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람과 함께, 빛과 함께, 단아한 모습으로...
3-1) 합천 매화산 청량사 삼층석탑 (보물 266호, 9세기중(신라), 4.85m)
2-13) 의성 사자산 관덕리 삼층석탑 (보물 188호, 9세기중(신라), 3.65m)
3-2) 영양 미천골 선림원터 삼층석탑 (보물 444호, 886년(신라), 5m)
3-3) 원주 거돈사터 삼층석탑 (보물 750호, 9세기(신라), 5.45m)
3-4)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층석탑 (보물 186호, 9세기(신라), 4.5m)
3-5) 합천 황매산 영암사터 삼층석탑 (보물 480호, 9세기(신라), 3.8m)
3-6) 홍천 물걸리 삼층석탑 (보물 545호, 9세기중(신라), 4m)
3-7) 성주 백운리 법수사터 삼층석탑 (경북 86호, 신라말, 6m),
3-8) 횡성 중금리 삼층쌍탑 (강원 19호, 8세기(신라), 6m),
3-9) 산청 지리산 단속사 삼층쌍탑 (보물 72,73호, 800년 전후(신라), 5.3m),
1.
직장생활-사회생활이 맞나?- 하다보면 이상한 원칙 한두개씩은 갖게 된다.
그중 하나가 기쁨은 외면(?)하고 슬픔은 챙겨라는 말이다.
본디 친구란 기쁨은 배로, 슬픔은 반으로 만든다는데,
아무래도 비즈니스 관계라는 게 친구처럼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못하지만,
친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부디껴야 하는만큼, 그런 경험적 타협점을 만들게 되었다싶다.
그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조금 난감해진 소식이 날아왔다.
장례식장이 경남 남해라는 거...
시간 조절이 가능한 慶事(경사)와 달리 弔(조)사란 본디 예고없이 찾아오는데다
하필 월말에 월요일인지라 공간상의 거리문제도 있지만,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다.
이렇게 저렇게 조문단을 꾸려봤지만 직원들은 어차피 움직이기 힘들고,
상주와 가까운 지인들을 중심으로 약속 했지만, 결국은 항상 가는 사람들만 가게 마련...
멀고먼 남해까지의 여정이 시작됐다.
너무 멀지?
나비양을 찍어보니 400km 전후, 숫자가 주는 압박보다 감당해야할 육체가 미리 피곤하단다.
태풍은 온다지, 비바람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 도대체 이 먼 길을 그냥 올라오기가 싫다.
온갖 잔머리가 굴러가고, 보리암과 산청 단속사지 - 내원사로의 이정표가 만들어진다.
<남해대교... 꼭 사진기를 들어야 했을까? ^^>
본디 남의집 경조사에서 초대한 이와 대면하는 시간은, 준비하고 이동하는 시간의 1/10도 안 된다.
숱한 감언이설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일정들이 꽉 짜인 사장들이라 모두 밤늦게 출발들 하고,
결국 혼자 남아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며 남해에서의 멋진 일출과 월야를 계획했지만,
아무래도 올라가는 거리가 너무 부담스러워, 결국 미조리항과 보리암은 포기하고 산청으로 출발...
장중한 남해의 일출을 생각 안 한건 아니지만, 인천앞 갯벌도 바다는 바다인데다,
곤파스의 심술로 뭉개질 일출보다는 지리산 안개속에서 만나는 단속사탑이 더 궁금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먼길을 내려와 "산청" 이정표를 보면서 보고픈 곳을 놓치기에 주어진 시간은 늘 짧다.
<남해에서 올라가다보니 산청보다는 단성IC가 가까웠다... "운리" 뜻은 모르겠지만, 12시가 넘어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안개는 정말 한 치앞도 보이지 않았다...>
2.
참 어렵게 당도한 길...
많이, 아주 많이 고대하고 기대했던 곳...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고 싶었던 이름...
내가 다시 취직하고 한 번도 떠나 본적이 없는 여름휴가지만,
무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올해에는 기필코 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엘 내가 왔다.
<단속사지 삼층석탑... 노반이 살아있는 게 동탑이다... 파손은 적지만, 서쪽에서 바라보면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얀...
백옥같이 하이얀 탑 두기가 서 있다.
하해서 정갈한 게 아니고, 하얗기에 단아한 게 아니지만,
숨길 수 없는 우아함이 내 마음 깊숙이 울림으로 다가오기에 하얀 색깔이 더 곱게 다가온다..
<단속사탑 석질... 화강암도 자세히보면 색과 결과 강도가 다르다... 석가탑과 감은사탑의 석질이 다르듯이... 우유빛, 혹은 연한 아이보리색을 띠는 석질이 가장 일반적이고 보기도 좋지만, 이렇게 하얗게 보이는 것도 독특했다... 일반 화강암보다는 화강편마암이나 변성암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고... 석재의 결은 직지사 삼층석탑과 비슷하다는 생각...^^>
그래~~~
이런 걸 기다렸었지.
가려지지 않는 기품에, 귀하디귀한 땀방울로 갈무리된 정성을...
향기가 되고, 울림이 되고, 빛이 될 수 있는
그런 예술, 그런 정신, 그런 기도를 보고 있다.
탑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 그리워했을 것이다.
탑은 나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나는 여전히 엊그제의 조우를 간직할 것이다.
내 마음이 이리도 가벼울 수 있는 것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좁지 않은, 너른 자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향기와 빛과 울림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단속사 삼층석탑 중 서탑이다... 파손의 정도는 동탑보다 심하지만, 전체적인 비례와 안정감은 서탑이 더 괜찮다는 생각도... 그리고 전각이 모두 살아있는 동탑이 경쾌하고 유려하게 보인다면, 전각이 부분부분 깨어진 서탑은 단정함과 준수한 느낌이 크다...^^>
우아하다.
단아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참, 간만에 맘껏 내가 아는 단어들을 나열해 본다.
우아함의 색깔이 하나가 아니고,
단아함의 품격이 하나가 아니고,
아름다움의 깊이가 하나가 아니지만,
단속사지의 삼층쌍탑은 분명 그러하다.
<주변에 보이는 민가들은 단속사 영내다... 저 민가들이 있던 곳을 꽉 채웠을 가람 배치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지만 준수하면서도 수려한 자태가 우아함이고,
장중한 권위와 소박한 내숭이 배제된 적절한 크기와 흐트러지지 않는 정연함이 단아함이고,
안정됨과 상승감을 살린 세련된 비례가 바로 아름다움이다.
삼층쌍탑에 빼앗긴 내 맘과 두 눈에는 주변의 모든 조화가 탑을 위해 존재하니 그게 아름다움이다.
너무 좋다...
3.
단속사에 대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남명 조식과 신라에 처음으로 선종, 그중에서 북종선을 전래한 신행, 그리고 경덕왕이겠지?
손오공을 거느렸던 삼장법사 현종이 선덕여왕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측천무후시대 사람이고,
그때부터 당나라의 불교가 가장 왕성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지 100년이 지났으니 이젠 선종의 시대.
당나라에 선종이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뿌리를 내릴 때 신라는 이제야 화엄종으로 대승불교를 완성한다.
물론 신라의 대승불교는 인도의 석가모니에서 유래된 불교의 최고 정수를 완성한 결정체였고,
그 끝이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었으니 신라의 경덕왕은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할만한 인물이다.
달이 차면 기울고, 해가 뜨면 지는 법이니 교종으로 꽃피운 불교는 이제 선종을 잉태하게 되고,
그 씨앗이 신라에 싹뜨기 시작하니 선종을 전파하기 시작한 신행이란 이는 시대를 앞선 선각자였고,
그 신행을 품을 수 있었던 단속사를 거찰로 용인한 경덕왕은 역시 희대의 경륜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조우할 수 있었던 공간이 바로 단속사터였으니 이것만으로 명당지처가 아닐까?
솔거가 그린 유마상과 신행이 그린 경덕왕 초상이 이곳 단속사지에 조선 초기까지 남아 있었지만,
(유마는, 부처도 보살도 아닌 처사가 궁극의 도를 깨우쳤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대승불교의 완성태다)
새짚신을 신고 돌아보다 다 닳아졌다는 그 넓은 단속사는 조선시대에 파괴되고 폐허로 전락하니
그 첫 번째 시련기가 남명조식과 그 유생들이 자리를 잡았던 조선 선조시대이고,
그나마 남았던 명맥이 완전히 끊기고 마을로 뒤바뀐 것은 625전쟁때의 빨치산 토벌 작전 때이다.
<감은사탑에서 석가탑, 단속사탑까지 변하지 않은 것중 하나가 기단부(갑석이라 부른다)의 얕은 이단 받침(중석 받침 혹은 몰딩이라고도 부른다)이 곡선+직각이라면, 일층 몸돌의 이단 받침(옥신 괴임이라고 부른다)은 직각+직각이라는 점... 그 작은 차이가 전체적인 미감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
사실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조식은 단속사 유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으나
내가 볼 때 오늘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단속사의 첫 번째 파괴자는 분명 남명 조식이 분명하다.
퇴계 이황과 영남학파의 동쪽과 서쪽의 수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남명조식은
이황이 “경”을 성리학의 완성이라고 보았던데 반해 “경의”를 유학의 완성이라고 보았던 사람이다.
이황을 공자와 비슷한 경향의 경륜가로 본다면, 조식은 유대교의 율사 같은 사람이었다.
<기단부(지대석) 주변에는 술정리탑처럼 판석이 깔려 있다... 아마 석가탑의 팔방 금강좌가 퇴화된 듯 싶다...>
<내가 좋아하는 탑들의 비례를 보면, 기단부에서 일층 지붕돌까지의 높이와 기단부 판석에서 삼층 지붕돌까지 높이가 거의 같거나 상부(자주색①)가 더 높다... 그리고 체감률을 보면 단속사(검정색①)처럼 지붕돌의 끝선이 기단부와 일치하면 안정감이 살아난다... 이건 다음에...^^>
이황이 개체의 완성인 경을 통해 관계와 사회의 시스템을 왕도를 통해 구현하고 구축하려고 했다면,
조식은 개체의 완성인 경에 관계의 원칙인 의를 더해 유학 이외에 어떠한 사상과 신념도 적대시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유일사상에 근거한 폐쇄성과 강고함이 임진왜란때의 의병장들을 만들어냈고,
이 지역 후인들에 의해 전수된 그의 사상이 조선후기 위정척사파의 고집스런 쇄국정책으로 이어졌지만,
그들의 성향에 의해 단속사는 철저히 파괴되고 불 질러지고, 그리고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숱한 자료에 남명 조식과 단속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명에게 딴지를 거는 건,
남명과 단속사가 사상적으로나 영향력에서 모두 당대를 풍미할만큼 체계적이고 완성된 형태임에도
남명의 배타적인 신념은 파괴와 축소를 강요했고, 단속사는 변화의 흐름속에서도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내가 남명의 학풍과 영향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도 없고, 부족한 내용에도 이렇게 비판하는 이유는,
단속사 삼층석탑에서는 축소와 퇴화와 변형속에서도 밝고 맑은 향기를 느끼기 때문이고,
그것은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정체성을 잃치 않는 현실적이면서도 당당한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이곳에서 남명 조식과 그의 유생들이 공부했다는 것만으로 매화향 그윽한 단속사터를 그릴 수 없음은
사상이 남긴 편협함과 파괴의 옹졸함을 비단 시대의 조류로 수긍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물론 남명의 유생들과 그들의 학풍이 남긴 우리역사의 긍부정에 냉정한 저울을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지리산 천왕봉의 큰 울림을 느끼고자 했던 이들을 영남학파로 국한시키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우려가
단속사 삼층 쌍탑이 비단 유려함과 수려함으로만 보이지 않게 만드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하다.
한 고을이 들어서기에는 좁은 자리임이 분명하지만, 하나의 절터가 자리잡았다면 광활한 공간이다.
좁고 굽은 길을 꼬불꼬불 넘고 넘어 들어선 운리, 그 이름처럼 운무가 가득한 한 지역,
우뚝 솟은, 너무 커서 태연자약한 지리산의 한자락에 기대어 천년을 의연히 지켜온 삼층석탑...
아직 내 눈에 최치원의 신선놀음도 남명과 그 유생들의 매화타령도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그리고 빨치산으로 각인된 지리산의 또다른 이름이 낯선 이유는 삼층쌍탑이 너무 초연하기 때문이고,
斷(단)俗(속)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곳에 살고 있는 농부들이 너무 무심하기 때문이다.
4.
참 수려하지?
저 당당한 지리산 자락에도 의연하고 준수하게 자리잡은 모습이?
참 단아해...
이 깊은 곳, 인적과 적막이 끊어졌을 그 먼 시대에 무엇을 완성시키려 저리 생기발랄할까?
참 우아해...
권력에서 멀어지고, 속세에서 지워지고, 마음만 남았을텐데 그 품위는 어디서 만들어졌을까?
참 아름답다...
영화의 흔적은 세월에 파묻어 버리고, 파괴의 흔적은 매화향으로 지웠지만
그 자태만은 숨기지 못했으니 아름답다는 말을 아낀들 무슨 미련이 남겠어.
내가 기대한 것보다 좋았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이곳이 맘에 들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의연하고, 준수하고, 좋다.
한 백이삼십년전쯤, 감은사탑, 고선사탑을 만들었던 후인들이 만들었을거야.
삼층쌍탑을 저렇게 정성스럽게, 흐트러짐없이, 꽉차게 만들었다면 분명히...
<감은사 삼층쌍탑과 단속사 삼층쌍탑의 비교... 서로 전혀다른 미감과 체감을 가지고 있지만, 왠지 축소판 같다는 생각도 들지?^^>
한 삼십년전쯤, 석가탑, 술정리탑, 봉기동탑을 만들었던 후인들이 만들었을거야.
삼층석탑을 저렇게 준수하면서도 생기 넘치게, 수려하면서도 우아하게 만들었다면 분명히...
갈항사탑, 용명리탑, 보월동탑을 만들었던 후배들이나 자식들이 만들었을지도 몰라.
한두개씩 빼고 줄이고 조금 작아졌지만, 그런 탑을 만들어보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정신을 이어가고, 문화를 보존하고, 그리고 예술을 완성하고...
단속사지 삼층쌍탑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완성을 보고 있다.
의연한 자존과 장중한 권위를 내세우던 감은사탑에서 보았던 첫 번째 완성에 이어서...
하늘과 땅을 꽉 채운 지고지순한 미와 환희를 숨겨놓았을 석가탑, 원원사탑에서 보았던 두 번째 완성에 이어,
충만의 즐거움과 평화의 미소를 느끼게 하는 세 번째 완성을 보고 있다.
내가 단속사탑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다.
장중한 당당함과 생기발랄한 경쾌함, 소박한 무심함과 초연한 의지를 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단속사탑을 보면서 나는 우리 최고와 최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도 없다.
내가 단속사 삼층쌍탑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또 다른 완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꽉찬 감동과 여유로운 감흥, 그리고 자연스러운 품위...
단속사라는 공간과 경덕왕의 호연지기, 그리고 주체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
그것들이 어우러진 1200년전,
꼭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과거의 어느 시점에 깃든 완성의 미소를 보았다.
단속사탑을 보면서 내 얼굴에서 기쁨과 즐거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정성이 만든 하나의 <완성태>를 느꼈기 때문이며,
궁극으로서 완성은 아니지만,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변화를 수용한 그 담대함과 현실적 감각이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속사 삼층석탑이 좋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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