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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문학의 옹호

 

인문학의 옹호    동국대학교 [동국] 34집. 1995년/봄

 

"세 가지 오해로 인하여 사람들은 최근 몇 세기에 걸쳐 과학을 촉진시켜왔다. 첫째, 사람들이 과학과 함께, 또 과학에 의해, 신(神)의 선의(善意)와 지혜를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대한 영국인들(뉴턴과 같은)의 마음 속의 주요 동인(動因). 둘째, 사람들은 인식의 절대적인 유익함을, 더욱이 도덕과 지식과 행복의 심오한 결합을 믿었기 때문에- 위대한 프랑스인들 (볼테르와 같은)의 마음 속의 주요 동인. 셋째, 사람들은 과학에 의해 무엇인가 공평한 것, 무해한 것, 자기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것, 진실로 사기(邪氣)없는 것, 거기에 인간의 사악한 충동이 전혀 관계되어 있지 않은 듯한 것을 손에 넣고, 그것을 사랑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인식자로서의 자기를 신적으로 감지한 스피노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주요 동인.- 이와 같은 세 가지 오해로 인하여![Friedrich Nietzsche, {Die frhliche Wissenschaft (1882)},  37.]"

 

    1. 과학, 그 문명과 야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인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이 존경을 무기로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누구일까? 이 시대의 정신과 의식을 강제로 이렇게 저렇게 몰고 가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부르주아라는 시민계급이다. 그러면 이 부르주아들 가운데 최고위 집단, 다시 말해서 가히 '현대의 귀족'이라고 부를 만한 집단은 누구일까? 이에 대한 대답도 간단하다.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전문가 집단일 것이다. 엔지니어 (기술자), 의사, 고급관료, 변호사, 교수, 고급 예술가 등이 그들이다. 그러면 이들 전문가 집단 내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직업집단은 누구일까? 물으나 마나 그것은 과학자, 기술자일 것이다. 과학자, 기술자가 학문과 인간의 본래적인 목표를 어디로 끌고 가든, 아무도 그 권위에 저항할 권리가 없다.

 

바야흐로 과학.기술이 모든 인간적인 가치의 척도인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너희들은 대지를 지배하라"는 프란시스 베이콘의 정언명언이 있은 이래로 과학(이 글의 성격상 그냥 '과학'이라 하면 자연과학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은 야만을 문명으로, 귀족과 평민을 통일된 하나의 '계급 대중(大衆)'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는 대중만이 있는 '과학문명사회'에 성인이나, 철인, 혹은 소박하게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짐작해 보건데 대중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점(과학적 지식의 대중화 실용화를 주장했던 저 베이콘의 프로젝트를 기억하라!)에서 보편성의 원리, 정의의 원리는 지키고 있지만, 과학의 배타적인 본성상 그것은 '무식한 대중'만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철학박사가 암 유전자라든가, 쇠붙이의 소성가공, 혹은 전자계산 분야의 C 언어를 알까? 한마디로 무식하다. 그러나 박사님을 무식하다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유식한가? 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다. 과학은 모든 분야에서 '유식한 무식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과학은 왜 이런 '무식한 대중'을 선호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학의 발전과 진보, 나아가서 인류의 장래에 좋기 때문이며, 과학의 구조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포퍼의 [지식론]이 이야기 하듯이 "근대 자연과학의 그 엄청난 성취는 그저 단순한 모험적인 도박[K. R. Popper, {Logik der Forschung}, Tbingen 1971]"이 아니다. 아주 치밀한 계획 아래 수행된 "유럽-백인-남자"들의 모던한 정신의 산물이다.

앞에서 근대과학이 배타적이라고 말했는데, 왜 그런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불가피하게 토마스 쿤을 들먹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정상과학'과 '비정상과학'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쿤은 과학이론의 발전을 설명하면서 과학을 '정상과학'과 '비정상과학'으로 구분했다. 한 이론이 모든 사물의 현상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으면, 즉 설명되었다고 인정되면 그것은 '정상과학'이 되고, 개별 사물의 현상은 이미 이론으로 정착된 '정상과학'에 근거할 때 의미를 갖게된다. 그러나 만약 정상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어떤 현상이 나타났다고 가정하면, 이러한 현상은 처음에는 환상으로 치부되고, 좀더 진지한 연구를 하게되면 '정상과학'의 영역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환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상과학'에 편입되지도 않을 경우, 하나의 새로운 이론이 고안된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한 이론을 기존 이론에 대비하여 '비정상과학'이라 부른다. 새로운 이론이 기존의 이론을 대치하게 될 때, 예를 들어 뉴우턴의 고전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현대물리학으로 대치되었을 때, 혹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이 톨레미의 천문학을 대치했을 때, 과학은 하나의 '혁명'을 일으킨다. 쿤에 의하면 정상과학과 비정상과학은 서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이론의 변천은 항상 '혁명적'이다[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197o].

 

과학적 지식은 금세기에 와서는 더 이상 철학적.인문학적으로 검증받을 필요도 없이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인문학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좇아가는 사태에 이르렀다. 과학적 지식 자체도 이제는 확실하고, 궁극적인 지식이 아니라, 탐구과정의 중간결과 정도로 이해될 뿐,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과학의 엄청난 성과와 그 사회적 위상의 제고(提高)는 또한 인문학 역시 이러한 이상를 추구하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문학은 오로지 대학 내에서만 그나마 과학으로 행세할 수 있고, 그 지위를 누릴 뿐, 바깥에 나가면 아무 것도 아닌, 심지어는 우스갯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실제로 어디가서 전공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윤리'나 '철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웃는 사람의 교양없음이나, 경솔함을 나무라기 전에 인문학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문학이 자연과학적 기준을 좇아가는데에서 생기는 병폐가 아닐까 싶다.

 

앞의 토마스 쿤의 얘기를 좀 더 해야겠다. 쿤에 의하면 혁명이 아니고는 과학의 패러다임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 말 속에 이미 근대과학의 배타적인 본질이 숨어 있다. 정상과학의 잣대로 재어보고, 정상과학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근대과학의 배타성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인문학에 있어서는 쿤이 말하는 '정상과학'이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쿤의 말대로라면 철학이나 문학비평은 전부 '사기'이거나 주술(呪術)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나 문학비평가에게 그런 소리를 해보라, 그러면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소위 전문가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유식한 무식꾼'이 많다.

 

그리하여 근대과학이 계급을 해방했고, 해방된 계급은 부르주아 대중이 되었고, 대중은 전문가 집단을 낳았고, 전문가 집단은 다시 과학자.기술자들에 지배되고 있다. 그러면 이들 과학자.기술자들을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쿤이 말하는 '정상과학', 그 이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결국 과학에서 시작하여 과학에서 끝난다. 무식이 유식으로 되거나, 야만이 문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문명'은 동의어가 아니다. 근대의 합리성 개념, 과학적 지식의 보편성에 대한 장황한 비판을 늘어 놓을 게 아니라, 노자(老子)의 말을 빌어 일축해 버리자:

 

"(통치자)가 성스럽고 지혜로운 체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는 차라리 백 배나 이로울 것이요, 어질다거나 의롭다는 윤리덕목을 세우지 아니하면, 백성은 절로 효도하고 자애로와 질 것이다. 교묘한 기술로 이해를 추구하고,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주지 아니하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성지(聖智)와 인의(仁義)와 교리(巧利), 이 세 가지는 설령 문명은 될지언정 그것으로 족하지 않다. 문제는 마음의 소박함을 그대로 놓아두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다[老子, {道德經},   19,].

 

노자와 비슷하게 파괴와 부정을 통해 인간정신(아마도 니이체가 '인간정신'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인간의 교양과 인격도야를 향한 '에로스적 본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직하다)과 과학의 조화를 끌어내고자 했던 독일의 천재적인 사상가 니이체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화답하고 있다.

"인간은 원래 마음씨가 좋은 동물에 속한다지. (......) 그런데 인간은 지금 몹시 더디긴 하지만 굉장한 자기극복을 거친 뒤에, '불신하는 동물'이 되었다. -그렇다! 인간은 바야흐로 그 이전 어느 떄보다도 더 사악하게 되었다. (.....) 어떻게 해서 인간이 지금은 이 정도까지 불신적(不信的)이 되었는가? - 왜냐하면 인간은 지금 과학을 소유하고 있고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Friedrich Nietzsche, {Die frh- liche Wissenschaft(1882)},  33.]"

     

    2. 인문학의 옹호

한 때 아리스토텔레스적 지식과 형식논리학이, 또 어떤 때는 베이컨과 더불어 귀납적 지식, 나아가서 자연지배에의 과학이 당대 교양의 첫번째 목록에 올려지던 때가 있었다. 계몽은 '이성'의 촛불을 밝혀, 이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었고, 계몽된 세계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도, 두려울 것도, 의심스러운 것도 없었다. 좀더 가까이는 맑스와 그 후계자들을 자처하는 이 세상의 모든 혁명적 정신의 소유자들은 맑스주의를 과학 일반을 대신하는 '창조과학'으로 받들던 시대도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다행이다. 더욱 심각하게 우리 정신을 훼손하는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저질러지고 있는 저 '그노시스적(Gnosistisch)인 낭만'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나는 '자본주의 경제학' 다양한 유형의 신비주의 철학 (예를 들면 가장 실증적이라고 생각하는 등의 철학) 그리고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들고 싶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원시적인 종교, 미신, 샤머니즘, 주술, 정령숭배에 묶여 있다가, 세계종교의 지배 속에서 인간적인 안락과 평화를 누려 왔다. 그리고 과학적 세계관이 종교를 대신해서 인간에게 행복과 미래세계에의 희망을 품고 살았다. 한 때 이데올로기로 도피하기도 하였다. 이 이데올로기는 과학과 기술, 자본주의 경제의 합작품이다. 이제 인류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돈의 논리, 경제의 논리에 매몰되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여서 사람들은 '위기'를 말하고, 생태와 환경을 걱정하는가? 그것은 매우 긍정적인 징후이며, 참으로 인간적인 반성의 결과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런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여전히 미래세계를 책임지는 담지자라는 것이다. 이런 걱정과 위기의식은 인간의 '책임'과 '자율'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과 생태계의 질서를 책임지는 세계관이 요청된다'. 인류는 자연을 변형시키고, 인류의 목적에 활용하는 유일한 종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자연환경과 다른 생물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는 행위속에는 경제를 제어하는 책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과학이 그 책임을 자임하고 있는가?

 

경제를 제어하는 활동은 정치투쟁과 연계되어야 한다. 심각하게 환경을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상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펴고, 핵발전소 건립이나, 핵폐기물 저장소 건립에 반대하는 일, 나아가서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을 합리화하여 농삿꾼들이 화학약품을 사용하지 않고도 농업생산물을 팔고 그 수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장하는 일 등은 이미 경제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이다. 경제나 정치와 같은 사회과학이 책임을 느끼고 있는가?

 

이처럼 과학이 원인을 제공한 위기에 대하여 과학이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인문학은 철학이 그랫듯이 이런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책임을 자처하고 나선다. 왜 그런가?인문학은 인격도야와 교양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런 한에 있어서 반성적인 사유를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과학(Wissenschaft)인 한, 그 역시 앎(Wissen)의 문제에 간여한다. 그러나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문학에서의 앎이란 "반성을 통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앎이다. 인문학이라는 말은 인간교양(cultura animi)을 지칭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음직 하다. 교양은 바로 인격적 가치이다. 그러므로 교양을 위해 우리는 한번 전체성, 순수성, 자유와 숭고성에 빠져들지 않으면 안된다. 교양은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에토스(ethos)이다. 플라톤은 이를 에로스(eros)라는 여신을 등장시켜 설명하고 있다[Platon, {Sympo-sion}, 2o6 a-211, 그리고 23o a].

 

사람들은 말하기를 현대는 영웅도 없고, 철학자도 없고, 존경할만한 선생님도 없는 시대라고 한다. 왜 그럴까? 성급하게 대답하자면 지식(과학적 지식 전부)이 인격을 도야하고, 지성의 계발이라는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습득한 사람일지라도 지성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묘한 이율배반을 본다, 우리 스스로가 '지식' 혹은 '학문'의 전수.학습.연구에서는 '수단적인 가치'로 여기면서도 (이렇게 된데에는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의 역할이 지대하다) 그 평가에 있어서는 '모던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름지기 교양은 오래되고 숭고한 것에 대한 호기심, 소크라테스의 말로 하면 '무지의 지(知)'로부터 추구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본질적인 지식' 인 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자연과학적, 기술과학적 지식의 목표와 그 적용이 아무리 정교해졌다 하더라도, 어떤 수정이나 변용도 허용하지 않는 인간의 긍지의 표현이다. 인문학의 출발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본질이 그러하기에, 모든학문 영역이 응용과 수량화, 화폐화 되어가는 오늘날의 학문의 위기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때, 확실히 인문학은 '냄새나는 구닥다리 학문'이라는 폄하를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더우기 후기 산업사회에서 '지식'의 기능과 역할이 크게 바뀌었다. 즉 교양 일반에서 단순한 '정보'로 되었다. 지식의 본질이 크게 변했다[Jean-Francois Lyotard, {La Condition Postmoderne}]. 교화적 계몽적 정치-사회적 중요성에 따라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본(화폐)의 순환논리에 따라 교환되는 '도구적 가치'를 갖는다. 이것이 인문학이 처한 위기이다.

 

지식(적어도 인문학이 추구하는 교양적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이 "포괄적인 교화[리오따르]"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 지식의 정당성의 원리는 훼손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지식에 관한 한, 포스트모던한 현상이란 없다고. 얼핏보면 '교양적 지식'이 그 정당성을 획득하는 근거들이 과학.기술의 증가로 무너져 내리는 듯하고, 많은 성급한 학자들에 의해 그렇게 규정되어 왔지만, 자본주의가 아무리 팽창하고,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문학이 목표로 하는 저 '포괄적 교화'로서의 교양적 지식은 여전히 계몽적인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이런 경탄할만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이 지구와 대자연의 존속에 대한, 한마디로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성과 이성의 위대한 산물인 과학의 저 위대한 자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이성에 대해 광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지식이 (그것이 '교양'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한) 정신과 인격의 도야라는 내면성을 상실하고, 인간 바깥에 대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식은 정보의 교환이라는 교환가치만 지니고 소비되기 위해서만 생산되기 때문이다[Jean-Francois Lyotard, {La Condition Postmoderne}]. 지식은 이제 아무런 사용가치도 없다. 현대의 과학적 지식은 학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과학적 미덕이라고 한다. 그것이 과학이 갖고 있는 "보편적 편견"이다. 이런 편견이 상품으로서의 지식을 낳는다. 건전한 오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보편적 편견에 사로잡힌 자만이 알아 듣는다. 그러나 모든 과학(예를 들면 수학)은 플라톤에게서도 분명히 그러했듯이 궁극적인 지식, 보편적인 교양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인문학은 '자연 이탈적'이 아니라, '자연 친화적 학문'이다. 자연과학이라고 부르는 복합명사는 그러나 불행히도 자연을 멀리하는 과학으로 되었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유의 존재로 규정지워졌다고 믿는다면, 자유의 필연성은 자연으로부터,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연의 생명력'으로부터 온다. '교양적 지식'이 그러한 생명력으로부터 숨을 얻어 마실때, 저 과학의 목표(그것은 가능한 한 인간 아닌 것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가 달성되는 것이다.

     

    3. 프로젝트, 모더니즘

사람들은 오늘의 위기상황을 '과학과 기술진보의 불일치', '환경.생태계의 위기', 혹은 '지향점을 잃은 의식의 위기', 나아가서 '학문의 후기적 증세'라고 진단한다. 이런 위기의식은 이미 근세의 과학, 자연, 역사 개념과 그 실천적 적용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각하고 하는 말이다. 완전히 새로운 사고로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언어적-개념적 표현만으로는 결코 '현대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항상 낡은 사고구조와 낡은 개념을 가지고 문제의 해결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그것은 문제는 해소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도 근대 이후의 무수한 좌절한 시도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우선 우리 스스로가 과학, 자연,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해 보자. 개인들이 각각 어떤 일정한 '역사적 조망' 없이 무엇을 연구하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태가 상투적이고, 필연적인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전혀 독특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경우, 각자가 고유한 역사적 조망을 가질 때, 사태가 어떻게 진척되어 왔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조망이라는 말은 사태를 파악하고, 규정하고, 예측하는데 필요한 인간의 인식능력을 담아두는 그릇이다. 역사적 조망은 그러므로 인식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때 우리가 활용하는 사고방식은 분명 '근세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체로 말해 155o년에서 175o년 사이에 형성되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4-5oo년 전의 사고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현대'라고 번역되는 '모더니즘'은 19세기 중엽, 다시 말하면 보들레에르(Baudelaire)에서부터 시작되는 예술사조로서의 모더니즘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영어의 모더니티(Modernity), 즉 새시대를 의미하며, 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 생활방식은 또한 르네상스 이후 등장한 '시민'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아울러 근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런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표현양식은 금세기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식의 수정은 이제 불가피하다. 현실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역사적 조망의 수정'은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하버마스가 이미 한번 시도했듯이, 우리도 하버마스를 흉내내어 "프로젝트, 모더니즘"을 가지고 이러한 수정을 시작해 보기로 하자. 모더니즘 프로젝트는 현대의 수정인 동시에 현대의 완성이다.

 

근대는 역사의 한 시기에 우연하게 시작된 게 아니라, 많은 선지자들, 예언자들에 의해 시도되어 왔던 정신이 어떤 계기(그것을 르네상스라고 해도 놓고, 종교개혁이라해도 좋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하나의 특정한 사회운동이 계기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에 의해 구체화된 것이다. 근대적인 경험과 삶의 양식, 특히 근대적인 문제에 대한 언어적-개념적 표현은 파악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미 역사적으로 된 인간으로 이해할 경우, 현대의 조건에 문제가 있음을 경험하고, 그렇게 파악되면, 그것은 우리는 자신의 역사적 역사적 조망의 변화과정을 수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해결가능한 문제만 문제삼기 때문이다[Marx]."

     

    4. 인문학의 통합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인문학의 옹호를 위해 나는 세 가지 인문학 연구의 태도, 혹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직업, 혹은 전문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인문학, 둘째; 세계지(世界知)로서의 인문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순한 삶(인생)의 태도'로서의 인문학이 그것이다.

 

교양이 인생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 진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대상으로서의 교양.지식과 주체로서의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앎의 양식'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근세과학의 등장과 더불어 모든 과학적 지식의 체계는 인간과 분리되어 있는 무엇이라고 믿는 강력한 경향이 있어 왔으며, 이는 오늘의 과학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직업이나 전문지식의 습득을 위해 인문학을 한다함은 2o세기에 들어와서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다른 개별과학으로 된 것과 인문학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일정한 교과과정에 따라 공부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전문 분과, 직업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세계지로서의 인문학'은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관심갖는' 문제, 즉 현재의 '문제상황'과의 끊임없는 철학적 토론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인생의 태도로서의 인문학은 오늘날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추구되는 모든 '앎의 양식'과 가장 뚜렸하게 구분되는 학문함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들 각각을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4-1. 직업으로서의 인문학

'직업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문제부터 시작해 보자: 예를 들어 인문학의 한 학과인 '철학과'에서 배우고, 이를 통해 장래에 철학자라는 직업을(그렇다고 하여도 [운명철학관]은 아니고) 수행할 수 있도록 자질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을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근세 이후 학문의 분화로 철학이 과학화되고, 철학이 과학을 모방함으로써 하나의 학과로서 철학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금세기에 있어서 인문학 일반의 과학화는 인문학을 대상의 갖는 과학으로, 또 하나의 확실한 지식체계로 만들려고 했던 칸트의 이상이 실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과학이 무엇인가를 짧고 명쾌하게 규정해 보자: 과학은 그저 하나의 지식체계에 대한 탐구, 검증, 확대, 수정일 뿐, 과학을 통해 산출된 지식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왕 증명된 지식체계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반증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말이다. 개개의 과학자는 스스로를 보편적 지식체계를 소유한 학자로 생각하지 않고, 과학의 복합적인 구조에 기여하는 '연구자' 정도로 생각한다. 연구자의 과학적 기여라는 것도 당연히 역사적으로 변화가능한 기준에 기초하고 있으며, 불변의 보편적인 기준은 과학성이라는 기준이다. 과학성이란 언어적 규범과, 방법론적인 규범을 갖고 있다. 이것이 과학에 대한 현대의 해석이다.

    4-2. 세계지(世界知)로서의 인문학

'세계지(세계개념)로서의 인문학', 이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개별적인 삶 속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는 철학만이 갖는 고유한 문제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관심 갖는 문제는 타인과, 또 타민족과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문제와 기술조작, 문명의 몰락, 생태구조의 몰락의 문제이다. 이 모든 문제는 정치적, 사회적, 법적, 경제적, 기술적인 문제로서 개인의 결단에 의해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여기에 인문학에 요구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세계지로서의 인문학에서 인문학이 다루는 일은 '보편적 세계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인문학의 이런 과제는 그러면 어디에 근거해 있는가?

 

사람들은 통상 헤겔의 말을 빌어 이 물음에 대답하고자 할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헤겔은 "철학은 관념 속에서 파악한 그 시대"라고 말했다. 한 시대가 개념적으로 완성되는 절정에 이르렀다고 믿을 때만 우리는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다. 환경위기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에 의해 저질러진 현대사의 야만과, 스스로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며,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자끄 데리다가 적절히 비판하고 있듯이 이념 속에서 이 시대를 파악한 사람은 불가피하게 계시론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처음부터 인문학적 완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근본적인 변화가 필연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또한 개념적 작업도 요구한다. 현실의 부동성은 부분적으로 개념적 고착화에 의해 규정되기도 한다.

 

현실은 그러나 헤겔이 생각한 것처럼 세계정신의 구현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지난 세대의 사고와 연구를 통해서 개념적으로 굳어진다. 더욱 문제인 것은 .현.존.하.는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시.도.하.는 .수.단.이 .주.로 .변.화.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과 .동.일.한 .범.주.로.써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세계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인문학적 연구는 대안적 사고가능성과 행위가능성을 내 보임으로써(證示) 고착화된 개념을 풀어내는데 있다. 즉 현실을 개념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있다. 인문학적 연구는 그러므로 변화되어야 할 현실에 대한 개념적 연구이다.

 

여기서 세계지로서의 인문학이라는 테마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인간 자신에 대한 관계라는 테마로 된다. 여기서는 이 '관계'를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관계는 오늘날의 변화된 인간 조건, 즉 기술문명 속에서의 삶이 인문학의 고전적인 이상(고상한 인격과 교양을 갖추는 것)과는 다른 자아형성의 모델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4-3. 삶의 양식 혹은 인생의 태도로서의 인문학

인문학 연구의 세 번째 방법으로 '삶의 양식'혹은 '인생의 태도'로서의 인문학이다. 우리는 앞에서 지혜의 추구라는 인문학에 대한 순수한 개념규정을 보았다. 인문학을 직업적 활동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지 않는 인문학자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철학자의 모범으로 일컫는 소크라테스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이란 공허하고 쓸데없는 일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게되고, 그래서 인문학적 삶의 태도는 피나는 경쟁적 생존이나 경제적 사고와는 결코 조화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서양철학의 원조(元祖)로 불리는 소크라테스에게는 '지식의 추구'와 '지혜의 추구'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지식의 한 유형으로서 인문학을 과학과 구분하여, 이러한 지식과 지혜의 통일은 인문학만이 갖는 고유한 것이며, 특히 인문학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감안할 때,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지식과 지혜의 통일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누구든 나이에 걸맞게 성숙되게,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고자 한다. 지혜란 그래서 자명한 가치인 양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혜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노력한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물에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대한 지혜, 그리고 이를 '남에게 충고는 능력'으로서의 지혜를 이야기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문학의 이중적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남에게 충고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보다도 지식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한 개인의 인격적 성숙 정도는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국 과학자 개인이 도달한 지식의 정도와 그의 인간적인 성숙도와는 무관하다.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면서도 수준이하의 학자일 수 있으며, 거꾸로 학문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인간적으로는 미성숙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과학은 지식과 교양의 함양과 지혜의 추구, 양자의 결합이라는 주장은 인문학만의 독특한 주장이다. 지혜를 추구하는 전혀 다른 길이 있기 때문에, 인문학의 이런 주장은 매우 중요하다.

 

삶의 태도로서의 인문학은 지혜에로의 길이다. 거기서 지식은 개성을 변화시키고, 지식으로부터 행동할 수 있는 영적인 단계로 인도한다. 지혜를 추구하는 이런 노정에서 지혜의 지식과의 관계는 가르침이라는 외적 관계가 아니라, 자기계발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학문하기'란 필연적으로 훈련, 즉 정신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도달해야만 될 인격의 고양(高揚) 정도는 자족(自足, Autarkie), 부동심(不動心 Ataraxie) 혹은 자율(Autonomie)이라는 고전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말로 하면 지혜를 추구하여 인간성이 도달해야할 단계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여, 거리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보편적 지식이 분열하고 무너져 버린 오늘날 교양인은 스스로 학문 분야간의 상호연관성을 매개하고, 한 차원 높은 과학적 반성을 유도하는 '전문적인 보편주의자'임을 자처하고 나온다. 사회-정치적으로 보편적 정향점의 상실이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한 오늘, 인문학 연구자는 이제 도덕가로, 또 직업적으로 정향점의 위기 문제에 관여하는 사람임을 천명하고 나서야 한다. 인문학자의 이런 임무설정은 인문학 역시 사회적 리쏘오스(Resource)를 둘러싼 싸움에서 그 효용성을 주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 정향성을 바로 세우도록 돕는 일은 굳이 대학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양의 함양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5. 지식과 교양의 합일로서의 인문학

이상으로 우리는 인문학 연구의 세 가지 태도를 이야기 했다. 직업활동으로서의 인문학, 삶의 양식으로서의 인문학, 그리고 세계지로서의 인문학은 서로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이는 다소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기도 하다. 지혜의 작업은 직업적인 인문학적 자격, 경험, 특히 인문학적 지식에 의거한다. 직업으로서의 인문학 연구는 그러나 그 문제가 인문학 내에서의 담론, 즉 인문학의 커뮤니티 내에서의 입장이나 이론의 발전 이상으로 더욱 멀리까지 포괄하는 반면에, 세계지는 사회적 맥락에서 그 문제영역을 구한다.

 

직업활동으로서의 인문학은 교양적.인격적 삶을 영위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직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혜롭게 살지 않고도, 또는 적어도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도 어떤 사람은 탁월한 인문학자로 있을 수 있다. 거꾸로 교양적 삶을 영위하는 것 역시 직업적인 인문학 연구와 별개이다. 교양적인 삶을 사는데는 사실 어떤 인문학적 지식도, 직업적인 훈련도, 그리고 따로 특별한 연구도 필요하지 않다. 세계지를 얻은 지혜자의 "인문학하기" 중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는 일이다. 지혜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여 고통스러워 하는 반면, 그 시대의 문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보편적인 문제로 만든다.

 

그러나 교양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 지혜자로 있을 필요는 없다. 이 보편적인 시대적 고민을 함께 할 능력이 없으면 훌륭한 개인적인 자아완성에 도달하는 것이 지혜자가 되는 일 보다 차라리 쉬울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인문학자 대부분은 대체로 이런 생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인문학은 '체계화된 지식의 총체'로서의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인문학의 현실을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그 무수한 이론과 논증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으로 승인된 인문학적 지식이란 없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게 되고, 이것이 혹 인문학의 결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된다. 그러나 '체계화된 지식의 총체'라는 주장은 사실상 자연과학이든 인문학이든 터무니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학문 연구는 '창조적, 생산적'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며, 누군가가 학문할동을 '지식생산'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기능공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메모 : 천천히 읽어 볼 필요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