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통일신라의 700년대 삼층석탑에 대한 메모...
1. 통일신라의 전성기, 700년대 삼층석탑
1) 들어가는 말...
2) 통일신라 전성기 탑들은 어떤 미감을 가지고 있을까?
3) 전성기 석탑들의 종류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시대별, 유형별 변천
3) 전성기 석탑들의 종류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시대별, 유형별 변천
불국사 석가탑, 술정리 동삼층석탑, 갈항사지 삼층쌍탑, 월광사지, 선본사와 보월동 삼층석탑,
그리고 원원사지 삼층쌍탑과 용명리, 염불사지, 미탄사지, 마동 삼층석탑...
위에서 나는 전성기 신라의 삼층석탑 중 경쾌하고 화사하며, 세련되며 우아한 탑들을 골라봤다.
그리고 이와 상반되는 미감으로 장중하고 당당하거나, 무겁고 기름진 탑들도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했다.
감은사지 삼층쌍탑을 비롯해, 천군리, 간월사지 삼층쌍탑과 고선사지, 황복사지, 낙산동 삼층석탑 등이다.
미감은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 흐트러짐 없는 정연함, 품격 넘치는 절제와 긴장감이 내재된 생동감...
*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의 미감...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유지되는, 흐트러짐 없는 반듯함과 한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정연함,
이런 단정함 속에서 우리는 전성기 신라의 석탑에서 내재된 절제미와 긴장감을 느끼는지도 ...
<고선사지 삼층석탑/기단부 판석... 그 거대한 탑이 이렇게 정밀하게 다듬어졌다는 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손을 베일 것 같이 예리하게 날이 서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지붕돌 층급받침... 신라시대 석탑의 가장 첫번째 미감은 정연함이 아닐런지...>
<천군리 삼층석탑... 한단 한단 깎아올린 층급받침에서 절제되고 응축된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봉기동 삼층석탑... 한 땀 한 땀 손길이 지나간 그곳에 세련된 우아함이 살아나고...>
<거돈사지 삼층석탑... 한층 한층 쌓아올린 몸돌과 지붕돌은 그럴 수 없이 차분하고 안정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성기였기에 가능한 규모와 공력이 뒷받침된 장엄이며, 하나하나만으로도 시대를 대표하는 탑들...
그런데 이런 탑들을 모아보면서 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으니
하나는 전성기 탑들은 판에 박은 듯 일정한 양식과 균질한 수준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탑이 조성된 지역이 생각보다 넓지 않다는, 엄밀히 말하면 특정지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정한 양식을 갖출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전성기 탑들이 분포한 지역은 왜 전국적이지 않을까?
700년대 전후, 전성기 신라시대 탑들을 모두 모으기 전에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먼저 전성기 신라탑이 가졌던 특정 양식과 그 연원을 추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약간 지루할 듯^^).
* 700년대 전후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우아한 미감의 삼층석탑 분포도...
<① 경주 : 석가탑, 원원사지탑, 용명리탑, 미탄사지탑, 염불사지탑, 마동탑, ② 창녕 술정리 동탑, ③ 청도 봉기동탑, ④ 합천 월광사지탑,
⑤ 경산 팔공산 선본사탑, ⑥ 성주 보월동탑... 이 탑들이 분포한 지역은 초기 신라와 500년대 정복한 가야지역임을 알 수 있다... 왜 부여에는, 서울에는, 광주와 원주에는 그런 탑들이 없을까?... 전성기 신라의 우아함은 이 지역들을 벗어나지 않은, 혹은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게 이 글을 시작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야기를 풀어가려면 먼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석탑이 변화하는 양식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라시대 석탑들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탑들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몇몇 탑을 제외하면 700년대까지, 800년대에, 그리고 900년대 신라말기 등 만들어진 시대 구분도 쉽다.
일례로 조선시대 만들어진 탑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하고 나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숭유억불이 있었고, 불교 미술에서도 석탑이 주도했던 시대가 아닌만큼 수준과 규모가 조악하더라도
실제 만들어진 수량이 적거나 없었던 때가 아님에도 형태와 규모를 가지고 시대를 추측하기는 불가능하다.
고려시대도 마찬가지. 조선시대와 다르다면 지역성이 남아있고, 넓은 흐름 정도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들은 무엇이 있을까?
<함안 지리산 벽송사 삼층석탑/조선/보물474호/높이3.5m... 1520년, 벽송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보물로 지정됐다... 600여년이 지난 다음의 계승과 퇴화... 묘한 상념을 일으키게 하는데, 아무튼... 신라석탑의 양식이란 어떤 것일까? >
<미탄사지 삼층석탑/기단부... 먼저 상층과 하층, 2단의 기단부를 갖추고 있다는 점...>
<나원리 오층석탑/지붕돌... 낙수면과 층급받침으로 이루어진 지붕돌...>
<고선사지 삼층석탑/기단부 괴임... 하층 기단부 면석과 상층 기단부 판석 사이의 괴임... 목조건축의 문지방에서 차용했다는 설이 있다...>
<천군리 삼층석탑/기단부 괴임... 자세히보면 아래쪽은 곡선으로, 위쪽은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호, 각형에 대비해 호형이라고 부른다...>
<보월동 삼층석탑/일층몸돌 괴임... 그리고 몸돌 괴임은 상하 모두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형이라 부른다>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각층 지붕돌 위 몸돌괴임... 전성기 석탑에는 일층뿐만 아니라 각층 몸돌 밑에 2단 각형 괴임을 두었는데, 자세히보면 지붕돌과 함께 가공했는데, 석가탑 등을 제외하면 이런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면 먼저 신라시대 석탑 양식이 어떻게 변하는지 간단하게 살펴볼까?
가장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1) 상층 기단부의 면석에 탱주가 2개(700년대까지)에서 1개로 줄어들고,
2) 하층 기단부의 탱주도 3개(600년대)에서 2개로, 800년대 중반이후 1개로 줄어들고,
3) 800년대 중반 이후 하층 기단부가 사라지거나, 탑신 괴임도 2단에서 1단, 또는 생략되기도 하며,
4) 탑의 규모(노반까지)가 7m이상(600년대), 6m이상(700년대)에서 800년대 이후 4.5m전후로 작아진다.
* 통일신라 석탑의 시대별 탑의 규모와 기단부 양식 변화 ; 600년대 후반 → 700년대 → 800년대 후반
<나원리 오층석탑/600년대 후반... 높이 9.8m>
<나원리 오층석탑/기단부... 하층기단부에는 3개의 탱주가, 상층기단부에는 2개의 탱주가 양각되어 있다... 그리고 자세히보면 일층몸돌이 상층 기단부보다 높고, 일층몸돌의 폭도 기단부를 채울만큼 꽉 차있다... 600년대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인 목탑/목조건축의 흔적이다...>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 700년대 중후반... 높이 5.2m, 노반이 살아 있었다면 5.6m 정도였을 크기다... 나는 탑의 크기를 상층 기단부 판석(갑석)과 내 눈높이를 맞춰 가늠하고 미감의 상당부분도 결정한다... 판석이 눈높이를 벗어나면 장중함으로, 눈높이보다 낮으면 단아함으로...>
<보월동 삼층석탑/기단부... 하층 기단부 탱주가 2개로 줄었지만, 상층 기단부 탱주는 그대로 2개... 상층 기단부가 높아졌고, 일층몸돌은 작아졌다... 그러나 괴임부터 보면 일층몸돌이 상층 기단부보다 높다... >
<경주 효현리 삼층석탑/800년대 중후반... 높이 4.6m, 노반이 살아있었다면 대략 4.9m 정도였을 듯... 높이는 1m 정도에 불과하지만 탑의 미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탑에서 건축적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공예품으로 느껴지는 크기의 기준을 나는 사람 키의 3배 이하인 4.5m 전후로 본다...>
<효현리 삼층석탑/기단부... 지대석 없이도 하층 기단부가 높아진데다, 상층 기단부도 갑석까지 고려하면 점차 정사각형에 가까워진다(900년대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일층몸돌도 그만큼 작아지고...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높아졌다는 설명이 맞을 듯...>
* 일층몸돌 괴임과 기단부의 변화 (이건 흐름은 보편적이라 보기 어렵다)...
<단속사지 삼층석탑/일층몸돌 괴임... 80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괴임이 상당히 낮아졌다... 물론 설명을 위해서 첨부했지만, 실제 이 탑의 괴임이 낮아진 이유는 석재의 강도 때문이었을 걸로 짐작한다... 왜냐하면 상층 기단부 갑석 전체를 파내야만 일층몸돌 괴임을 만들 수 있는데, 유독 단속사지 석탑의 석질이 강했을 것으로 본다...^^>
<봉암사 삼층석탑/기단부... 880년대 창건과 함께 세워진 탑으로, 상륜부까지 높이 6.3m다... 직지사의 탑들처럼 문경지방의 특성일 수도 있는데 기단부가 단층이다...>
* 탑의 전체 높이에서 상륜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감은사탑/682년... 위에서 시대가 흐를수록 탑의 높이는 낮아지고, 나는 노반까지의 높이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상륜부가 온전히 남은 탑은 보림사, 봉암사, 실상사, 백장암 등 몇기 안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반까지만 남아있는 탑의 전체 높이는 어떻게 추정할 수 있을까? 1972년 복원한 석가탑의 예도 참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전성기 신라석탑의 상륜부는 감은사탑에서 단초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은사탑의 전체 높이는 13.4m, 이중 노반까지가 9.5m고, 찰주가 3.9m다. 참고로 찰주의 전체길이는 5m...
그렇다면 전체높이에서 상륜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29%고, 노반까지 남아 있는 탑이라면, 상륜부는 노반까지 높이의 41%가 된다.
즉 노반까지 5m 높이의 석탑이라면 망실된 상륜부는 2.05m 정도가 되어, 전체 석탑 높이는 대략 7m가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이를 기준으로 노반까지만 남은 탑들의 전체 높이는 쉽게 추정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위의 비례로 대략적인 상륜부 높이추정은 가능하다... 문제는 우리의 시선은 만들어진 크기 그대로를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가까이에서 탑을 올려볼수록(↑) 상륜부는 작아지고, 멀리서 정비례로 볼수록(↓) 상륜부는 높고 길게 느낄 수밖에 없다...>
<즉 상륜부의 높이는 사찰에 들어서 탑을 바라다 본 위치와 거리,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고차원적인(?) 건축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다만 탑의 전체 크기가 작아질수록 상륜부의 높이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점을 고려해, 700년대 초반까지는 탑신(당시 탑들은 노반까지 7m가 대부분 넘었다)의 40~35%까지를, 800년대(이때부터 탑의 높이는 6m 이하로 줄어든다)부터는 35~30%까지를, 900년대(4.5m 이하)에는 30~25% 정도로 낮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륜부가 낮아져 미감을 크게 해친 대표적인 탑이 1650년대 만들어진 법주사 팔상전이라 생각하는데, 아무튼 법륭사 오중탑 등 일본목탑을 살펴봐도 감은사탑과 비슷한 비례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초기에는 그만큼 상륜부가 강조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륜부는 훨씬 높았고, 그런 생각에서 사진찍을 때 존재하지 않은 상륜부를 고려하여 그 높이만큼 여백을 남기고 상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탑이 소형화 단순화 되면서, 부재의 수도 줄고, 기법도 생략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지붕돌의 변화와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 등 조금 더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더 있다고 생각된다.
5)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5단(800년대 초반까지)에서 4~3단으로 줄어드는 경향이 강하며,
6) 지붕돌 낙수면(물 흐르는 위쪽)과 전각(낙수면과 층급받침의 사이/간격) 코너의 반전(치켜올라감)이
직선에 가깝거나 매우 완만한 형태(700년대까지)에서 점차 곡선화 되면서 과장(800년대 중반)이 심해지고,
* 지붕돌 층급받침의 변화 ...
<나원리 오층석탑/600년대 후반/ 5단 층급받침...>
<성주사지 삼층석탑/800년대 중후반/ 4단 층급받침... 물론 후대에 조성된 석탑 층급받침이 모두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5단 층급받침의 양식적 규준이 깨져 나가는 것은 분명하다...>
* 지붕돌 낙수면과 전각부위의 반전...
<석가탑/741년/ 전각과 반전... 석가탑의 지붕돌을 보면 곡선이 없다... 낙수면의 모서리인 우동도 완전히 직선이고, 지붕돌 전각과 코너 부분의 반전을 봐도 확실한 직선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매우 부드러운 곡선으로 지붕돌과 전각을 바라본다는 게 신기하다...>
<용명리 삼층석탑/700년대/지붕돌... 석가탑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드러나지만, 용명리탑 지붕돌은 우동도 전각의 반전부분도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가공되어 있다...>
<보월동 삼층석탑/700년대/지붕돌 전각과 반전... 낙수면은 끝부분에서 부드럽게 공글렸고, 전각은 두툼하다...>
<성주사지 삼층석탑/800년대/전각과 반전... 전각이 두툼하게 처리되어 힘을 잃지는 않았지만, 반전의 각이 커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하게 보인다...>
<보림사 삼층석탑/870년/지붕돌... 800년대에 이어 860년을 전후해 신라석탑의 미감은 또 한번 크게 변하데, 800년대엔 기단부와 규모에서, 860년대엔 지붕돌의 낙수면과 층급받침, 전각의 반전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7) 초기 일층몸돌이 기단부에 비해 넓고 높은데 반해, 700년대엔 일층몸돌이 상층기단부 높이와 비슷해지고,
800년대부터 일층몸돌이 가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탑신은 작아지고, 상대적으로 기단부는 높아지는데,
800년대 후반을 넘어서면 상층기단부는 정사각형에 가까워지면서 하층기단부가 매우 높아지게 된다.
즉 초기일수록 기단부는 넓고 낮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기단부는 높고 상대적으로 커진다. 이건 큰 차이다.
* 기단부와 일층몸돌 비례의 시대별 흐름 비교 ; 600년대말 → 700년대 중반 → 후반 → 900년대..
<감은사탑/682년/기단부... 일층몸돌과 상층기단부의 높이와 넓이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목탑과 목조건축의 여운이 강하게 남아있는 초기의 형태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상층기단부는 정사각형 3개 ■■■를 붙여 만든 것 처럼 넓다...>
<석가탑/741년/기단부... 목탑의 여운이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일층몸돌이 상층기단부보다 높다... 그리고 상층기단부는 정사각형 2개 ■■로 만들어진 것처럼 안정된 직사각형이다...>
<단속사지 삼층석탑/800년대 초반/기단부... 일층몸돌보다 상층기단부가 높아졌다... 상층기단부 갑석까지 본다면 정사각형 1.7개 정도 들어가는 비례... 800년대 중반 이후는 효현리 삼층석탑 사진(↑)을 참고하는 게 더 좋을지도...>
<성주사지 삼층석탑/800년대 중후반/기단부... 800년대 중후반부터 900년대에 오면 기단부는 초기의 비례와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석탑은 석탑으로서 완성될뿐, 목탑이나 전탑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특징이 1), 4), 5), 6)번 항목이고, 일부에서는 2), 3)번 항목도 지적하곤 하는데,
이렇게 양식을 세분화시킨 건 신라뿐 아니라 고려시대탑과 비교하는데도 유용한 기준이 되기 때문인데
900년대 이후 2)하층기단부 탱주, 4)탑의 규모, 5)층급받침 단수, 7)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 등은
탑을 조성하는 양식으로서 의미가 이미 사라지고, 다만 1)상층 기단부 탱주는 1개이거나 완전히 사라지고,
3)신라말 고려초부터 탑신괴임 중 일층몸돌 괴임이 강조되기 시작하여 나중엔 별석으로 만들어지게 됐고,
6)과장된 낙수면 경사와 전각의 반전은 고려시대 탑의 미감을 결정하는 가장 큰 특징으로까지 부각됐다.
* 라말려초 900년대 이후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 일층탑신 괴임 강조와 지붕돌 낙수면 반전의 과장
<성주사지 삼층석탑/800년대 중후반/일층몸돌 괴임...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화려하고 세련되고 정교한 일층몸돌 괴임을 가진 탑이 성주사지 삼층/오층탑들을 것이다... 괴임을 별석으로 가공하고 장식화한 고려시대 특징의 시원적 형태라 생각해 함께 소개한다...>
<신복사지 삼층석탑/고려... 몸돌의 괴임은 목조건축의 흔적이 아닌, 석탑의 장식으로까지 발전한다...>
<홍제동 사현사 오층석탑/고려... 고려시대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지붕돌 낙수면과 반전의 과장일 게다... 그러나 자세히보면 전각의 아랫부분은 완벽한 직선으로 만들어졌고, 마지막 코너 반전을 위해 부드럽게 올라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보면 고려시대 석탑들의 지붕돌은 분명 직선과 곡선의 조화인데, 우리 눈에는 곡선으로만 보인다...^^>
즉 고려시대 탑은 신라의 절제된 정연함과 긴장감, 그리고 전통양식을 고수하는 균질함을 포기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지역적 특성까지 가미하여 자유롭고 다양하게 조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위 항목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탑의 변천을 정리한다면,
먼저 초기 목탑이나 목조건축의 결구방식과 체감은 시대가 흐를수록 사라지거나 잊혀지고,
둘째 양식이 고착된 이후 점차 석재 고유의 구조에 맞게 부재는 단순화되고 세부기법들은 생략되어가고,
셋째 가람배치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부터는 석탑으로서의 질감을 살리는 방향에서 공예적 완성에 초점이 맞춰 양식도 따라 변해 갔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 석탑 부재의 단순화와 세부기법의 생략 ; 700년대 초반 → 800년대 중반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700년대 중후반... 탑리리와 감은사 양식이 혼합된 초기양식을 가진 석탑 ...>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800년대 초반... 모전석탑 양식을 이어받았더라도 낙산동탑과 부재 수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부재의 수도 줄어들고(지붕돌 1개, 몸돌 1개), 세부 기법들도 완전히 생략되고... 석재 고유의 질감과 구조만으로 석탑이 완성된다...>
* 차츰 건축적 요소가 사라지면서, 석탑은 공예적 미감으로 완성된다 ; 682년 → 900년대
<감은사탑/682년... 신라시대 삼층석탑은 이렇게 시작해서...>
<성주사지 삼층석탑/800년대 중후반... 이렇게 변하다가...>
<중흥산성 삼층석탑/800년대 중후반... 이렇게 마무리 된다...>
사족 ;
전체의 이미지와 느낌이 달라진 것은 비단 탑의 규모와 볼륨의 변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세부 디테일이 틀려지고, 그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를 하나씩 뜯어보면
사족1> 층급받침이 4단으로,,,
사족2> 지붕돌 전간은 더이상 직선이 아니다. 모서리 부분을 들어올렸다. 이 반전은 백제석탑의 특징으로 이후 고려석탑의 핵심적 미감으로 정착한다...
사족3> 낙수면 경사는 적극적인 곡선이다. 이 점도 고려석탑의 대표적 특징으로 고착된다...
사족4> 지붕돌 전각에는 풍탁이 달렸을 풍혈들이 규칙적으로 노반까지 뚫려 있다. 통일신라 초기탑들에는 이런 풍탁을 위한 풍혈이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에는 존재로 모든 걸 말했다면, 후기에는 장식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사족5> 각층 지붕돌 위, 몸돌괴임은 낙수면과의 경계까지 명확하다. 전체적인 양식은 단순화 되지만, 세부기법에는 상당히 장식적인 요소들이 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초기에는 탑을 돌로 건축하였다면, 후기에는 탑 모형을 석재 공예품으로 만들었다??!!!^^>
'탑여행-趣,美,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시대 삼층석탑 4>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의 미감차이...1304 (0) | 2013.04.25 |
---|---|
신라시대 삼층석탑 3> 고구려에는 석탑이 없었을까? 왜 석탑을 만들었을까?...1304 (0) | 2013.04.16 |
700년대 전후 전성기 신라시대 삼층석탑 1> 우아한, 준수한, 미려한 석탑들...1303 (0) | 2013.03.30 |
탑> 얼어붙은 시간 - 무미건조한 탑 속에서 자유를 찾다...1203 (0) | 2012.03.28 |
탑3-3> 가을, 거돈사지에서...1110 (0) | 2011.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