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탑...
탑에 대해 정리해보겠다 마음 먹은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한마디 쓸때마다 달라지는 마음처럼, 일관된 유형의 글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한번은 미감으로 접근하고, 한번은 공간으로 접근하고, 또 한번은 역사로 접근하고...
오늘은 엉뚱하게 역사에 대한 정리를 하다 보니 생각지 않게 길어진 글이 생겼다.
(길고, 이것저것 주워 담아 중구난방식으로 써가는 글 만들기가 내 습관이지만...^^)
아주 드물지만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탑을 바라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충분히 이야기했는가를 돌이켜 생각하면 늘 부족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많다...
그때의 분위기와 당시의 내 수준,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심 때문이겠지만
완결되고 고착될 수 없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나만의 지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첫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그런 만큼 오랫동안 뜯어보기를 좋아한다.
내가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 다른 이들의 의견을 수긍할 때까지 그쳐지질 않는다.
그래서 만들어진 나만의 언어가 생겼을 때... 참 좋고 즐거운 기분을 느낀다...
관계나 관심, 그리고 호불호를 마음에 담는 나만의 패턴이 돼버렸다.
<2000년 11월... 지광국사 현묘탑...>
삼국시대와 조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물꼬를 터 놨지만 고려에 대해서는 부족했다.
중국, 일본과 함께 해온 우리역사의 멀지 않은 부분의 공백과 나의 단절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지광국사 현묘탑에 접근하면서 역사와 당시의 사상적 흐름을 쫓았다.
현묘탑의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국제관계를 알아야했고,
현묘탑과 현묘탑비에 새겨진 문양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상적 흐름이 필요했고,
현묘탑에서 느껴지는 상반된 미감에서는 국내 지배층의 흐름을 서술해야했다.
조금 넓게 펼쳐놓고 뜯어보는 나의 즐거움이 읽는 분들에게는 지루함으로 바뀔지 몰라도,
전체를 느끼기 위해, 넓게 펼쳐진 흐름의 집약을 풀어보는 행위라 생각하시길 바란다...^^
1-4) 경주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742년, 10.4m)
1-5) 원주 법천리 지광국사현묘탑 (국보 101호, 1085년, 6.1m, 경복궁)
1-6)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785년, 14.5m)
1-7) 영양 입암 산해리 봉감오층석탑 (국보 187호, 신라, 9m)
1-8) 경주 원원사 삼층쌍탑 (보물 1429호, 8세기중엽, 7m)
1-5) 원주 법천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제101호, 1085년, 6.1m, 경복궁)
- 현묘탑을 통해 살펴본 고려시대로의 역사여행...
(1) 시작하는 말... 왜 이렇게 생겼을까?
(2) 현묘탑이 경복궁에 남은 이유...
(3) 원주 문막 법천사지...
(4) 지광국사 해린이 살았던 고려시대의 정치상황...
(5) 지광국사 해린이 살았던 고려시대 불교의 흐름...
(6) 현묘탑과 현묘탑비에 새겨진 단서들...
(7) 고려시대의 한계와 현묘탑의 정중동...
(1) 시작하는 말... 왜 이렇게 생겼을까?
은행나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좋아하는 이를 만난다.
바람이 없어도 좋고, 주변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표정이 숨겨지지도 않는 순간...
아직까지 경복궁을 떠나지 않은 지광국사 현묘탑을 만나는 시간이다.
<97년 여름...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지? 그때는 참 불만이 많았다...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 문화재를 가까이서 보고 음미할 수 있는 의자하나 없으면서 잔디가 더 중요한가?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 다행히 문화재청이나 박물관 귀가 간지러웠는지 은행나무 주변, 현묘탑 가까이 의자들도 놓이고 휴식공간도 생기고... 욕을 많이 한만큼 자주 애용했던 장소다...^^>
종로인근에서 약속이 있을 때면 의례히 이곳을 장소로 정했다.
약속시간 사이사이, 잠깐 짬이날 때면 책한권 들고 이곳 벤치에 머물렀다.
가볍게 바람 쐬고 싶은 주말이면 가끔씩 인왕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기도 했고...
아마도 횟수로 따지면 제일 많이 본 탑 중 하나가 지광국사 현묘탑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탑 중 하나로 꼽게 되었고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함을 갖춘 국보다운 국보로 현묘탑을 추천했다.
국보란 시대를 대표하고, 지금의 나와 우리를 대변할만한 문화적 상징...
지금도 나의 선택에 의문을 두지 않는다.
<97년 호암미술관의 현묘탑 모형...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탑으로 꼽았는지 모르겠지만 용인 호암미술관은 불국사의 석축기단과 연화교 칠보교를 차용하여 진입부를 만들고, 그 좌우에 다보탑과 현묘탑을 1:1 크기로 재현한 모형을 만들어 배치하였다... 가끔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것을 확인하면 참 즐겁다...^^>
신라풍의 기단부는 화려한 조각을 위해 정교하게 세분화되고,
두툼해진 기단부 판석과 굄돌을 강조하여 고려식 탑파양식을 따르고,
이탑의 유일한 곡선이나 마찬가지인 지붕돌 낙수면에는 백제식 용마루가 살아있다.
상륜부는 인도 풍의 산개가 앙화와 보륜 보개, 수연 등으로 화려하게 장엄되었는데
아마도 부도탑임을 고려하여 복발은 따로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밀하면서도 눈에 거슬리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장중함을 잃지 않은 안정감...
현묘탑이 만들어지기 전 어디에서도 실험되지 않았고,
현묘탑이 만들어진 이후 어디에서도 아류나 모방을 허용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형태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석탑 양식으로 지광국사 현묘탑이 남아있다.
<08년 1월... 현묘탑 부분...>
그러면서도 늘 자문했다...
지광국사란 분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추존(推尊)이 필요했을까?
목조건축(부석사, 수덕사, 봉정사 등)과 청자와 고려불화로 우리에게 각인된 고려인들은
어떤 이유로 이처럼 독존적인 석탑양식의 유물을 만들었을까?
(2) 현묘탑이 경복궁에 남은 이유...
1910년경 한 일본인이 원주 문막 부론면 법천사지 일대를 농장으로 사들인다.
일본-중국-한국, 삼국의 밀접한 관계를 분석하고 일본고유의 성질을 찾기 위해
각국의 문화재를 수집하는 것은 전승의 명예라는 정부의 지침이 없는 것은 아니나,
데라우찌 총독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채, 또 다른 일본인에게 현묘탑을 판다.
당시 3만1천5백원에 이 탑을 사들인 그는 1912년 오사카로 반출하지만,
결국 총독부의 강권으로 탑의 매매는 허사로 돌아가고 경복궁으로 옮겨진다.
<복원되기 전 파손된 모습... 12,000개의 조각을 수습하고 그것을 이어 붙였다니...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이승만과 함께 경복궁을 산책하던 한 외국 대통령의 문화재에 대한 안목이 행운이었을까?
지붕돌이 산산이 부서진 현묘탑을 바라보며 역정이 난 이대통령은 탑의 복원을 지시하고
경복궁의 모든 석조유물들 중 유일하게(?) 유탄에 맞아 12,000조각으로 파손된 이탑은
1957년경부터 임천이란 분의 주도하에 복원되기 시작, 1962년 국보로 지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대부분의 석조유물들이 옮겨졌다.
문화재에 대한 사회 분위기도 성숙하고 제자리 찾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현묘탑도 용산이 아니라 원주 법천리로 옮겨져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지만
부재의 내구성도 약화 된데다, 파손된 부분을 복원하면서 과용된 접착제 때문에
현묘탑은 용산으로도, 법천리로 옮겨지지 못한체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
<97년 여름... 용산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하기 전까지는 주변으로 이런 석조유물들이 많았다... 왜 유교의 중심부에 불교의 유적들이 있냐는 원성도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이왕가 박물관을 만들면서 수습한 유물들과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된 유물들이 모아져 유지되던 흔적들이다... 앞에 염거화상 부도(844년 신라말기의 전형적인 부도모습)가 보인다... 일반적인 부도와는 전혀 다른모습의 현묘탑...>
현묘탑 그림자에 남아있는 지난한 근현대사의 편린들이다.
그렇다고 현묘탑 어디에도 애처로움이나 아쉬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복원이란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이 탑에 어설픔이란 없다.
1085년, 고려 왕실과 새롭게 형성된 문벌귀족의 총력이 현묘탑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3) 원주 문막 법천사지...
한 시대의 상징은 존재하는 그 이름이 머무르는 공간과 시간의 결정이다.
앞선 양식의 전승과 변화, 추진하는 이들의 공력과 염원,
그리고 새겨질 역사에 대한 존중과 현 시대에 대한 파급력...
현묘탑은 그런 의미에서 한 시대의 절정과 한계를 고스란히 담았다.
먼저 현묘탑이 조성되었던 법천사지란 공간을 찾아볼까?
조선초기 유방선의 제자, 한명회, 서거정, 권람이 공부하던 법천사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풍부한 물산과 넉넉한 규모의 사찰로 남아있었나 보다.
작은 둔덕을 의지하여 현묘탑이 자리했을 기단을 서성이며 강바람을 기다린다.
<97년 여름 원주 문막 법천사지... 오른쪽으로 현묘탑비(국보 59호, 1085년, 높이 5.5m)가 서있고, 왼편 기단부에 현묘탑이 서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들이 많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합류지점...
1960년대까지 한강과 충주를 오가던 배들이 머물던 원주 문막,
인근 평야를 배후로 지역문물의 집산지이자 교착지로 중시되던 어느 한켠,
고려의 법천사는 신라의 황룡사, 백제의 미륵사만큼 넓게 자리 잡았다.
법천사 인근의 산을 예전에는 명봉산(鳴鳳山)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설악산의 봉정암을 봉황의 머리로 보고, 여주 신륵사를 봉황의 꼬리로 보면서
명봉산 인근은 봉황이 알을 낳는 곳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지광국사, 한명회... 이미 봉황은 알을 낳고 그 기를 다했을까?
너무나 차분하고 정적인 공간...
길도 돌고, 물도 도는, 조금은 외진 이곳에는 바람도 머물지 않는다.
결코 극적이거나 장엄한 장면을 기대하기 힘든 밋밋함...
남아있지 않는 법천사의 위용을 그리기에 너무나 펼쳐진 느낌이다.
<97년 여름... 법천사지 전경... 전체적인 윤곽이 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찰의 규모는 대략 5만평 내외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고려 흥왕사(1067년)와 함께 최대 규모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불국사 석굴암이 그렇고, 시스틴 성당 바티칸 성당이 그렇듯이,
한 시대의 시스템과 뛰어난 천재가 만나면 <공간이 열리고 정신이 살아난다>
그러나 역사에 그런 행운이란 쉬이 찾아지지 않는 법...
어느 일방에 주도되는 유적과 유물은 공간을 포괄하지 못한고 이름으로만 남는다.
불교를 숭상하는 고려 왕실과 이제 정착되는 유교를 등에 업은 신흥문벌 귀족...
그들이 서둘러 봉합되고 타협한 법천사에는 공간이 없고, 정신이 없고, 천재가 없다.
우리나라 어느 부도탑이나 부도비와 비견할 수 없는 극치의 정교함과 화려함을 뽐내는
지광국사 현묘탑과 탑비는 그렇게 이름으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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