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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잡생각...

헛생각> 당신은 놀기 위해 일하나? 아니면...090101

* 모처럼 쉬어 봤고...ㅋ

* 진평왕릉에 펼쳐진 다회(茶會)를 그려봤고...ㅎ

* 일과 휴식에 대한 복잡한(?) 헛생각을 그려보고팠다...^^

 

 

1.


사람은 놀기 위해서 일할까?

일하기 위해서 놀까?


계급적 역사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소비사회>가 낯설지 않은 시대,

<즐겁게, fun> 이란 이슈가 사회적 트렌드가 된게 길지 않지만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의 경계마저 허물어뜨리는 근저에는

분명 소위 <창의력>을 빙자한 <효율성>에 있음을 부정할 이는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상업화해야하는 강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며칠,

바람과 하늘과 향기를 쫓던 시간이 끝날 때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일하기 위해서 쉬었는지,

쉬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는지 자문해봤다.

 

<가끔 거꾸로 뒤집어 세상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여전히 하늘은 파라니까...^^ 사진은 진평왕릉에서 골랐다...0812> 




2.


당연,

서양식 사고에 익숙하다면 우리는 놀기 위해 일한다는 게 틀리지 않는 표현이고,

동양식 사고에 얽매여있다면 일을 더 열심히 하기위해 놀았다고 말하겠지?

잠깐 뜯어볼까?


흔히  <그리스 로마의 Sisyphus 신화> 에서 서양식 노동관의 근원을 찾고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결국 굴러 내려온 바위를 다시- 영원히 밀어 올려야하는 숙명...

그래서 그들에게 노동은 회피해야 되는 것, 벗어나야 되는 것,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에 반해 휴식의 쾌락은 자유로운 것, 아름다운 것, 부러운 것이다.


2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땀 흘려 일한 당신, 이제 떠나라>는 투의 <신의 예언>을 들은 서양사람들은 없다!

(MBA를 패스하고, 투자은행에 근무하면서 거액의 연봉을 단 한번이라도 받아본 사람빼고)


태어날 때부터 도둑질을 시작하고, 미모를 갖추고, 철을 다루고,

연애를 즐기며, 전쟁을 일으키고, 징벌을 일삼으며 자연을 다스렸던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인간들이 침범할 수 없는 힘과 재능>을 갖춘만큼 그들은 늘-항상-영원히 자유로웠다.

한마디로 <먹고 살기 위한 일과 직업>에 충실한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들에게 책임감이란 <보다 쎈 권력과 서열에 충실할 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의인화 된 신들의 이야기라 멀리하기에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서양사람들의 꿈이며 동경이고 낭만이고 기원이며 태초의 이상향이다.

그러나 이상향이란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할 뿐이니,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놀기 위해) 다퉈야하는 인간들에게 그리스도는

<사랑하기 위해 나만 믿고, 남의 물건은 (절대로!) 탐하지 말라>고 가르쳐야했고,

그후로 1000년이 넘게 성직자와 신학자들은 <죽은 다음의 안식>을 약속했다.

(죽어야만, 걱정없이 편안한 신들의 세상에 편입되려면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

 

<구황리 삼층탑에서 바라본 진평왕릉... 길도 끊어지고, 주변은 공원으로 대대적으로(?!!!) 파헤쳐지고... 아무튼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전히 진평왕릉임에는 분명하고... 근데 일과 휴식을 생각하면서, 왜 이쪽 사진을 골랐지?> 




3.


애초부터 인간들이 신의 자손이라 생각하는데 동서양의 차이는 없었다.

다만, 햇빛이 쨍쨍해서 눈이 굳이 파래야할 필요도 없고,

때 되면 비 내려주고, 씨만 뿌려도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자라나는 동양(특히 중국)에서는

굳이 신과 인간을 구별짓지 않는 공생과 현세의 무릉도원이 이상향이라는 차이뿐...

그래서 살만한 곳에서는 종교와 철학과 교육이 전무하거나(열대와 아열대 지방)

인위적으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상을 동격으로 만들려는 지배자들의 노력이 횡횡했지.

(너무 고도로 문명이 -초기에- 발달한 인도나 페르시아 지방 등...)


그러면 동양사람들에게 노동관은 무엇일까?

불행하게도 서양이 아닌 동양이란 범주는 너무나 넓다.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 페르시아 지방에서부터, 인도, 중국과 동북아까지

서로의 특징이 너무나 분명하게 다른 세 지방 이상을 포괄해야하니까...

아무튼 분명한 건, 동양의 노동관은 특화되지 못했다는 점이고,

동양적 노동관의 특징이란 <농업적 노동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 사실 페르시아 지방의 문명은 이슬람 문명의 발원지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크리스트교 문명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아담과 이브의 고향은 페르시아 만이며, 그리스 로마의 진출경로는 늘 중동을 향했지)

때문에 현재 유럽으로 대변되는 서양의 쌍생아일 수도 있고,

엄밀히 인도가 동서양의 중간 경계이거나 점이지대라고 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혹 삼지창이 생각나지 않나? 포세이돈이 잘쓰던, 수호지의 완소이,완소오,완소칠이 잘 쓰던... 그렇게보니 금강저 같기도 하고...ㅎㅎ 아무튼, 노동이 상징하는 게 항상 우악스러움은 아닌데... 그래도 하늘을 향해 뻗은 힘찬 기상이...> 

 

 

농업적 노동관에서 일과 휴식이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의 순응이다.

일할 수 있을 때와 쉬어야할 때는 자연이 결정하는 것이지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어야 하고,

추워지면 일을 해봐야 필요가 없고, 날이 더우면 일을 피해야만 하고...

일과 노동, 피아를 구별해야 하기에 동양의 자연적 조건은 유럽에 비해 탁월하게도 월등하다.


여기에 사회 지배 시스템으로 교육이 작동하면 부지런한 <근면과 성실>이 삶의 방편이 되고,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정직과 진실>만 작동하면 농업적 노동관은 완성된다.

자아실현도, 노동에서의 해방도, 소외의 극복도 애초 자리할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동양의 이상향, 무릉도원에는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밥하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곳이다.

단지, 착취와 전쟁이 없는 평화롭고 걱정이 없다는 특징이 추가될 뿐이다.

(그래서 무릉도원은 도전과 미래가 없는 한적하고 여유로운=시간에서 이탈한 곳인지도 모른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잔듸는 안식의 상징일까? ^^> 




4.


물론 서양의 노동관에도 일대의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니 그게 르네상스고 종교개혁이다.

신을 위한 존재에서 인간의 세상이 부흥하고,

또한 그러기 위한 주체의 자각과 개체의 완성은 국가로 체계화되고 이념으로 굳어진다.

신으로부터의 자유와 존재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자연과 사회법칙의 완결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무장하고 분석하고 해체하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종합한 절대지성 헤겔은 주체해방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플라톤 이념의 완성자 마르크스는 노동으로부터 소외의 극복을 주창하고,

소크라테스의 말을 곱씹은 니체는 홀로 서야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유토피아는 <노동하는 자아-주체의 인정과 해방>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유토피아를 글로 설명한 마르크스는

<낚시를 즐기면서, 베토벤 음악을 듣는 노동자의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비약이 많다고?

충분히 납득할 만한 지적이다.

그렇지만 (따뜻한 태양을 찾아) 한달 놀기위해 11개월을 열심히 일하는 21세기 유럽인들과

노동시간의 단축이 절대적 목표인 오늘날 선진유럽국가의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서양의 노동관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유럽 노동운동의 방향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다)


여기에 이미 탈 농업적 문화와 상업적 거래, 공업화된 노동의 세례를 받은 동양은 어떨까?

절대이성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헤겔은, 인간의 수양을 강조한 이황을 닮았고,

비판의 무기로 관념을 뒤집은 마르크스는, 현실비판에서 군자의 도를 역설한 이이를 닮았다.

그러나 이황과 이이는 주체의 완성으로서 <노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동양사상과 유교가 <관계>에 집착하면서도 부의 확대재생산과 통치의 정교화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완성된 인격이 통제하는 소일거리로서의 일>이 베이스에 깔렸는지도 모른다.

(post-이이를 주창한 최한기의 기론 역시, 니체처럼 사유의 재구성만 외쳤을 뿐이다)


아무튼, 현세의 이상향을 지향하는 동양적 사고와 유교적 지배이념은 우리 생각보다 강고하다.

게다가 2500년 동안 세태풍파에 자유롭게 적응해온 유교의 지배논리는

서양의 노동관과 농업적 노동관을 적절히 교합시키는데 실패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지극히 낭만적이며 이탈적인 선동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당신, 더 열심히 일해라~>는 보이지 않은 강요에 반발할 동양의 노동자는 거의 없다!

(여기에 한술 더 뜨는 게 있으니 ; <미친듯이 일하는 당신, 너무 아름답다~>는 말 아닐까?)

 

 <소나무와는 또 다른 느낌의 거친 목피...>




5.


일하고 싶어도 떠남을 강요당하는 지금...

미친듯이 일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현재,

일하고 있어도 언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2008년 세밑...

그리고 일하고 싶어서 일하는 게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출근해야만 하는 <노동 만족도 최하위> 대한민국에서

<노동과 휴식의 균형>이라는 사치스런 생각이 며칠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놀고먹는 게 부럽다는 신화는 이미 깨어진지 오래다.

그럴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사회이며,

그것이 가능할만큼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부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들의 걱정은 놀고는 먹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부족하며, 일을 선택할 자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배신감,

그 무기력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비참함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다.


물론 이 문제들은 개개인이 노동-휴식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는가와 무관하다.

충분히 <세계화> 되어 있고, 너무나 <자유롭게> 인격과 기술과 꿈으로 무장된 우리들에게

여전히 노동과 휴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강요이기 때문이다.

다만, 일을 통해 자아가 실현되고 완성된다는 <교육받은 노동관>이 힘을 얻으려면

일과 휴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지는 못해도, <일로부터의 소외>를 강요당하지 않으려면

뭔가 희망을 위한 변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은 더더욱 분명하다.

 

 

<안식의 상징인 능은 여인의 가슴, 하늘의 둥근 달(오른쪽 맨위에 살짝 떠있는 하얀 반달)을 닮았다? ^^> 


몇 년 전의 안이한 판단과 반성이란 개념을 이고 있는 착찹함에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나부러졌다.

더군다나, 새해엔 몇몇 직원들에게 휴식과 새로운 일자리를 내가 강요해야할지도 모른다.

새해에도, 나는 여전히 일과 휴식의 균형을 고민하고 東西古今의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



한가지 사족만 붙이고 정리해야겠다.

왜, Sisyphos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형벌에 취하게 됐는지 아시는가?

(Sisyphus, 시치푸스, 시찌푸스로 불리는 그는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지?)

신의 잘못을 폭로했다는 <진실과 비판>이란 굴레 때문이다.

진실과 비판에는 대가가 따른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노동이라는 대가...

휴식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 소~ 누구의 삼단논법으로?

A ; 인간의 진실과 비판 → 신의 형벌 = 인간의 영원한 노동

B ; 노동의 반대는 휴식 = 신의 칭찬?

C ; 고로, 신의 칭찬을 받으려면 → 인간에게는 거짓과 순응이 필요하다? = 휴식? ㅎㅎㅎ

차라리, 신에게 짧은 휴가를 보장해주는 게 편할듯 싶다...(이래서 이글이 헛생각임...ㅋㅋ))  

 

 

 

<여전히 어지럽군...^^> 


당신은 놀기 위해서 일하는가?

아니면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