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여행은 항상 불완전하다.
계획적이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고,
충분히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두 번째고,
살아있는 시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세 번째다.
욕심 때문인지,
결핍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유일한 이유를 자극이라 이름 하는진 몰라도,
아직은 숙성되지 않은 부족함의 확인과 충만에 대한 갈증은 변함이 없어선지,
나는 여전히 돌아다니고, 돌아다니려 하고,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여행은 여직 불완전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 모내기전... 문득 이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떻게 세월을 지내왔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 시간, 그 곳에 아직까지 살고 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여행은 정말 모든 걸 충만하게 채울지도 모른다... 그때 나누는 이야기가 그곳과 그 시간을 다 포괄하지 못할지라도... 아무튼 나는, 이 아저씨의 반복된 생활과 나의 반복된 생활은 거의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나의 모습이 훨씬 변화무쌍(?^^)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거 같다...^^>
왜 탑을 보냐고?
탑이 그곳에 있어서...^^
어줍잖은 대답이지만, 그곳엔 자연이 있고, 역사가 있고, 향기가 있기 때문이지.
나의 여행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이미 오래전에 세워졌다 ; 보겠다는 게 나의 계획이니까.
나의 여행은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여유로운 것도 사실이다 ; 사진을 찍으니까.
그리고 나의 여행이 조금 더 풍성하게 살아있는 시간으로? ; 그건 아직 내가 젊다고 위안한다.
아직 나는 여행에서 살아있는 육성을 채취하고, 주변의 풍수지리를 논하기엔 충분하지 않음을 안다.
<Daum지도에서... 장곡사와 무량사를 가야겠다는 마음에 나선 길... 새로 개통한 151번 고속도로 청양IC를 나오면 곧바로 정산면 서정리다... 서남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오른쪽 위가 공주, 중앙 아래쪽이 부여고, 왼쪽-서쪽에 칠갑산이 있다... 백마강 지류가 흐르는 작은, 그리고 좁은 마을이다...>
오늘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
그냥가기 아까워 청양 장곡사 들렀다가 만수산 무량사 가는 길이다.
또 거기까지 갔는데 잠시 틈이 있을거라 생각하여 정산 서정리를 경유지로 결정했다.
작지 않은 구층탑이 있다길래.
만만치 않은 거리를 짧은 시간에 주파하려면 역시 몸이 고생해야하고, 작은 거짓말이 곁들여져야 한다.
2.
작은 마을이다.
면소재이지만 한눈에 대략의 경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최소의 필요만큼, 최소의 장치들만 존재할 수 있는 곳...
흐르는 곳도 고이는 곳도 아닌 적당한 규모의 마을이 적당하게 자리잡은 곳...
아마 이곳은 넘쳐도 쌓이지 못하고, 부족해도 견디지 못할 느낌이다.
<탑을 보면서 주변을 한바퀴 비잉 둘러봤다... 마을과 비교적 가까이, 그렇지만 충분히 떨어진 논 한가운데 탑이 서있다...주변에는 탑을 압도할 무엇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탑이 주변을 압도하지도 않는다...>
그런 느낌 때문일까?
공주와 부여의 삼각 꼭지점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칠갑산이 버티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백마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들판에서 농사도 짓고 물류도 모였던 정산은
3.1운동이나 항일의병, 그리고 더 멀리는 백제 부흥군이 근거지를 삼은 곳 중 하나다.
머물기에도 좁고, 갖추기도 어렵지만, 부족하면 떨쳐 일어나고...
쉽게 흐르고 나아갈 순 있지만, 지키기엔 어려운 곳이었으니 의병도 백제부흥군도 쓰러졌겠지.
<탑에서 바라본 정산면 시가지... 서정리다...>
야트막한 야산에 서남쪽 좁은 물줄기로만 뜨여있는 정산면에는
그런 순수함과 정갈함이, 때로는 우직하게 때로는 순박하게 때로는 노도처럼 흘렀겠지.
꼭 그런 느낌의 고려시대 구층탑이 백마강으로 향하는 동남쪽에 덩그렇게 놓여있다.
어느 흐름과 변화든, 내 몸과 맘이 편하면 결코 쉬이 변하지 않을 그런 느낌...
가볍다고 폄하하기엔 조용하고, 평화롭다고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곳을 지키며 서 있는 구층탑.
꼭 이 지역에 어울리는, 치장이라곤 찾을 수 없는 그런 순박함으로 우직함으로 탑 하나가 서있다.
<부여, 백마강 방향이다... 그쪽에 백제부흥군의 산성이 있었다는데, 역시 백제는 평야의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3.
종교와 사상이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고 껍질과 규범으로만 남았을 고려시대,
이미 생활이 돼 버리고, 일상이 돼 버렸지만, 정신적 형식적 구심의 역할은 포기하지 못했을 시기,
어떤 촌부의 과시욕과 넉넉한 재원에 적당한 설화가 붙여지면 상징이 생겨나고 랜드마크가 만들어진다.
꼭 그만큼의 정치적 욕구와 경제적 지원에 예술적 깊이가 더해지면 사람들은 상징물을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무덤을, 그리스인들은 신전을, 로마인들은 광장을, 중세유럽인들은 성당을 지었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무덤과 궁궐을, 일본인들은 성을 쌓았고, 고려시대 정산면에서는 탑을 쌓았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담았던 무덤의 양식도 희미해지고 - (사람들은 이미 이성적으로 변했지)
부처의 형상을 대신하던 상징이란 의미도 퇴색하고 - (사람들은 이미 부처형상의 불상을 만들었지)
사찰 가람의 중심적 요소에서도 밀려나고 - (사람들에게 깨달음은 마음 또는 불경에 있다고 변해갔고)
이제 탑이란 형식의 공예적 요소만이 남아있을 때 만들어졌겠지.
그러나 어떤 유적/유물도 만든 이의 정성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염원이 없다면
스스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이유의 충분함을 만족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느 유물이든 주변의 지세와 사람들의 심성, 그리고 시대를 반영할 수 있다면 생명력을 갖춘다.
만약 이 정산 서정리 구층탑이 공주나 부여, 또는 경주나 개성에 있었다면 절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고,
속리산 법주사나 가야산 해인사, 대둔산의 대흥사에 서 있었다 해도 절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돌산도 아니고, 뽀족한 산세도 없고, 급한 계곡물도 없어서 이 구층탑은 주변과 시대와 어울리지 모른다.
그리 넓지 않아 풍요롭지 않고, 그렇게 좁지 않아 초라하지 않으며, 그렇게 척박하지 않아 튼실하게,
꼭 그만큼의 크기와 높이와 미감으로 천년 세월을 버티며 역사를 지켜봤겠지.
<탑을 보면서, 논을 걸어가는 아저씨와 아직 갈아놓치 않은 논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4. 고려시대 탑 - 시대적 구분(사족...^^)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안내문에는 신라말, 고려초라고 표기 되어 있지만, 전혀 믿고 싶지 않다.
신라말 고려초라면, 개심사지탑, 춘군동 오층탑, 성주사지 오층탑, 광주 장운동탑이 해당될 것 같고,
정산 서정리 구층탑은 개성 현화사가 만들어진 1018년 전후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구층탑에는 아직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탑의 형식을 모두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탑신(탑의 몸돌)에서 우주와 탱주(모서리와 몸돌 중간의 기둥 모양의 양각) 문양이 희미해지고,
기단부 판석과 일층 몸돌 사이, 또는 옥개석(지붕돌)과 몸돌 사이의 돌출된 굄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개성 남계원탑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지붕돌의 두툼한 곡선이 충분히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면,
신라탑의 양식적 요소만 승계하고 건축적 결구가 사라져가는, 즉 퇴화되는 과정의 특징들이다.
<구층탑 기단부의 낮은 문양의 안상... 소박하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시대 탑파의 대표적 유형을 갖춘 탑들은 1050년~1150년 경에 만들어졌고,
(지광국사 현묘탑이나, 신복사지 삼층탑, 월정사 구층탑에는 고려시대 문화미의 정수들이 들어있다)
개성 남계원탑이나 화순 운주사탑군, 담양 읍내리탑, 서천 비인탑 등은 그 이후의 시대 것으로 보인다.
<강릉 신복사 삼층탑...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모든 특징들을 갖추고 있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탑으로 불러도 손색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강력한 중앙집권제하의 신라에서는 모든 석탑의 규격과 형식까지 통일 되어 있었지만,
지역연합 성격에서 지방분권으로 전화된 고려의 정치체계에 남아있는 강력한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일부 요소는 선택 유지되고, 또 다른 요인들이 가미되는 특성을 고려하면,
고려시대의 탑유형은 950년을 전후한 초기, 1100년을 전후한 중기, 1250년을 전후한 후기로 나눌 수 있고,
고려식 탑파가 완성된 시기는 1100년을 전후한 중기에 최고의 정점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정산 서정리 구층탑이 만들어진 시기를 1020년경(중기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며,
안성 봉업사 오층탑, 충주 미륵사지 오층탑, 춘천 근화동 칠층탑 등이 동시대 만들어졌고,
특히 상주 상오리 칠층탑이 옥개석 전각과 일층몸돌의 비례에서 차이가 날뿐 가장 유사한 형태라 생각한다.
결국 신라식 미감은 완전히 퇴색하고, 새로운 고려식 체감과 비례가 만들어지는 시점이 그때가 아닐까?
(조성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관촉사탑이나 현화사탑을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사실 이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므로 참고만 하시기 바람...^^)
<상주 상오리 칠층탑... 탑의 일층 몸돌이 조금만 낮았어도 훨씬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물론 체감에서는 상오리탑이 상승감을 강조하였고, 지붕돌 반전이 미비하여 직선으로 보이는 차이점이 있어, 이 탑이 훨씬 차분하고 단정하게 보인다...
서정리탑과 비교해보면 ; 같은 시골출신이라도 상오리탑이 때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 같다면, 서정리탑은 장년의 듬직함이 있다... 두탑만 놓고보면 추녀의 반전이 커서 장식적인 서정리탑이 오히려 남성적으로 보이고, 아무런 치장이 없는 상오리탑이 여성적으로 보인다...>
<춘천 근화동 칠층탑... 만약 일층몸돌 아래에 있는 굄돌만 없다면 이쪽의 미감이 서정리와 비슷했을까?>
5.
신라가 잊혀져 가고, 연합적 성격의 고려가 중앙집권을 인정한 분권형태로 재편되어가는 시점,
중앙과 지방 귀족에 차별화가 생기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서서히 분출될 즈음에
미래지향적인 참신하고 개방적인 형태보다는 과거를 갈무리하고 조심스럽게 내부를 추스르는 과정에서
현재의 완성태를 강요하는 의지로 만들어진 만들어졌다면 너무 비약일까?
<모든 것의 시작은 지난 흔적을 갈아 업는데에서 시작하는 걸까???>
한 지역에 한번의 태풍이 역사속에 이벤트처럼 존재하는 것은 비일비재하며 이것은 분명 우연이다.
그러나 한 지역에 시대를 앞서가거나, 새로운 시대를 거부하면서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서
지나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몸부림이 지속되면 이것은 지역의 전통이 되고, 색깔이 된다.
부여 사비성에서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 부흥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곳 정산면 일대는
근대의 항일 의병활동과 3.1운동의 지역 중심지로까지 그 저항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왔다.
<무뚝뚝하고, 무덤덤한 이 걸음이 왜 그렇게 이 서정리탑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덩그렇게, 혹은 멀쭉하게 서 있는 정산 서정리 구층탑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어떤 투박함을 느낀다.
하나의 상징과 구심으로 우뚝세워 치장하기에는 너무나 순박하고 단조롭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고 튼실하게 세워져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자못 듬직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냥 지나치는 길에 들른 곳이지만, 여전히 이곳은 지키기에는 작고, 나아가기에는 좁아 한계가 있지만,
흐르지도 고여 있지도 못하는 소박하고 진솔한, 바람과 물과 땅과 역사(風水地理)의 향기를 느낀다.
논 한가운데 서있는 작지 않은 구층탑을 보면서 서정리, 정선면, 청양읍, 충청도의 맛을 찾아본다.
<오늘은 탑을 보면서 탑을 느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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