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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추석스케치...정림사탑/왕궁리탑...0910

 

 

 

1.


이제 며칠 후면 모델을 오픈한다.

꽤 긴 시간, 이번 프로젝트에 묶여 있다.

끝 모를 터널 속에서 어둠을 헤매듯,

해보자는 오기 외엔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이겨내지 못하는 무거움에 몸도 맘도 묶인 시간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지금의 상황을 대변한다.

잣대와 원칙과 기댈 언덕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황무지...

허허벌판 같은 사막속에서 방향도 없이, 실마리도 찾지 못한체 여전히 두리번거리는 마음...

마지막 순간까지 놓을 수 없는 마음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하겠다고 맘 먹은 이상, 해야만 한다는 지상명령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아는 순간,

이젠 기다리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짧은 연휴...

한가위 명절이란 이름이 그래도 며칠의 여유를 보장해 준다.

이 시간, 뭔가를 충전하고 비우고 채우지 않으면

일에 짓눌리고, 시간에 쫓기고, 부담감에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아

혼자의 시간을 계획했다.

 

<한가위 추석달... 하루전...>

 

간만에 탑도 보고, 하늘도 보고, 달도 보리라...

그렇게 자극을 만들고, 여유를 만들고, 맘을 풀어놓고 싶다.




2.


그래도 하루는 가족과 함께...

집 근처 <타임 스퀘어>라는 곳에 가기로 했다.

틀어진 색시의 마음을 쓰다듬지 못해 첫 시작을 난감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결합...

인근의 복합공간과 건축을 이야기삼아 아이들과 거닐었다.

 

 

 

 

도쿄의 오다이바 - 일산의 라페스타와 웨스틴 돔 이후,

한국적 완성태를 보는 거 같다.

상권이 이루어질까? 오피스와 오피스텔은 채워질까?

우려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에 쏟아진 인파는 내 기우를 묵살시키기에 충분하다.

 

 


<타임스퀘어... 가로형 배치에 시원한 중정구조... 이 공간이 각각으로 분절된 메스들을 매개하고 통합하고 있다>

 

 

신세계까지 네 개의 분절된 공간을 옥상공원이 통합하고,

가로형 상업공간이 매개/점이 공간을 만들었다.

괜찮네... 컨셉도, 마감도, 세심한 배려도...

상업과 사무와 쇼핑과 주거와 여가가 어울어질 수 있는 복합공간...

도쿄의 롯뽄기힐스를 한국적으로 풀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세계쪽에서 바라본 타임스케워... 분절과 변화와 통합... 괜찮은 공간이다...>

 

 

멀리 북악산도 보이고, 한강도 보이고...

무엇보다 옥상위에 자리한 넉넉한 휴식공간이 있어 맘에 든다.

변화와 매개와 점이공간의 연속성...

일체화된 무엇보다는 분절된 공간을 통합한 가로형 중정구조가 답답하지 않아 좋다.

 

 

<타임스퀘어... 양양의 솔비치와 비슷한 중정구조... 곡선과 이를 가로지는 사선이 동선과 시선을 동시에 잡아준다...>



3.


내려가지 말라, 내려오지 말라는 통보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섰다.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개인 여백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앞섰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떠나야만 하는 이유는 휴식이 아니라, 비워진 이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냥 목적도 계획도 없이 거닐어야만 만들어질 거 같은 자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림사지는 문을 닫았다.

6시가 조금 너머, 열쇠가 채워지고 허허로운 적막만 남았다.

여기까지 와서???

담장을 넘는다. 묵직한 카메라 두 개를 어깨에 걸치고.

 

 

<정림사탑... 늦은 시간에 반사된 빛이 있어 평백제... 글씨가 보였다... 흐릇하게 잡혔지만, 역시 자태는 변함이 없다...>


 

스산한 바람도 없고,

투명한 하늘도 없다.

넉넉하게 보이지 않고, 답답함도 찾을 수 없고,

언제나 그렇듯 탑은 서있고, 시간만 변했을 뿐...

 

 

<기단부에 보이는 유리창 빛은 내부의 불빛이 아니라, 석양빛에 반사된 빛이다... 훨씬 붉었는데...^^>


 

하루의 차이만큼 채워지지 않은 달을 바라보며

탑을 음미한다.

내려다보는 정림사탑은 역시 어설프다.

올려다보고, 눌리워 보고,

정림사탑은 역시 올려다봐야 그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정림사탑에서 한가위 추석달을 바라본 건 처음인 듯... 많이 생각했다...^^>


 

가벼울 수 없고, 거들먹거림도 없고, 쪼잔하지 않고, 무겁지도 않은...

흐트러짐은 거리의 문제고, 부족함은 주변의 문제...

최상의 비례와 완전하지 않은 완성을 찾을 거리에 서서 달과 하나가 된다.


지평선으로 숨어버린 태양이 남긴 붉은 빛과

이제 떠오르는 빛나지 않은 달의 조심스러움이 그렇게 어우러졌다.

조금씩 깊어지는 하늘과, 조금씩 드러나는 별들과, 조금씩 가벼워지는 마음...

 

 

<투명한 하늘에 옅은 구름이 만든 달무리... 참 분위기 좋았는데...>


 

태양은 모든 걸 가리지만 달을 숨길 수 없고,

달은 크지만 별 빛을 가릴 수 없다.

색과 빛과 크기가 어우러져 하늘을 수놓고, 마음을 채운다.

무엇을 소원하고,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까?

정림사탑에 그려진 달빛으로 충분한 것을...

 

 

<정읍사 /  달아 높히곰 돋으샤? ^^ 구름이 참 예뻤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었던 거 같고...>



4.


늦은 시간에 들어왔다.

담배를 많이 피워선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고.

차례를 지내고, 성묫길에 나섰다.

눈부신 가을빛이 못내 따갑게 느껴지는 묘역...

역광에 반사되는 녹색의 빛 속에 잔잔한 마음들을 바라본다.

 

 

<담양 공원묘지... 빛이 참 눈부셨는데...>


 

명옥헌이라도 둘러보지요?

부모님을 모시고 귀가길을 틀었다.

하나도 남지 않은 배롱나무 꽃,

아쉬웠던 건 명옥헌의 그 작은 못에 투명한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

 

 

<명옥헌 연못... 물이 아쉬웠다... 얕지만 투명하고 깊은 색을 바랬는데...>


 

가물었겠지?

스스로 정화하고 명징한 하늘을 담아내기에 명옥헌의 물은 너무 탁했다.

소슬바람이라도 불어 마음을 녹였으면 좋으련만,

굵은 옹이와 벗겨진 껍질에 드러난 수백년 수명의 배롱나무들은 반짝이지 않았다.

 

 

<명옥헌 배롱나무... 꽃 없는 나무만 보시고도 어머니는 참 아름답다 하셨는데...>



5.


막힐 걸 뻔히 알면서도 나서야만 하는 귀경길...

역시 그냥 돌아가기엔 채워진 것도 없고, 비워진 것도 없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곳...

텅 빈 길을 내달려 왕궁리로 간다.

 

 

<왕궁리탑...>


 

고선사 탑이 느껴지지?

정림사탑과 갈수록 비슷하게 느껴지는 왕궁리탑에서

오늘은 확실히 감은사탑을 느낄 수 있었다.

두 탑에서는 찾을 수 없는 붉은 황토빛 벌판에 솟아오른 왕궁리탑...

정림사탑과 감은사탑을 잇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두 탑이 갖지 못한 색과 단아함을 가졌다.


단아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크고,

웅혼하다고 말하기엔 조금은 가볍고...

왕궁리탑을 어설프고 위태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낮고 약한 기단부만 보기 때문이고,

가벼우면서도 경쾌하지 못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꽉 짜인 몸체와 넓은 지붕돌 때문이다.

 

 

 

 

가깝고 멀어짐... 거리의 변화에서도 미감이 변하지 않은 건 안정감 때문이고,

두터워진 몸돌과 여전히 얇은 지붕돌 판석은 무거움과 가벼움에 치우침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비껴나 있었겠지.

백제와 신라와 고려를 비껴나고, 보물인지 국보인지 논란을 만들어야 했고...

 

 

 

 

 

한 시대의 완성으로 보이기엔 충분히 장엄하지 못하고,

한 시대의 시작으로 만들기엔 충분히 역동적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왕궁리탑이 허튼 실험이나 조잡한 모방이라 말하지 말라.

그 정중동의 그윽한 향기가 당신의 마음에 새겨지기 전까지...

 

 

<발굴현장이 이어선지 오히려 황토흙들이 붉게 드러났다... 흙색과 탑색이 햇빛에 잘 어울려서 더 좋았던듯...>

 

 

붉은 황토흙에 당당히 솟아올라,

너른 대지를 조용히 지켜가며,

하늘을 기대며 떠받치는 그 육중함은 조금도 틈이 없으니...

천하를 호령할 장중함은 무게로 대신하고,

마음을 베어낼 날카로움은 부드럽게 갈무리했으나,

다만, 뜻한바 깃발을 꼽지 못함은 마음을 탓해야지, 시대로 변명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 충분히 크고, 충분히 장엄하지?  이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한참 기다렸다...^^>


 

오늘서야 정림사탑과 감은사탑이 미쳐 말하지 못한 정중동의 절제를

왕궁리탑의 의연한 자태에서 찾아본다.

조심스럽고, 내세우지 않으며, 채워질 수 없는 여백을 바라본다.

그곳의 석양은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붉지 않은가...

 

 

<익산에서의 석양...>



6.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노곤함이 밀려오고,

충분치 못한 준비들이 짜증스럽더라도 차분히 기다려야 할 듯 싶다.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분절된 이미지들이 어지러운 것도 숨길 수 없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여전히 맘을 무겁게 만든다.


일정의 틈을 만들어내고,

한 발 물러선 은근함으로 채울 수 없는 한계를 보완해야겠다.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드는 건 너무 가벼운 거고,

마구 쏟아지는 욕심들에 휘둘리는 건 너무 얇은 때문이고,

불확실한 미래를 꿈으로 대체하는 건 너무 어설프다.


다시 한번 복기를 하며,

다시 한번 준비하며,

다시 한번 틈을 벌려놓고,

방향을, 생각을 열어 놓아야겠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중(中),

그리고 여유...

충분히 즐기되, 충분히 관조할 수 있는 느긋함...

그런 정중동의 절제가 필요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