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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詩,畵,樂...

강우방교수> 백제 금동 대향로...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금동 높이 64cm 백제 6∼7세기. 국보287호. 1993년 부여 능산리 왕릉 옆의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백제 미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우리는 중국미술이나 일본미술과 구별되는 한국미술만의 특징을 규정 짓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미술사의 특수성 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사 속에서의 보편성 역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우리 미술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백제 미술의 진수인 금동제대향로(金銅製大香爐)를 통해 한국미술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살펴본다.


우리가 흔히 쓰는 ‘특색’이란 말은 혹은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서로 대치될 수 있는 용어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특색은 다른 나라의 미술과 비교할 때 간취되는 다른 점들이요, 본질은 보편적인 점을 파악하려는 과정에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미술의 특색을 찾으려 가장 애쓴 미술사가는 고유섭(高裕燮) 선생이었다. 내가 미술사를 연구하는 동안 선학(先學) 가운데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 분이 그였다.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선구자요, 하나의 모델로 삼게 된 미완(未完)의 대기(大器)였다. 내가 영향을 받은 것은 그가 탑파연구에서 보여준 치밀한 형식에 대한 분석과 정확한 양식에 대한 파악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정신은 불행하게도 계승되지 못했다. 그의 연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그가 제시한 우리나라 미술의 특색들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기교(無技巧)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었다. 또 하나가 ‘자연에의 순응(順應)’, 그런 특색들이 열거된 글이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인데 그 특색이 많이 인용된 까닭은 통문관(通文館)에서 펴낸 그의 글모음 《韓國美術史及美術論攷(한국미술사급미술논고)》의 첫머리에 실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미술의 특색을 거론하면서 이를 인용하지 않은 학자는 거의 없다. 그것은 논문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김원룡(金元龍) 교수도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고유섭 선생은, 우리나라 민예품을 보고 불가사의하다고 경탄해 마지않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영향을 받았다. 고유섭의 글을 분석해 보면 그가 열거한 특색 가운데 하나인, “조선미술은 민예적(民藝的)인 것이매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정치(精緻)한 맛이… 항상 부족하다. 그러나 그 대신 질박한 맛과 둔후(鈍厚)한 맛과 순진한 맛이 있다”라는 기본틀에서 모든 특색이 도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비판할 겨를이 없다. 다만 한국미술의 가장 큰 특색이 민예적이라는 오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즉 한국미술의 특성을 애써 찾으려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미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민예적 성격을 내세움으로써 우리나라 미술사학에 엄청난 오류가 생긴 것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어느 나라건 민예품을 가지고 한 나라 미술의 특색을 삼는 경우는 없는데, 그 민예적인 것이야말로 인류공통의 보편적인 것이다.

그 글은 고유섭 선생이 1941년에 집필한 것인데 내가 태어난 해였다. 지금 책을 찾아 그 글을 다시 살펴보니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1974년 내 메모가 연필로 적혀 있었다. “이 글은 1941년에 쓰인 것이다. 그러나 1974년,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 동안 새 자료의 발견과 업적에 따라 다르게 쓰여야 한다. 〈반우현론(反又玄論)〉 계획.”  그 밖에 다른 메모들이 적혀 있는데 그리 눈여겨볼 만한 것은 없다. 10년 전쯤 가볍게 비판한 글을 쓴 적이 있으나,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내가 비판적인 입장이 더 강화된 것을 느낀다. 말하자면 그를 극복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민예적(民藝的)’, 고유섭이 제시한 한국의 미

지금까지 한국미술사의 연구대상은 가능한 한 예술성을 획득한 가장 훌륭한 작품들이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해 왔고 또 실제로 그러한 작품들, 예를 들면 사유상(思惟像)·석불사(石佛寺)·불국사(佛國寺)·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등 인류가 이루어 놓은 가장 위대한 예술품의 반열에 드는 작품들의 연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런 것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작품들도 자연히 함께 다루어지기 마련이므로 그 주장은 어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선택적이라 할 수 없다. 내가 과거 선학들의 관점을 재검토하고 우리나라 미술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 것은 백제의 금동대향로가 발견되던 때다.

요절(夭折)한 나라 - 백제. 문화가 정점에 달할 즈음 갑자기 멸망해 폐허가 된 백제. 그러나 남아있는 백제미술의 편린은 사라져간 고대 동북아의 진주 같은 존재를 아련히 그립게 만든다.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정림사지석탑(定林寺址石塔)만이 외로이 부여를 지키고 있을 뿐 지금까지 이렇다 할 미술품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중국 한대의 금동상감박산향로. 예술성은 높지만 넓은 공간을 압도하는 백제 향로에 비하면 왜소하다.

이런 가운데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羅城, 궁성을 감싸고 있는 성곽) 사이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제대향로(金銅製大香爐)는 지금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찬란한 백제미술의 진수였다. 향로의 대좌 기능을 하는 용틀임은 인동당초문과 절묘하게 어울리는데 유려한 흐름에 탄력 있는 힘은 커다랗고 묵중한 향로를 지탱하고도 남음이 있다. 활짝 핀 연꽃 줄기를 고개 들어 물고 있는 형상이지만, 실은 용의 입에서 연꽃이 - 즉 창조(創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꽃에서 화생(化生)한 갖가지 자세의 사람·동물과 산·나무 등 자연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넓적한 홑잎연화문을 세 겹으로 돌렸으며 그 연꽃잎 사이와 연잎에는 주로 물과 관련된 물고기·사람 등 24가지가 표현되어 역시 물로 인해 모든 것이 탄생된다는 것을 나타내 용(龍)이 수신(水神)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뚜껑에는 세 겹이나 다섯 겹을 이루면서 들쭉날쭉하고 변화무쌍한 입체의 산악 70여 봉우리가 솟구쳐 있는데 봉우리와 골짜기에 무려 47을 헤아리는 갖가지 사람과 동물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중국인이 이상향(理想鄕)으로 생각하는 봉래산(蓬萊山)이라 생각한다. 가장 윗부분은 다섯 봉우리로 마무리되었는데 봉우리마다 기러기가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사이마다 다섯 사람의 주악상(奏樂像)이 있다. 뚜껑 윗부분에 다섯 봉우리, 다섯 사람의 주악상, 다섯씩 두 줄로 뚫린 구멍은 도교(道敎)의 오방(五方)신앙과 관련 있을 것이다. 70여 봉우리에는 동자를 태운 코끼리, 말을 달리면서 뒤로 향해 활시위를 당기며 수렵하는 장면, 지팡이를 든 승려들, 멧돼지, 귀면, 기마상, 호랑이, 원숭이, 사슴 등 현실세계의 수많은 인물상과 동물상이 생동감 있고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이들은 모두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어 있으며 어떤 것은 산에서 곧 튀어나올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준다. 몸체와 뚜껑의 입가장자리에는 운기당초문(雲氣唐草文)띠를 각각 둘렀다.

뚜껑 정상에는 봉황이 막 날아오를 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부리는 독수리와 같고, 양날개를 활짝 벌리고, 꼬리는 길게 휘날리는 모습이 고구려벽화고분 가운데 삼실총·쌍영총·우현리중묘 등에 그려진 주작과 똑같다. 봉황이 사신(四神)의 하나로 편입될 때 주작(朱雀)이라 한다.

중국 향로의 미를 능가하는 백제의 금동제대향로

이 향로의 전체적 비례감각은 백제인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밑에서 넓게 퍼진 용 다리와 갑작스럽게 좁아지면서 큰 향로를 받들고 있는 용머리의 극적 결합은 백제의 석탑이나 석조(石槽)에서 발견되는 백제 특유의 조형감각이다. 머리를 번쩍 든 용의 모습, 물에 핀 연꽃, 그 위에 솟은 산악, 그 상부의 다섯 봉우리에 앉은 기러기들, 그리고 정상부에 날아갈 듯한 봉황, 이들 전체 조형은 아래에서 위로 향한 한없는 상승작용을 빼어나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용으로 상징되는 물(水)에서 땅(大地)을 거쳐 하늘(天)에 이르는 우주가 이 향로에 고스란히 응결되어 있는 것이다. 마침내, 뚜껑의 산속 계곡에서 향연(香煙)이 피어 오를 때, 그것은 창조의 근원을 상징하는 ‘용(龍)의 입에서 품어 나오는 기운(雲氣)’가 아닌가.

백제 금동제대향로 뚜껑 윗부분의 주악상과 기러기. 도교의 오방(五方) 신앙과 관련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가장 근원적인 존재인 용의 탄력 있는 웅자(雄姿)를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용틀임의 자세로 고개를 곧추 들고 있으며 뿔은 변형된 인동문(忍冬文)으로 도식화됐다. 앞의 오른 다리는 땅을 딛고 왼 다리는 번쩍 들었는데 든 다리의 다섯 발가락의 힘차고 미묘한 표현은 어느 천재(天才)의 아이디어였을까. 용머리 앞의 허전한 공간을 메우며 동시에 비록 거리가 있지만 묵중한 용기를 받쳐 주고도 남음이 있다. 가늘고 긴 몸체가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아가는 꼬리 끝이 뒤쪽 오른 다리 발가락에 닿아 있다. 꼬리 끝이 역시 인동문(忍冬文)처럼 도식화되어 운기를 나타냈다. 뒷다리 둘이 기단(基壇)을 이루듯 크고 둥글게 맴도는 듯한데 발 사이의 빈 공간을 역시 운기문(雲氣文)과 꽃무늬로 연결하고 있다. 그러니 밑에서 위에까지 생명력 있는 조형(造形) 전체가 바로 기 - 정신이라 해도 좋고, 신이라 해도 좋고, 무한한 우주라 해도 좋고 - 의 형상화가 아닌가. 전체가 상상력의 산물이며 동시에 우주의 본질이다. 바로 그것이 도교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을 환상적으로 종합하여 장엄한 우주관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고 힘찬 향로인 것이다.

연꽃이 만물의 모태(母胎)라는 인도인의 사유방법과, 용의 기가 만물로 화신(化身)한다는 중국인의 사유방법이 이 향로에 완벽히 균형을 이루며 융합되어 있다. 특히 중국민족의 사상을 대표하는, 만물이 용에서 탄생된다는 용의 상징적 의미가 우리나라 백제의 향로에 이르러 더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용이 실제로 연꽃줄기를 물고 있는데 비록 가장 밑부분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최상위(最上位) 개념을 보여주고 있으며 만물창조의 과정을 가장 뚜렷하게 전달해 주는 유일한 예다. 그리하여 인도적(印度的)·불교적(佛敎的)·중국적(中國的)인 것을 융합하여, 현실세계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곧 영원한 이상세계로 추구하는 여러 종교의 공통된 본질을 이 큰 향로가 기념비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향로의 전체 높이는 62.5㎝다. 대부분의 중국 향로는 20㎝ 내외여서 백제 것이 크기로도 단연 압권임을 알 수 있다.

신품(神品)이다. 백제 고유의 비례감각, 우주에 충만한 듯한 생명감, 그리고 완벽한 기술(技術)이 어우러져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향로가 이 땅에서 탄생했다. 중국에 수많은 사유상들이 있지만 백제의 사유상(국보 제83호) 하나를 당할 수 없으며, 중국에 수많은 박산향로(博山香爐)가 있지만 이 하나를 당할 수 없다. 절대(絶對)의 형태다.

이 향로와 비교할 수 있는 중국 향로 가운데 예술성이 가장 높은 것이 하북성(河北省) 만성(滿城)의 중산왕 유승(中山王 劉勝)묘에서 출토된 기원전 113년경의 금동상감박산향로(金銅象嵌博山香爐)다. 높이는 26㎝. 백제향로가 발견되던 해에 다행히 나는 서울의 한 전시회에서 이 향로를 사진 찍고 자세히 조사할 기회를 가졌다.

아무리 예술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공예품에 지나지 않아 기념비적인 백제 향로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백제 향로의 원류는 이러한 중국 향로이며 모티프는 같지만 백제는 그것을 높은 차원의 예술품으로 승화(昇華)했다. 대좌(臺座)는 세 마리의 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매우 작고 빈약하다. 이에 비하여 몸체는 바다의 파도로 윤곽을 삼고 당초무늬의 도식적 파도무늬는 금상감으로 장식했다. 그 위의 뚜껑은 마치 소용돌이치는 듯한 형상의 기세 좋은 산봉우리들이 볼 만하며 기암괴석(奇巖怪石) 사이마다 주악상·기마상 등 사람 여섯 명과 호랑이·멧돼지·원숭이 등 동물 열여덟 마리가 환조(丸彫)에 가까운 강한 입체감을 띠며 역동적으로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기가 충만해 있다. 산의 강하고 두터운 입체감과 가는 선상감(線象嵌)이 대비를 이루어 아름답다. 봉우리에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어 향연이 피어 나오게 했다. 중국의 대표적 향로라 할 만 하지만 넓은 공간을 압도하는 백제 향로에 비하면 왜소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신품(神品)이자 절대의 미(美)

대향로가 발견된 절터는 왕릉 무리 곁에 있으므로, 능사(陵寺)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니 역대 왕들이 이 곁에 묻힐 때 영원한 삶을 기원하는 의식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때 사용된 향로가 이것일 것이다. 538년에 서울에서 부여로 천도했으니 6세기 중엽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뚜껑부분의 활쏘는 장면. 뚜껑부분은 현실세계의 수많은 인물상과 동물상이 생동감있고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왕릉 무리 옆에 자리한 절터를 발굴하면서 금빛 찬란하고 당당한 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을 때 세상은 뜻밖에 고요한 편이었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백제 것이 아니라, 너무 훌륭하고 크고 완벽하여 중국 것이라는 의견이 국내는 물론 일본 학계에서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 보는 경이로운 예술품이었다. 일찍이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본 적이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처음 대했을 때 어리둥절하여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면 왜 그것을 우리나라 것이라고 단언하지 못하고 의심했을까. 그 까닭의 근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아마도 한국 학자들만큼 한국미술이 중국과 어떻게 다르고 더 나아가 일본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밝히려고 애쓰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한국미술이 갖는 특질이 무엇인지를 무리하게 규정지으려 한 나머지 마침내 다른 나라에 없는 오직 한국적 특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것도 몇 마디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유섭 선생은 일본인의 관점을 이어받아 한국미술이 민예적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민속품이나 공예품만 가지고 한국미술의 성격 전체를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석불사(석굴암) 같은 경우는 너무도 뛰어난 나머지 한국적 특성이 없으며, 외래인이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으며, 백제의 금동대향로도 중국 것이라 말하는 학자들이 아직도 있다. 세계미술사(世界美術史)의 흐름에서 한국미술사를 연구할 때 특수성이 간취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편성도 감지되는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 두 가지는 분명히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려 발전적 양상을 띤다.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도도한 세계미술사의 흐름에서 한국미술사는 정당한 위상을 갖고 그 흐름에 공헌할 수 있다. 보편성이란 쉽게 말해서 같은 점, 공통점이다. 중국·우리나라·일본 등 여러 나라의 공통된 요소이고 그 사상적 배경도 같다.

한국적 특성과 세계적 보편성의 융화

세계역사란 영향을 계속 주고받으면서 더욱 발전하며 독창성이 더욱 가미되며 더욱 종합되어가며 온갖 지류(支流)가 대하(大河)되어 바다에 이르듯 도도하게 흘러간다. 그런 대원리(大原理)가 우리나라에서도 실현되어 위대한 결정체를 이룬 것이 국보 제78호·국보 제83호 금동사유상이며, 석굴암이며, 불국사이며, 금동대향로 등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으며, 더 완벽할 수 없으며, 더 고매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불교미술의 원류를 인도에 두고 볼 때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일본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우리가 그런 미술역사의 대원리(大原理)를 파악하지 못하였기에 백제 대향로가 돌연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우리 것이라고 선뜻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선인(先人)들이 그러한 보편적인 것을 추구했음을 확인하면서 나는 한국미술이 인류가 이루어 놓은 위대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위대한 것 가운데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하나가 되어 원융(圓融)을 이루고 있다. 거기서 구태여 가장 한국적인 것만을 가려내고 외래적 요소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적인 것을 추출하려고 비교연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보편적인 것을 추구해 왔음을 알게 됐다.

이제 우리는 보편성을 획득함으로써 세계무대에서 자긍심을 가지게 되고, 한편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리라. 이에 이르러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도 세계를 주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이미 세계미술사의 발전적(發展的) 흐름에 이바지 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그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누어 갖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