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삼층석탑 15>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6)삼층석탑이 선택된 이유...1306
8. 통일신라 불교의 출발과 감은사(고선사)탑의 진정한 의의
4) 통일신라인들이 삼층석탑을 만든 이유
(1) 불탑의 평면구성과 층수의 의미 - 중국/고구려/백제
(2) 통일신라시대 석탑 층수의 의미
(3)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이유
감은사와 고선사에서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모든 석탑이 3층으로 단일화된 건 아니다. 경주 나원리와 장항리에도 여전히 오층석탑이 만들어졌으니, 황복사까지는 5층과 3층석탑이 혼재된 시기로 봐야 한다. 그러나 목탑과 목조건축의 이미지, 그리고 전탑의 영향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통일신라만의 삼층석탑이 갑작스럽게 탄생한 것도 깜짝 놀랄 일인데, 소재 때문에 규모는 작아졌지만, 몸돌에 이어 지붕돌까지 각각 하나의 부재로 만들어져 훨씬 간결해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692년 탄생하고, 천군리 삼층쌍탑이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통일신라의 석탑조성과 삼층석탑 양식은 상상할 수 없이 빠른 속도와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면서 체계적으로 전형화 되어감을 보여줬다는 말인데, 이는 그만한 연구와 검토, 그리고 다양한 실험 등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충분히 살펴봤고, 자, 이제 왜 통일신라는 3층석탑을 만들게 되었을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려 한다.
<경주 천군리 삼층쌍탑... 석가탑이 만들어지기 전, 황복사탑이 만들어진 이후 7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천군리탑이라 생각된다... 감은사 →장항리 →고선사 →천군리로 이어지는 길은 왜군들이 경주로 진출하는 가장 단거리에 있고, 역으로 해왕릉으로 가는 출발점이 천군리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일본과의 대규모 해전이 끝난 730년대, 성덕왕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1) 불탑의 평면구성과 층수의 의미 - 중국/고구려/백제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먼저 ①우리나라 불탑은 중국과 고구려의 누각건축 전통을 이어 받아 조성된 것으로, 기수와 우수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즉 수직성을 표현하는 층수는 홀수로, 수평의 각은 짝수를 기준 한다는 것으로 사각삼층탑, 팔각구층탑 등이 그 예다. 때문에 미국의 펜타곤처럼 평면이 5각형인 건축(지상 5층)이나 삼각사층탑, 칠각오층탑은 애초 상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②평면구성은 사각, 육각, 팔각 등이 있지만 고구려는 원형에 가까운 팔각형(197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정자들을 팔각정이라 부른걸 생각하면, 팔각평면은 800년대 중반부터 불교미술을 주도한 승탑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현대까지 전승됐다고 생각된다)을 선호한 것으로 보이고, 백제는 사각형 평면을 고집했던 것으로 보인다(공간20/정림사탑의 완성/2011년7월 참조. 나는 이글에서 천하사방의 중심이라는 백제의 독자적 천하관 때문에 사방불과 함께 사각형=방형탑이 고착됐고, 5부족 연합의 상징기제 등을 묶어 백제인들이 선호하는 완성수 개념과 미감으로 완성한 것이 정림사 오층탑이라고 봤다).
<정림사 오층석탑...>
세 번째는 ③층수 문제... 삼국시대 기록을 보면 고구려탑은 칠층, 구층, 십삼층이고, 백제는 오층과 구층, 신라는 구층탑이다. 사실 숫자만 보면 ‘9’와 ‘5’는 중국적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 연원은 주역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64괘, 384효로 구성된 주역(예견의 법칙을 모아놓은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선천팔괘를 만든 복희씨에서 시작, 주 문왕(혹은 그의 아들 주공)이 효사를 짓고 공자가 완성했으며, 인간의 행위에 시(時)와 중(中)을 중시하면서 천문지리까지 포괄하고 있다)은 6개의 효( ╍ , ━은 각각 음양을 상징하는 6개효를 아래서부터 두 개씩 묶어, 각각 땅의 음양(음양), 사람의 음양(강유), 하늘의 음양(인의), 즉 천지인(天地人) 삼재로 나눈다)로 이루어지는데, 이중 6번째 효는 질적인 변화를 잉태한 上(상)효라 부르기 때문에, 不變(불변)의 정점인 五(오)효에서 최고 단계에 이룬 것으로 생각해 ‘5’를 최고 정점에 이른 단계를 상징한 개념으로 보게 된다.
<역경/주싱 풀어씀/김영사/2010년간 P45에서... 역경은 단순히 점치는 책이 아니라, 중국사상의 골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였고, 그 최고봉을 공자로 본다... 1407년 축조가 시작된 자금성 역시 주역과 중국의 천문사상 영향아래 기획되었다...>
또한 10진법이 정착된 이후에도 이런 전통은 이어져, 10, 100, 1000, 10000 등은 꽉 찬 수면서 새로운 전환으로 보기 때문에, 그 바로 전 ‘9’를 최고수로 본다. 그래서 욕심 많은 중국인들은 9와 5를 하나로 묶은 ‘九五의 자리’는 황제나 천자의 용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수였고, 누각건축도 5층, 9층은 신성한 영역이었다. 결국 9와 5를 비롯해, 음양이 조화를 이룬 최고 완성수 ‘3’, 그리고 천하시방=십방과 12지신에 각각 1이 더해진 11, 13 등이 불탑의 층수로 정착한데는 음양오행과 완성수, 방위개념과 기수의 법칙 등이 상호작용했고, 여기에 중국과 고구려의 중후장대한 미감이 더해져 9층 이상의 불탑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보인다(또한 3, 5, 7, 11, 13, 17 등은 자신과 1이외에는 나눠지지 않는 ‘소수’이기도 하다).
<숭악사 15층 전탑 모형/중국 심천... 물론 중국의 전탑은 '소수'만으로 구성되지 않았지만, 9층을 제외하면 15층 이상은 극히 드문 경우다...>
<중국 호남성 숭악사 15층 전탑 전경/BEST SCENERY AND SIGHTS IN CHINA P128에서... 모형과 실제의 차이... 직접 보는 건 또 다르겠지...^^>
그리고 고구려나 중국에서 ‘7’이 선호된 또 다른 이유는 도교의 영향이다. 천하사방을 28개의 별자리(28성수 혹은 성숙이라 부른다. 천문학이 발달했던 고구려와 중국에서는 하늘의 별자리를 동서남북 각 7성으로 나누다가 이를 체계화해 3원 28수체제로 해석하게 되는데, 삼원은 북극성 주변을 나누어 中上下원을 각각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으로 불렀고, 28수는 북두7성, 남두6성, 동서쌍3성과 중앙 북극3성으로 구분하여, 이를 오행으로 연결시킨, 좌(동)청룡, 우(서)백호, 남주작, 북현무란 상징과 신앙이 파생한다. 이런 천하관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명대 건축된 자금성을 자미원으로 인식하여 배치한 것 등과, 4~6세기 고구려 등의 고분이며, 고구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중앙에 황룡을 배치하여 5신도까지 완성하게 된다)체제로 나누면서,
<고구려 덕흥리 고분 천정 벽화/408년/고구려 별자리와 신화/김일권 저/사계절/2008년 간... 기마수렵인물도로 유명한 덕흥리 고분에는 우리가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고구려의 천문도가 함께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을 살펴볼 수 있다... 위 그림들 사이사이 원으로 표현되거나 원을 선으로 이은 것들이 별자리다... 그리고 사진이 뒤집히기는 했지만, 왼쪽편에 보이는 원안에 검은 새그림이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고, 오른쪽 원은 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조금 더 시기가 내려오면 두꺼비는 계수나무, 토끼 등과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고구려 춤무덤/같은 책에서... 흔히 무용총이라 불리는 이 고분에는 완성된 형태의 28숙이 그려져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재현품/여주 영릉...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두개로 나눠 봐야한다. 하나는 1395년 태조때 각석한 국보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고, 또 하나가 1687년 복각한 보물837호 숙종본이 그것이다... 1395년 각석한 천상열차분야지도 자체로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 천문도의 위상이 있지만, 이 천문도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조선시대에 각석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화재가 되었다... 1913년 평양 합성숭실대에 근무하던 칼 루퍼스 교수가 발견했고, 후에 영국에서 먼저 연구했는데, 가치를 몰랐던 우리나라는 국보지정도 아주 늦었다...ㅉㅉ(우리 스스로 잊어 버리거나 잃어버린 과거는 너무 많지??)
어째든 그 관측 위치가 600년대 중반 평양으로 밝혀진만큼 고구려 천문사상의 깊이와 과학성을 담은 실질적 자료이며, 400년대 전후부터 그려진 고구려 고분에서 나타나는 28성수체제의 완결판으로 이해하면 될 거 같다... 당시 고구려왕은 하늘의 이치를 읽는 사람이었기에 고구조선에서부터 이어저 내려온 천손사상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고...>
<고구려 오신도/같은 책에서... 위 천상열차분야지도와 500년도 초반 통구 사신총과 집안 오회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중앙의 황룡을 이 책의 저자 김일권씨가 오버랩 - 레이아웃한 그림... 4~7세기까지 만들어진 107기의 고구려 벽화고분 중 별자리 그림이 그려진 것은 25기로, 3~10세기까지 그려진 중국의 벽화고분 16기보다 많고, 별자리가 선으로 이어져 깊이가 있다...
참고로 천상열차분야지도처럼 하나의 평면에 전체별자리를 그린 천문도를 '개천식 전천 천문도'라고 하는데, 동아시아에서는 500년대 초반 만들어진 평양의 진파리 4호분이 최초고, 중국에서는 200년 뒤인 당나라의 돈황성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고천문도가 700년경 만들어진 일본의 기토라 금박 전천천문도인데, 이 천문도의 관측지역 역시 북위 39도 평양 인근으로 밝혀졌음을 참조하면 좋을듯...>
각각의 방위를 상징하는 신앙이 태동하는데 북현무, 즉 북두7성을 중심으로 한 북두칠성 신앙(이를 조선불교가 습합해 사찰건축에 수용하는데, 그것이 칠성각(당)이다)이 그것이다. 결국 도교의 영향이 강할수록 7이란 숫자에 대한 선호는 컸을 것이고, 당연히 고구려에서는 7층목탑도 유행할 수 있었고, 이런 영향이 남아 고려시대에도 북한강과 임진강 이북에는 칠층석탑이 계속 전승된다.
<칠성각/서울 봉원사... 조선시대 불교는 산신각 등 전래 무속신앙을 무리없이 수용하며 명맥을 유지한다...>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1283년 중수한 기록이 있어 고려 중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적 전통은 그렇게 그렇게 맥을 놓치 않고 상징을 되살린다...>
또한 600년대를 전후한 시기 수나라나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교의 영향이 적었지만, 567년 능사의 백제금동대향로나 750년대 동대사의 칠층쌍목탑을 보면 백제 역시 도교가 생활과 관습에 깊숙이 천착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5부족 연합 등의 영향이 강하게 잔존했고, 고구려의 천문사상의 영향을 받아 음양오행에 근거한 천하사방의 중심을 표방하며 중국이나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 천하관을 갈구했던 후발 강국 백제는 ‘5’란 숫자에 집착한 것으로 보여 9층탑 외에는 5층탑을 선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대사 모형/일본 나라/대불전 내부에 전시... 불국사와 비슷한 750년대 창건한 동대사는 금당 영역과 별도로 동서로 탑원을 각각 두어 90m 이상 높이의 칠층목탑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동대사 창건에는 고구려, 신라 출신 승려들의 주도설 등등 다양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앞선 동대사 관련 글 참조...>
(2)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층수
그러면 신라의 9층은? 우리가 알다시피 신라의 사상체계와 신앙은 선진적인 수준이 아니었고, 앞서 살펴본대로 당나라의 등장 이전까지 고구려의 영향이 컸던 나라다. 때문에 그들이 삼국시대 조성한 불탑의 층수는 기존의 개념에 어떤 상징적 해석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데, 여기에 신라고유의 호국불교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원광법사의 세속화한 불교와 구역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장율사의 율종식 개념은 아직 불교의 본질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런 바탕에서 분황사 9층탑과 황룡사 9층탑이 만들어진다. 이탑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여왕의 권위를 과시하여 신라를 둘러싼 9개국의 외적을 굴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황룡사 복원 모형... 9개 각층이 9개 나라를 상정했다는 말을 역으로 보면, 신라가 9개 나라를 떠받드는 형상이 되니, 상징이란 해석하기 나름이다...ㅋㅋ 아무튼 그만큼 신라의 불교는 세속적이며 정치적이었음을 반증한다...>
우선 황룡사탑이 의미하는 9개 나라는 일본/중화/ 오월/탁라(제주)/응유(백제를 낮춰 부를 때 사용)/말갈/단국(단원)/여적/예맥(고구려)이었다는 기록과, 구이(九夷)라 불렀던 왜인/현도/낙랑/고려/만식/부유/소가/동도/천비 등에 상응한다는 설이 있다. 일치하는 이름이 적다는 점에서 기록 당시 명칭의 적확성과 신빙성에 문제가 있겠지만, 참고할만한 자료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교전 상대국의 이름인데, 교전횟수가 많은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백제>왜>고구려>당>말갈>가야>낙랑>우산국 순이다. 그런데 당나라는 640년대 교전상대국이 아니니 빼고, 우산국과의 교전은 1회이므로 제외한다면 5개국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신라에서 주적으로 삼았다는 9나라라는 것도 후대의 상징조작일 개연성이 많거나, 신라에 배타적이거나 정복해야할 나라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
<통일신라 이전, 삼국의 교전 횟수와 상대국/역사신문 1권/사계절... 이렇게보면 신라의 교전국은 9개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고구려가 가장 많은 나라와 전쟁을 벌였지만, 횟수는 신라가 가장 많은만큼 신라인들의 호전성은 알아줘야할 듯...^^ 아무튼 생각할수록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라 생각해서 올린다...>
아무튼 신라에서 생각하는 호국적 성격만 이해하는 것으로 하고, 이제 전쟁이 일단락되고 통일신라는 새로운 상징을 찾아야만 했다는데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먼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인접하면서 그들의 동맹국이었을 오월, 탁라, 말갈, 단국, 여적 등의 위협이 사라졌으니, 황룡사처럼 ‘9’가 담아야할 外敵(외적)의 개념에서 불탑의 상징수를 찾는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물론 당시 일본/당나라/발해 3국의 도발 저지를 결집하는 3층이 필요했을 수도 있지만, 760년대 이후 이런 위험요소가 사라진 다음에도 ‘3’층이 지속됐다는 것은 시대가 변한만큼 황룡사 같은 의미부여 방식은 더 이상 무의미했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9’층 이상 다층탑은 당, 고구려, 백제에서 충분히 유행하고 있었고, 도교의 영향이 적었던 신라가 ‘7’을 선호할 이유도 없으며, 정림사/왕궁리 등에서 단련된 백제석공들의 경험을 수렴하여 이미 탑리리 5층석탑을 세웠지만, 유독 백제에 대해 열등감도 강했고 감정적이었던 신라가 ‘5’층을 계속 고집하거나 연연해할 이유는 없었다.
<탑리리 오층석탑...>
게다가 가장 늦게 국가체계를 갖추고 말갈, 가야를 비롯해 백제와 고구려 등과의 정복전쟁을 통해 성장했던 신라로서는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독자적 양식의 불탑이 절실했을 것이고, 전륜성왕을 자처해야하는 신라왕들에게 새로움과 변신을 과시할 수 있는 양식개발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중했을 것이다. 이때 통일신라인들은 가장 깊고 낮은 근본에 천착했다는 생각이 된다. 신라의 역사와 전통, 불교/유교/도교 등의 영향, 그리고 당시 급속하게 늘어나는 사찰건축과 불탑조성의 경제성과 효율성, 그리고 관리의 편리성도 고려했을 것이며, 마지막 석재로 만든 불탑을 선택했던만큼 석재의 질감과 결구를 최대한 살리면서 신라인들이 가졌던 실용성과 정연함을 함께 살릴 수 있는 양식의 석탑을 찾았을 것이다. 나는 630년대 선덕여왕 이후 김유신 등 수많은 영웅호걸과 원효 등 대사상가를 배출한 신라에 이 정도 저력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 결과로 선택한 양식이 바로 3층석탑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3)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이유
①하나는 인도의 분석철학과 직관과 포괄이 강한 중국철학을 통합하면서, 불교의 상징체계를 가장 간략하게 분석한 3이란 숫자에서 출발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3은 태극과 음양에서 출발한 중국고유의 완성수라는 의미가 있다. 먼저 석가모니의 완벽한 깨달음을 설명하는 보리심도 3가지고, 초기 불교가 태동하던 기원전 500년대 인도의 우주관도 3계이며, 논리적 사상적 체계를 갖추어가며 완성된 반야경에서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 방법도 3법인(중관)이고, 현장의 신역불교가 등장한 이후 600년대 후반까지 성취된 중국과 신라의 불교교리의 집대성은 화엄경인데, 여기에서 공과 무자성의 사상을 분석하는 개념도 3성과 3무성(화엄경의 삼계유심)이었으니, 인도의 가장 전통적인 진법인 4에서 파생된 4성 8정도와 10진법에서 유래한 10대제자 등 다양한 상징 중 3은 가장 근원적인 숫자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논리적 체계에서 형상화된 인도의 수직적 우주가 풍륜-수륜-금륜으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 사왕천에서 33 도리천으로 이어지는 수미산의 형상을 3층으로 정리했을 수도 있고... 또한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음양이 통일된 가장 안정적 완성수인 3이야말로, 불교교리를 완벽히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본다. 불교의 수많은 보물을 불,법,승 3보로 통합정리한데서도 통일된 신라와 전륜성왕에게 가장 적합한 상징이 ‘3’이란 숫자였을 것이라는 게 첫 번째 추측이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오른편의 청동향로는 중국의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0세기 전후 작품인데, 다리가 세개인 솥 사진이 없다...^^ 아무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가장 안정적인 구조는 삼각형... 여기에서 파생개념이 鼎立(정립)이다...>
<산청 대원사... 팔작지붕위 합각면에는 불교의 여러상징들이 그려진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왼쪽 건물 지붕 원안에 세점이고... 그것은 불교의 삼보인 불, 법, 승을 상징한다...>
②두 번째는 대중적 친근성에 대한 검토인데, 600년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휩쓸던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의 근간도 3세와 3생으로 표현되듯, 당시 3은 불교를 비롯해 도교적 입장에서도 거부감이 없으면서 완성된 숫자로 대중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미타신앙과 정토사상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도모하면서 원융무애의 화엄사상을 통해 통일국가의 이념을 세우는데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원효의 회삼귀일 사상도 큰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원효가 말년에 주석한 고선사에도 그런 상징은 필요했을 것이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통일된 형상으로서 삼층석탑은 매우 적합한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족일지 모르지만, 솟대신앙에서 발전한 고구려의 삼족오는 태양을 상징함과 동시에, 하늘과 인간을 잇는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신격이 있는 ‘3’은 여전히 유효한 숫자였고, 신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눌지왕에 의해 김씨 세습이 정립되기 전 400여년간 신라의 왕(마지막 명칭이 마립간이다)은 박, 석, 김 3성씨가 경주6촌 회의를 통해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으나, 부족 조상신을 대신한 제사장이나 무당의 역할을 벗어나 김씨 세습왕조가 전륜성왕을 자처하기 위해서 진골세력까지 모두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3은 새로운 완성을 상징하기에 매우 이상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맞새김무늬 꾸미개/국립중앙박물관... 위 고구려 고분벽화 천문도에서 소개했던 진파리 고분에서 출토된 꾸미개로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즉 삼족오는 고구려의 천하관 및 천문사상의 핵심적 상징이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탁본... 용화수 오른쪽에 그려진 원이 태양인데, 그 안에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참고로 왼쪽에는 달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가 새겨져 있다...^^ 앞선 법천사와 지광국사현묘탑비 관련 글 참조...>
③마지막으로 고구려의 학술적, 백제의 계율적 성격에 비해 실천적 성격이 강했던 신라의 불교는, 자비왕부터 소지-지증-법흥-진흥-진지-진평-선덕-진덕왕까지 10대 150년에 걸쳐 왕명과 왕실가족까지 불교식 이름을 붙일 정도로 왕즉불 신앙에 기초한 호국적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삼국통일 직후 미타신앙의 보급과 함께 국가적 상징보급뿐 아니라 왕실의 원찰의 필요 등 사찰건축에 대한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여기에 세계를 자비로 통치하는 전륜성왕신앙까지 겹쳤으니 공급에는 절대적으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조성시기가 짧고 신라인의 미감에 적합한 삼층석탑은 매우 효율적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또한 고구려식 9층이나 13층 등으로 석탑을 다층화 했을 때 수직성은 강조되지만 장중함은 떨어지고(정혜사지 13층석탑이나 월정사 9층탑, 그리고 경천사탑 등을 생각해보라), 백제의 화려하거나 우아한 미감이지만 부재수가 많아 결구가 복잡하고 관리가 어려운 5층, 9층석탑보다 실용적이고 정연한 미감을 좋아했던 신라인에게 3층석탑은 가장 적합하지 않았을까 싶다.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에서... 칠층이라고 고집을 계속 피웠는데, 이젠 그냥 십층으로 표기하기로 했다...^^ 석재로 만든 탑을 다층화하면서 중후장대한 느낌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올린다...>
<예전에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렇게 실제 비례를 확인할 수 있느니, 고려시대 석탑의 미감을 '세장미'로 표현하려 했던 사람들의 고심을 읽을 수 있겠다... 나는 다른 표현을 찾고 있었는데...^^>
<92년도 경복궁에 있을 때 사진... 당시에 나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탑이란 걸 제대로 알았을까? 미감이라는 걸 알았을까?^^>
결국 추론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3층석탑은 불교적 상징성과 대중적 미감, 그리고 공급적 측면에서의 실용성을 모두 만족시킬 최적의 조합이었기 때문에 700년대 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①불탑장엄의 효과를 높이고 신라인의 안정감을 가미하기 위해, 고구려식 토단을 버리고 목탑이나 목조건축에 사용되던 실용적인 이중 기단부를 석탑에 적용하고, ②석재의 중후한 미감을 살리기 위해 기단부를 제외한 각층 몸돌의 탱주를 없애면서 우주만 살려 괴체감을 주고, ③담백해진 몸체의 건조함을 상쇄하기 위해 목조건축지붕을 실증적으로 차용한 층급받침을 5단으로 정형화하고, ④낙수면은 탑리리탑의 높이와 백제탑들의 질감으로 단순화하니, ⑤정연함과 복잡함, 장중함과 우아함, 괴체감과 세련됨을 모두 살리면서 석재고유의 질감도 살아나고 관리와 보존에 유리한 석탑다운 석탑이 이제야 탄생하니 그것이 바로 감은사와 고선사 삼층석탑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첨언한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탑 유구인 북한 요동성총 벽화에 그려진 3층탑을 대중적으로 복원했으니, 이는 근본으로 회귀한 것일 수도 있다.
<고구려 용동성총 고분벽화/NAVER에서... 요동성이 그려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만주가 아닌 평양에 있는 고분이다... 375년... 늦게 잡아도 400년 전후의 고분으로 삼층탑 형상이 그려진 최초의 유구가 이 벽화다... 억지인줄 알지만 괜히 그런 생각을 해 봤다. 혹시 최초의 삼층목탑을 계승하기 위해 삼층석탑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삼층석탑을 만들면서 신라인들은 그 뿌리를 어디에서 찾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말이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그렇게 해서 통일신라인들은 이런 삼층석탑을 만들 게 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1331년이 지나서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그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