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 序 1. 한국적인
5) 무덤, 능, 묘 :
존재에 대한 기억과 볼 수 없는 세상과의 소통 ;
인간이 만든 최초의 문화, 최후의 문화
<고창 계산리 고인돌 ;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을 가진 거석문화권, 우리는 돌로 시작했다.>
* 인간의 공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의 공간으로, 산자들이 만든 죽음의 공간이다.
* 육체의 공간이면서 정신의 공간이며, 이승의 영역이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저승의 영역.
* 본능에서 탈각한 인류가 시간의 영속성과 세계관을 갖추고, 공공적 목적으로 집단적으로 만든 인류 최초의 건축은 죽음의 공간이다 ; 고인돌, 피라미드, 병마총, 적석총, 전방후원분 등
* 집중된 권력이 사회구성원 모두의 자본과 지혜를 담아, 산자들의 거주공간보다 더 크고 높게 만든, 멈춰 상실된 생명에 영원한 시간을 부여하는, 그 시대 그 사회의 기념비.
<산청 왕산 구형왕릉 ; 요동에서 한반도까지 뒤덮었던 고인돌 풍습이 장군총으로 귀결되고, 고구려와 백제의 적석총은 다시 낙동강 상류지역의 가야까지 북방문화의 영향은 이어진다. 신라는 이런 돌무지무덤 위로 흙을 덧씌운 무덤들을 만들고... 고구려의 벽화고분, 백제의 벽돌무덤도 결국 봉토분-토총 속의 구조일 뿐...>
* 특정지역 문명이나 민족이 만든 묘와 성당의 크기는 현재에도 그 규모를 벗어나지 않는다.
* 무덤과 성당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죽은 자들이 묻힌 무덤을 살아있는 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빛과 소통의 문과 기능별 방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바로 성전과 성당이 되기 때문.
* 무덤과 묘는 문명의 시발점이며, 한계와 가능성을 내포한, 가장 느리게 변하는 문화 DNA
<경주 괘릉리 원성왕릉 ; 피장자와 부장품(껴묻거리)에 집중하던 무덤의 정점에 고구려의 벽화고분과 백제의 무령왕릉, 신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있다면, 호석을 두르기 시작한 신라는 김유신묘(경덕왕릉 추정)와 원성왕릉에서 외적 완성태를 만든다. 토총 - 봉토분의 구조적 보강이 의장으로 정형화되면서 십이지신상까지 접목되고...>
* 우리나라는 원시부터 조선까지 각 시대별 지배층의 능과 묘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한다. 고인돌의 양식과 물량, 고구려와 백제, 가야의 적석총, 나주 전방후원분, 신라의 돌무지 덧널무덤, 백제 무령왕의 벽돌무덤, 통일신라이후 봉토분 호석(십이지신), 고려시대 언덕 위로 올라간 능침공간, 조선의 제향공간 등 시대별 특징이 살아있다.
* 규모를 생각하면 당대에 동원할 노동력이 크지 않았다(중국, 일본과 비교, 고구려/발해를 제외). 또 규모 및 부장품도 통일신라를 기점으로 전후 차이가 크다. 중앙집권화와 종교가 국가화 되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시점에, 능묘에 대한 가치관도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구리 동구릉 목릉 ; 최근 매장에서 화장으로 장례풍습이 다시 변화되기 전까지 조선왕실의 능묘제도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변화의 완결판이었다(고인돌→장군총→대릉원→원성왕릉→고려왕릉→건원릉). 고려시대부터 언덕위로 올라간 능침공간의 기물들(혼유석, 곡장, 장명등, 망주석, 망료위 등)이 정돈되고, 언덕 아래에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재실 등)이 정립된다.>
* 우리나라는 산자와 죽은자의 관계에서 서양과 완전히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나폴레옹 묘지인 앵발리드 같은 공간도 없고, 판테온 같은 신전도 없으며, 두 개가 합쳐진 성베드로 성당은 불교의 대웅전이나 유교의 대성전과 완전히 다르다.
도깨비와 저승사자, 귀신은 있어도 분리된 혼(魂), 백(魄)이 다시 합쳐질 수 있는 부활이 없고, 좀비도 없으며, 영생불사도 진시황 이후 맥이 끊겼다. 과학적, 합리적, 현실적이라 평가해야할지 모르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삶과 죽음은 공존하지 않고 공간구성도 교류와 소통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과 삶의 공간은 점점 멀어지고 철저히 분리되어 묘자리는 높고 먼 산위의 음택(陰宅)지를 찾았고, 산자들에게 남은 것은 제사뿐이었다.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제사풍습이다.
<현재의 묘는 규모만 다를뿐, 이전 모든 양식들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담양 천주교 공원묘지 :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는 장례문화는 시대를 반영한 결과인지, 변화될 시대의 출발점인지 모르겠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어쩌면 우리시대의 무덤과 묘는 급격한 변화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고인돌 ; 고창, 화순, 강화 (지석묘) | 기원전11세기 ~ 기원전3세기, 선사시대, 4만여기, 제단/무덤 고인돌, 탁자식/바둑판식/구덩식 고인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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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고구려 적석총) |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 용산, 4세기후반 ~ 5세기 광개토왕릉비, 집안 칠성산 고분군/환도산성 아래 무덤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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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방이동 고분군 (백제적석총) | 위례성에서 웅진(공주) 천도전(4세기후반 ~ 475년 이전) | ||||
고구려 봉토분 (토총 + 고분벽화) |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 이후 (427년~7세기초) 봉토분 고분벽화 : 호남리, 덕화리, 쌍영총, 안악1,2,3호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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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개봉고분 (토총) | 5세기, 도시를 바라보는 | 가야 | |||
경주 대릉원 일원 (토총)(노동동, 황남동) | 돌무지 덧널무덤, 4세기~6세기초, 노서동/황오동/인왕동 금령총,황남대총,천마총,미추왕릉,검총, 금관총,호우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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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 고분군 (전방후원분 등) | 3세기 ~ 7세기, 자미산일대 | 백제 | |||
공주 무령왕릉 (토총+전축분) | 국보154호등 | 529년 | 벽돌무덤, 무령왕릉 지석(523년), 금제관식, 발받침, 거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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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왕산 구형왕릉 (적석총) | 532년 | 가락국 양왕,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적석총(타원형) | |||
경주 낭산 선덕왕릉 (봉토분) | 647년 | 원형봉토분, 자연석 둘레돌, 신라 | |||
경주 김유신묘 | 673년, 경덕왕릉(765년)설과 100년후 개수설 호석구조(면석과 탱석)와 난간석, 탱석에 십이지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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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괘릉리 원성왕릉 | 보물1427호 | 798년 | 수면에 안장(괘릉), 석상 및 석주 | ||
구리 동구릉 태조건원릉 | 보물1741호 보물1803호 |
1408년 | 정자각, 신도비, 조선 태조 | ||
여주 영릉 (세종) | 1469년 이장 | 풍수지리 | 조선 | ||
남양주 진접 광릉 (세조) | 1468년, 십이지신상 난간석으로, 조선 | ||||
구리 동구릉 목릉 (선조) | 보물1743호 | 1608년,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꽃무늬 | |||
남양주 금곡동 홍릉(고종), 유릉(순종) | 1919~1926년, 대한제국 황제릉, 침전, 홍살문, 석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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