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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삼층석탑 14>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5)감은사탑의 진정한 의의...1306

姜武材 2013. 6. 25. 22:09

 

 

 

 

 

 

 

 

 

 

 

8. 통일신라 불교의 출발과 감은사/고선사탑의 진정한 의의

3) 감은사(고선사) 삼층석탑의 진정한 의미

  - 거석신앙에서부터 출발한 석조예술의 일관성 획득

 

 

나는 감은사(고선사)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분야, 특히 불교의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종교적으로 예민한 부분과 신라불교의 허실, 그리고 한반도 문화의 원형에서부터 원효란 대사상가의 이야기까지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런 전제없이,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에서 갑자기 석탑이 등장하고 왜 폭발적으로 조성됐는지, 왜 석탑이 석불에 앞서 불교장엄의 중심에 서게 됐는지, 삼층석탑으로 단일화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 후에는 무슨 이유로 사방불이 탄생하고 석불좌상이 보편화되면서, 석등과 석당간지주 등 석재불교미술로 일관화 되는지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해 2013년은 북한과 정전 60주년이 되는 해다.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그 전쟁의 폐해가 얼마나 강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지 뼈아프게 공감하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전쟁의 상처와 폐해에서 오는 정신적 피폐와 물질문명의 파괴,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부터 시작되는 개개인과 사회문화적으로 광범위하게 잔존하는 트라우마와 각종 이데올로기 조작에서 오는 콤플렉스까지, 불과 3년 동안의 전쟁은 2세대 60년의 긴세월이 지났음에도 끝나지 않은 질곡을 양산했다. 합리는 딴 나라 이야기가 되고, 자유롭거나 순수한 영혼은 사치가 되며, 개인의 편의는 집단에 양보해야 되고, 정의와 자유는 전체의 당위에 귀속되어야만 했다. 게다가 근본 지형이 변하지 않은 이상, 무관심한 이들과 망각에 의존하려는 이들까지 끌어들여 선택을 강요하는 게 권력과 정치의 속성이니 누군가의 의지대로 쉽게 끝날 거 같지도 않다.

 

 

<7세기 전쟁상황 및 시기별 횟수/역사신문/사계절... 1900년대 우리에게도 많은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면 어떻게 횟수를 가늠해야할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1950년 625 한국전쟁은 우리의 인지여부와 무관하게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그런 규모와 비슷하게 봐야할지는 모르지만 600년대 한반도에서는 150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다. 특히 고구려와 거란, 백제와 당나라, 신라와 일본의 전쟁은 1회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각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이 되었다... 문제는 그 시기 수만에서 수십만명이 동원된 전쟁이 일년에 두세차례씩 전개 되었다면, 가히 한반도는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한치 앞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 백성들은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으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었을까? 또 전쟁이 끝났을 때 신라의 왕실은 무엇을 해주어야 했을까? 나의 생각은 늘 이지점에서 출발했다...>

   

 

 

 

또한 이를 극복했던 과정도 지켜볼 수 있는 행운도 현대의 우리들은 누리고 있다. 우리들의 원형과 뿌리를 탐독하려는 의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는 근대성과 전근대성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반성하려는 노력이 흔들린 적은 많지만 중단되지 않은 결과가 아닐까? 경제발전과 더불어 정치문화가 변했고, 또 우리의 정체성과 잠재력,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개인은 개인대로, 가족단위는 가족대로, 그리고 사회와 국가는 또 그에 걸맞은 대안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들 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의 충격이 있었고, 또한 외부문물의 급격하고 무분별한 유입에도 불구하고 과거와는 다른 질적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난 신라는 달랐을까? 우리의 1960년대처럼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쌓였을 680년대 전후의 신라는 어땠을까? 또 전쟁이 끝나고 60년이 지난 730년대의 신라는 어땠을까? 지금의 우리와 많이 달랐을까? 내가 보기에 당시의 질곡과 고심은 지금보다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도 역시 전몰장병들과 일반 백성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전쟁의 명분이 납득되었어야 했고, 승리자와 패배자 모두 현재와 미래를 위한 존속의 의미가 전체주의적인 당위에 구속되었어야 했으며, 특히 승리자, 정복자에게 유효한 정체성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지속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로 결집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통일신라라는 국가의 정체성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야만 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신라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까지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당나라의 야욕이 멈추지 않았고, 북방에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발해가 고구려만큼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게다가 남쪽에는 호시탐탐 백제의 본토를 수복하려고 절치부심하는 일본이 강성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정복의 야망으로 보이고, 한반도의 일통으로 보일지 모를 당시의 전란은 아직 이성의 세례를 받지 못한 신라인들에겐 생존이었고, 또 전쟁의 광기를 식혀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들이 선택했던 것은 종교가 아니었을까?

 

<신라 왕경도 중 월성복원도/신라역사박물관... 670년 전후 문무왕은 임해전지 등 궁궐도 신축했지만, 당나라나 왜적(일본)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경주에 성을 쌓으려 했다. 물론 의상대사의 반대로 멈췄지만, 반월성과 남산위의 산성은 그 흔적들이다... 또 그는 일본의 침투와 넓어진 영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달구벌-대구로의 수도 이전도 계획했지만, 결국 경주에 뿌리를 둔 6촌 귀족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이들 외부의 견제로부터 신라가 살아남으려면, 그들의 모든 게 바뀌어야 했다. 먼저 신라왕실이 변해야 했고, 두 번째는 정복된 백제유민 및 멸망한 고구려와의 일체감을 형성해야 했으며, 세 번째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불교의 본질을 간파해야만 했다. 때문에 신라왕은 3성씨, 6개부족을 통치하는데 지나지 않았던 무당이나 제사장의 틀을 벗어나야했고, 이를 위해 미륵보살을 자처하던 왕의 위상은 전륜성왕으로 수정되어야 했으니, 미륵신앙은 급속히 퇴색하고 전륜성왕신앙이란 새롭게 바꿔 입을 옷이 필요했다. 또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아미타신앙(백성들이, 미륵보살을 따르는 수동적 추종자에서, 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적극적 주체로 나설 수 있는)이 필요했고, 신라가 극락정토로 가는 불국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각지에 상징물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 상징물은 허상이 아닌 신심으로 달궈진 모든 것이어야 했고, 여기에는 인도의 불교사와 중국의 불교사상, 그리고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신앙이 결집되어야 했을 것이고...

 

 

* 신성화된 청동기 유물...

<청동검/중앙박물관... 신석기 청동기 시대부터 칼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건 살상용 무기가 아니라 청동거울, 팔령구처럼 제사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신표였다...>  

<청동검/고조선/중앙박물관... 그리고 고조선 시대가 되면 이 청동검은 제사장 혹은 부족장의 신분에 맞는 장식과 크기를 지니게 된다...> 

<칠지도 재현품/백제/부여박물관... 그리고 백제시대에 들어오면 청동검은 철제검으로 바뀌고, 각 지방을 다스리는 왕들에게 하사된다... 신성의 권위는 그렇게 유지된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청동거울 역시 청동검과 함께 제사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표였다... 황룡사 장륙존상(진흥왕), 천사옥대(진평왕), 황룡사구층탑(선덕여왕)을 신라 삼보라고 하듯이, 일본황실의 삼보는 칠지도, 청동거울, 보석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청동거울의 신성은 청동기시대부터 제사장-부족장-왕실의 국가적 보물로 계승되었다...> 

<나전 단화금수문 거울/국보140호/통일신라/리움미술관... 통일신라 역시 청동거울의 신성은 유지된다... 왕의 권역할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들의 권위와 역할을 상징하는 유품들은 바뀌지만, 수천년을 내려오는 신성시하는 상징물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현명한 사람은 한계에 부딪혔을 때 뿌리와 원형을 복원하고, 성공가도에 올라섰을 때 초심을 잃지 않는 법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군주 문무왕은 그만한 자질을 가졌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도교와 유교의 반발로 실패했던 수나라와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 역사를 반성하고, 법흥왕에서 진흥왕으로 이어졌던 전륜성왕신앙을 복원하면서, 인도의 불교사와 불교의 본질까지 회복하고자 했다. 또한 전란의 피해에 허덕이며 쓰러져간 영혼들을 위해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 고구려에 전승되던 제사의식을 통합할 방도를, 기존의 전통적인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이 불교와 습합한 방식에서 찾기 위해 거석신앙에 천착하면서 통일된 백성들의 의식에 일체감을 강제한다. 문무왕 이후 신문왕-성덕왕-경덕왕으로 이어지는 불교 드라이브 정책에는 이런 불교사상과 전통문화의 원형질 탐구가 가미되었으니, 신라가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비된 셈이었다.

 

 

이때 시대의 흐름을 간파한 경륜가이자 사상가로 원효가 등장했지만,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보편주의에 입각해 신분제를 해체해야 했는데, 신라의 6두품과 골품제까지는 손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통일신라불교를 주도한 의상은 교학/교종을 중심으로 승단을 체계화하니 원효가 신라화해 놓은 화엄종이 그것이었고, 이제 전란에서의 출구전략을 찾으며 안팎으로 정리할 시간을 얻으니 문무왕과 원효의 문제의식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고, 이것까지도 통일신라의 복이었던 거 같다. 왜냐하면 불교의 개방성과 평등성이 강조된 원효의 정토종과 선종적 경향을 당시의 신라가 수용하려 했다면 필연적으로 무정부주의와 염세주의 경향에 빠지면서 지방분권화가 가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원효이후 진표율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통일신라의 불교계는 다시 세속화하고 권력화 되면서 종교 엘리트주의에 빠져 교종이 주도하게 되지만, 당시로서는 시대의 한계가 선택한 최선의 타협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원효의 개방성과 왕실의 전륜성왕신앙, 그리고 불교계의 세속화가 적절히 타협한 산물이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니 그것이 바로 석탑건설의 붐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거문고를 타거나 강설하는 원효/화엄종조사회전-화엄연기라 불린다/일본 국보, 고잔지/같은 책... 6두품 출신이었던 원효는 거문고도 잘 탔다고 한다...>

 

 

 

 

먼저 신라왕실 등 위로부터 변화와 타협에는 인도 불교의 태동기 700여년에 대한 역사인식이 깔려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결국 통일신라는 이를 압축적으로 재현하게 된다. ①기원전 500년대부터 시작된 무불상시대, 즉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하여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던 시대를 주도했던 것은 불탑이었던 것처럼, 통일신라의 불교예술의 출발점 역시 불탑이 주도하게 됐고, ②기원전 200년 전후, 인도에서 불탑 조성을 주도했던 아소카왕이 전륜성왕을 자처하면서 전국각지의 바위와 돌기둥에 칙령(마애법칙이라 부른다)을 새겼듯이, 통일신라의 군주들도 왕즉불사상을 전륜성왕신앙으로 계승 발전시켜 불탑 조형과 마애불/마애탑 조성을 국왕이 주도하면서 추진했으며, ③기원전후 인도에서 대승불교를 일으킨 중심세력이 불탑을 신앙의 중심에 두었던 재가신자(출가승려의 반대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통일신라의 대승불교를 불탑 조성을 통해 완결해나가려 했다는 점들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헤겔의 말을 차용해, 인도불교의 역사가 축약되어 신라에 나타났다는 내 생각이 무리한 접목이나 비약 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절을 사원(寺院)이라 부르는데, 이는 중국식 표현인 사(寺, 남북조시대 관청의 통칭이었는데 나중에는 절을 의미하게 됐다)와 인도식 표현인 원(院, 회랑으로 둘러진 건물로 결계의 상징이 되었다)이 병렬적으로 나열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고유명사처럼 고착됐듯이, 통일신라 불교는 중국식 전통에 인도의 역사를 접목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분명했던 우리에게는 낯선 윤회설이 김대성 설화에 접목되듯이, 그 당시는 인도불교에 대한 선망이 강했던만큼 인도의 불교역사 추적은 통일신라인들이라면 한번쯤 답습하고 싶었던 여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크다.

 

왜냐하면 인도 구법승 삼장법사 현장(602~664, 원효와 15살 차이밖에 없다)이 인도경전들을 직접 번역하면서 시작된 신역불교는, 당나라 불교계와 지성계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엄청 파장(삼국지, 수호지 등과 함께 중국 4대 고전 혹은 기서, 소설-그외 홍루몽, 초한지, 금병매 등이 있는데 금병매는 수호지의 한 부분이다-로 사랑받는 서유기가 바로 현장법사의 인도여행기다)을 일으키고 있었고, 완전하게 중국식으로 소화되기 시작한 불교사상과 현장의 인도여행기는 원효나 의상에게도 커다란 자극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통일신라불교의 주체성과 인도의 여운이 가장 강했을 시기가 이때였기에 인도와 전륜성왕, 그리고 불탑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의상과 동굴에서 비를 피하면 하룻밤을 보내는 원효/화엄연기/같은 책... 원효와 의상은 650년과 661년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는데, 원효의 나이 34세와 45세때로 현장의 인도구법이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동굴그림은 661년 해골물을 마시던 때다... 원효는 그 과정에서 三界唯心 萬法唯識-모든 존재와 일이 결국 마음의 구성이다는 의미로 당시 현장의 유식론과 닿아있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데, 당나라 불교의 절대 전기를 일으킨 '신역불교'에 대한 원효의 자신감으로도 해석되는 순간이다. 결국 원효는 적확한 논리를 담은 ‘판비량론’을 통해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던 현장법사를 비판하게 되고, 중국 불교계를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그 당시부터 원효는 중국에서 해동성자로까지 추앙 받는다... 아무튼 원효와 신라인들에게 당시 인도는, 요즘의 한류처럼 하나의 열풍이 아니었을까?>

 

 

 

 

또한 위에서 추가로 제기한 점들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600년대 후반부터 700년대 중후반까지 왜 불탑 조성이 불교장엄을 주도했는지 당시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경주남산을 비롯 고려시대까지 끊임없이 조성되는 마애불이 신성시 된 동력이 무엇이고, 왜 성덕왕과 경덕왕 등은 전륜성왕을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불사를 일으키면서 상징적 건축과 불탑조성에 매달렸는지, 그리고 대승불교가 불국사와 석굴암 조형을 통해 완전히 소화된 다음 불탑의 의미와 조형의 무게중심이 급격히 불상조성으로 이동되는 이유 중 주요한 단초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별도로 첨언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전통적인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을 불교식으로 습합한 결과로 나타나는, 석재를 활용한 불교문화와 예술의 일관성 획득이라는 점을 정리해 본다. 이미 앞선 글들(2007년 전북답사여행, 2008년 당간지주 등)을 비롯해 여러 기회를 통해 나의 문제의식을 말했지만, 불국을 표방했던 고려시대에도 소도와 성황당신앙은 면면이 이어졌고, 근대까지 솟대와 무당은 계승되는 등 전통적인 제사의식과 문화적 원형은 종교적 사상과 신앙생활에 앞서 공동체 형성의 구심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문무왕과 원효에게는 그런 문화적 전통이 습합된 불교의 상징적 장엄이 필요했으니, 그들은 이를 석재로 만든 불탑으로 구현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감은사(고선사)탑은 한국적 불탑의 양식적 출발일 뿐만 아니라, 백제의 석조예술과 고구려의 목탑과 토탑의 전통 및 고분벽화의 정신을 계승하며, 더 근본적으로는 고조선과 홍산문화의 고인돌에서부터 출발하는 巨石(거석)신앙을 잇는 문화적 완결태이자 신앙적 염원의 정수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 거석신앙의 흔적들... 

<반구대 암각화/경북대박물관... 신석기, 청동기부터 우리 조상들은 돌에 자신들의 생활과 염원을 남겼다...> 

<영월 선돌... 그리고 고인돌뿐만 아니라 이처럼 기괴하게 선 돌에 경외심을 갖고 신성시 했고...> 

<경주 남산 삼릉계에서... 인도와 중국에 석굴이 있고, 원효가 토굴에서 득도를 했기 때문에 토굴이나 돌이 현대인들에게도 신성시되는 것만은 아닐터... 돌을 신성시했던 거석신앙은 세계적인 분포를 가진 보편적 풍습의 하나였고, 특히 한반도는 그 정도가 깊었다...>  

<감은사탑... 그런 문화적 전통과 경외감이 있었기에 신라인들은 탑을 석재로 만들었고, 감은사탑은 그 신앙을 불교에 적합하게 변형시킨 문화적 완성태의 시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상사 상원주장군... 그리고 불탑조성이 시들해진 조선시대에도 마을 어귀를 지키는 것은 돌장승이 되었다...> 

<석재 솟대/세중돌박물관... 돌은 우리민족이 가장 오랫동안 전승하고 있는 솟대를 표현하는 소재로까지 이어졌다...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디에도 쌓여있는 작은 돌탑들, 산 정상에 쌓인 돌탑, 그리고 심지어 마을이름을 새겨놓은 비석까지 돌에 대한 애착은 여전히 계속 전승되고 있다...>

 

 

 

 

그 이유 때문에 이렇게 감은사(고선사)탑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인도의 영향과 원효까지 끌어들었지만, 어째든 통일신라에 와서 우리 민족은 돌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문화적 양식을 폭발적으로 구현하며 완성했다고 생각된다. 생각해보면 600년대 이전까지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하나의 소재와 양식으로 구현된 예는, 암각화와 고인돌 및 고분, 청동기 동검과 거울, 그리고 宇宙木(우주목)이나 神木(신목)신앙에서 출발한 솟대(신라의 出자형 금관도 우주목신앙의 변형이다) 등이었다.

 

 

* 우주목 신앙의 변천... 

<문경 봉암사 가는 길... 거석신앙과 함께 인류의 가장 오랜 풍습 중 하나가 우주목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마을어귀를 지키는 당산목 주변에는 항상 돌무더기가 있었다...> 

<경기도 광주 목장승과 솟대...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목장승과 솟대 역시 늘 농촌마을에는 꼭 있었다...> 

<솟대/세중돌박물관...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새의 형상을 한 솟대...>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191호/국립중앙박물관... 400년대 초반 아직 마립간으로 불리던 때의 관으로, 신라의 금관을 대표한다... 아직 왕이 왕이라 불리지 않고, 이사웅, 차차웅, 거서간, 마립간으로 불리던 부족장들의 대표, 조상신의 제사장으로 군림하던 때로 내물/실성/눌지 마립간 중 한사람이 주인공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때 왕들의 고분은 경주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 우주목의 상징은 선덕여왕이후 중국복식이 정착되면서 후대 신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불교라는 옷을 입으면서 이제는 원시적 토템신앙과 조상신에 대한 제사예식과 무속신앙을 벗어나 사상적 예술적 정치적 형상으로 돌을 가공하게 되었으니, 그 이전의 고인돌과 고분이 한 개인과 부족의 전통을 대변하고, 청동기 유물들이 제사장과 무당의 권위를 치장한 소품에 불과하며, 산악사상과 결부된 선돌신앙(오늘날 어지간한 산 정상에 올라가도 봉수대모양의 적석탑이 세워져 있다)이나 우주목신앙이 원시적이며 추상적인 해석에 머물렀다면, 감은사(고선사)탑부터 공동체 형성의 공간 중심에 뿌리내린 석탑과 석불상, 석등 등 거석신앙의 상징들은 실증적이며 논리적인 불교의 사상까지 수용하여 일관되게 해석 가능한 형상으로 구현된다.

 

 

 * 죽은 이를 위한 위한 무덤의 변천과 탑... 

<강화도 고인돌... 이 고인돌은 주인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청동기시대 제사장 혹은 부족장의 묘제다...> 

<장군총 부속 적석총/충주장로성가단 카페에서 스크랩... 이미 앞에서 살펴봤지만, 고구려의 적석총 위로 고인돌이 올라간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이후 사라진게 아니라 철기시대에도 여전히 묘제의 상징으로 전승됐다...> 

<태왕릉 복원도/같은 책... 그리고 시대가 흐르면서 고인돌을 대신해 적석총 위에는 향당이라는 묘상건축이 세워진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이미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편에서 충분히 설명했지만, 고구려의 적석총은 신라의 토단으로 전승되고, 향당건축을 대신해 이제는 탑이 세워진다... 고인돌에서부터 길고 긴 변화의 결과다... * 이 탑평리탑의 토단은 보수과정에서 보강되었다고 하는데, 위 그림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겠다 싶어 올린 것이니 참조하실 것...>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조선 통치영역에서 가장 먼 동남쪽에 위치한 후발 소국이면서 도교적 전통이 취약했던 신라였지만,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삶과 죽음의 공간을 분리(그 이전까지 신라의 고분은 경주 한가운데 조성됐다)하고, 통일신라에 들어와 원효 등의 영향으로 정신적 평등의 세례를 받으면서, 왕이 더 이상 무당이나 제사장이란 신분이 아닌 불교적 의미의 전륜성왕이 되어 불국토를 완성하기 위해 불탑과 불상조성(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으로 사방불이 채택된 것도 정복군주를 표방했기 때문이다)이 필요하게 됐다. 이때 통일신라를 이끄는 주체들이 선택한 것은 거석신앙에서 출발한 돌에 불교의 사상을 입히는 것이었고, 이로서 돌에는 피가 돌고 생동감을 얻으며 대중들과 새롭게 교감하게 되었다. 그들은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불탑과 불상뿐만 아니라 거석신앙의 후예답게 석등, 당간지주, 승탑과 부도비 등을 만들어 나가니,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석등의 나라이며, 유일한 석당간지주의 나라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740년대... 역시 앞에서 설명했지만, 마애삼존불 앞에 사방불이 있다... 백제에서 시작된 사방불신앙은 여전히 통일신라에 와서도 전승된다... 특히 세계를 정복하고 자비로 통치한 전륜성왕을 자처하려했던 신라의 왕들에게는 그만한 상징이 필요했을 터...>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석불/750년대... 불국사를 만들 때쯤, 사방불의 주불은 바위에서 떨어져나올 준비를 한다... 그리고 이때까지 주불상은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이었다...> 

 

 

 

 

그래서 700년대 전후부터 꽃 피우기 시작한 통일신라의 전성기는, 한반도 정신문화가 질적으로 비약하는 새로운 시기가 되며, 공동체 구현의 정신적 지평을 확대하고 질적인 밀도를 높이는 승화의 시기였다고 생각되고, 나는 그 출발이 감은사(고선사)탑이라 생각하고 있다. 회화, 금속공예, 도자공예, 목공예, 글씨와 문자 인쇄술, 천문학과 지도 등 많은 분야를 제치고 건축과 석조미술(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아이템을 분류할 때 다른 분야는 공예로 표현하면서, 석조분야만큼은 미술이라는 포괄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은 이때부터 한반도의 문화를 대변하는 양식이 되었고, 그 내부에서도 조금씩 무게중심이 이동 되는데, 700년대까지는 석탑이 그 문화를 주도하면서 석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800년대까지는 석불과 석불좌상이, 그리고 그 이후 신라말 고려초에는 승탑과 부도비가 이를 주도했다고 보고 있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고선사탑과 감은사탑은 통일신라시대 석조미술의 황금기 서막을 여는 시원인 셈이다...>

 

 

 

요약해보자. 통일신라시대 석조예술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에 서있는 감은사(고선사)탑은, ①중국, 일본과 달리 신라인이 선택한 것은 석재로 만든 불탑의 완성된 양식이었다는 점, ②우리나라 지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지속성과 전국성에 신성까지 갖춘 가장 효율적인 소재와 구조인 석탑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 ③사리봉안과 개인의 추모뿐만 아니라 국가적 기념비라는 복합적 상징이라는 통일신라 불탑의 정체성을 정립하면서 만든 최초의 석탑이라는 점, ④이렇게 완성된 감은사(고선사)탑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한반도에 전해 내려온 거석신앙을 불교와 융합해, 정치/종교/무속적인 상징물로 석조예술을 선택하고 발전시킨 기념비란 의미와 함께 ⑤변화된 통일신라 불교의 의미와 내용을 담아 만들어 간 석탑의 출발점이라는 점 등을 살펴봤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보수전(↑)과 보수후(↓)의 모습... 물론 이후에도 또 손을 댔지만... 이제 감은사탑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있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