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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탑2-10> 느낌이 있는, 닮고 싶은 - 선산 낙산동 삼층탑... 080413

 

 

 


2. 느낌이 있는, 닮고 싶은...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의 괴리가 있을 때...

삶의 리듬에 엇박자가 생기고 작은 파열음들이 마음을 흔들 때...

그리고 무언가에 의지하여 내 마음을 열고 싶을 때 탑을 찾곤 했다.

말하지 않은 이와의 대화,

그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향기가 그리울 때 탑을 찾았었다.

 

<의성에서 군위 - 선산쪽으로 가는 길에... 봄... 생명... 준비하는 계절인가?> 


오늘, 도저히 갇힌 공간에서 나를 추스르지 못하고,

때 늦은 시간에 쫓기고 떠밀리는 기분으로 구미, 선산을 향한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바라봐야 하는 나이라면 

구미 낙산동에 외롭게 서있는 삼층석탑을 한번쯤 다시 봐야한다는 생각에...

 

<어지러움... 지금의 내 마음일까?> 


우중충한 날씨이지만 봄날의 봄볕이 마냥 숨기만 하겠냐는 생각 하나,

아직 봄바람이 채우지 못한 원주의 황량함을 씻어줄 봄꽃맞이도 나쁘지 않을거란 생각 또 하나,

그리고 싱숭생숭 차분하지 못한 마음을 가라앉혀줄 당당함을 보고 싶은 마음 또 하나...

떨어지는 해의 속도를 아쉬워하면서도 길가의 꽃들은 마냥 화사하기만 하다...

그리운 이름들 하나하나, 꽃송이에 매달아 향기로 버무려가며 시골길을 달린다.

 

<화사함... 계절의 마음일까?> 



2-11) 구미 낙산동 삼층석탑(보물 469호, 8세기, 8m)


200여기가 넘는다는 낙산동 고분군을 나는 아직 찾지 않았다.

죽음의 공간...

인간이 만든 첫 공간이며 건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의 공간이다.

고인돌이 그렇고, 피라미드가 그렇고...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의미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다.

 

 


삶의 환희와 충만함을 알기 이전부터 죽음의 회한을 강요한 섣부른 낭만에

가깝게, 혹은 의미로 다가가야 했던 수많은 죽음을 보아온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절, 이별, 그리고 다시 함께 할 수 없음이 주는 무거운 감상은

언제부턴가 그로부터 가장 먼 어느 곳에 내 감성의 추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희열과 행복의 잣대를 잃어버리고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서성거리게끔...

 

 

 


희뿌연 차장 밖으로 넓지 않은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삼층탑을 찾았다.

조금은 정교하지 못하고, 조금은 낯설게, 조금은 산만하게 보이는 탑...

잠시 머물며 떨어지는 봄날의 태양과 맑지만은 않은 하늘을 바라본다.

북쪽의 고분군을 등지고 막힌 둔덕을 바라보는 탑의 마음도 그리 경쾌하지만은 않은 듯싶다.

 

<낙산동 삼층석탑...> 




먼저 이탑의 특징인 지붕돌을 뜯어볼까?

얼기설기 짜 맞춰진 지붕돌은 강진의 월남사지탑과 닮았으나 그와 비할바는 아니고,

의성 탑리 오층탑이나 빙산사 오층탑처럼 모전석탑류의 형식이지만 정연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경주 남산동 양피사지 동삼층탑처럼 어설픔은 없고,

선산 죽장동 오층탑처럼 차분하거나 조용하지도 않다.

 

<탑이 등지고 있는 뒤쪽이 마을이고, 그 산 너머에 200여기의 가야 - 신라의 고분군이 있는 낙산동이다...> 


언제쯤 만들어진 탑일까?

이단의 기단부중 하층 기단부에 세 개, 상층 기단부에 두 개의 탱주가 있다면

신라의 석탑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앞선 시기에 해당하고,

1층 몸돌에 비해 낮은 높이의 기단부는 감은사탑과 비슷한 비례를 갖췄다.

 

<고선사탑...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만들어진 시기도 그리 길지 않은 시차만 있지 않을까?> 


탑 한번 보고, 석양 한번 보고, 들판 한번 보고, 마을 한번 더 보고...

이제 찾았다... 이 탑과 비슷한 미감의 탑...

고선사탑을 닮았다.

 

<고선사탑... 부분...> 


두툼한 부재들이 자잘하게 쪼개졌지만 굵직굵직한 층급받침의 듬직함이 그렇고

깨어진 지붕돌 마구리까지도 모질지 않게 보이는 너그러움이 그렇고,

땅을 누르는 중후함에 모진 세월 이겨낸 당당한 의연함이 그렇고...

선산 죽장동의 오층석탑의 아류로 분류되곤 하는 이탑에서 나는 고선사탑을 생각한다.

 

<낙산동탑... 부분... 비슷하지 않는가?> 





미륵보살의 화신이라 칭하던 선화공주를 데려온 백제 무왕의 신라침공이 시작되고,

빼앗긴 미륵보살을 대신한 신라의 선덕여왕과 낭도 무리들의 절치부심,

고구려로부터 위협받은 한강유역을 지키고 당과 교섭하기 위해 시작된 삼국의 전쟁...

서기 600년부터 70여년간 신라의 모든 군사는 이곳 선산을 지났으리라...

 

<탑이 바라보는 곳은 작은 둔덕이다...> 

 


경주를 떠나 부여로 향하고 서울로 향하고 평양으로 향하는 김유신의 군대는

팔공산 북쪽 군위를 거쳐 선산 - 상주에 머물다 길을 나누었을 것이다.

백제 - 가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맨 처음 신라의 영역을 넓힌 곳도 이곳이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한반도 쟁패의 군마를 출진시킨 곳도 이곳이었을 것이다.

 

<흙먼지 일으키며 출병하는 장졸들을 위한 진군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을까? 아니면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을 달랠 진혼곡이 울렸을까? 그 당당함과 차분함이 공존하는 탑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한반도의 맹주로 자리할 즈음...

무열왕 김춘추는 더 이상 미륵보살이 아닌 미륵불이 신라에 상주함을 선언한다.

이제 미륵신앙은 백제지역으로 쫓겨 가고,

원효는 이 땅에 아미타 신앙, 정토사상을 주창하고,

관음보살의 화려한 옷을 입고 대승불교의 꽃을 피운 화엄종은 의상이 개창한다.

그 의상대사가 열반한 700년 전후 이 탑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양립하지 못할 두개의 미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탑의 시선과 이곳 선산의 역사적 위치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차돈이 순교하기 100여년전 맨처음 고구려에서 신라에 들어온 승려가 정착한 곳도 선산이며,

이중환의 택리지처럼 조선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이 머문다는 곳도 선산이다.

백제의 영역, 가야의 영토, 그리고 고구려의 영향력...

경주에 머물던 신라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해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선산은

문명과 문화의 교착지였고, 정착지였다.

 

 


한 시대의 영화와 쇠락,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

너무나 역동적이고, 너무나 극적인 공간과 시간...

그리고 또 다시 잊혀지고 선산이라는 지명마저 희미해진 오늘날...

그 긴긴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낙산동 삼층탑을 보며 잠시 잊혀짐을 생각해 본다.

 

 




단절과 이별, 혹은 지워진 기억 모두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죽음의 무거움이 삶의 소망과 희열을 짓누를 수도 없는 것이 섭리...

모든 변화와 발전, 그리고 성숙은 경계와 교류와 포용에서 시작한다.

이제, 공존하는 죽음과 삶의 무게만큼 일정한 경험과 연륜은 균형과 현실을 찾을지 모른다.

불혹과 지천명 사이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것과 아직 펼치지 못한 것을 생각한다.

 

 

 

<넓은 판석이었으면 정림사탑이 생각났을지도 모르겠다...^^> 


조각 조각나 보수되고 덧대어졌지만 든든함과 묵직함은 숨겨지지 않는다.

낯설은 지붕돌에 차분한 기단부... 그런 이질의 조화도 당당함을 거부하지 못한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닳아진 부재들까지도 중후함을 위한 장식일지 모른다.

넓지 않은 공간을 지켜선 외로움까지도 절제된 차분함으로 소화했다.

 

 


가끔 탑이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가끔 탑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부지런히 쫓아 나선 낙산동 삼층탑...

여전히 살아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9년 전, 처음 이탑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의 40대도 이 탑처럼 중후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

조금, 아주 조금 변한 주변에서 시간의 흐름은 느낄 수 없다.

여전히 마을을 등지고 막힌 둔덕을 바라본다.

 

 

 


너무나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시간...

섣부르지 않은 의연함...

절제된 당당함...

그리고 차분한 정적...

오늘은 어쩐지 탑을 돌려놓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