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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탑> 얼어붙은 시간 - 무미건조한 탑 속에서 자유를 찾다...1203

 

 

 

 

 

 

 

나는 어떤 탑을 좋아할까?

첫째는 아름다운 탑이고

둘째는 생동감 있는 탑이고

셋째는 영향력 있는 탑일 거 같다.

 

 

<감은사탑/국보112호... 언제 보아도 감동적인... 왜 그렇게 보일까? 비슷한 연륜의, 비슷한 시대의, 비슷한 정신세계에서 만들어진 비슷한 모양의 탑이지만 그 느낌은 정말 다르다... 왜 다를까?>

 

 

 

그런 탑들은 바람처럼 자유롭고, 빛처럼 화사하며, 꽃처럼 향기롭다.

그런 탑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나를 유혹하며, 마음을 열게 한다.

그런 탑들은 시대의 코드가 되고, 공간의 상징이 되며, 나의 멘토가 된다.

느낌이 살아있고, 그래서 닮고 싶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된다.

 

 

<정림사탑/국보9호... 하나가 신라를 대표한다면, 이 탑은 백제를 대변한다... 그렇게 각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탑들은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300여개의 국보 중 9% 정도 28개가 탑이다... 어는 석조물보다 많고, 어떤 종류보다 많이... 그래서 탑은 우리의 정신세계에 주요한게 자리잡은 코드 중 하나일지도...> 

 

 

 

장중한 감은사탑이 그렇고, 너그러운 고선사탑이 그렇고,

우아한 석가탑이 그렇고, 단아한 술정리탑이 그렇고,

짜릿한 전율이 흐르는 정림사탑이 그렇고, 허허로운 왕궁리탑이 그렇고,

화려한 다보탑이 그렇고, 꽉찬 현묘탑이 그렇고,

준수한 탑평리 중원탑이 그렇고, 차분한 봉감탑이 그렇고,

이지적인 화엄사사사자탑이 그렇고, 세련된 장항리탑이 그렇고,

사랑스러운 원원사탑이 그렇다.

 

 

<감은사탑... 정말 좋치 않은가???>

 

 

 

 

 

 

같은 국보급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탑들도 있다.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나를 유혹하지 않고,

생동감에 목말라하는 나를 무시하며,

아무런 느낌없이 무미건조하게 서 있는 탑들...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국보16호... 크고 높아서 국보가 되었을까? 그리고 너무나 장대해서 나의 정신세계를 벗어나 버렸을까? 주변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 탑 자체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받지 못했다...>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장대함이었다... 어느 시기, 어느 시대인가 꼭 필요했을 장대함... 군림의 시선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장대함의 유혹에 내 스스로도 젖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보면 국보탑 28기중 6~7m를 넘지 않는 것은 10호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40호 정혜사지십삼층석탑, 44호 보림사삼층쌍탑 및 석등, 99호 갈항사삼층쌍탑, 105호 산청범학리삼층석탑, 122호 진전사삼층석탑 등 6기에 불과하다...크고 높다는 거, 장대함이 하나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크기와 높이만큼 많은 것을 대변할 수 있는 있다... >

 

 

 

 

시대도 그를 비켜가지 않았고,

정성도 그를 무디게 하지 못했고,

위엄도 그를 퇴색시키지 못했지만,

여전히 읽을 눈이 없고, 열릴 마음이 없고, 담을 머리가 없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탑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보물459호... 보물급 중에서도 이처럼 장대함과 균형을 함께 갖춘 탑들이 있다... 너무 정연해서, 너무 충실해서 생동감을 갈무리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유가 이 석탑의 위용을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높이로 따를 수 없는 신세동 칠층탑, 정연함에서 빠지지 않는 나원리 오층탑,

포부도 당당한 죽장동 오층탑,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분황사석탑,

너무 조용해서 굳어버린 탑리오층탑, 너무 꽉차 둔중해진 구황리 삼층탑,

목조 성채가 되어버린 미륵사서탑, 허우대만 멀쑥한 남계원 칠층탑,

그리고 하늘로 오르기엔 너무 가냘픈 경천사/원각사 석탑과 월정사 구층탑들이 그들이다.

국보급은 아니지만 장대함에서 뒤처지지 않는 송림사탑, 장락동탑, 정암사탑, 석남사탑도 그렇고...

 

 

 

<송림사 오층전탑/보물189호... 너무 반듯하고 너무 정연해서 차분해져버린... 그 장대함만큼의 위용과 그 높이만큼의 권위는 사라지고 어딘지 조각같고 형식만 남은 듯한 느낌... 그렇다고 생각해선지 이 탑은 나를 충분히 압도하거나 흡입하지 못하고 있다...>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국보100호... 이 탑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임에 분명하다... 중후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 그러나 고려시대 어느 시기를 지배한 유약함이 묻어 있어 왠지 낯설게 보이는 장대함이다... 그렇다고 이 탑이 신라의 미감을 흉내냈거나 현묘탑 같은 화려함을 함께 갖추려 했다면 그것은 또다른 실패가 됐을지도 모를 일... 이 자체... 그것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들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내 감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이성의 거름막에 해석되지 않는 그들의 존재이유...

내 이지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무미건조함의 이유는 무엇일까?

무시할 수 없는 시대의 미감이면서 나의 감성에 어정쩡하게 걸려 있는 그들의 존재이유...

나는 왜 그들을 읽지 못하고, 그들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과 이야기할 수 없을까?

도대체 왜 나는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까?

 

 

 

 

<의성 빙산사지 오층모전석탑/보물327호... 모전석탑도 두가지 유형이 있다... 분황사석탑처럼 전탑의 외형을 갖춘 것과 탑리탑처럼 전혀다른 외형을 갖춘... 무엇이 부족한 게 아닌데, 나는 자꾸 부족한 2%에 매여있다... 98%의 꽉참을 외면하고 부족한 것으로 전체를 판단하려는 것은 무슨 심뽀인지...   잘 다음어진 하나하나의 깊은 공력을 보면서도 나는 내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울주 석남사 삼층석탑... 석남사에는 큰 삼층탑과 작은 삼층탑이 있고, 단아한 체감에 온갖 정성이 깃든 작은 삼층탑은 시도유형문화재 대우라도 받지만 이 삼층석탑은 미지정이다... 기단부와 2,3층 몸돌이 보수되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장대함은 장항리 오층탑과 비슷한 규모고, 부재 하나하나에 깃든 정성은 어느 보물급탑에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상륜부가 지금보다 두배정도 크고 높았다면 이 삼층석탑은 훨씬 장쾌한 느낌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고...>

 

 

 

그 탑들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을텐데...

충분히 완성된, 그래서 그들을 흉내 내고 모방하기에 그들은 변화의 흐름을 담보하지 않았지?

시대를 대변하는, 어느 한 순간을 담아냈지만 그들에게 시간은 그 순간에 정지한 게 아닐까?

과거를 읽지 않고, 미래를 약속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과 이 공간을 가슴이 아닌 기술로만 해독했던 것 때문이 아닐까?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86호... 고려시대 탑의 길고 가늘어진 미감은 탑이 더이상 사찰공간의 상징으로서 지위를 포기하면서 나타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이정표 같은, 기념비 같은 장식을 담은 조각으로서 말이다... 웅혼함과 장중함을 떨쳐버리고 사실적인 부처 형상을 조각으로 남기면서, 탑은 더 이상 해탈의 상징도 각성의 매개도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탑에서 조각을 해독하지 탑 전체의 분위기에서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든 걸 눈으로 보여주려고 욕심을 부리면, 예술은 기술이 되고, 상징은 조각으로 전락하게 되는 법이 아닐런지...>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부동의 평상심...

과거와 단절되고, 미래를 잊어 버린채 그냥 그대로 정지해버린 가장 정적인 모습...

생동감을 포기하고, 아름다움을 지워버리고, 주변의 모든 관계로부터 끊어진 찰라...

그렇게 그들은 완성된 게 아닐까?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국보37호... 바로 옆 전봇대를 보더라도 이 탑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좁아진 지붕돌 때문인지 자꾸 둔중해졌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비슷한 규모의 석가탑이나 이 탑과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경주 천군동 삼층쌍탑과 너무나 다른 분위기... 그렇지만 꽉차있고, 흐트러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긴장감이 드러나지 않는 태연자약한 바로 그런 모습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주변 환경과의 조화가 아니라 자신만의 완성을 위해서...

포장되는 과거와 희망 섞인 미래 대신에, 선택한 바로 그 순간의 정적...

그들에게서 과거와 미래와 그 시대가 읽히지 않는 이유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을 붙들어 맨 부동의 형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에 무관심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관조하고 표현하는 역발상의 또 다른 코드였을지도 모른다.

 

 

 

<경주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국보39호... 이 탑에서 참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이 글을 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탑일지도 모르겠고... 흔들림 없는 부동심, 권위가 거세된 장대함... 너무나 차분하고 어려워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탑... 세월이 흘러 세상일 모두 알고 나를 알면 나도 이처럼 한없이 조용하게, 한없이 차분하게 세상을 대할 수 있을까? 그는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고, 이 곳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래서 공허한, 그래서 무미건조한, 그래서 느끼는 정적과 찰라... 그 찰라의 순간을 이처럼 크고 장대하게 쌓고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심성의 사람들이었을까?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유일하게 남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멈춰버린 시간속에의 정적과 침묵속에서 또 다른 자유를 느꼈다면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까?? 구속할 수 없고, 구속하지 않으려는 자유? 치우침이 없고, 자약하지도 않은 자유? 자유는 가볍고 경쾌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움직이지 않는 부동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자유를 표현하고 싶었는지, 이 석탑을 기획하고 만든 이들에게 묻고 싶다는 생각만... 어려웠다...>

 

 

 

 

 

장대하고 장쾌하고 장중하다는 의미는 이미 개인의 사욕을 넘어선 공력이었을 것이다.

안정감과 정연한 마감, 세심한 비례와 조화는 그 시대를 담지 않으면 안됐을 깊이였을 것이다.

어느 한 시기, 그만한 크기와 높이와 위엄을 뽐내야만 했을 딱 그 시기에 그 탑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탑들은 만들어진 순간 예술이 아니라 기념비가 되고, 믿음이 아니라 기술이 되었을 것이다.

박제화 된 종교, 장식이 된 예술, 조각이 된 권력...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11호... 지금은 해체되어 현재로서는 느낄 수 없게 된 미륵사지탑... 성을 쌓으려 했을까? 인도의 석굴을 모방했을까? 나는 왜 이 탑을 보면서 박제화된 종교와 권위만 남은 권력이 생각나는 것일까? 이 탑은 가까이에서도 멀리에서도 나와 무관하게 서 있을뿐이었다... 내게 이 탑을 해독할 코드가 없었을까? 이 탑이 나를 외면하는 것일까? 아름다움의 기준, 내가 가지고 있는 미의 기준으론 접근하기 어려운 석탑이다...> 

<남아있던 규모만으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넓고, 높았던 석탑... 백제탑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얇은 판석과 완만한 낙수면, 깊고 넓은 처마와 슬며시 들어올린 경쾌한 귀솟음이 충실히 살아있다... 목조건축의 번안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리를 보관한 석굴의 번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런면에서 상징보다 기능이, 전반적인 분위기 보다는 규모를 위한 기술이 더 중시되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크고 넓어졌겠지만... 백제는 이 석탑을 완성한다...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고, 앞으로도 만들어질 수 없는 완성, 완결이 되었지... 완성 되었다고 선언하는 순간, 미륵세상이 구현되었다고 강요하는 순간, 그때부터 남는 것은 쇠락과 절충과 환락만 남지 않았을까? 완성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한다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을 다했다는 점이라는 거... 얼마후 백제는 진짜 멸망한다... 그 위대한 유산과 역사를 완전히 소각시키면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30호... 634년이면 신라 선덕여왕때다... 자장율사가 돌아오고, 사리가 들어오고... 석문이 있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석탑... 나는 이 탑을 볼때마다 미륵사지탑이 생각난다... 이제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신라와 노쇠할만큼 쇠락해져가는 백제... 당대를 대표하는 선덕여왕은 백제의 구심점인 무왕의 미륵신앙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뺏어와야했었겠지... 그래서 신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투입해서 똑같은 규모의 구층탑을 만들고 싶었는지 모르겠다(당시 황룡사 구층탑을 만든 이가 백제의 목공이었듯이 백제에는 더 높고 큰 목조탑들이 많이 있었을테니까)... 여기에 당나라와 적대적이던 백제와 달리 자신들이 살길을 당나라에서 쫓았듯, 탑도 전탑의 모습을 빌려야했을테고... 물론 현재의 모습이 일제강점기 때 재수선되어 원형을 짐작할 수 없다고 하나, 지나치게 안정된 체감은 생동하는 기운을 담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다... 모방이었기 때문이거나, 답습의 결과 때문은 아닌지... 한가지 다르다면, 백제는 미륵사탑을 만들었기 때문에 몰락해 가지만, 신라는 분황사탑을 만들었기 때문에 점차 더 부강해졌다는 점... 이 두탑의 모습에서 그런 차이를 읽을 수 있을까? 때때로 모방과 재현은 또 다른 창조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내 눈에 그들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형식만 남은 권력, 예술, 종교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껍질만 남아서 나에게 무미건조해졌을까?

혹여 시대정신과 예술적 감성, 그리고 한계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 외형에 대한 집착은 아니었을까?

과시와 권위를 위한 교조적인 형식과 타협 없는 원칙, 불변의 신념은 어느 한 순간 꼭 필요한 결정들이다.

껍질, 형상, 겉모습에 대한 집착...

그속에서 나는 자꾸 생동감을 포기한 이유를 찾고 있다.

혹시 그것이 얼어버린 평상심과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어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48호... 높이가 지나쳐 가늘게 보이고, 부재들의 두툼함에도 불구하고 위엄이 없다... 황금비... 자연에 숨어있는 황금비를 거스리는 조화와 비례는 그래서 항상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둔중하고 경직된 미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경박스럽거나 가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탑에서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도 한시대의 미감이었을텐데,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아직 나는 그것을 충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그 부동의 형상에서 나는 정적을 읽으며, 그 정적속에 멈춰선 시간을 읽어 본다.

움직이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를 따라잡지 못하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

움직여야만 생명이 있고, 생동감이 없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너무나 좁은 시선의 나...

움직여야만 안정이 되는 영원히 불안한 나...

그리고 멈춤을 두려워하며 시간에 휘둘리고 공간에 쫓기는 늘 허기진 나...

진정 자극이 없으면, 봐 주는 이 없으면, 가만히 서 있으면 나는 퇴보하는 것이고 죽은 것이 될까?

나는 이제야 생동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탑에서 너무나 조급하고 불안하고 쫓기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국보130호... 10m의 장대한 크기와 세련된 비례를 갖춘 이탑은 전탑식 지붕돌이 특징... 비슷한 크기의 나원리 탑만큼 나를 고민스럽게 만든 탑이 이거다... 지나친 안정감, 균제된 비례... 크기와 높이를 압도하는 디테일에 자신의 분위기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크기가 주는 위압감도 없고, 육중함이 경직되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긴장감도 없다... 너무 차분해서 잠시 시선을, 마음을 멈추게 하는 탑... 내가 포착하지 못하는 멈춤과 느림의 미학을 이들은 형상화해냈던 것일까?>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에 숨겨진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는 일일지 모르고,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은,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는 속에서 멈출 줄 아는 지혜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은, 주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된 주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어려운 것은 멈출 줄 모르고 움직이려고만 한다는 것, 그리고 홀로 서있지 않다는 거다.

그리고 내게 무미건조하게 다가왔던 그 탑을 만든 이들은 그 한계마저 뛰어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지러운 이 싸움에서 결코 움직임이 없는 그들의 존재이유가 다가온다.

 

 

 

 

<의성 탑리 오층석탑/국보77호... 태생을 놓고 논란이 많은 탑이다... 연한 민흘림을 갖춘 일층 우주(기둥) 위에 끼워진 주두를 보면서 목조건축의 번안으로 규정되어 있고, 전돌과 같은 형식의 지붕돌은 백제석탑과 다르게 신라식 석탑의 특징이 되는 급한 낙수면의 원형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고... 여전히 문제는 탑 앞에선 내가 일체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거, 교감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선산/의성/안동지방이라는 지역적 특징으로 몰아가기에는 너무 장대하고, 신라의 한 시대를 대변한다고 말하기에는 시기가 불분명하고... 그렇게 역사의 좌표를 찾지 못해 나의 이지에 포착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소, 닭보듯...ㅠㅠ>  

 

 

 

 

시간을 거세하고, 공간을 초월하며, 염원마저 잊어버렸던 상징...

그 찰라의 순간을 가장 정적으로, 가장 차분하게, 가장 무미건조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그렇게 만들어졌지?

 

 

 

<피렌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복제품이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 그 긴장된 전쟁과 싸움의 광경을 이렇게 표현할 이가 세상에 있을까? 미켈란젤로가 천재였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골리앗과 다윗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 이 작품이 표현하지 않은 주변 정황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우리 모두는 충분히 알고 있다...바로 이 이유 때문에 굳이 작품에서 설명하지 않은 여백을 우리들의 지성과 감각이 채우고 있다는 말...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잘 모르거나 어려워하는 대부분의 표현작품들의 시대적 배경과 작품의 의도를 모를 때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작가가 표현하지 않은 여백을 우리가 채우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 이 다비드상과 내가 골라 본 석탑들의 또 다른 차이는 움직이는 광장에 만들어져 있는가? 일부러 찾는 이들에게만 공개된 외진 곳에 있는가의 차이가 아닐런지... 유무의식적으로 접하는 상징은 항상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들이 살아있을 때, 예술도 종교도 철학도 대중과 함께 숨쉴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고른 탑들에는 아직도 숨어있는 이야기가 많고, 해석되지 않은 코드들도 많다... 이야기가 살아있지 않다는 말이다... 작품에 이야기를 붙이는 스토리텔링... 그것은 만들어진 당시의 영향력 뿐만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영향력에도 개입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형의 복원이 아니라, 그들이 간직한 사연의 복원이 먼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포효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오로지 팽팽한 긴장감만으로 모든 걸 담아낸 걸작...

만약 같은 의도였다면, 내가 아직 읽지 못한 것은 긴장감일지 모른다.

아니면, 어느 시대 어떤 이들은 그 긴장감마저 이미 지워버렸는데,

나는 아직도 그 미련을 벗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불국사 다보탑/국보20호... 이 탑을 보고 무미건조하다고 말하면 욕먹겠지?^^ 현란한 구성과 세련된 장식들, 그리고 나를 압도하는 이 탑은 무미건조하지는 않다. 다만 그 감동의 여운이 너무 짧다는 거지... 정림사탑/미륵사탑처럼 넓은 판석위, 돌난간부터 시작되는 탑신이 조금만 더 넓고 높았다면, 상륜부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하는 아쉬움은 그런 짧은 여운에 대한 변명일뿐이고... 미륵사탑을 만들던 무왕 시대와 불국사를 만들던 경덕왕 시대는 그런 차이가 있을까? 한차원 끌어올린 수준에서 느끼는 부족함... 그 빈공간을 채우기 위한 채찍과 이정표로 이 다보탑이 존재했다면 하는 생각말이다...>

 

 

 

 

충분히 모든 걸 경험한 어느 날...

살만큼 살아서 종심소욕 불유구를 논할 수 있는 어느 날...

시간을 박제하고, 공간을 무시하며, 깊이를 포기한체 형식만 남게 되는 어느 날...

껍질만, 형식만, 겉모양만 남아있는 그 탑들을 보면서 나는 여전히 씨름하고 있다.

그들이 부동심을 표현했을까? 아니면 형식만 만들었을까?

 

 

 

 

<법주사 팔상전/국보55호... 조선시대, 그것도 임진왜란이 끝난 인조왕 전후의 미감을 규정하는 게 이 팔상전일 거 같다... 신라 경덕왕대 진표율사는 이 자리에 더 높고 웅장한 목탑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미륵신앙이 꺼져가던 고려시대 어느날, 원나라의 침입 속에 그 때 목탑은 불타고, 또 다른 고려대 목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선 선조왕대 임진왜란(조일전쟁) 때 그나마 흔적도 소각되어 버렸을지 모른 그 자리에 인조는 다시 목탑을 세웠다... 가볍고 경쾌하고, 부드럽고 유연하게...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위안을 강조하기 위해선지, 원칙과 권위에 질곡되기 시작한 유교적 정신질서에 대한 무의식적 반발 때문인지, 그 시대 그 건물은 그렇게 지어졌다... 보여주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그런 생각이 자꾸 이 탑을 껍질과 형식과 겉모양이 망각한 깊이와 절제와 긴장감을 아쉬워하는 것이고...>

 

 

 

 

껍질이 아닌 비움과, 형식이 아닌 원칙과, 겉모양이 아닌 정제에

멈추고, 관조하며,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로운, 변화로부터 자유로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하나의 형상을 바라본다.

내게 무미건조한 탑들에게서 나는 멈춤을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여유로운 평상심과 긴장감 넘치는 부동심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그 한계마저 뛰어넘은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122호... 꼭 6~7m가 넘는 장대함 때문에 무미건조함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탑 역시 국보이고, 상하층 기단부와 일층몸돌에 새겨진 세련된 조각과 안정된 비례를 갖추고 있지만, 내 눈엔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그 무미건조함이 차분함, 정체, 멈춤, 닫힘, 여백 등등의 개념과 반하거나 포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쪽 끝에는 응축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움직이기 직전의 긴장도 거세하고, 다양한 변화의 자유도 포기하고, 자연스러운 부드러움도 회피한 또 다른 차원의 완결... 그 한점 느낌과 배움만 있다면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의 빈약함 때문에 나는 그걸 자유의 또 다른 반쪽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황리 삼층석탑으로 다시 돌아왔다... 삼국전쟁과 당나라와의 전쟁도 마무리된 시점... 감은사탑, 고선사탑을 만들든 웅혼한 기상과 도전적인 패기들이 멈춰서야 했던 어느 시점... 가정적 염원과 시대를 벗어난 소시민적 감성이 석탑에 배어들기 시작한 어느 시점... 강직하면서도 차분하고, 꽉차면서도 경직된 모습의 탑을 보고 있다... 이 지점에서 바라보는 탑은 벌판을 포효하지도 않으며, 도전적이지도 않고, 구심점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지극히 여성적이며, 정적이며, 안정적이다... 그 욕구는 세상의 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그 반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불안해 하는 나를 생각하며 멈춤과 관조의 미학을 생각해 본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있는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거... 조금 더 자유스러워져야 가능한 일일 듯 싶다...> 

 

 

* 첨언 ;

<법륭사 오중탑(599~711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말한 이가 괴테였다고 말했었지?! 역시 대문호 다운 표현이다... " 시간이 멈춰버린 " , " 찰라 " , " 순간 "... 이 모든 걸 집약하는 표현을 괴테에게서 차용하면 <얼어붙은 시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 이 오중탑을 볼 때도 그렇고, 나원리탑, 죽장동탑을 볼 때도 그런 감상이 아니었을까? 이 한마디를 위해 나는 너무 긴 구연을 쥐어짰나 보다... 그래서 제목도 바꿨다 ; 시간이 멈춰버린이 아니라, 얼어붙은 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