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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삼층석탑 39> 불국사(12) - 다보탑, 불국사, 그리고 경덕왕...1309

姜武材 2013. 9. 24. 10:36

 

 

 

 

   (4) 석가탑, 다보탑, 불국사, 그리고 경덕왕대 통일신라

 

 

 

이런 의미에서 다보탑의 영향력을 재조명한다면, 다보탑은 불탑의 보편성과 국제성을 계승하면서 독창적인 조형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석탑에 다양한 이형이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불탑과 승탑이 분화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741년 석가탑이 완공된 이후 조형되기 시작한 다보탑으로 인해 묘탑의 기능과 불교사원의 상징성을 목적으로 만들던 불탑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즉 진신사리가 봉안된 무덤이라는 기능과 불교사원의 상징성에 만족했던 불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지 않더라도 불국토나 불단(佛壇)을 재구성하여 형상화하거나, 기존의 목탑이나 석탑을 모형화한 것만으로도 충분해질 수 있었다.

 

 

<이제 다보탑과 불국사에 대해 마무리해보자...>

 

 

 

물론 이런 인식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져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30~60여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국 형식이 내용을 대신하게 되고, 기능이 없어도 목적만 충실하면 될 정도로 유연해지고 다양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 석탑은 건축에서 모형으로 전화하기 시작했고, 불탑과 다른 양식의 승탑을 수용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그 불탑의 의미가 변화하기 전, 건축적으로 완성되는 마지막 정점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위치한다.

 

 

<나는 다보탑과 석가탑 같은 명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불국사 대석단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건축적 의지와 영감으로 이루어진 대석단이 있어 다보탑의 구조와 양식은 도전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대석단은 우리나라 석조건축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멀리는 고인돌에서부터 시작한 거석문화가 고구려의 적석총으로 계승되고, 이를 종교적으로 재해석한 백제의 석탑을 거쳐, 통일신라의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시 통일신라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풍수도참설로 이어져 충주 미륵사지와 화순 운주사를 만들어내지만, 불국사와 석굴암만큼의 체계적 질적 완성도를 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완성은 미술사적 관점에서 마냥 긍정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즉 궁극의 완성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모든 양식과 조형의지를 해체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는 말이다.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흉내낼 수 없는 최고의 기획과 최상의 기술, 그리고 비극까지 승화될 수 있는 최선의 정성과 왕실의 재력이 뒷받침된 든든한 후원, 국가의 추진력이 결합된 불사(佛事)나 역사(役事)는 수백년을 통털어 한나라에 몇 번의 기회밖에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상의 완성도는 후대 사람들의 도전의지를 꺾고 체념을 양산하며 긴장감을 이완시키며 모방과 답습만 강요하게 된다. 보다 높은 경지를 이루지 못하거나, 이를 극복하려는 진정한 용기가 없다면 말이다.

 

 

  

<석굴암을 비롯 불국사 대석단과 석가탑, 다보탑의 위용은 오늘날에도 재해석되거나 차용되지만, 아직 그 수준을 뛰어넘는 석조예술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호암미술관에서...>  

<경복궁내 민속박물관의 계단과 기단부도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차용됐다... 물론 궁궐과 성벽도 같은 석조건축로 당대의 사상과 재정 및 노동력이 집약되지만, 이는 권력화되고 폐쇄화된 공간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 건축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종교적 이유든 정치사상적 의도든 개방적이고 대중화된 공간에서 우리는 아직 불국사와 석굴암을, 석가탑과 다보탑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무려 13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나라 석탑조형의 역사에서 석가탑이 기획의 승리이자 꽃이라면, 다보탑은 기술의 승리이자 꽃이었다. 때문에 도면만 있으면 석가탑은 쉽게 전승되지만, 형상이 있어도 다보탑은 재현되기 어려웠다. 그만큼 구조적으로 복잡했고 기술적으로 난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삼층석탑은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다보탑은 단절됐지만, 이후 통일신라의 석탑은 양식과 완성도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석가탑과 다보탑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재현과 답습, 그리고 모방의 길 뿐이고, 또 하나는 다른 영역으로의 전환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통일신라 불교미술에 새롭게 등장하는 석불좌상의 조형과 석등이었다고 생각되며, 800년대 중반 이후 시작한 승탑으로의 무게중심 이동이었다고 보인다. 물론 석가탑과 다보탑의 여운은 이후 30여년 지속되며 술정리탑과 정혜사지탑, 화엄사 사사자탑 등으로 이어지지만 삼층석탑도 청송사탑과 남산리탑 이후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한번 핀 꽃은 지기마련이며, 하나의 완성은 또 다른 변화와 해체를 잉태하는 법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날, 현재의 우리에게 가슴을 뛰게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건축이 우리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있는가 말이다... 서초동 삼성타운? 도곡동 타워팰리스? 여의도 국회의사당? 4대강 사업? 포항제철? 나로호 우주센터? 인천대교? 애버랜드? 아니면 아파트 단지일까??? 우리시대 기획과 기술의 꽃은 무엇일까? 그런 걸 찾고 싶은 게 내가 쓰는 글의 목적 중 하나다...^^>

 

 

 

 

 

 

 

현재 불국사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은,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거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대웅전 회랑 동측면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 즉 대석단의 위용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채 맨 먼저 다보탑을 보게끔 유도되어, 다보탑에서 석가탑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불국사의 전체 느낌을 좌우되는 측면이 클 수밖에 없다. 몰론 당시까지는 석탑이 가람배치의 중심이었고, 동선이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도 있지만 배치에서도 간과하기 쉬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국사 가람배치도... 이제 다시 불국사로 들어가 볼까?>

 

 

 

지형적으로 보면 불국사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경사진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당연히 관음전 쪽이 높고, 대웅전에서는 다보탑 쪽이 높아 물과 바람은 서남쪽(석가탑과 자하문 쪽)으로 흐르게 된다. 때문에 건축적으로는 석가탑과 다보탑 중 어느 게 먼저 만들어졌을까 하는 선후의 문제보다, 석가탑과 다보탑의 좌우가 바뀌면 어떻게 느껴졌을까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불국사 조감도를 보면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다... 물과 바람이 지나가는 길은 우리의 시선이 흘러가는 길과 같다...>

 

 

중국적 위계구조에서 보면 대웅전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우측(금당과 불상이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좌측)의 위계가 더 높다(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듯이). 즉 당대의 불국사 조형에서도 다보탑의 위계가 석가탑보다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다보탑의 의미가 석가탑보다 컸던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의 형상이 규격화 돼있지 않은만큼 두탑의 좌우 배치는 경전의 도해나 권위적 위계보다 건축적 요소가 더 중시됐을 가능성도 있다. 대웅전 좌우의 지형적 조건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을 갖는 불국사는 어떻게 공간을 경영하면서, 두 탑을 배치했을까?>

<석가탑과 다보탑... 두 탑의 위치가 달라졌다면 오늘날 불국사는 어떻게 보였을까? 다보탑 뒤쪽으로는 늘 푸른 녹음의 산이 어우러져 있어야 안정적이고, 석가탑 뒤쪽으로는 파란 하늘이 보여야 제맛이 난다면, 김대성과 아사달의 공간연출은 오늘날 기준으로도 완벽했다는 말이 된다...>

<석가탑은 어느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산이 아니라 하늘을 배경으로 삼는다... 안정적인 다보탑은 산에 의지하고, 상승감이 강조된 석가탑은 하늘을 향해 솟고... 두 탑은 처음부터 우리가 바라봐야할 시선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고 생각된다...>

 

 

 

 

건축적으로 보면 대웅전 우측편은 극락전 영역으로 대웅전보다 한 단계 낮게 조성되어 있고, 좌측편은 회랑에 높지 않지만 야산이 가까이 있어 시선이 막힌 곳이다. 그런데 단면적으로나 볼륨에서 석가탑보다 큰 다보탑이 석가탑의 위치로 갔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불국사를 큰 배로 본다면 서남쪽으로 더 기울어져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흐름은 처음부터 불국사의 물과 바람의 길을 염두에 두었다...>

<대개 기념비적 건축은 자연을 극복하는데서 이루어진다. 물과 바람을 거스리는 인공의 힘에 의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편안하고 지속적으로 확장 가능한 건축은 자연에 순응한다... 자연스럽다는 말과 아름답다는 말은 그렇게 혼연일체가 되어 인간을 동화시킨다...>  

<그래서 우리, 아니 불국사 대석단을 카메라로 담는 내 사진은 항상 연화칠보교에서 청운백운교쪽을 향하게 된다...>

 

 

 

시선을 차단한 동쪽 구릉의 막힌 곳에 석가탑보다 무겁게 보이는 다보탑이 있고, 상승감이 강조된 석가탑은 한단 낮게 조성된 극락전을 향해 하늘로 치솟아 있다. 741년 석가탑 완공과 함께 다보탑이 준공되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불국사 대웅전 영역은 주변 지형과 시선의 흐름에 조화를 이루면서 상승감이 강조된 석가탑과 안정감이 강조된 다보탑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면서 공간에 균형을 유지하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함에도 편안한 연출을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만약 관음전에서 바라보는 곳에 석가탑이 있었다면, 이런 집합적 통일성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이런 공간연출력은 석공의 경험만으로 가능했을까? 기획과 기술, 경험과 이론, 사상과 심미안은 그렇게 하나로 통일됐다...>

 

 

 

자하문 밑에 앉아 무릎을 쳤던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공간경영에서의 균형감각과 완벽한 연출력은 아사달의 경험이었을까? 김대성의 안목일까? 혹 경덕왕의 참견은 없었을까? 또 석가탑이 만들어진 10년 동안 불국사는 어느 부분까지 건축이 되었을까? 각각의 영역이 나뉘고 대석단도 완공되고 다보탑까지 만들어진 이후, 각각의 금당과 금동불 정도만 남았을까? 아니면 모든 걸 다시 재정립했을까? 아직도 불국사가 말하지 않은 부분은 무궁하다는 생각이 든다.

 

 

<600년대가 고구려-백제-신라-수당-일본이 어우러진 한반도의 가장 역동적 시대였다면, 700년대는 통일신라-당-일본의 문화가 가장 아름답게 구현되었던 시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751년 결합한 김대성이 석가탑과 다보탑 조형에 얼만큼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이미 741년 석가탑이 완성됐다는 기록과 불국사와 석굴암을 동일시했던 당대 분위기를 고려하면 다보탑부터 본격적으로 결합해 석굴암에 더 치중했을 개연성도 있지만, 국가의 기념비적 사업이었던만큼 재상에서 귀족으로 신분만 달라졌을뿐 상대등 시절부터 개입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보인다.

 

 

<그 시대를 읽는 것은 이런 세부적인 모습들 하나하나를 뜯어 보는 것에서 시작하겠지만...>

 

<왜냐하면 당대의 그들이 권력과 재정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구현하고 싶은 최상의 것을 표현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부분부분을 읽는 것은 항상 전체적이고 깊이 있는 시선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석가탑과 다보탑의 좌우배치를 고려한 건축적 구상에서부터, 석굴암과 불국사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수리적 체계, 그리고 조형적 기술적 완성도를 뛰어넘는 정신적 공간경영을 보면 기술자의 역량만으로 건축가의 안목을 충족시키긴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천재적이라고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은 김대성과 아사달의 절묘한 궁합이 있어 불국사와 석굴암, 석가탑과 다보탑이 완성됐지만 무엇보다 경덕왕의 역할도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전체를 읽기 위해 우리의 동선도 다양하게 구성해 볼 필요가 있을 듯... 내가 생각하는 불국사의 동선...^^>

 

 

 

 

 

그렇게보면 재위기간 내내 귀족들과의 권력투쟁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한 역사를 놓치않고 주요 요충지마다 통일신라의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토목건축공사를 일궈낸 경덕왕은, 백제의 의자왕이나 고구려의 보장왕, 고려의 공민왕이나 조선의 정조같은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선왕의 후원과 유지를 이어 개혁군주로 등장하지만, 그들의 실패는 결국 국가의 좌절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물론 전륜성왕을 자처했던 경덕왕의 실패는 너무 일찍 꽃을 피워서가 아니라 당대의 역량을 소진한 이후를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그들로 인해 정치와 사상은 다양화되고, 훨씬 폭넓은 계층들이 참여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한동안의 침체와 쇠락이 전제되었겠지만 또한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모색되었다면 실패로만 바라볼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평가에도 양면성이 있으며, 역사적 사건은 항상 빛과 그림자를 동반하는 법이다.

 

<그 동선을 따라가면 생각보다 다양한 건축을 접할 수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의 대비뿐만 아니라, 불국사에는 이처럼 다양한 건축과 공간의 변화가 살아있다... 대웅전에서 무설전 방향으로...>

<불국사의 가장 높은 곳... 관음전...>

<관음전에서 내려온 비로전...>

<비로전에서 내려 온 나한전... 그 때도 이 이름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한전 앞 법화전지 혹은 미륵전지를 지나 극락전...>

<극락전 앞 안양문... 이러면 불국사를 한바퀴 도는 거지?>

 

 

 

 

흉내와 모방마저 거부한 궁극의 완성은 끊임없는 영감의 도화선이 되고, 새로운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개개인의 인간적 자각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깊고 높아진 정신세계는 당당한 기백과 수려한 기품으로 구현됐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획과 기술과 정성과 후원과 추진력이 없으면 쉽게 타협하고 쉽게 고갈된다.

 

 

<봄과 가을의 불국사는 어떤 맛일까? 나는 아직 그 기운을 느껴보지 못했다...ㅠㅠ>

 

 

고전과 낭만, 절제와 화려, 단순과 복잡이라는 비대칭의 조화와 양극단의 대립을 합리적으로 조율하고 이뤄낸 통일은 관념적 완결성을 추구했지만, 그로인해 고취된 의식과 충만해진 자신감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게 되었고, 분열을 포용한 통제력으로 일관된 체계와 과감한 도전을 가능케 했지만, 그렇게 넓혀진 평등성과 다양성은 보수적인 경주를 역으로 공격하게 만들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그렇게 완성되고 석가탑과 다보탑은 그렇게 정점을 찍었지만, 전제정치의 붕괴와 함께 통일신라 석탑 조성체계와 건축의지는 그렇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제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불국사에 대해 나는 충분히 말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