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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탑1-5> 지광국사현묘탑과 함께하는 고려시대(2)...080425

 




(4) 지광국사 해린이 살았던 고려시대의 정치상황...

(4-1)


지광국사 해린(984~1067년)이 살아온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본다.

918년 고려를 개창하고 936년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인 왕건은 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960년을 전후해 조선의 정조 같은 황제가 고려에 등극하니 그가 광종이다.

유학에 기반을 둔 국가체제를 정립시키면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과거제도 시행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개국공신이었던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노비안검법을 시행한다.


또한 그는 왕건의 유지를 받들어 불교부흥을 위해 성대한 팔관회를 개최하고

국사와 왕사제도를 만들어 불교세력을 왕권으로 흡수하니

왕권과 불교와 유학자의 삼각편대를 갖춘 새로운 유형의 국가로 고려는 정착된다.

 

<97년 겨울...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970년)...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마애불을 보고 백제 위덕왕의 얼굴이라고 주장하는 이(최완수씨)가 있다... 조금 넓혀서 은진미륵을 보면서 나는 고려의 광종을 그려보라고 말하고 싶다...^^> 

 

 

호족들이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파주 용미리와 안동 이천동 등에 석불을 조성하자

광종은 30년이 넘는 공력을 들여 논산 관촉사에 자신을 닮은(?) 은진미륵을 만들고,

지광국사가 지주로 머물던 현화사도 이시기에 번창했다.

 

<06년 2월... 현화사 석등... 원래 개성에 있는 것인데 유독 석등만 경복궁으로 옮겨졌었던 것 같다... 현화사에는 현화사비, 현화사 부도와 대각국사 의천의 유물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관촉사 은진미륵 앞에 석등을 유심히보면 현화사 석등과 비슷한 형식임을 알 수 있고, 이쪽이 유약해 보인다면 관촉사 석등은 우직하고 강건한 모습이다...>

 


과하면 넘치고, 넘치면 반발이 일어나는 것이 또한 순리일까?

정조의 개혁이 정순왕후에 의해 처참히 깨지고 조선이 몰락을 향해 치달았지만

그나마 고려에는 성종이란 왕이 나타나 광종의 충격을 수습한다.

(어쩌면 조선은 영조와 정조의 순서가 바뀌었다면 운명을 달리했을지 모른다...)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 집권한 성종은 팔관회를 금지하고 신분질서를 정착시킨다.

노비환천법을 시행하고 관직을 세습시켜 귀족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장려하여 안정의 계기를 만든다.

그러나 유교의 한계는 차별의 인정과 지배층의 가치관이며 정치철학일 뿐이라는 점이다.

거란이 요나라를 건국하고 이 시기에 지광국사가 태어난다.

 

<2000년 9월... 충주 미륵사지 석등... 현화사, 관촉사 석등과 비교하면 매우 단순한 모습이지만 방형(사각형)을 유지한 당시의 유행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지방 호족의 공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4-2)


백두산이 지구의 최근 1만년 역사상 가장 거대한 화산폭발을 일으키고

(폼페이를 덮은 베수비오산 폭발이 VEI 5였으니, 백두산의 VEI 6 강도면 10~30배?)

덩달아 한라산 화산도 폭발할 즈음, 발해의 부흥운동은 정안국의 멸망으로 쇠퇴하고

서희는 강동 6주를 놓고 거란의 소손녕과 누가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인가를 협상하지만

결국 1018년 지광국사가 30대 중반에 이를 때 강감찬의 귀주대첩까지 고려를 유린한다.


한족과 점이지대에 위치한 선비, 거란, 말갈, 여진족은 국가흥망과 직결된바가 많다.

고구려에 이어 발해의 멸망으로 강성해진 거란족에 대한 고려의 입장정리가 필요하고,

한반도의 본류와 조금 이질적인 신라를 흡수한 이후 후백제을 정복하고

발해의 유민들까지 받아들인 고려의 입장에서는 내적인 정체성 확보가 시급했겠지?

 

<06년 7월... 월정사 구층탑(1007년 조성)... 흔히 고구려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구려에 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토탑과 목조탑이 대부분이라 알려져 있고, 아직 석탑으로까지 전환 발전하지 않았던 듯 싶다... 고구려의 독자적 문명이 만들어진 때에는 살아있던 사람을 위한 고분에 많은 공력이 쏟아졌고, 말기에 고구려 전역을 휩쓴 도교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발해의 귀족들과 발해의 유민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10세기 말기에 고구려와 발해의 문물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강조의 난으로 시작된 거란의 2차 침입을 전후하여 월정사 구층탑이 완공되고

호족의 발호를 막기 위해 걷어 들인 쇠붙이로 철불조성(충주 대원사)이 유행하고

또 한쪽에서는 개경까지 유린한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요와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들여온 시기도 이때다.

 

<07년 12월... 충주 대원사 철불... 1067년 낙성된 개경 근처의 흥왕사를 낙성하기 위해 무기 제조용 철까지도 공납되었다는 사실이 있는 모양이다... 왕실에서는 무기 제조용 철을, 지방의 호족들은 농기구와 농기구 제조용 철을 사용하여 철불을 제작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시기는 철불 제작이 유행이었던 시기다...>

 


사라센 제국을 통일한 셀주크투르크, 암흑기 유럽에 문명의 불씨를 제공하던 아라비안들이

목종때 부활한 연등회, 팔관회에 송나라, 거란, 일본인들과 같이 참석하던 1040년경,

참된 군왕 곁에는 참된 부처님이 계신다는 말과 함께 고려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논리, 문장, 음운에 뛰어나고 뜻이 심오하며 법문이 출중한 지광국사의 전성기다.


8~90년만에 송과 국교가 재개되고 고려의 교역이 활기를 띠었던 문종대는

호족들이 개국공신으로, 다시 유학을 무기로 관리가 되고 문벌귀족으로 성숙해가는 시기다.

문종의 세 아들에게 세 딸을 시집보내고,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한 현화사에는 손자를 보내고,

지광국사에게 아들을 보내 금산사를 일으킨 이자겸의 할아버지 이자연은 문벌귀족의 태두...


한마디로 지광국사는 왕권과 문벌귀족의 양날개의 호위를 받고 있었고,

고려의 안정기는 이 세 권력이 솥단지의 세다리처럼 균형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활발한 대외교역도 사치품 위주로 증대하고 백성들의 수탈이 체계화 되던 시기였고,

사회불만의 완충지대로 남아 빈민들을 구휼하는 등 사찰의 순기능이 많았지만,

통도사 인근의 국장생표처럼 양산지방 땅의 절반을 사찰가람이 차지하던 시대였다.

 

<96년 2월... 통도사 부도밭 전경... 지금도 통도사에 가 보시면 층층이 쌓여있는 부도밭의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다... 통도사의 위상도 있지만 고려시대 사찰의 폐해는 조선시대 서원에 못지 않았던 것 같다... 단, 고려시대의 사찰은 빈민구휼이라는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5) 지광국사 해린이 살았던 고려시대 불교의 흐름...

    (5-1)


아미타불 신앙과 화엄종 이후 득세하기 시작한 신라말 선종의 영향으로

이제 대덕고승은 부처님과 동격으로 추앙받고, 이분들의 사리가 안치된 부도가 유행한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를 정점으로, 법천리 인근 문막 흥법사, 여주 고달사, 거돈사에도

진공국사 부도와 부도비(940년), 원종대사 부도(975년), 원공국사 승묘탑(1025년)이 조성된다.

 

<08년 03월... 원주 문막 흥법사 진공국사 부도(940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07년 6월... 원주 문막 흥법사지 진공국사 부도비... 부도와 같이 조성되었겠지만 비석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지광국사 현묘탑, 현묘탑비와 비교하기 위해 인근 지역의 부도와 부도비를 시대별로 모아본다...> 

 


사회가 발전하고 안정되고 문물이 풍족하면 관세음보살이 앞장서지만

전란과 변고에 시달리고 미래가 불투명해질수록 미륵보살이 유행일 수밖에 없는 상황...

화엄종의 영향력은 여전하지만 고려에는 미륵보살을 앞세운 법상종이 강화된다.

같은 교종이지만 화엄종의 관세음보살은 최고위 지배층을 위주로 유지되고

80여년에 걸친 후삼국시대의 전란과 왕권의 약화는 백성들에게 미륵보살을 찾게 만든다.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법사가 만들고 신라의 원측대사가 심화시킨 법상종은

신라 경덕왕(불국사를 만든)대에 금산사 미륵전을 만든 진표율사가 개창했다.

일체의 존재는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마음의 작용으로 현상이 나타난다는 유식론에 근거

존재의 근본보다는 현상을 세밀히 분석하는 법상종은 현실의 변혁과는 거리가 있었다.

 

<04년 10월...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상... 현존하는 금산사와 미륵전 등은 정유재란때 화재로 소실되고 1635년 중창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안치된 미륵불상은 1637년 조성된 소조불중 본존불이 화재로 파손되고 1938년 중수했다고 한다... 아래쪽의 청동좌대는 신라시대의 작품이고...>

   


자아의 실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아함경)

존재의 실체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반야경)

중도를 밝히는 가르침(화엄경)을 쫓는 법상종은

현실에 대한 수긍을 전제로 변화와 변혁의 의지를 먼 미래와 사후세계로 미루어

아이러니컬하게도 미륵보살에 의지하는 미륵신앙과 궤를 같이한다.


지배층의 화엄종과 피지배층의 미륵신앙 중간에 법상종이 존재하는데,

교조화 되는 사상은 식자층으로 고립되고, 관념화한 사상은 도식과 형식을 쫓게 마련...

필연적으로 개체화가 진행되고 파편화된 사상은 다시 참진리를 찾게 되고 변화를 모색한다.

절정에 치달을수록 민중들의 호응에서 멀어지는 정점에 지광국사의 열반이 위치한다.

 

<2000년 11월...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 승묘탑(975년) 아직 지광국사가 태어나기 전인가? 대체로 부도탑은 팔각원당형의 몸체에 팔각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시대별로 복련 아래쪽의 기단부에 많은 변화를 두었다...> 

<2000년 11월... 고달사지 원공대사 부도... 우락부락한 표정에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귀부와 이수다... 문막의 흥법사지 귀부와 비교하면 훨씬 힘차고 깊게 조각되었음을 비교할 수 있다... 이때가 그나마 고려시대에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기운이 돌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5-2)


서양철학사에서 관념론의 정점에 위치한 헤겔을 뒤집어 세운 맑스라는 천재는

참진리와 변화의 근간을 인간과 인간사회, 그리고 역사의 법칙으로 하강시켰지만,

원효이후 관념철학의 정정에 이른 동양의 철학은 유교라는 형식을 받아들여

관념으로 치닫고, 미래로 미루며, 인간 개인에 머문다.


중세까지의 동양사상사는 도교적 토템에 유교적 합리와 불교(흰두교)의 궁구를 보완하여

사회적 관계와 인간의 마음을 중시한 개체의 완성과 식자의 수양에 머물렀다면,

근대이후의 서양사상사는, 맑스의 유물론에 실증적 분석과 실존적 소통을 보완하여

인간관계와 사회발전을 중시한 구조적 합리주의를 탄생시켰다.

 

<08년 3월... 원주 문막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묘탑(1025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전의 문막 흥법사지 부도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유약해진 느낌이다...>

<07년 6월... 원주 문막 거돈사지 원공국사 부도비... 5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수나 귀부 모두 훨씬 간결해지고 우락부락한 맛이 사라진다... 그러나 독창적인 모습과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의연한 모습의 귀부다...>  

 


아무튼 절정에 오른 교종계 화엄종과 법상종은 불과 50여년후 의천의 천태종으로 바뀐다.

불교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조계종이 조계산에서 시작된 것처럼

수나라때 지의란 스님이 머물던 천태산에서 이름을 따온 천태종은

화엄종, 법상종의 교종과 약화된 왕권속에서 번창해가는 선종을 강제로 통합시킨 종파다.


교종중심의 고려 불교는 사회가 약화될수록 확산되는 선종의 영향으로 다시 7~80년후,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한 지눌에 의해 조계종으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른다.

철저히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한 귀족과 지배층은 극도로 화려한 관음보살을 추종하고,

철저히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변화를 바라는 피지배층은 우락부락한 미륵보살을 쫓고...

13~14세기에 만들어진 세기적 걸작인 고려불화는 바로 관세음보살상이 대부분이고

고려시대 만들어진 대부분의 미륵불상들은 소박 소탈을 넘어 거칠고 투박하다.

 

<2000년 9월... 충주 미륵사지 미륵불... 파주 용미리의 소박함이나 안동 이천동의 당당함은 없고 부드러운 모습의 미륵불... 그러나 거치면서도 단아한 표정은 잃지 않았다...> 


요순시대로의 귀화를 목표로 도덕정치을 주장하며

강진홍도(講眞弘道), 명료돈오(明了頓悟)의 법명을 받은 지광국사 현묘탑이 만들어진

1085년, 고려는 요나라와 송나라 고려의 삼각안정 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왕권과 불교세력과 문벌귀족이 또 다른 세력균형을 이룬 시점이고,

화엄종의 관음보살과 법상종의 미륵보살, 그리고 선종이 적절히 통합된 시대였다.

 

<고려불화... 관세음보살상...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미륵보살과 관음보살를 비교해보면???^^ 물론 고려불화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13~14세기에 만들어져 2~300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그만큼 추구하는 바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광국사의 열반이후 현화사 주지를 이어받은 이자연의 아들 소현이 국사가 되고

문종이 시작하여 선종대까지 15년간 현묘탑과 현묘탑비가 만들어졌다.

고려청자가 전성기를 맞이한 1160년대 의종까지 지광국사를 찾는 발길은 이어졌고

각지방의 반란과 고려 무신의 정변이 일어난 것이 바로 1172년 의종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