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삼층석탑 41> 700년대 후반 통일신라의 한계와 대안 (2)...1310
1) 700년대 후반 통일신라의 정치(사상)적 지형 변화
그렇게보면 700년대 중반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이 우리나라 예술사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시 석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당대 통일신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대안은 없었을까 한번 생각해보려 한다.^^ 물론 철저히 내 주관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면 ;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는 건 정답 혹은 진리가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역사란 보고자 하는 이가 주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음지에 핀 작은 꽃들을 찾아내든, 굵은 줄기들이 얽힌 기세를 읽든, 혹은 빛과 색을 담은 풍광을 보든 말이다...>
<그럼에도 저 숲속에서 찾고자 하는 게 무언지 불분명하다면 길을 잃게 되겠지...^^>
먼저 제정일치 사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통일신라에서 정치적 지형과 종교적 판도의 변화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제정일치의 시스템까지 완전히 해체해야만 새로운 시대정신이 완성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불교와 왕실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는 그렇지 못했다.
이를 행불행의 문제로 접근할 수는 없으나, 800년대 중반부터 당나라에서는 막중한 폐불정책(당 무종)이 일어났음에도 통일신라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유럽의 종교개혁도 르네상스 이후 세력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유럽의 변방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오히려 800년대 이후 통일신라 불교는 교종중심의 불교문화에 선종 및 풍수지리설까지 수용하여 훨씬 광범위하고 대중적으로 침투하면서 유연하게 주도권을 유지하며 유교의 지식인들까지 포용하게 된다.
<장보고 선단은 분명히 통일신라의 중요한 돌파구 중 하나를 제시했다... 660년대 백제의 부흥을 위해 일본에서 지원한 군사의 규모가 2만7천명이었는데, 장보고 상단이 거느렸다는 1만의 군사의 군사와 중국의 동쪽 해안에 설치된 신라방의 규모는 어지간한 제후국의 규모를 넘어섰다고도 추정할 수 있다...>
두 번째 오늘날과 달리 권력과 재화가 특정 공간에 집중된 고대와 중세까지의 시대배경에서 수도(首都)는 지배계층의 형성에서부터 신화와 정체성까지 상징하게 마련인데, 통일신라에서 천도가 한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말은 경주에 집중된 권력/재력/무력과 이 세습 시스템이 한 번도 변화하기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400년대 초반 형성된 김씨 세습시스템(내물왕)과, 400년대 중반 완결된 경주 6촌의 6두품으로의 전환(자비왕), 그리고 이를 완성한 500년대초 골품제도(법흥왕)는 이미 600년 진평왕대부터 위기에 노출돼왔었다. 다행히 선덕여왕의 치세와 백제/고구려 정복전쟁으로 그 위기를 돌파했지만, 그 한계를 간파한 문무왕과 신문왕은 대구(달구벌)로의 천도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성덕왕대 상당한 투자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통일신라는 경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신라의 이런 폐쇄적 집중성은 일본이 약간의 시차를 두면서 오사카-나라-교토에 폭넓게 권력기반을 이동한 것과 다르고, 이탈리아처럼 로마-피렌체-밀라노-베네치아 공국으로 분산되어 경쟁적 대립체계 속에서 발전한 것과도 다르다. 통일신라에서는 경주와 경쟁할 만한 지역이 싹도 트지 못했고, 그나마 팔공산과 지리산일대는 종교적 거점만으로 유지됐을 뿐이다). 전쟁이후 급변하는 정치지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는 자신들의 보수성과 폐쇄성을 유지하면서 대구로 천도를 실행하지 못했다는 말은, 무열왕계든 내물왕계든 어느 그룹도 골품제와 6두품을 깨뜨리기 싫어했다는 말과 같다.
<하나의 풍경을 이루기 위해 한그루의 나무가 전체를 대변할 수도 있지만, 몇 개의 군집이 어우러져 전체를 버텨낼 수도 있다... 물론 맞고 틀림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복국가로 성장한 신라는 경주6촌이 변화한 6두품과 삼성이 단일화된 골품제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내적인 변화와 자신들이 원하지 않은 새로운 문물에 극도의 경계심에서 경주 이외의 지역을 모두 변방으로 취급했을 뿐이었다... 물론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성장의 동력이 되었지만, 한계에 다다르면서 그건 질곡이 되었고...>
세 번째, 정복국가 신라가 나아갈 길은 확대된 국토와 늘어난 백성들에 걸맞는 선진적인 정치제도의 도입과 경제구조의 전환이었을 것이고, 당대의 통일신라가 지향할 방향은 생산양식의 문제보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과의 통합(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세가지의 발전방향이 있었는데 ; 하나는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의 효율적 관리를 통한 생산력의 증대, 또하나는 한강과 예성강을 넘어선 대륙방향으로의 진출, 그리고 마지막 영산강/금강/예성강 유역 등을 통한 해양문화의 수렴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의 문물과 유교에 기초한 효율적인 중앙집권체계까지는 수립했지만 대륙과 해양문화의 이식에 통일신라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백제유민들은 여전히 2등 국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호남지방과 한강 이북지방의 해양세력은 완전히 방치된 결과, 통일신라는 결국 이들 세력의 성장에 의해 몰락하고 만다.
<그렇지만 신라의 변방이면서, 600년대 삼국의 교전으로 수시로 주인이 바뀌며 가장 불안정한 처지에 놓였었던 영산강 일대와 예성강 일대는, 통일신라의 문화적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오랜 질곡에서 깨어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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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친당문물에 기댄 전제정치파나 이를 반대한 내물왕계나 통일신라가 한번쯤 넘었어야할 필승의 과제는 풀지 못했다. 모든 진행은 문제의 봉합과 타협이었고, 그 주도권은 여전히 골품제와 6두품의 세례에 편승한 통일신라의 지배층에 있었기 때문에 얼굴만 바뀌었을 뿐 근본적 변화가 잉태된 것은 아니었다.
통일신라의 이 선택은 많은 지식인들이 통일신라나 왕실을 떠나는 계기가 되면서 직간접적인 신라 멸망의 원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그후로도 300여년간 한반도 정치경제문화지형을 결정하게 되는데 고려시대까지 폐불 정책은 없었고(근본적인 자기반성과 개혁이 부족했던만큼, 조선의 억불정책은 극단적이었다), 대륙으로의 진출 기상도 봉쇄(궁예 정도가 급진적이었지만, 서경천도 등 고려시대에도 지속된다)됐으며, 해양으로의 진출(장보고에 이어 왕건으로 이어지지만, 군사력보다 무역으로 축소된다)도 무위에 그치고, 무속적이며 변형된 제정일치 문화를 보다 인간적인 정치체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유교세력이 전면에 부상하는데 상당한 기간을 요하게 만들었다.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한번의 선택이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일관된 지속성을 유지하면, 그것도 하나의 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또한 800년대말 견당사까지 폐지한 일본이 장원경제에 입각한 지방 분권적 봉건제로 이행하고, 900년대초 불교를 비판하며 유교적 체계를 공고히 하면서 다양한 지역문화가 합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중국이 갖춰가는 동안(당→오대십국→송→요/금→원→명)에도 한반도에서만은 1300년대 말까지 불교를 앞세운 중앙집권적 동원체제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한마디로 경주와 불교를 포기하지 않은 지배층의 유연한 통치전략이 통했다
(고기 맛을 아는 이가 좋은 고기를 찾듯, 권력의 맛을 아는 이들이 권력을 추종하는 것일까? 1100년대에 이 세력은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는데,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문인으로 알려졌지만 묘청의 난을 진두지휘한 권력의 실세로 무열왕계 후손(공교롭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도 경주 김씨다)다. 그리고 그 토양에서 성장해 불교 대신 유학으로 옷을 바꿔 입고 1800년대 안동 등을 중심으로 세도정치를 이끈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다른 조건에서도 비슷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뿌리를 잃지 않아서겠지?...>
그나마 몇 가지 유의미한 변화가 발생했다면, 선덕왕에 의해 효소왕 이후 처음으로 한강을 넘어 예성강 이북까지 진출하여 고구려 멸망 이후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황해도 지방까지 통일신라의 정치와 문화가 파급되었다는 점과, 전북 익산지역으로의 천도가 중단된 이후 충청도 중심의 백제문화 무게중심이 농경과 해양문물에 기반해 경제력을 축적한 호남지방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기억될 만하다.
이는 금강산 일대의 통일신라말 유적과 지리산 일대와 서산지방, 그리고 개성 일대의 9산선문 중심지와 직결되는 것으로 통일신라의 마지막 활력소가 되었지만, 600년대까지 유일하게 경주에 입성한 세력가가 김유신에 불과했듯, 800년대 평민출신으로 경주에 입성한 장보고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통일신라는 새로운 변화의 동력을 스스로 재생해내면서 내부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드러낸다.
<스스로 잎을 버리고, 스스로 싹을 띄우고... 하나의 선택이 다음을 준비하면서 나이테가 두터워지고, 줄기는 높아지고, 뿌리는 깊어지고...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모았던 나무 사진들이 생각나 함께 올린다...>
또한 당나라나 일본, 그리고 발해라는 대외 여건이 질적으로 변화하면서 더 이상 외부세력에 대항하면서 내부 결속력을 공고화시킬 정체성의 문제나 호국불교의 성격이 약화되고, 미륵정토와 극락정토를 대체한 화엄사상(비로자나불)과 약사정토 신앙이 대세를 장악하게 되고, 현실을 벗어나 관념화/권력화된 교단을 통해 기복적 경향의 밀교적 속성이 강조되면서 사치와 권위의 방편으로 전락하는 불교의 반성을 촉구한 선종은 선종대로 시대와 타협하면서 경주를 벗어나 자체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80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법상종의 미륵신앙이 득세한다).
결국 800년대 선종과 풍수도참설이란 선진사상의 유입으로 불교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면서 통일신라 해체가 도모된 것이 아니라, 친당에 근거한 왕권파의 전제정치 해체가 선종과 풍수도참설을 유행시켰다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평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를 열었던 선종9산은 역시 낙동강을 넘지 않고, 소백산맥 언저리에 자리를 잡는다... 그 토양은 장보고의 해양문물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영산강과 예성강 일대... 고구려-백제-신라의 접경지이면서 변방이었고, 통일신라의 문물이 가장 늦게 전파된 곳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