, 왕궁리탑은 정림사탑을 모본으로 약화된 것이 아니라, 미륵사탑을 간화 경화시켰다는 흐름이 훨씬 자연스럽다. 자칫 순환참조에 걸릴지도 모르지만, 정림사탑이 두탑 사이에 낄 경황이 없다는 말이다.
* 정림사탑, 미륵사탑, 왕궁리탑을 한 눈으로 비교해보려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9호... 500년대 중후반>
<익산 미륵사지 서탑/국보11호... 639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289호... 639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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