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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 心,想,和...

상현좌 불상1> 600년대 이전 상현좌 불상 - 상현좌란 무엇?... 170531




상현좌(裳懸座, 치마 상, 매달 현) 양식의 불상들...


창원 삼정자동 마애불을 보면서 상현좌 유형의 불상들을 생각해봤다.

상현좌는 긴 도포를 입은 불상이 앉아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늘어뜨려진 법의가

좌대를 덮고 있는 형상을 단순화 시키지 않거나 과장되게 표현한 양식으로,

치마가 매달려 있다는 직역보다,

법의가 치마처럼 (좌대를 덮고) 늘어뜨려진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인도불상이 중국화 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 오랜 기간 유행했었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이지만) 특히 상현좌가 절대적인 불상조형의 양식으로 고착됐던 시기는,

구마라습의 구역불교시대(400년대)부터, 삼장법사 현장의 신역불교 초기까지로,

우리 경우로는 자장율사로 완결되는 구역불교시대와 원효, 의상의 신역불교 초기까지니,

결국 우리나라에서 상현좌는 불교전래 초기부터 삼국이 통일되는 600년대 후반까지 유행하다가,

신역불교와 화엄종 등이 주도권을 잡는 800년대 이후부터 사라진다고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황복사터 삼층석탑 사리기로 출토된 아미타불좌상이라 생각된다.

황복사터 삼층석탑에서는 순금제 여래입상과 본 아미타불좌상 두기가 출토됐는데,

여래입상은 처음 석탑을 조성한 692, 본 아미타불좌상은 706년 중수하면서 봉안한 것으로,

두 불상은 700년 전후 통일신라 불상과 광배, 그리고 좌대 등 조성시기의 기준작이면서,

또한 최고 수준의 불상이라 할만하다.

이 중 아미타불 좌상을 통해 오늘 주제인 상현좌 형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주 구황동 황복사터 삼층석탑 출토 순금제 아미타불좌상/국보79/706/통일신라/높이12.2cm/중앙박물관...>

상현좌는 통일신라가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전성기를 맞이한 700년대까지 불상조형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석불좌상 뿐만 아니라 금속제나 마애불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또 하나 놓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대부분의 반가사유상이 상현좌란 사실이다.

600년대 전후 백제와 신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 영향으로 반가사유상이 널리 유포되었는데,

상반신의 노출여부에 관계없이 하반신을 법의로 길게 덮을 수밖에 없는 특성 때문인지,

반가사유상들의 상현좌는 일반 좌불상보다 훨씬 세련되고 다양한 주름으로 표현되었다.


 

 

<반가사유상/국보78, 83/600년 전후/백제/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을 상현좌 유형이라고 분류한다면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역으로 가장 아름답고 세련된 치마 주름을 표현한 불좌상들이 반가사유상이다...


 

 

<봉화 북지리 반가상/보물997/650년 전후/경북대박물관...>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인근에서 발굴된 이 반가상은, 하반신만의 높이로 1.6m가 넘어 불상이 온전했을 경우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정된 자세에 화려하고 세련된 옷주름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장엄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반가상들이 장엄되기에는 상현좌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 이제 우리나라에서 불상들 중 상현좌가 표현된 불좌상들을 모아본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한꺼번에 소개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

금동제 반가사유상을 제외한 석불들과 마애불을 중심으로 시대적으로 배치해 보았다.


 

 

<서울 뚝섬 출토 금동 불좌상/400년대/중앙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금동)불상으로,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중국제작설 등 기원이 다양하다. 상현좌는 516, 위진남북조시대(221~589. 조조의 위나라, 사마의의 서진에서부터 시작한다)부터 체계화, 신앙화 된 불교가 영향력을 키워나가던 중국불교 초기부터 유행했으며, 이 시기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백제의 좌불상들도 대부분 상현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남 평원 원오리 소조불보살상/500년 전후/고구려/중앙박물관... >

그러면 고구려는 어땠을까? 평남 원오리사지에서 출토된 소조불보살상들을 보면 상현좌 흔적이 있는데, 맨 왼쪽 좌상이 상현좌 양식이다. 500년대 전후 고구려의 불보살상이어서 그런지 앙련은 나타나지 않으며, 연판의 도형도 매우 단순하다.


 

 

<부여 군수리 납석제 불좌상/500년대 중반/백제/중앙박물관... >

우리나라 불상의 원형은 아무래도 백제에 있다고 생각된다. 부여에서 출토된 이 불좌상은 뚝섬출토 금동불좌상과 거의 같은 유형으로 사각좌대를 완전히 덮은 법의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상현좌는 불상조형 연원을 파악하는데 가장 오래된 古式(고식)의 기준이 된다...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보물794/525년경/백제...>

개인이 소유하거나 쉽게 운반 가능한 크기를 넘어, 기념비적으로 조각된 불상 중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또한 기념비적 스케일에 사방불 형식(끼워 넣은 팔이 모두 훼손돼, 명확한 교리적 명칭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공식명칭은 사방불이 아닌 사면불이다. 물론 나는 사방불로 본다...^^)을 감안하면, 공주에서 사비로 천도한 500년대 초반, 백제에서는 불교가 사상적으로 체계화(겸익의 율종 탄생) 되었고, 도교를 비롯한 전통신앙 체계보다 불교가 우위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석불이다. 독자적 양식으로 조형한 이 사방불을 보면, 불교에 대한 백제인의 이해도 및 자긍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예산 사면석불은 완성도까지 높은 매우 소중한 유산이라 생각된다...

 

 

남면의 본존불만 좌불상으로 상현좌이며, 연판이 새겨진 광배, 안정적인 구도와 균형 잡힌 사실적인 신체비례, 그리고 굵으면서도 유려한 곡선 등 백제불상의 모든 특징이 담겨 있다. 나중에 사진을 통해 비교되겠지만 환조의 두상, 고부조의 상체, 중부조의 하체까지, (통일)신라 (마애)불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잘 비교할 수 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 불상이 왜 국보로 지정되지 않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경주 남산 부처골 석불좌상/550년 경/신라...>

이 당시는 신라는 어땠을까? 신라 최초의 석불좌상으로, 감실부처라 불리는 부처골 석불좌상 역시 사각대좌에 상현좌다(석조불상에는 아직 원형이나 팔각원당형 대좌가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제작시기에서 600년 전후까지 내려가는 주장도 많지만 나는 500년대 중반이라는 최완수선생 의견에 동의하는 편인데, 경주 반월성 남쪽에 있는 남산의 동편, 기념비적 규모의 신라 불상으로서도 최초이며, 역시 경주 남산 최초의 불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 더, 감실부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라불상 조형의 첫 시작은 석굴이었다. 때문에 신라불상 조형의 완성도 석굴을 통해 정점에 이르게 된다...


 

 

<도교사면상/중국 서위/554/중앙박물관 특별전...>

그러면 당대의 중국, 수나라가 통일하기 이전 중국은 어땠을까? 한나라 멸망을 재촉한 삼국시대(//)를 이어 시작된 위진남북조시대 불교는 곧이어 중국에 토착화되지만, 150~200년이 지나 절정에 다다르면서 구역불교의 병폐가 나타나고, 50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수나라가 통일하기 이전부터 도교는 다시 불교의 대항세력으로 급부상하며 전면에 등장한다(중국의 국교는 유교나 불교가 아닌 도교다. 수나라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불상조형에서 뿐만 아니라, 도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 연상할 수 있는 ; 관모를 쓰고 긴 도포를 입고 학선의를 들었던 제갈공명 같은 모습을 대신해, 도교의 천존은 불교의 부처 같은 형상으로 조형되기 시작한다...

 

불교의 토착화를 위해 도교의 체계와 습합했는데, 이제는 도교가 다시 불교의 양식을 추종한다???... 역설적 아이러니?!! 아무튼 당대 도교의 원시천존을 조각할 때도 중국은 상현좌 양식을 애용했다...


 

 

<청원 비중리 일광삼존불상/580년 경...>

그렇게 상현좌 양식은 국내외를 할 것 없이 당시 보편적인 유행이었다... 그리고 500년대 중후반에 남은 유물 중, 금동으로 만든 일광삼존불상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 유형은 고구려와 백제를 중심으로 조형된다. 삼국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청원 비중리에는 금동불이 아닌 석불로 제작된 일광삼존불이 있는데, 이 불상의 제작주체는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제작설이 모두 존재한다. 나는 전체적인 느낌과 광배의 특성 등을 고려하여 백제 불상이라고 단정하는데(고구려는 마애불을 만든 적이 없다?!!), 좌상으로 조형된 본존불이 상현좌로 표현되어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국보84/580년 경/백제...>

백제의 미소로 불려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불상이다. 좌협시 미륵반가사유보살상도 역시 상현좌 유형이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45/600년 전후/백제...>

서산 마애불 이전까지 백제의 불상들은 예산 화전리, 태안을 포함해 모두 마애불(금동불, 소조불 등을 제외하면, 이때까지 석불입상, 석불좌상은 제작되지 않은 듯...)뿐이다. 그러면 그 이후에도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몇 기 되지 않지만 보화리 입상도 있고, 또 좌상도 있다(물론 백제의 양식과 전통은 700년대 초중반부터 통일신라에 의해 완전히 융합되지만, 최소 600년대 후반까지는 백제의 이름을 스스로 거론(연기파 불비상 등)할 정도로 직접적 영향을 남겼다)...

 

그중 후대 보강된 두상으로 인해 완성도가 떨어져 보일지 모르지만, 4m에 가까운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균형 잡힌 자태와 대담하면서도 유려한 곡선이 잘 살아있는 백제 석불좌상이 연동리불상(광배는 석불좌상 중 최대 규모라 생각된다)인데, 제단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석불좌상도 사각좌대까지 법의가 덮고 있는 상현좌로 표현되었다...


 

 

<익산 태봉사 삼존석불/600년 초반/백제...>

잘 알다시피 익산은 무왕이 천도를 고려했던 별궁이 위치한 지역으로 왕궁리 오층석탑, 연동리 석불좌상 등 백제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회칠이 두껍지만 광배와 사각대좌의 상현좌 등 백제의 불좌상들은 당대의 양식을 충실히 잘 표현하고 있다...


 

 

<법륭사 금당 석가삼존상/600년 전후/일본 나라/법륭사간 안내책자 스캔...>

그러면 이 당시 일본은 어땠을까? 쇼토쿠 태자가 집정하던 때의 일본을 아스카 시대(593~622) 아스카 문화라 구분하는데, 한반도의 직접적 전란에서 비켜나 있었던 일본에서 백제미술은 절정에 다다른다. 이 중 백제 불상의 최고 완성작이라 할 만한 것이 백제관음 등, 법륭사 불상들이다.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성된 법륭사에 남은 불상으로, 이 삼존상은 일본 飛鳥時代(비조시대)를 대표하는 국보이며, 백제인들이 남긴 가장 화려한 상현좌가 아닐까 싶어 골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