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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700년대 전후 전성기 신라시대 삼층석탑 1> 우아한, 준수한, 미려한 석탑들...1303

 

 

 

 

 

 

 

전성기 통일신라의 700년대 삼층석탑에 대한 메모...

 

 

 

1. 통일신라의 전성기, 700년대 삼층석탑

 

   1) 들어가는 말...

   2) 통일신라 전성기 탑들은 어떤 미감을 가지고 있을까?

   3) 전성기 석탑들의 종류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시대별, 유형별 변천

 

 

 

 

 

 

1) 들어가는 말...

 

 

좋아하는 것,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건강한 일이다...^^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설레임이 있고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 만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채울 수 있고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생동감 넘치는 평화는 그렇게 잉태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 된 것일까?

아직 그리움이 있고, 또 다른 설레임이 있고, 그래서 기다림은 더 간절해진다.

여운이 남아있고, 향기가 남아있고, 다시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춤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만지고, 나누면서 나는 행복한 상상을 즐기고 있다.

 

 

<석가탑/국보/741년/7.9m... 삼층석탑의 완성...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완벽함... 그가 模本이고 母本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원사지 삼층쌍탑/보물/7m... 가장 화려하고 우아한 삼층석탑일 것이다. 그 완성태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탑... 나는 이 탑이 늘 석가탑 이후인 780년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석가탑보다 이전인 700년대 초반 성덕왕대에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개연성에 찬성한다...>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5.8m... 석가탑과 가장 닮은 꼴을 찾는다면... 그러나 어느면으로나 석가탑에 떨어지지 않는 완벽함을 갖추었다... 만약 이탑에 노반이 살아있다면 또 어떤 미감으로 완성될런지...>

 

 

 

 

역시 좋은 건 좋은 것인가?

그리움을 채우고 설레임을 비우니, 산개했던 단상들이 조합되고 완성된 그림은 또다른 영감이 된다.

띄엄띄엄 조각나 있던 것들에 마지막 한조각 퍼즐을 끼워넣는 뿌듯한 쾌감 같은 거...

하나하나가 모이니 공간에 경계가 생기고, 시간에 의미가 부여된다.

그걸 관통하는 사상이 형상화되고, 염원이 종교로 승화되고, 땀방울이 예술로 조형된다.

내가 좋아하는 미감들이 묶이면서 먼 과거의 역사가 이제야 선명하게 윤곽을 그린다.

보고 싶었던 경산의 팔공산 선본사 삼층석탑에 힘겹게 올라 전성기 통일 신라를 그려본다.

700년대, 8세기 전후의 삼층석탑들을 거의 다 봤다고 생각하니 이리도 홀가분한 건 또 뭘까?

 

 

<갈항사지 삼층쌍탑/국보/758년/4.4m... 간결함, 담백함, 정연함, 차분함, 그러면서도 읽히지 않는 다양한 매력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탑이다...>

 

<그리고 이 탑이 석가탑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시대를 흐를수록 신라시대 삼층석탑은 작아졌다는 보편성을 부정하게 됐지... 석가탑 전후에 이른 미감의 삼층석탑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고, 석가탑은 그걸 완성했을 뿐이다... 석가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실험들이 있었을 것이고, 석가탑이 공통된 격식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지만 크기로 시대를 구획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아름다움에도 미묘한 차이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것들도...

성별에 따라, 경험에 따라, 시대정신에 따라, 관계의 깊이와 개인의 욕망이란 강도에 따라.

호불호의 선택이 무슨 是非(시비)나 美醜(미추), 그리고 貴賤(귀천)으로 좌우될 수 없음에도

우리는 그냥 좋아할 수도, 많이 좋아할 수도 있고, 그리고 최고로 좋아할 수도 있다. 또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할 수 없는, 꼭 있어야만 하는, 없으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차이를 두기도 한다.

결국 좋아하는 것도, 아름다움도 그런 거리와 깊이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경주 용명리사지 삼층석탑/보물/6m... 우아하고 경쾌한... 석가탑이 남성에 가까운 중성성을, 원원사탑이 지성미를 갖춘 우아함의 극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성적이라면, 이탑은 가장 여성적인 우아함을 갖췄다... 세련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완벽함을 동경하는 것도, 소유의 독점을 갈구하는 것도, 지켜보며 즐기는 것도 아름다움을 즐기는 여러 방식,

범접하기 힘든 기운에 압도되는 것이 있다면, 주머니 속에 갖고 다니고 싶을 만큼 애틋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서기에 어렵지 않고, 머물러도 구속되지 않는 것들이 의외로 편하고 다정할 수도 있다.

내 바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아름다움도, 나눔이 있고 영혼의 교류가 있으면 몸으로 체득된다.

다양한 차이와 그만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내 몸에 각인되고 투영된 靈感(영감)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좋아한다는 감성과 이성, 아름다움을 쫓는 관성을 만족시키면 내 몸의 자양이 되고 우리 삶의 원천이 된다.

그 모든 것들이 내게 기쁨과 활력을, 안정과 평화를, 때로는 자극으로 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청도 봉기동 삼층석탑/보물/5.5m... 술정리 동탑과 판박이. 그런면에서 석가탑의 규준을 완벽히 이어받았다고 말하지만, 실제 석가탑 이전에 조형된 석탑이다... 가까이 가기에, 머무르기에 아무런 부담도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더 좋은 탑...>

 

<왜 이렇게 비슷비슷하거나 똑같은 탑들이 경주 주위에 산개하게 되었을까? 다음에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2) 통일신라 전성기 탑들은 어떤 미감을 가지고 있을까?

 

 

새로운 자극으로 온 몸과 맘을 채근하고 싶은 요즘, 또다시 그걸 찾고 싶어 이리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궁극적이진 않지만 적당한 거리와 알맞은 깊이로 다가오는,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것을 모아본다.

감은사/고선사탑과는 차이가 있는, 석가탑/술정리탑과는 또 다른, 탑평리탑/장항리탑과는 전혀 다른

정연하면서 우아하고, 화사하면서 세련된 70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탑들을 한 곳에 모아보려 한다.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한 시대의 전성기는 대략 5대 150년 정도...

나는 신라의 전성기를 태종무열왕(654년)과 문무왕부터 경덕왕을 거친 원성왕(799년)까지로 본다.

오늘 모아 본 탑들은 신라의 전성기, 그 때 만들어졌으며,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완성에 이른 것들이다.

 

 

<팔공산 경산 선본사 삼층석탑/도지정/5m... 시대의 미감을 완벽히 갖추기에 부족함이 역시 없다...>

<삼층석탑이 자리잡은 곳은 대웅전 앞마당이 아닌 선본사 건너편 산중턱이다. 그리고 오른쪽 정상이 팔공산 갓바위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왜 이런 곳에 삼층석탑을, 거기에 충실한 공력을 담은 석탑을 세웠을까? 산하를 굽어보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것도 다음 기회로 미룬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했던 선본사... 이 탑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아침이나 오후보다는 점심 때쯤이 좋을 듯... 있는 길 찾지 못하고 선본사에서 직선으로 경사를 낙엽을 밟으면 올라가느라 혼났다...^^>

 

<어디서 본듯한 느낌? 아래(↓)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과 비교해보면... 일단 다음에 중복이 있더라도 같이 올려본다...>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크기와 양식에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미감을 구현했다...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는 미감은 그렇게 전승된다...>

 

 

 

 

한 시대의 전성기에는 상반된 시대정신이 공존한다. 장중함과 우아함, 치열함과 너그러움, 화려함과 소박함. 그런 긴장감들이 충돌하고 교류하면서 사회는 활기를 띠고, 문물은 풍족해지며, 인간의 사고는 넓어진다.

과거의 전통이 존중되고, 미래의 도전에 거침이 없으며, 현재엔 격식있는 절제와 은근한 낭만이 함께 한다. 나는 전성기의 신라가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구현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갖췄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유물과 유적에 그런 시대정신이 담지되고 예술과 종교로 승화되기에는 엄연한 한계도 있었을 터, 하나의 유물에 상반된 미감을 모두 담았다면 그것은 당대의 모본이 됐을 것이고, 역사의 명품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일면만을 반영하면서도 전반적인 기류와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체로 완결태를 갖췄다면, 이것 역시 한 사회의 유행으로 남았을 것이며, 당대의 칭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기에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함에서는 적당한 거리가 있고, 최고로 치기에는 깊이가 부족하지만, 좋아하기에 충분한 탑들을 소개한다.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미지정/6m... 준수한, 의젓한 멋쟁이... 지붕돌 삼단의 층급받침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히려 간결해지고 단순해지면서 공예적 완성과 힘을 갖추게 됐다. 아마 전성기 삼층석탑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단으로 마감된 노반까지 일단으로 마무리 한 걸보면, 이 탑을 만든 이는 자신이 추구했던 미감을 일관되게 구상할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여성들이라면 한없이 좋아할 만한 믿음직스러움... 그런 당당함까지 갖췄다...>

 

 

 

 

 

 

 

 

 

탑을 보면서 그런 걸 찾을 수 있냐고? 몇 개의 탑을 고르면서 시대를 논한다고?

하하~~ 느끼려 한다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고 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고...

더군다나 나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탑들, 내가 보고싶어 하는 탑들을 만나기에 더 자유로울지도 모르겠다.

이 탑들을 만든 이가 수천, 수만년도 더 되었을 돌덩이를 웃음으로 쪼개고, 눈물로 다듬고 마음으로 갈아

다시 천년이 넘은 새생명을 만들었다면, 그 탑에서 시대와 사상과 예술을 해독하는 건 현재 우리들의 몫...

그걸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품격과 기운, 그리고 상상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어 보물이 되는 거 아닐까?

내가 탑을 보고, 탑에 동화되는 느낌은 미추와 귀천, 깊이를 떠나 모든 관계가 완성되는 통로라는 생각이다.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도지정/5.2m... 갈항사지에서 느끼는 정연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멋진 탑이다...>

<지금 보고 있는 보월동탑이나 월광사지탑들은 동시대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전통의 양식에 충실해선지 변화가 없고, 안정감만 눈에 띈다... 비례와 조화에선 나무랄데가 없지만, 상반된 미감과 변화가 없으면 긴강감이 없어지고, 긴장감이 없어지면 생동감을 잃는다... 격식은 살아있지만 맛이 옅어지는 아쉬움... 후대의 탑들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많은 탑들이다...>

<합천 월광사지 서삼층석탑/보물... 월광사지에는 두기의 석탑이 있지만, 조성된 시대는 분명히 다르다. 그만큼 미감도 느낌도 다르고... 통일신라 전성기 700년대의 기운이 그대로 살아있다... 언제 다시 사진 찍으러 가야하는데...^^>

<경주 마동사지 삼층석탑/보물/5.4m... 마동사지는 불국사 창사와 비슷한 시기에 김대성이 지은 절터다... 지붕돌 전각이 지나치게 두꺼워지면서 전성기 우아한 맛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두툼함으로 인해 오히려 소박해지고 단순해진 느낌이다... 흐트러지지 않는 정연함의 또 다른 맛을 지니고 있는 탑...> 

 

 

 

 

전성기 신라를 대표하는 각양각색의 탑들을 모아볼 수도 있고, 장중하고 남성적인 미감의 탑들만 모을 수도, 경주에서 만들어 각 지방 요소요소에 보내진 랜드마크적인 탑들만 모을 수도 있지만, 오늘은

중성적이지만 여성성에 가까운, 정연하지만 화사하거나 세련된 미감을 가지고 있는,

격식과 전통적인 규격에서는 엄정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편안하고 부담없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딱 그만한 거리에 있는, 깊지도 낮지도 않은 딱 그만한 깊이를 가진,

그중에서도 삼층으로 만들어진 탑들을 골라봤다.

경쾌한, 화사한, 포근한... 그런 탑들을 우선 골라본 건 아마도 봄이기 때문이리라. 봄을 그렇게 맞고 싶다.

 

 

 

<경주 남산 염불사지 삼층쌍탑/미지정... 경쾌한, 화사한, 그리고 어여쁜... 게다가 시원시원하다...>

 

<정말 좋치?^^ 한가지 아쉽다면, 이탑의 노반은 일단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그러나 이정도 화려하고 경쾌하게 만들어진 탑이라면 처음엔 분명 이단으로 만들어졌을 터... 작은 부분이지만 아쉽다...> 

<왜냐하면 이렇게 석가탑의 노반은 분명히 이단으로 만들어졌다... 일층 지붕돌이 아래(↓) 또 다른 쌍탑에서 규격을 원용했겠지만, 기왕 복원할 때 조금 더 심사숙고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탑의 복원이 이 정도 수준과 완결성을 갖춘다면, 나는 복원과 보수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은 갈고 다듬을 때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끼가 세월의 훈장이 되고, 방치가 원형보존이라는 논리를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염불사지 삼층쌍탑처럼 원형을 찾을 수 있다면 마땅히 보수하고 관리해야만 한다... 일례로 목조건축의 기와와 지붕은 20년에서 150년 주기로 끊임없이 보수한다... 그게 문화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훼손은 아니기 때문이다...>

<염불사지 상층석탑이 처음부터 저런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 탑은 과거 불국사역 근처, 7번 국도에서 불국사로 들어가는 구정리 방형분 옆에 서 있었다... 가늘어 보이는 일층 탑신과 너무 두꺼운 일층 지붕돌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나역시 몇번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고... 예전 경주 구정동에 있었을 때 모습이다...>  

<그리고 구정동 당시를 보면 노반이 많이 거슬리지? 복원하는 이들이야 구색만 갖추려했겠지만, 장난감처럼 올려놓은 저 하나의 부재로 인해, 이 탑의 미감은 크게 반감되었을 터... 손대는 게 방치하는 것보다 나빠지는 걸 우려하는 우리들의 염려가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그래도 손대야 할 걸 외면하는 건 나쁜 거 같다...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이 탑이 어색하게 보였던 단 한가지 이유는 일층 지붕돌 때문이었단다... 모든 건 염불사지 석탑부재였지만, 유일하게 일층 지붕돌만 이거사지탑 부재였다는 말... 드디어 염불사지로 옮기면서 기존에 남아있던 석탑의 일층 지붕돌을 복원하여 지금의 자태를 살리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일층 지붕돌 하나가 바뀌었다고 탑의 미감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그래서 판석의 두께와 넓이, 전각의 두께, 낙수면의 반전 각도, 탱주의 유무, 그 하나하나가 탑의 미감에 미치는 영향은 우리들의 의도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우리가 좋다고 느끼는, 아름답다고 규정하는 것들은 모든 요소와 장치의 총화다... 특히 염불사지 쌍탑이 빛을 발하는 것은, 경주 남산을 배경으로 하는 위치도 커다란 몫을 차지할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지금의 모습은 아리따운 꽃처녀를 보는 느낌...^^>

 

<오늘은 염불사지 삼층탑까지만 보고, 다음엔 전성기 신라시대의 장중하고 당당한 삼층탑들을 모아 보겠다...>

<신라의 전성기 700년대는 오늘 소개한 탑들처럼 우아함과 세련됨, 그리고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기운이 꽉 차 있었을 거 같다... 그 미감에는 절제된 감각과 미려한 솜씨, 그리고 균질한 정연함이 어느 곳에도 부족하지 않게 깔려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신라의 전성기는 그러한 바탕에 이처럼 화사함을 꽃피우면서도 장중한 느낌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 상반된 미감을 소화할 수 있어 신라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고, 또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시대의 양면은 무엇이고, 어떻게 교류해야 할까? 무엇이 우리를 충만하게 채울 수 있을까? 전성기 신라를 생각하는 이유고 지금의 나를 다시 채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