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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탑1-9> 내가 제일 좋아하는 - 경주 원원사탑...101224

 

 

1. 내가 제일 좋아하는...

2. 느낌이 있는, 닮고 싶은...

3. 바람과 함께 빛과 함께, 단아한 모습으로...

4. 남성적인 혹은 여성적인...

5. 무시할 수 없는 시대의 미감...

6. 역사와 함께... 목조번안탑

7. 역사와 함께... 모전석탑의 다양한 미감

8. 놓치기 싫은...

9. 보고 싶은...

 

 

1. 내가 제일 좋아하는 ...

 

1-0)  경주 감은사 삼층쌍탑                  (국보 112호, 682년(신라 문무왕), 13.4m),

        경주 고선사 삼층석탑                  (국보 38호, 686년(신라 문무왕), 9m, 경주박물관)

1-0)  경주 토함산 불국사 석가탑           (국보 21호, 742년(신라 경덕왕), 8.2m),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국보 34호, 8세기중(신라 경덕왕), 5.75m)

1-0)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                   (국보 9호, 6세기(백제 위덕왕), 8.33m)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 289호, 7세기초(백제 무왕), 8.5m)

1-4)  경주 토함산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742년(신라 경덕왕), 10.4m)

1-5)  원주 법천리 지광국사현묘탑           (국보 101호, 1085년(고려), 6.1m, 경복궁)

1-6)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785년(신라), 14.5m)

1-7)  영양 입암 산해리 봉감 오층석탑      (국보 187호, 신라, 9m)

1-8)  구례 지리산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35호, 8세기중(신라 경덕왕), 5.5m)

1-9) 경주 삼태봉 원원사 삼층쌍탑     (보물 1429호, 8세기중, 7m)

 

 

 

 

 

1.

 

원원사탑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상상을 한다.

이 탑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하는...

 

<경주 삼태봉 원원사 삼층쌍탑     (보물 1429호, 8세기중, 7m) >

 

 

깨어지고 부서지고 만신창이가 된 삼층쌍탑을 보면서

나는 망가진 탑재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느끼고, 노래한다.

 

 

<처음 이 탑을 찍으면서 어려웠던 것은, 가장 덜 부서진 면을 찾는 일이었다... 삼층쌍탑의 여덟면에서 아마 원형을 추정하기에 가장 좋은 방향의 사진일듯 싶다...2003년>

 

 

우아하면서 도도하지 않은,

튼실한 교양에 활달한 웃음,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아리따운 지성을 만난 듯한 착각...

 

<원원사 삼층쌍탑의 사천왕상은 옅은 부조의 조각이라기보다, 환조에 가깝게 볼륨감을 가지고 조각되었다...>

 

 

2003년의 느낌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나에게 하나의 미감을 추가하고 싶다.

사랑스러운 탑이라는 말을...

 

 

 

우아하고 세련된,

활달함에 깃든 생명력과 차분한 정갈함...

내가 좋아하는 삼층석탑에서 절대미감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원원사탑을 맨 앞에 둘 것 같다.

 

 

 

 

 

2.

 

삼층석탑 사이의 초라한 무덤이 아마도 1809년 울산에 살았던 이모씨의 무덤일지 모른다.

원원사를 파괴하고 삼층쌍탑을 쓸어버리고 지금은 초라하게 흔적만 남은 무덤을 만들었다.

1921년 부서진 탑재들이 발굴되고, 오사카의 김모씨(분명 한국인이었을 것이다)가 일차정리를 하고,

1926년부터 원원사지에 드나들던 <노세 우시조>에 의해 삼층쌍탑은 복원된다.

 

<원원사지 전경... 가운데 보이는 봉분이 아마 1809년 울산에 살았다는 이씨의 무덤이 아닐지...>

 

<여기 자료들은 1931년 <조선>과  1933년 <건축잡지>에 실린 자료로, 다음블로그 - 월강님의 포스팅에서 스크랩하였다... 이 사진은 노세 우시조가  1931년 <조선>지 10월호에 기고한 "원원사의 탑과 십이지신상에 대해"라는 글의 자료다...> 

 

 

경주고적보전회에서 정리한 원원사에 관한 자료를 보면,

오사카 긴타로씨 말대로 노세 우시조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원원사탑은

여전히 땅속에 묻혀있었을지 모른다.

  

 

 

 <월강님 포스팅에서 스크랩한 이 사진은 1933년 <건축잡지>11월호,후지사마 가이지로의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삼층석탑론"에 수록된 "원원사지 석탑의 파손상태"이며, 그의 박사논문 <조선건축사론 : 특히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불교건축에 대해>의 일부분이다... 사진은 1931년 9월에 촬영됐다는 부언이 있다...>

 

 

 

 

9차례에 걸친 방문과 조사, 그리고 자신의 일본 집까지 팔아 발굴하고 복원한 삼층쌍탑과 원원사지...

그에게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삼층석탑이 신기하고 독특했겠지만,

땅속에 묻힌 30여톤의 석탑 부재들에서 그는 이미 이 탑의 아름다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산산히 부서진 일층몸돌을 이어붙인 정성을 보면 정말 눈물겹다... 1만조각이 넘게 박살난 지광국사현묘국탑의 지붕돌은 그나마 우리 손으로 복원했다지만, 노세 우시조의 헌신은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노세 우시조...

그에게는 원원사탑의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보였을까?

무엇이 그를 이 탑에 수년의 공력과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하게 했을까??

복원된 삼층쌍탑의 모습에서 그는 충분히 만족했을까???

 

 

 

 

 

 

3.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탑 중에 유일하게 국보가 아닌 게 원원사탑이다.

처음엔 보물로 쳐주지도 않다가 몇 년전에야 보물 1429호로 지정된 원원사탑은

기단부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일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부조되어 있는

높이 7m의 삼층쌍탑으로, 신라 경덕왕 후대인 78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블로그의 내 포스팅을 눈여겨 본 이들은 기억하겠지만, 나는 유독 경덕왕을 좋아하고 강조한다.

불국토를 지향했던 신라에서 스스로 전륜성왕으로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의 멸망이후 한반도 지배야욕을 숨기지 않았던 당나라 군을 철수시킨게 경덕왕이고,

불국사, 석굴암 등을 창건하며 전성기 신라문화의 정수가 완성된 시기가 경덕왕 대이다.

 

<탑은 바라보는 위치와 거리, 그리고 높이에 따라 판이한 미감을 드러낸다... 나는 5.5m가 넘는 탑을 더 높게 평가하는데, 그것은 크고 높아서라기 보다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우러러볼 수 있는 높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키의 3배까지는 일체감과 편안함을 주지만, 그걸 넘어서면 높이와 불륨을 가늠하기 쉽지 않아진다... 상대적으로 11m를 넘어가면 우리들은 높이와 크기를 가늠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물론 나는 그의 허물을 숨기고 싶지 않고, 그의 실패는 곧바로 신라의 몰락이었음도 부정하지 않는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영조, 정조가 조선 중기의 마지막 군주였듯이

신라의 성덕왕과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마지막 군주였고, 이후 신라는 지루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가 만들었던 모든 시스템은 수정, 철회되었고, 그때부터 나라와 왕은 백성들의 마음에서 지워지게 된다.

 

 

 

그런 실책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영-정조와 신라의 성덕-경덕왕을 칭송하는 것은

그들로 인해 조선과 신라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저력을 발휘해 한 시대의 문화에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사상-정치-경제의 일체화를 꿈꾸며, 모든 역량과 잠재력을 동원하여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향을 제시했고,

비롯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남긴 꿈과 비전은 오랜 세월 민초들의 희망의 나침반이 되었다.

그들로 인해 만들어지고 남겨진 것들이 신라와 조선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결정체임은 분명하다.

 

 

 

<원원사지 석등부재... 신라의 석조예술이 절정이 이르렀던 780년대, 만약 이 석등이 그때 만들어졌다면 어떤 비례와 모습을 간직했을까? 법주사 사천왕상 석등의 모습일까? 아니면 경주박물관에 있는 경주읍내리 석등의 축소판일까? 단아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색감이다...>

 

 

 

4.

 

김유신이 불사를 일으켰던 원원사지의 원원사탑은 분명 석가탑 보다 늦게 만들어졌다.

노세 우시조는 2할, 즉 석가탑(8.2m)보다 20% 정도 작아진 23척 남짓 = 7m 크기로 말했지만,

실제 석가탑의 노반까지를 비교하면 낮아진 높이는 10% 차이에 불과할 것으로 보이고,

기존 석탑들의 몸돌에 장식되었던 문비와 인왕상에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을 처음으로 새겼다.

 

<원원사지 삼층쌍탑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이 신상들은 도포를 입고 있는데, 경주의 왕릉과 삼층석탑에 남아있는 십이지신상이 모두 도포를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김유신묘를 제외한 흥덕왕릉, 진덕왕릉, 구정리방형분의 십이지신은 모두 갑주(갑옷)를 착용하고 있다... 원원사지 삼층쌍탑의 십이지신은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모두 왼쪽을 바라보는데, 유일하게 축신만 오른쪽을 바라보게 조각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석가탑과 절대적인 차이는 조각이나 높이보다, 2층 지붕돌의 두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자료에 의하면 석가탑 2층 지붕돌 두께는 783cm로 일층 지붕돌 843cm보다 60cm가 작게 나오지만

이 수치는 몸돌 괴임대를 포함한 수치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층 지붕돌이 일층보다 두껍다.

그에 반해 원원사탑의 지붕돌은 1층>2층>3층으로 훨씬 편안한 체감을 유지하고 있다.

 

       

<경향신문에서 스크랩한 석가탑의 황금비례... 황금비례는 1:1.618의 비로 우리가 쉽게 접하는 명함이나 담배갑이 이 비례를 따르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 등 그리스 건축에서 찾아진 이 황금비는 오늘날까지 유효하며, 최근 김효율 교수는 석가탑에서 황금비를 찾고 있다... 일층 몸돌 : 일층 지붕돌, 이층 지붕돌 : 이층 몸돌, 삼층 지붕돌 : 삼층 몸돌의 비례가 황금비 1:1.618과 비슷하다... 그러나 석굴암과 불국사의 도해를 찾아보면 신라에서 주로 사용했던 황금비는 1:1:√2 비례가 많고, 조선시대 가장 많이 사용된 비례는 2:3가 많다... 이 외에도 1:2:√3도 황금비의 일종이다...

* 그리고 옆 그림은 흔히 사용되는 삼층석탑의 도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석가탑의 도해와 전혀 다름을 읽을 수 있다... 오히려 삼층석탑의 이상적 모습으로 인용되는 오른쪽 그림의 비례나 체감, 볼륨 등이 원원사지 삼층석탑과 유사하다...>

 

 

석가탑에 트집을 잡으면서 원원사탑의 완벽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자료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석가탑은 이층 지붕돌이 일층보다 두꺼워지면서 새로운 미감을 만들어 냈다.

석가탑을 보는 사람들은 결코 이 탑에서 가벼움을 느끼지 못하며 늠름한 기상까지 엿볼 수 있다.

즉 지붕돌 크기와 볼륨이 1층>2층>3층으로 되었다면 석가탑은 훨씬 가늘고 늘씬한 미감에 멈췄을 것이다.

 

<석가탑 부분... 아무리 살펴봐도 이층지붕돌이 일층지붕돌보다 두껍다... 다보탑 보수중 찍은 사진으로 이층몸돌과 수평의 높이에서 찍었으므로 단초점 사진의 보정치(중앙기준점에서 멀어질수록, 상하좌우 끝부분은 실제보다 길어지는 것이 사진의 한계다)를 둔다해도 내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신라인들과 아사달이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인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장치로 인해 석가탑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비례를 갖추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석가탑... 밑에서 올려보면 이층지붕돌의 두터움이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일층 지붕돌은 충분한 넓이로 상승감을 살렸고, 이층 지붕돌의 두툼함으로 인해 위에서 꾸욱 누르는 힘과 단호한 기상같은 것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만약 석가탑의 이층지붕돌이 원원사탑처럼 얇아졌다면, 석가탑에서 우리는 남성적인 힘이나 우람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층지붕돌이 두꺼워지면서 석가탑의 윗부분은 강인한 임펙트와 함께 미감은 새롭게 반전된다.

튼실한 어깨와 활짝 편 가슴을 보듯, 유약함과 가벼움은 사라지고 상승감과 당당함이 함께 다가온다.

석가탑과 가장 유사한 미감을 갖춘 탑이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청도 봉기동 삼층석탑이다.

물론 석가탑과 2m 정도 차이가 있지만 이 탑들 역시 우아하면서도 엄정한 미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석가탑에서 느끼는 미감과 기상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쌍둥이처럼...^^>

 

 

이에 반해 원원사지 삼층쌍탑은 1,2,3층 지붕돌에 자연스러운 체감비례가 적용되었다.

당당함보다 우아함이 살아나고, 엄정함보다 부드러운 미감이 살아나게 된다.

낮아진 일층몸돌과 볼륨은 돌출된 사천왕상으로 보충되며, 작아진만큼 경쾌함을 살릴 수 있었다.

모두가 세련된 우아함과 나약하지 않은 의연함을 갖추고 있고, 여기에 날렵함과 상승감까지 추가되었으니

가히 삼층석탑의 백미들이 아닐까 생각되는 게 이 탑들이고, 그 탑들의 차이가 아닐지...

 

<청도 봉기동 삼층석탑... 조금만 더 컸더라면 술정리동탑과 완전히 쌍둥이다... 크기가 작아진만큼, 이층 지붕돌이 얕아진만큼 훨씬 단아하고 차분해졌지만,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 아주 미세하지만...^^>

 

 

석탑의 미감에서 지붕돌의 두께와 몸돌의 높이와 넓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요한 요소다.

일례로 6m 전후 크기의 미탄사탑을 보면 정연함과 준수함을 갖췄지만 경쾌함과 상승감은 느끼기 어렵다.

자세히보면 2층 몸돌이 탑 전체의 체감을 맞추기 위해 지나치게 작아진 때문이다.

반전의 각도, 지붕돌의 곡선, 기단부의 넓이와 판석의 두께에 이르기까지 어느하나 소홀할 수 없지만,

몸돌의 넓이와 높이만큼, 지붕돌의 넓이와 두께는 보이지 않는 미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경주 미탄사 삼층석탑... 이층 몸돌의 폭=넓이가 일층 몸돌에 비해 급격히 좁아졌다... 준수한 청년의 느낌은 살았지만, 중후하고 당당한 기상은 훨씬 적어진 느낌... 석가탑이나 술정리동탑과 큰 차이다...>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 비록 보물로 지정된 탑은 아니지만 봉기동탑의 미감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지붕돌의 비례는 원원사탑과 훨씬 유사하다...>

 

그리고 원원사 삼층쌍탑과 가장 유사한 비례를 갖추고 있는 탑은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이 아닐까싶다.

물론 성주 보월동의 삼층석탑도 비슷한 배율을 갖추었지만 작아진만큼 훨씬 단아하고 차분한 느낌이다.

이에 비해 원원사탑과 용명리탑은 석가탑, 술정리탑, 봉기동탑에 비해 훨씬 여성적이고 부드럽다.

마냥 우러러보이는 권위도 없지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은 절로 탄성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나는 삼층석탑에서 가장 완벽한 비례와 체감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원원사탑을 꼽고 싶다.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 아마 원원사탑의 지붕돌이 완전했다면 이 같은 미감이 아니었을까? 삼층석탑의 완벽한 미감을 지니고 있는 몇 안되는 소중한 탑이다...> 

 

 

5.

 

하나 막힘이 없는 시원시원함,

어디 하나 군살없는 담백함과 날렵함,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화사한 자태에,

원원사탑은 부드러움과 경쾌함,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까지 갖추었다.

그렇게 살아난 세련된 우아함...

 

 

이것을 빗은 장인의 손길은 얼마나 거칠고 정성스러웠을까?

이것을 다듬은 석공의 마음은 얼마나 풍요롭고 충만했을까?

이것을 그리고 완성한 이들의 땀방울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과 환희가 깃들었을까?

 

 

정말 아름답고

정말 사랑스러운 탑...

지금은 깨어지고 부서지고 뭉글어진 원원사탑에서 그럴 수없이 평온하고 평화로운 환희를 느낀다.

그런 외연을 갖춘 탑에서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원원사지에 서서,

원원사 삼층쌍탑을 보면,

사라진 조각들까지 살아난 아름다운 화음이 절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