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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잡생각...

헛생각> 칭찬하라, 칭찬 받기위해? ^^ ...090513

1.


고래를 춤추게 만드는 거,

둔재를 천재로 변화 시키는 거,

아부처럼 가볍지 않고, 비판처럼 날카롭지 않은

<칭찬>이라는 테제가 신드룸처럼 출판가를 휩쓴 적이 있다.


물론 관심없는 분들이야 신드룸이었는지, 심드렁이었는지 지나쳤을 거고,

나 같이, 책 내용이 책 제목을 넘지 못하는 것만큼 재미없다 여긴 사람들도

독서삼매의 열락을 비켜가셨겠지만

칭찬이란, 정말 책제목들처럼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학습(혹은 교육)의 효율과 조직내부의 소통,

그리고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배려란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 결과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심지어 무거움과 무표정의 상징일지 모를 코끼리까지 춤추게 만들어라는 강요까지 보태져,

가히 칭찬이라는 슬로건은 <웃음, 그리고 긍정의 미학>과 함께

지식경영과 자기암시의 선진기법처럼 우리들에게 각인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사회를 조금 더 밝게 만들고,

상대방도 인식하지 못한 숨겨진 잠재력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칭찬에 대해

불필요한 시비나 꼬투리를 달고 싶지도 않고,

중언부언의 설레발 예찬을 늘어놓고 싶어서가 아니라,

문득,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게 칭찬이라는 기(氣)가 아닐까 싶어 펜을 들어봤다.

 

 

<안성 봉업사터에서...> 




2.


꽤 오래전, 지역활동이라는 것을 해보면서 참 많은 분들을 만났던 기억이 있다.

30대 후반에서 50대 초입까지의 인생선배들을 만나는 작업이라 말도 탈도 많았지만,

한지역을 정리하면서 그 지역선배가 내게 마지막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 된다 ;

<나는 네게서 한번이라도 칭찬 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짙은 서운함에 심지어 자조적인 허탈감까지 섞인 탄식을 들으며 깜짝 놀랬었지.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배려와 소통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었을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내게 그렇게 차갑고 냉정했는가를 반문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칭찬하고 칭찬 받는 걸 내가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느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당시 나는, 부드럽고 유연한 인간관계보다 철저하고 엄혹한 자기단련에 몰두해 있었고,

수시로 변하는 우여곡절의 과정보다 의도한 결과에 대한 목적달성이 우선했을지도 모르며,

경험의 축적보다는 근본적 변화를, 현실의 괴리를 벼려줄 이상에 목말라하던 때,

아마도 나는 낭떠러지에서 기어 올라온 사자새끼만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는 그 형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지도와 보조만 넘나들었을 뿐인데,

그 형은 이미 일과 조직의 목적보다는 나와의 관계와 교감을 우선시 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는 나보다 훨씬 많이 마음을 열었고, 삶과 일의 잣대로 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역할과 지위고하를 뛰어넘어 진정한 교류와 연대에 대해 나는 무심했고, 그는 목말라 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3.


인간관계의 깊이와 폭, 그리고 지속성과 무관하게 칭찬은 유용한 기법이 분명하고,

조직이든, 친목이든, 혈연이든 <멘토와 멘티>를 지향하는 관계에서 칭찬은 더더욱 중요하다.

게다가 <칭찬의 진정성>은 관계의 시작과 끝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끈끈한 흐름이지,

자기암시와 조직경영의 기법과 습관으로 각색되고 훈련되는 매개가 아님도 분명하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칭찬하지 못하는 자가 타인에 대해 칭찬의 마력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사실, 나이와 성별, 교양과 무관하게 형성되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에서 칭찬의 진정성은

칭찬이 갖는 진지한 효과를 떠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잣대이며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칭찬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추지 못한 자는 타인을 포용할 수 없지 않을까?

어줍잖은 변명과 꿀발린 핑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나를 칭찬할 이유를 몰랐던 거 같다.

아마도 나는 나를 위한 목적을 우선시했지, 그를 변화시킬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진짜 공유하고 함께 남겨야할 것이 무엇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를 결코 몰랐음이 분명하다.

 

관계의 효율성과 공사의 경계를 넘지 못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일천한 경험과 충분하게 열리지 못했던 미천한 심성을 탓하면서,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칭찬과 어설픈 자만을 경계하면서,

내가 혹은 나를 바라보는 그 어떤 이와의 관계에서 <칭찬과 인정의 결핍>을 생각해본다.

 

 

 




4.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장 많이 칭찬 받은 곳-혹은 사람에게 우리는 <정>을 준다.

나를 가장 많이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기억해주는 것-혹은 사람에게서 우리는 <위안>을 찾는다.

그 곳-혹은 사람은 마음을 열게 만들어 주고 긴장을 풀어준다.

그 것-혹은 사람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재충전의 활력을 만들어 준다.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사랑하는 연인이든, 직장이든, 이상형이든, 멘토든 우리는 <마음>을 준다.


그런데 우리는 - 혹은 나는 칭찬에 인색하고 칭찬 받기만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자신을 칭찬한다는 어설픔에 자만에 빠지고,

상대방을 칭찬해야 한다는 호승심에 아부에 빠지고,

더 큰 칭찬을 남겨야 한다는 설익은 배려에 무관심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칭찬은 변화를 위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위해, 격려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칭찬은 효율과 매개와 지속성을 갖추기 위해 만들어진 기법이 아님도 분명하다.

혼을 자극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끌어내기 위해 연구된 교육수단도 아니다.

어쩌면 칭찬은 가장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애정표현이 아닐까 싶다.


선후와 경중, 그리고 완급조절은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칭찬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관심의 시작이며, 관심의 결과일 듯싶다.

칭찬은 웃음과 긍정과 희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장 기름진 토양이며

타인과의 배려와 소통, 그리고 자기자신과 친해질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매개(다짐)인 거 같다.


다만,

절제되지 않은 칭찬과

일방적인 칭찬,

그리고 자신만을 향한 칭찬은 약이 되지 못하고 독이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무튼, 최근의 나는 칭찬에 인색했고, 칭찬에 목말라 하는 거 같다.

내가 가장 많이 칭찬하고 칭찬 받는 곳, 그 곳과 사람에 조금더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칭찬하라, 칭찬받기 위해?!

타인을 칭찬하라, 나와 친해지기 위해?!

나 자신을 칭찬하라, 타인을 내 품에 안기 위해?!


여전히 나는 나를 가장 많이 칭찬해주고 인정한 당신을,

내가 가장 많이 칭찬해주고 인정한 당신을 칭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칭찬이란 개념>을 칭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