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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탑1-5> 지광국사현묘탑 뜯어보기 -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1109

 

 

 

1. 내가 제일 좋아하는...

2. 느낌이 있는, 닮고 싶은...

3. 바람과 함께 빛과 함께, 단아한 모습으로...

4. 남성적인 혹은 여성적인...

5. 무시할 수 없는 시대의 미감...

6. 역사와 함께... 목조번안탑

7. 역사와 함께... 모전석탑의 다양한 미감

8. 놓치기 싫은...

9. 보고 싶은...

 

 

1. 내가 제일 좋아하는 ...

 

   1-0)  경주 감은사 삼층쌍탑                       (국보 112호, 682년(신라 문무왕), 13.4m),

           경주 고선사 삼층석탑                       (국보  38호, 686년(신라 문무왕), 9m, 경주박물관)

   1-0)  경주 토함산 불국사 석가탑                (국보  21호, 742년(신라 경덕왕), 8.2m),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국보  34호, 8세기 중반(신라 경덕왕), 5.75m)

   1-0)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                       (국보    9호, 6세기(백제 위덕왕), 8.33m)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 289호, 7세기초반(백제 무왕), 8.5m)

   1-4)  경주 토함산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742년(신라 경덕왕), 10.4m)

  1-5)  원주 법천리 지광국사현묘탑     (국보 101호, 1085년(고려), 6.1m, 경복궁)

   1-6)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785년(신라), 14.5m)

   1-7)  영양 입암 산해리 봉감 오층석탑         (국보 187호, 신라, 9m)

   1-8)  구례 지리산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35호, 8세기 중반(신라 경덕왕), 5.5m)

   1-9)  경주 삼태봉 원원사 삼층쌍탑             (보물 1429호, 8세기 중반, 7m)

 

 

 

 

 

 

 

광주 동오층, 서오층탑에 대한 답사기를 올리면서 그런 말을 한 적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오늘 지광국사현묘국탑(엄밀히 부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탑이라 생각한다^^)을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한다(최근부터 ‘부도’, ‘부도탑’이란 명칭을 ‘승탑’으로 조정했다고 한다).

나는 충분히 보고, 충분히 생각하며, 충분히 느끼고 있는가? 하는...

 

 

<지광국사현묘탑... 국보101호, 1086년, 높이 6.1m, 경복궁내> 

 

 

잠깐의 짬을 내,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 달래려 경복궁에 왔는데, 갑자기 호승심이 인다.

오늘은 현묘탑 세부를 하나하나 뜯어보자고...

그것이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도 아닐테고, 또 다른 자극으로 호기심을 자아내지 못하겠지만,

잠시라도 집중해보면 무슨 깨달음(?)이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1.

 

필름 한통을 다 찍고서 생각했다.

기단부의 용발톱을 무시한다면 이 탑은 정말 차분한 비례와 기막힌 체감을 가지고 있는

늘씬한 자태였겠구나 하는 생각...

 

 

<용발톱을 고려하지 않고 탑을 중심으로 보는 것과, 아래처럼 올려다보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탑만 보면 정말 세련되고 늘씬한 느낌이지만, 용발톱을 약간 과장하면 대지를 꽉 붙들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느낌이다...>

 

 

용발톱이 있어 특이해진 것이 아니라,

용발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탑은 두 개의 미감을 모두 만족시킨다.

세련된 비례와 차분한 안정감...

처음부터 기획되었을지, 만들고 나서 보강했을지 모르겠지만,

작지도 길지도 않은 이 용발톱은 보면 볼수록 나를 감탄시킨다.

 

<참 절묘하지?!! 생김새도 조각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장치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현묘탑의 용발톱에 단초를 제기할 어떤 경험도 없었고, 그 이후로 용발톱을 흉내 낸 탑도 없다.

그럼 유일한 창작? 그래서 더 독창적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탑에 대한 모든 것들을...

하나 찾았다^^ 석가탑의 팔방연화좌 !!!

 

<입체적인 현묘탑 기단부와 평면적인 석가탑 기단부...>

 

<언듯 눈으로 놓치기 쉬운 것이 2단의 기단부 주변에 배치된 팔방연화좌다...  그러나 돌출되지 않은 평면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석가탑은 충분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 나는 언젠가 다른 글에서 석가탑이 날씬한 상승감만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보다 넓게 자리잡고 있는 팔방연화좌가 차지하는 무형의 공간감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문제는 사람들이 현상적으로 인식하여 팔방연화좌의 미학적 용도를 체감할 수 있는가 없는가 뿐!

물론 그것은 조금 더 깊게 느끼는가, 충분히 즐기는가의 차이일뿐, 호불호나 완성도의 척도는 아니다.

게다가 어떤 예술작품이든 작가의 의도가 100% open 되어 있다해도,

관람자들이 작가와 똑같은 감흥을 가진 주파수에 동화될 수는 없는 법.

석가탑은 우리들이 체득하기 힘든 숨겨진 장치로 인해 다보탑의 볼륨에 대비해도 전혀 왜소하지 않다.

 

 

<현묘탑 용발톱... 내 기억에만 현묘탑 주변의 경계말뚝(안전난간?)은 네번 이상 바뀌었다... 90년대 중반, 염거화상탑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런 난간이 없었고, 2000년 경에는 전통문양의 낮은 난간이, 2000년대 후반에는 말뚝에 줄로 경계를 쳐 놓았었는데, 지금(2011년)은 스텐레스 말뚝에 쇠사슬이 둘러져 있다... 훼손과 망실을 우려하는 것은 알겠지만, 지금 것은 너무 가까이 세워져 있기도 하지만 매우 불쌍 사납다... 시정되었으면 좋겠다...>

 

 

 

현묘탑은 석가탑의 팔방연화좌의 평면성을 극복하여 적극적인 조형부재를 설정한다.

그리고 입체화되는 부재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을 때의 번잡함도 피했다.

방형(사각형)의 외형에 맞게 사방 모서리에만 적용하여 공간적 확장감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만약 이 용발톱이 조금 더 길었거나, 조금 더 높게 도드라졌다면 지금의 미감은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탑신의 상승감에 대비한 상륜부의 육중함, 그리고 넉넉한 기단부에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안정감까지...

현묘탑의 공예적 완성도와 상징적 고귀함, 그리고 시각적 세련미는 이런 부재들의 조화에서 시작된다.

 

  

 

 

 

 

2.

 

필름 두통이 넘어가면서 다시 생각한다.

이 탑의 정면은 어디였으며, 당초 법천사지에 있었을 때는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었을까?

현재 경복궁의 현묘탑은 대부분 부도(승탑)들처럼 문비를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법천사지에 가보면 현묘탑 위치는 현묘비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특이하게 현묘비는 서쪽으로 90도 틀어져 있다. 둘이 같이 있었으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법천사지 전경... 물론 지금은 많이 정비되었지만 이렇게 찍은 사진이 없어서...ㅠ 현묘비 좌측이 현묘탑이 있던 자리다...>

<현묘탑의 석축기단... 이 기단도 자세히보면 매우 정성스럽게 이단으로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 자세히보면, 지붕돌 전각의 사방 모서리 가르빙가도 그렇지만, 중앙의 불상들 모양도 다르다.

그리고 혹시 지붕돌에 사면 중앙에 새겨진 불상들은 고려로 전승된 사방불 개념을 살린 것은 아닐까?

 

 

<현묘탑 부분... 사방에 새겨진 가르빙가...>

 

 

 

 

백제에서 창작된 사방불(東약사, 西아미타, 南석가, 北미륵)이 신라대에 이르러 南北이 바뀌었지만,

이 탑을 기획하고 감독하고 만들었던 이가 사면을 향한 불상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조성했다면,

그는 동서남북의 사방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망한 발해유민들이 가세하며 재조명되는 고구려의 기상을 현묘탑을 만들면서 재해석했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방불의 재현이라면, 이탑을 만든 이의 안목은 내 생각보다 훨씬 높고, 길고, 깊었으리라...

 

 

<현묘탑 부분... 이 지붕돌 사면의 중앙에는 이처럼 작은 불상들이 중앙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자세히보면 불상의 수인이나 모습이 모두 다르다... 혹시 사방불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기왕 지붕돌을 살펴봤으니, 상륜부까지 뜯어볼까?

현묘탑의 상륜부는 일반 부도나 탑처럼 노반-복발-보륜-보개-보주의 구성에서 보륜을 단순화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만약, 현묘탑도 다른 부도처럼 이 모든 요소를 살려 구성했다면 어떤 미감이 될까?

단적으로 비교한다면 연곡사의 북부도와 서부도, 그리고 화엄사의 석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거 같다.

화려하고 세련된 조각과 미려한 마감으로 완성된 연곡사 북부도는 생각만큼 완벽한 미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륜부가 망실된 염거화상이나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승탑) 보다도...

어쩌면 규모와 볼륨에 비해 과장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륜부의 크기와 높이 때문이 아닐까?

 

 

<경복궁 염거화상탑... 진전사지의 전 도의선사부도를 제외하면 최초이면서, 가장 교과서적인 형태다...>

<연곡사 북부도... 90년도와 다르게 상륜부가 많이 수정되어 있다... 900년대 중반>

<연곡사 동부도 상륜부(이 모습도 다르다)... 800년대 말 ~900년대 초반... 현묘탑 상륜부와 비교해보시길...>

 

 

또 하나의 예가 있다. 화엄사 각황전 앞에 호방한 기상으로 서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

지붕돌의 두툼함과 넓이에서 고달사 부도와 비견되기도 하는 이 석등 역시 높고 큰 상륜부가 살아있다.

그러나 화엄사 석등의 경우는 배경이 되는 각황전(이층이지만, 애초에는 삼층전각이 있었다고)이 있다.

즉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관람자들 시선에 이만한 높이의 상륜부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결국 독립적인 구성요소들이 전체적 시야와 비례, 조화를 통해 완성되는 공간감을 주기 위한 배려로

기획자가 크기와 높이를 조절했다고 볼 수 있는데, 법천사의 현묘탑은 그런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현묘탑 배경은 인위적 건축물이 아닌 자연지형이었고, 현묘비와 조화만 고려하면 됐기 때문이다.

 

 

<화엄사 석등... 각황전에서보면 생각보다 지붕돌도 넓고, 상륜부도 높다. 그러나 높이가 있어 서로 어울린다...> 

<계단을 오르면서 바라보는 화엄사 석등...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하여 지붕처마의 높이에 조응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상륜부가 지금보다 낮았다면, 우리는 석등의 상승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법천사지 전경... 현묘탑은 주변을 고려하는 것보다, 자체적인 완결성을 더 많이 고려했을지 모른다...> 

 

 

만약 현묘탑에도 연곡사 북부도나 서부도처럼 튼실하고 육중한 무게의 높은 상륜부가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같이 정제된 세련미나 조화로운 체감, 멋진 상승감과 정연한 안정감은 많이 깨졌을 것이다.

노반을 최대한 넓게 구성하고, 높이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복발부분은 앙련으로 충분히 감싸 대체하고,

보통 3단 이상으로 만들어지는 보륜을 크고 두툼한 하나의 부재로 통합한 다음, 보개를 넓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 보주도 넓어진 보개에 맞추어 앙련조각을 첨가하여 작아지지 않게 구성했을 것 같다.

 

 

<연곡사 서부도와 상륜부... 이 승탑은 조선시대 최고의 부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현묘탑 부분... 연곡사 부도의 상륜부와 비교해보길 바란다... 시대순으로 보면, 연곡사 동부도 →화엄사 석등→연곡사 북부도→지광국사현묘탑→연곡사 서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묘탑의 상륜부는 9세기 중후반, 초기의 부도들처럼 상륜부가 단순하지 않고,

10세기 초중반의 부도들처럼 상륜부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에서도 벗어난 적절한 규모이지만,

하늘에 닿기 위한 탑의 상승감보다는 대지를 누르는 육중함과 엄숙함을 살릴만큼의 볼륨을 갖추고 있다.

지나치게 무거워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 않으면서 부도가 갖춰야할 중후함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아마 현묘탑을 만든 이는 연곡사 등을 참고했지만, 상징적 구성보다 자체적인 완결성을 중시했을 수 있다.

 

 

 

 

 

 

 

4.

 

필름 세통이 넘어가면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정립되는 기분이다.

나는 앞글에서 이단으로 구성된 현묘탑 몸돌의 하부는 거란풍 가마장식을 단 상여를 모본으로 하였고,

정면에 새겨진 두가지 가마 조각들은 다비식 전과 다비식 후 지광국사 사리를 담은 가마의 상징,

그리고 다른 면의 조각들은 구름을 타고 도솔천으로 향하는 지광국사를 표현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또한 문비 주변의 조각들도 불교의 본고장 인도장식을 차용한 이슬람풍 아치형식이었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상징만이 아니라 부분부분을 뜯어볼수록 참 다양한 건축적 공예적 기법들이 동원되었음에 감탄한다.

 

<현묘탑 부분...>

 

 

<이층 몸돌에 새겨진 아치형 문양과, 커튼처럼 정교한 휘장, 그리고 측면 우주에 새겨진 대나무 문양...>

 

 

 

 

부도(승탑)와 석등에서 지붕돌의 크기와 볼륨은 전체적 미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고,

현묘탑 역시 지붕돌은 다른 부재보다 두텁지만, 고달사지의 전원감대사승탑처럼 넓지 않다.

그리고 이런 육중한 지붕돌이 상부에 놓이는 것은 전체적인 안정감과 중후함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

문제는 그런 의도를 살리면서, 탑 전체의 상승감도 살리고, 둔중함을 해소하기 어떤 장치를 했는가다.

 

 

<높이 5.7m의 술정리 동탑과 높이 6.1m의 현묘탑... 상승감이나 세련됨, 그리고 조화로운 비례가 잘 대비된다.>

 

 

하나는 상부의 지붕돌의 두께는 유지하되 넓이는 과감하게 좁게 조정하여 육중한 느낌을 거세했고,

(일반부도의 상륜부와 현묘탑의 상륜부가 어떻게 다른지는 이미 앞서 이야기했다)

또 하나는 일층과 이층 몸돌 사이의 괴임돌에 처마형 곡선인 반전을 두어 날렵한 이미지를 살리고,

(일반 부도에 사용되는 괴임돌 마감이 ⊂⊃인데 반해, 현묘탑은 일반 탑의 반전처럼 ↖↗느낌을 살렸다)

 

 

<다보탑 기단부의 판석... 정림사탑처럼 끝부분에 반전이 있다...>

<현묘탑 부분... 일반 부도와 달리 이층의 몸돌로 이루어진 현묘탑 괴임돌에는 처마처럼 끝부분에 반전이 있다...>

 

 

 

세 번째는 일층과 이층 몸돌을 기둥에서 사용하는 민흘림기법 또는 건축에서 사용하는 안쏠림을 적용,

탑의 상승감을 저해하는 둔중함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착시를 유도보완하기 위해 상부를 좁게 만들었다.

(착시현상을 의도적으로 건축에 적용한 대표적인 유물로는 황금비(∅,피)로 유명한 파르테논신전이 있고,

중세 유럽의 미켈란젤로가 기획한 카피톨리노 광장의 코르노나타 계단이 유명하다. 유럽만 그런건 아니다.

우리  건축에서도 착시현상을 고려, 상승감과 안정감의 상반된 미감의 통합을 위해 안쏠림등을 적용했는데

상승감이 돋보이는 정림사탑과 수덕사 대웅전이 대표적이고, 가장 미세하게 적용한 게 강릉 객사문이다)

그것도 일층 몸돌은 약하게, 이층 몸돌은 과감하게 했다. 우리들 눈에는 단정한 직육면체로 보이게끔...

 

 

<현묘탑 부분... 우리가 현묘탑 전체를 볼때와 완전히 다르게, 시선을 탑과 같은 높이 올리면 각층 몸돌의 안쏠림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건축적 기법이 있어 현묘탑의 상승감은 두드러지고, 상부가 넓게 보이는 경향을 의도적으로 차단하였다...>

<수덕사 대웅전 측면... 안쏠림이 확연히 드러나지?^^ 이런 세심한 고려가 있어 밧배지붕의 둔중함은 완전히 상쇄되고, 처마는 우아한 날개처럼 가벼워질 수 있었다...> 

<강릉 객사문 측면... 아마 맛배지붕 중 가장 미세한 안쏠림이 적용된 게 아닌가 싶다... 파르테논 신전은 지상 6000m 지점에서 한점으로 만날 수 있을만큼의 미세한 안쏠림이 적용되어 있다...> 

 

<다보탑... 그에 반해 구조의 안쏠림과 기둥의 민흘림이 거의 없는 경우로 아쉬운 게 다보탑이다... 다보탑을 사진으로만 봤거나, 예술적 감흥없이 보던 사람이 직접 불국사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면, 다보탑의 장대함에 깜짝 놀란 경험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 위압감과 장중함에 충분히 압도될만한 볼륨을 다보탑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차츰 다보탑에 비하여 무미건조할만큼 담백한 석가탑으로 시선을 옮기면 다보탑에 대한 조화로운 비례와 구조적 완결성은 많이 묻히게 된다... 그 이유가 뭘까? 내 경험을 돌이켜보면 ; 사자상이 놓여 있는 2층 기단부까지에 비해, 탑신이라 할 수 있는 상부의 볼륨이 너무 작고, 상륜부가 낮고 작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일제 강점기, 순수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 재조립된 과정에서 기단부를 두르던 난간이 없어지고 약간의 변형도 있었을 것이지만, 만약 사자상이 놓인 기단부 기둥에 민흘림이 적용되고, 안쏠림이 채택되었다면 다보탑은 훨씬 극적인 상승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다보탑 부분... 운이 좋아 보수과정에서 탑신 부분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돌을 떡주무르듯 했다는 그 성취의 세세한 모습을... 그리고 실측도를 그리는 연구원을 통해 다보탑 상륜부가 실제 얼마만한 크기의 스케일을 가질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싶어 이 사진도 함께 올린다... 다보탑은 중국, 일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기획과 구성으로 ' 땅으로부터 솟아 올라 공중에 떠 있는 ' 정토세계의 기적적 출현을 신비롭게 조형한 걸작임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5.

 

여행이나 답사여행을 다니다보면 우리는 많은 건축물과 공예품 혹은 유무형의 유적과 유물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설명을 듣거나 책을 보고, 혹은 느낀다.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고,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은 무엇이고,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그러면서 원형을 찾고, 변화를 찾고, 그것들을 비교하면서 最高와 最古를 찾기도 한다.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고, 마음에 담으면서...

 

<참 많이 찍었다.. 햇볕이 구름을 벗어나면 찍고, 구름속으로 숨으면 또 찍고, 석양에 해가 질 때까지 찍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것에 대한 호승심에 자극받기도 하고, 느슨했던 정보의 결속에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그 양과 질은 개개인이 갖는 기호와 호불호, 그리고 호기심과 지식과 애정만큼 다를 수 있지만...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것(!)일 수도 있고, 그때(!)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 결실들은 자기 자신으로 갈무리되고, 한 발 더 나가 자신의 범주가 확장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결국 여행은 일탈된 일상과 공간을 통해 자신으로 회귀와 성찰과 확대를 꾀하는 즐거운 매개일지 모르겠다.

 

  

<유모차에서 졸고 있을지 모를 저 아이는, 가만히 앉아서 고려와 조선과 현대의 분위기를 한눈에 담고 있겠지? ㅎㅎ 우리들이 의식하든 외면하든 건축과 조형이 주는 감상은 오래 오래 축적되지 않을런지...^^> 

 

 

오늘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묘탑이 만들어진 시대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지만,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른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건축적 기법과 공예적 요소, 상징적 구성에 모두 통달해 있었을까?

그(!)는 한사람의 기획자였을까? 아니면 아마추어들(현묘탑을 만들기 위해 임시로 급조된)로 조직된 드림팀이었을까? 아니면 국가시스템(항구적이고 체계적인 공인조직)이었을까?

그(!)는 내생각처럼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부도들을 모두 섭렵한 이후에 이것을 창작했을까?

과연 그(!)에게 경제적 기반과 작품경험, 그리고 역사의식과 사상적 통찰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나는 그(!)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며, 또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음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또 오늘 이렇게 하나하나를 뜯어보면서 그런 것들을 느낀다.

그는 참 자유로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 ;

형식과 법도에 구애받지 않는, 그러면서도 시대의 한계와 사상의 굴레를 뛰어넘는 자유로움...

그는 참 평화로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 ;

긴 안목과 열린 마음, 그리고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었던 평상심으로 스스로를 단련했을 거라는...

그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 ;

의뢰했던, 함께 일했던, 완성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행복으로,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는...

 

 

 

 

현묘탑을 바라보던 나를 되새김해본다.

현재 상황이 짧은 일탈을 강요했든, 혹은 내재된 일탈의 습성이든 나는 이유없이 현묘탑에 섰었다.

현묘탑을 바라보며 알 던 것을 확인하고, 몰랐던 것에 놀라고, 생각지 않았던 그(!)를 가공해낸다.

이것도 내게는 소중한 여행이 되었으면, 그(!)와의 만남이 소중한 인연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인해 반추되는 내 자신의 또다른 성찰과 테두리의 확장이 되었으면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