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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잡생각...

잡생각> 이희수 교수와 문화인류학...090301(전북지역2)

 

 

 

1.


<김영사>에서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희수>교수의 특강을 한단다.

토요일에 과연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하루 전까지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마침 금요일, 서울 올라올 일이 생기고,

간만에 일산에 머무르는 열이형 집에서 점심 먹고, 가족들과 파주 출판단지로 향했다.


911테러였지?

2001년, 오랜 시간 이슬람 문화권에 머물던 이교수가 방송에 자주 등장했던 계기가...

그 양반의 911 사건 진단에 대한 공과와 시비가 있을지 모르지만,

열린 마음과 문화인류학으로 단련된 그의 시각은 간만에 <소신 있는 전문가>를 만난듯 즐거웠고,

제도권과 기득권층의 편협하고 보수적인 상식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정당함을 넘어 신선하기도 했지.


아가씨들이 좋아할 상이 아니어서 방송에는 자주 못 나오겠지만, 아줌마들은 좋아하겠는데?

열린마음과 문화상대주의자가 가지는 여유, 정치/경제/외교에 대한 폭넓은 관점이 맘에 들기도 하고...

말할 때 가벼워 보이는 느낌 때문에 우려했는데, 열성도 느껴지고 입담도 있어 장수하시겠네.

이슬람이란 문화적 장벽과 미국적 관점에서의 부정적 이미지, 생활에서의 직접적 관련성과 무관하게,

해당분야 전문가로서 그를 지켜보던 나의 호기심이 이번 특강에서 충분히 확인되는 순간이다.




2.


햇살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이제 초등학교 5학년에게 어떤 철학과 관점을 요구하기는 어렵겠지만,

관심 영역을 넓혀가는, 호기심으로 남을 자극으로 기억되면 충분하지 않을까?

사실, 이슬람 문화가 햇살이에게 지식으로 남는 걸 기대한다면 그건 무리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질의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관심과 지식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열린 마음과 흡수할 수 있는 깊이, 그리고 따뜻한 애정이 필요한 거니까...

그리고 여기에는 인류의 보편성과 인류애라는 기본적인 의지와 심성이 고루 필요할 거고...

마음이 열려서 몸으로 타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식과 이해의 문제는 아니잖아?

이교수의 특강을 지켜보면서 햇살이 또래 참여자들에게 무엇으로 남았을까 색시와 잠깐 이야기...


1시간 반이 넘는 특강이 끝나고 8천원 참가비로 배포된 책과 함께 저자 사인회가 있었다.

역시 영상세대라 만화책이 대세네? 긍부정, 호불호를 떠나 나 역시 노자와 장자를 만화로 본다...^^

햇살이에게 인터뷰 요청이 있었고, 어쩌면 햇살이에게는 그게 더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는 일.

아무튼, 열린마음과 소신을 갖고 열성적으로 활동폭을 넓혀가는 전문가를 만나는 건 즐겁다.

잘 적응하실지 궁금해 하며 지켜봤는데(?), 이렇게 뵈니 반갑습니다. 저도 팬이거든요...^^

맨 뒷줄에서 저자가 찍은 사진엽서에 사인을 받으면서 나눈 인사였다.(책이라도 들고 갈껄...)




3.


우리에게 문화인류학이란 분야는 많이 알려지고,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을까?

혼돈의 시대에는 권위가 무기가 되고, 대게 이럴 때 학문의 영역은 배타적인 깊이만 강조되지만,

경계와 영역이 불분명해지는 변화와 발전의 시기에는 유연성과 선도성이 강조되기 십상이다.

유럽의 1970년대, 우리의 90년대 <문화인류학>은 인류의 보편적 관점에서 문화 상대주의를 인정하고,

한 지역과 공간의 제도와 관습, 그리고 종교와 예술, 언어 등을 종합하여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와 철학과 경제가 어우러진 <통섭의 간학문>으로 정착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문화인류학은 고고학, 인류학, 문화사, 역사와 정치경제학 등을 받아들여 체계를 갖췄지만,

그 출발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자본의 이해와 전쟁의 도구로 시작되었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즉, 진주만 공습이후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증대가 <국화와 칼>이란 인류학 책을 만들게 했고,

코카콜라가 중동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방에 진출하기 위한 사전 시장조사를 위해 민족습성을 연구했다.

게다가 히틀러의 제3제국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분석되고 분류된 인종과 민족성 연구를 토대로,

독일과 일본의 생체실험, 미국 자본의 이해를 영국과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조합한 학문으로 출발했지.

 

 


정리하면, 2차대전을 전후로 형성된 자본의 국제화는 새로운 시장에 적응하려는 학문을 잉태했으니,

소위 제국주의의 식민지론을 반성하면서 세련되고 고도화된 신식민지 지배의 길잡이가 되었고,

그 학문의 성과는 프로이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과를 흡수하면서 우리에게 차이의 인정과

계몽적이고 목적론적인 단선적 발전사관에 많은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것.


그러나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합리적 이성에 대한 회의는 다양한 현대인의 욕구와 접근을 촉발시켰고

여기에 <미래를 읽으려는 인간들의 노력>은 개인 인자의 DNA에 대한 검토란 과학적 성과와 더불어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뿌리찾기>와 <복잡계>가 변형된 다양성, 소비시장의 조사 등과 어우러져

<변화 예측 가능한 뿌리로서의 원형>에 대한 연구로 문화인류학은 그 폭과 깊이를 증대시키고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문학과 역사, 경제와 정치, 철학과 종교를 통한 총체적 이해를 돕는데 기여하고 있다.

 

 


최근의 문화인류학이 “머리 기른, 혹은 털 없는 원숭이인 인간”이란 영역으로 깊어지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포유류로 존재하는 인간의 이해에는 공간적 차이와 특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선후경중의 문제는 아니지만, 시간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역사>를 통해 일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시공간의 밀도가 집약되고 공간적 괴리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문화의 입체적 재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화 바람에 편승한 노마드 기질의 강조는 현대의 인터넷 보급과 여행문화의 보편화에

기존의 보수적 학문적 성과인 대중적 출판문화와 다큐영상물 등을 추렴하면서

전문가보다 폭 넓은 불특정 다수의 아마추어들의 목적 없는 탐구와 실용을 벗어난 깊이를

상식과 교양으로 요구하고 있으니, 문화인류학은 더 이상 학문적 영역으로 가둘 수 없게 만들었다.




4.


오늘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이교수나 이슬람 문화, 그리고 문화인류학이 아니다.

또한 나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는, 문화인류학이나 이교수가 길잡이였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 읽었던 <쿠란>이 있고, 몇편의 헐리우드 영화와 <술탄 살라딘>같은 좋은 책도 있었고,

조금 더 넓게 접근하면 수많은 여행서와 역사서를 통해 한 지역과 그 특성을 이해해왔다.

그리고 이제, 기질이면서 습관이 되어버린 역마살과 역사와 예술에 대한 관심을 돌이켜 보고자 한다.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나의 탑에 대한 관심이나 유적과 유물에 대한 답사여행은

분명한 목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로 채워지지 않는 나의 갈증해소에 신선한 활력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진과 메모들이 문화와 예술, 역사란 순수의 이름으로 무장되는 편협함에 갇히는 걸 경계하고,

사람과 공간, 시간에 대한 원형과 변화의 동력, 그리고 발전방향에 대한 호기심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니,

그건 얼마전 색시에게 사사 받은 <에니아그램>을 통한 내 성향의 반성과 궤를 같이하기도 한다.

 

 

결국 자료를 통한 지식의 습득이나 여행의 자극, 철학적 사색이란 문화인류학이 지향하는 ;

공기처럼, 너무나 익숙하여 존재와 의미를 잊어버린 문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 위한,

내 스스로 닦고 체크해야할 거울을 만들고 찾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그 거울의 틀에 과연 사람에 대한 애정과, 보편적 인류애를 깔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이 필요하다.

어차피 나는 내 얼굴을 스스로 볼 수가 없다. 거울 없이는...

(나는 영원히 좌우가 뒤바뀐 형태로만 나를 볼 수밖에 없다. 물을 채운 삼각 프리즘으로 보면 모를까)

   

아무튼, 나는 그 거울을 찾기 위해 탑을 쫓아 다녔고, 답사여행을 즐겼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 번도 그 유적과 유물의 현재적 의미와 영향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바 없다.

어쩌면 이미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혹은 닮고자 하는 인간의 상>에 대해 모두 다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한걸음 물러나 유적과 유물을 통해 그 지역과 지역의 사람들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한 지역에 대해 안다는 것이, 그 지역사람들에 대해 안다는 것과 같을 수 없고,

지역과 지방, 즉 동질의 생활권이 갖는 성향이, 그지역 출신 사람들의 성향을 결정짓는 건 아니겠지만,

일정한 공간에서 한계 된 시간만을 존재해야하는 유한한 우리들에게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의 정서와 느낌은 쉽게 변하지 않는 풍습과 문화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문화라고 말하는 culture란, 정착에서 이루어지는 동질감의 원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미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시간. 파주 출판단지나 한바퀴 비잉 돌아볼까?

옹기종기 들어앉은 4층의 균등한 높이로 제어된 출판단지의 다양한 건축물들을 보면서 잡생각...

색시, 다음에는 조금 빨리 움직여 여기 건축물들 사진 한번 찍어 봐도 재밌겠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파주란 땅에, 출판이란 목적물을, 어떤 건축적 장치로 풀었는지...^^

엊그제 전라북도 지방의 탑에 대해 모아 본다는 생각에 서론이 여전히 길다. 아주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