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구려에는 석탑이 없었을까?
우리나라는 왜 석탑을 만들게 되었을까?
1) 고구려 불교와 고구려 석탑 조형의 개연성
지금까지 나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양식과 특징을 정리하면서, 어떻게 석탑이 목탑의 그림자를 벗어가며 언제부터 공예적으로 완성되는가 하는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봤다. 또한 기존의 석탑 양식 구분방법에 기단부의 변화를 첨가하여 강조했다. 그러면 이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 체계적으로 완성되기까지 그 토대가 되었던 요인과 요소들에 대해 추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정리가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에서부터 원시적인 형태와 기원적인 양식, 그리고 전통적인 기법까지 일관성 있게 요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늘 가졌던 욕심이기도 하지만...
<인도 산치대탑... 스투파, 탑파, 탑... 인도와 중국문화의 점이지대인 인도차이나 반도 주변 태국/라오스/캄보디아/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소승불교가 주축이 된 곳은 인도의 초기 스투파와 후기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도 양식으로 탑건축이 형성되었지만, 대승불교가 주축이 된 중국/일본/한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한국만이 초기 인도의 스투파처럼 돌로 만든 탑이 고착된다... 물론 인도차이나 반도의 탑과 달리 한국식 양식으로...>
먼저, 인도의 복분식 탑파를 누각식 건축으로 번안하여 목탑을 불교건축에 접목시키고 전탑을 만든 중국처럼 외래문화로부터 고유한 전통을 지키면서 전파된 사상을 독자적으로 이해하려면 번안과 개선은 필연적인 과정, <석탑의 나라>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는 목조건축의 번안과 전탑의 모방으로 시작했다. 특히 다양한 교류로 형성된 문화를 독자적 세계관으로 통합하여 통치체계를 만들어갔던 500년대 백제는 최상의 목탑조성 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500년대 중후반부터 목탑을 번안한 석재 탑을 만들기 시작, 익산 미륵사지에서 볼 수 있듯이 600년대 초중반, 석탑뿐만이 아니라 석불, 석당간과 석등에 이르기까지 가람건축과 불교예술에서 석조건축과 공예가 갖춰야할 모든 양식적 요소들을 응집시킬 수 있었지만, 660년 멸망과 함께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백제를 정복한 신라에 의해 우리나라의 석불, 석당간, 석등을 비롯한 석조공예와 석탑은 정형화 되고, 전형화 되면서 완성되게 된다.
<미륵사지 모형... 미륵사지는 당대 한반도의 불교가 이룰 수 있는 모든 불교미술을 집대성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의미가 있다... 3탑3금당 방식의 가람배치에 목탑과 석탑을 비롯, 석등, 당간지주 등에 이르기까지 백제불교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고, 또 새로운 불교미술의 출발점이 된 곳이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에 의한 석탑의 실험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석탑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만약 백제의 실험을 신라에서 정형화하지 못했다면 한반도의 석탑조성 역사는 통일신라시대 300여년을 끝으로 소멸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를 비롯, 옛 백제와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전통과 사상까지 흡수하여 한반도의 정체성을 완성한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다양하고 폭넓게 석탑이 조성될 수 있었다는 것은, 한반도에 석탑이 주류로 등극할 수 있는 주객관적 요건이 충족되었기 때문... 그렇다면 백제뿐만 아니라 필히 고구려에서도 석탑을 조성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개연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이 해독한 진화와 발전법칙은 결과적 필연이었지, 태생적 운명은 아닐 것이다. 즉 숱한 우연과 돌연변이, 그리고 충돌과 융합의 결과를 진화와 발전이라고 해석하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최소 원초적 출발에서의 개연성은 밝혀야 보편성을 얻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다. 고구려의 석탑을 찾아보는 이유다.
<미륵사지... 미륵사지 서탑 한기를 해체하면서 나온 부재들... 동탑을 비롯, 목조건축의 기단 등을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양의 돌이 유입됐을까?>
나의 이런 추정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석탑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 고구려의 어떤 내적인 욕구들이 있었기에 그런 시도가 있었는지 메모해 본다. 먼저, 당시 탑의 조형이란 신앙의 도구와 상징으로서 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정치사회문화적 필요의 결정체인 만큼 500년대 전후의 사상적, 건축적 흐름에서 그 단초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삼국에서 가장 앞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중흥을 이루었던 고구려는 불교교리 측면에서도 삼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도적이었다. 그 대표적 이론가가 승랑으로 중국(수나라 길장), 일본(고구려 승랑-수 길장-고구려 혜관)삼론종의 개척조이기도 한 그는 인도의 용수와 중국 구마라습의 맥을 이어받아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사상적 초석을 만들었고, 달마대사와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무의무득(無依無得)을 표방, 초기 화엄종과 선종의 뿌리가 된 大사상가이다.
<4~6세기까지의 동북아 세력 배치도... 후한부터 불교는 유입됐지만,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들은 중화민족으로서는 이민족이나 다름없던 북방민족에 의해서다... 앞선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북위의 수도가 평강에서 뤄양(낙양)으로 천도한데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다... 그만큼 남북조시대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긴밀했다...>
또한 삼국사기 등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고구려 승려들은 간자(간첩)로 백제에 파견돼 전쟁을 승리로 이끌거나, 신라와 교류에서 선발대가 되는 등 정치적 활동폭까지 높았을만큼, 당시 고구려의 불교는 사회발전의 구심력이면서 대외교류의 가교역할까지 담당 했을 것이다. 당연히 불교건축과 탑파조성 수준도 선진적이었던 중국의 목탑과 전탑을 답습하고 모방하여 재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역으로 위진남북조와 백제, 신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진보적이었으며 새로운 변화에도 주도적이었을 것이다. 즉 고구려에서 석탑조형의 시도는 당대의 불교를 폭넓게 이해(750년대 이르러서야 신라는 석굴암을 만들 수 있었다)하고, 또한 불교근원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이 가능(다보탑의 형상화도 그런 일환)할 뿐 아니라, 문화적 전통을 사상에 접목시켜 새로운 변화(석가탑의 팔방좌나 원원사탑의 십이지신상, 화엄사탑의 사자좌 등과 같은...)를 창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다보탑... 전무후무한 양식으로 만든 석탑... 법화경에 근거하면 대웅전 영역은 완벽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 다보여래는 석가여래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석가여래는 대웅전의 영산회상을 향하게 되고... 그렇다면 불국사의 창건주며 건축주인 '김대성'은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순례의 방향과 순서를 잡아주고 있다... 먼저 다보탑을 보고, 그 다음 석가탑을 보고, 그 연후에 대웅전으로 들어오라는... 그래서 첫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다보탑을 화려하게 만들고,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게하려고 석가탑을 저리도 완벽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장군총/Daum카페/청주장로성가단 sungwoo님 사진 스크랩... 장군총의 4면에는 각면마다 3개의 호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호석은 고구려인들이 돌을 다듬을 기술과 시간이 없어 저렇게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원원사지탑 기단부... 고구려 시대 장군총의 호석을 곧바로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비약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덤 주위의 호석은 고조선시대부터 있었고, 백제, 신라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나는 원원사지탑의 이 십이지신상도 불교미술에 접목된 전통사상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석촌동과 방이동의 백제 적석총... 고구려에서 쫓기듯 내려온 백제인들도 역시 적석총을 세웠다. 피라미드식으로... 그리고 그 주변에는 이렇게 호석을 세웠고... 장군총과 이 백제의 적석총 중 어느게 더 빠른 시대에 만들어졌는지는??>
<경주 괘릉...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에는 하부에 판석이 둘러져 있고, 그곳에 십이지신상이 양각되어 있다... 물론 초기 형태의 신라고분에는 없었던 양식으로, 먼저 무덤 주위로 호석들이 세워지고, 후대에 판석이 가미되었다... 300여년에 걸친 변화... 무덤양식은 가장 오랫동안 쉽게 변하지 않고 전승되는 규범중 하나다...>
2)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살펴본 고구려 석조건축 기술
그리고 인류문명 중 가장 오랜 전통으로 전승되면서 쉽게 변하지 않는 묘제(墓制)건축을 통해 고구려의 문화적 전통을 찾아본다. 4~7세기까지 전성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아시아 최초, 당대 세계최고 수준의 프레스코기법 벽화이며, 그중에서도 산화열이 가미된 봉-프레스코(buon-fresco)기법벽화로 작은 벽화에서만 프레스코 기법을 혼용했을 뿐 세코(seeco-fresco)기법이 주를 이룬 로마의 폼페이, 카타콤 벽화와 차별된다. 내가 벽화에서부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때까지 벽화를 남길 수 있었던 크레타(BC1500년), 이집트(BC1300년), 그리스(BC570년), 에트루리아(BC480년), 그리고 로마(1~4세기)와 후한(3~4세기)처럼 4~7세기 고구려의 문명은 세계최고 수준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수렵도/무용총 내부/길림성 집안시/5세기 초... 익히 알듯이 무용총이란 주인은 모르고, 무용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무도/강서대묘 내부/평남 강서군/국립중앙박물관 모사도... 풍속화 위주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 4~5세기부터 사신도가 나타나기 시작, 6세기말 7세기에 이르면 고분벽화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자연히 다른 그림들은 없어진다는 말... 시기적으로는 혼재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벽화부터 감상해본다...>
<주작도/강서대묘 남벽/국립중앙박물관 도록에서... 평남 강서군에는 강서대묘를 비롯 중묘, 소묘까지 모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이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규모가 큰 게 강서대묘의 벽화들이다...>
<행렬도/안악3호분/황해남도 안악군/357년... 4세기 중반 만들어진 고분으로, 이 행렬도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큰 대작일 거 같다. 가로 10.5m, 높이 2m... 위 설명에서도 확인되듯, 이 행렬도에 등장하는 인물이 250여명이며, 병마총처럼 같은 얼굴이 없다고...^^>
<위 행렬도의 모사도다... 이 벽화를 통해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군들의 배치와 행렬의 순서, 그리고 무장의 수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백제와 일본, 그리고 신라 고분 등에서 발견된 못신의 용도도 확인할 수 있었다...>
<못신/국립중앙박물관/고구려... 백제, 일본 등과 다른점이 있다면, 못이 길고 바닥판에만 못이 박혀 있다는 점... 무령왕릉 등 백제의 금동신이 완전히 의장용으로 제작되었지만, 4세기 고구려 군들의 못신은 기병들이 근접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살상용이었음이 벽화를 통해 밝혀진다... 벽화는 타임갭슐처럼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BC1만년 경의 프랑스 라스코, 퐁드곰 동굴과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粗地(조지)기법의 자연발생적이고 우연한 산물이었다면, 이후의 문명들이 만든 粧地(장지)기법의 벽화는 집단적이며 지속적인 관리가 뒷받침된 공급체계와 실생활에서 문화예술을 누리려는 수요층이 두텁게 존재했음-한 개인의 우연한 천재성이 아닌, 집단과 사회가 공유한 예술적 취향-을 의미하는 문명의 척도로서 이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흥리 고분/남포시 덕흥리/408년/아름다운 우리문화재②,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예맥출판사, 2008년 초판... 여기 수록한 스크랩은 이 책자를 참고했다. 조금 더 다양하게 고구려 고분벽화를 올리고 싶어서...^^>
<행렬도/수산리 고분/남포시 수산리/5세기 후반... 모사도를 자세히보면 고구려 여인들은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신분의 귀족들은 일산(우산)을 좋아했음도 확인할 수 있고... 이 전통은 인도, 중국문화와 흡사한 것임에도 우리에겐 낯선 게 분명하다... 탑 상륜부의 보륜, 보개 등도 일산에서 차용했다는 설에 나는 동의한다... 아무튼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데...^^>
<견우와 직녀도/덕흥리 고분... 뿐만 아니라 5세기 초반 벽화의 소재는 다양한 풍물과 풍속 등이 소개되어 있다..>
<통구사신총/길림성 집안시/6세기 후반... 철기를 중시하는 고구려를 강조하기 위해 최근 많이 인용되는 사진으로 당시 고구려인들의 이상과 다양한 신앙도 벽화에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움직임들을 통해, 당시 고구려 국가체계는 완전히 불교와 유교 위주로 편제되었지만, 개개인의 실생활에는 철저히 도교가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미술 용어를 사용하여 채색기법을 정리하는 이유는, 오늘날 동양화풍의 수묵화가 장지벽화 중 습지벽화, 즉 프레스코 기법에서 유례했고, 서양화는 건지벽화, 즉 템페라(tempera)기법에서 발전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그런 분류로 본다면 서양화중 수채화는 세코-프레스코 기법이다. 그리고 필법에서도 동양화는 선 또는 획을 긋는다는 의미가 강하다면, 서양화는 칠하고 바른다는 페인팅으로 원초적으로 다르다. 즉 도화지에 연필이나 크레용, 또는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것과 화선지에 수묵을 치는 것을 비교해보면, 그림의 완성태를 접하는 동서양의 차이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16세기 르네상스 시절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 프레스코 벽화에 서양인들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아무튼 지천년견오백년이란 말이 있다. 좋은 천에 그린 그림이 5백년을 가지만, 좋은 종이에 그린 그림은 천년을 간다는 말인데, 이를 조금 더 확대해석하면, 캔버스 위의 유화 수명은 3백년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벽화는 이미 1천5백년이 넘었다. 그것도 우리나라처럼 습한 기후의 인위적으로 만든 지하공간에서 말이다...)
<바티칸 시스틴 성당 벽화... 역시 내가 찍을 수 있는 건 한계가 많았지?...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등... 그보다 나는 미켈란젤로에 촛점을 맞췄었지...>
<시스틴 성당 천지장조... 미술사에서 왜 그렇게 이 벽화를 중시하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해 무지한 걸까? 왜 자랑하지 못하는 걸까?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복원 된 서양의 벽화보다 1000년전에 고구려의 회화는 전성기를 열었는데...>
<바티칸 성당 내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건축에서 벽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부차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건축은 조각을 담은 공간이지, 그림을 담은 건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 내부를 폄하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가 있어 유네스코에서는 이 벽화를 인류의 문화적 미술사적 자산이며 지속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은 것으로 지정했겠지만, 그보다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찾아야할 중요한 단서들이 있는데, 고구려 벽화가 그려진 곳은 바로 고구려인들이 석재로 만든 고분이었다는 점이다. 즉 그림이 오랜 역사를 가지려면, 채색기법도 중요하지만, 제지, 제혁, 직조기술이 전제되어야 하듯이(프레스코 기법에 대한 연구도, 시간을 이겨낸 그림기법에 대한 연구의 하나일 뿐이다), 벽화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지진, 화산, 퇴적, 침식 등 숱한 자연재해에도 붕괴되지 않을 치밀하고 견고한 결구를 갖춘 고분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고구려인들이 만든 피라미드 모양의 횡혈식 석실분은 1500여년 동안 벽화를 보존하면서 유지할 정도로 매우 안정적이고 정밀한 석조건축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분들이 북한지방을 비롯 중국 집안 등에 1만 3천여기가 있고, 익히 알려진 동수묘(357년), 대성리, 삼실총,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강서대묘, 사신총, 오회분 등 80여 고분에 벽화가 남아있으니, 고구려인들의 높은 석조건축 수준과 견고함에 대해 우리가 의심해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과 고분벽화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와 우리나라의 문명은 시베리아 스키타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6000년 경부터 자생적으로 발생한 홍산문화(요하문명 내부)에서 시작했다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왜?! 근거도 뚜렷하지 않게 주장한 한 일본인의 학설이 우리에겐 북방유래설로 고착되었을까?>
<고조선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분포도... 그리고 여기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토기 역시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명보다 최소 1천년 이상 앞서 자생적인 문양과 모형들을 만들었다... 이건 다음에...^^>
<이 홍산문화의 유래를 통해 적석총이란 고유한 무덤 양식을 만들었던 문명분포와 동이족의 분포가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와 문명이란 쉽게 만들어지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구려 고분 중 벽화고분 분포도...>
<집안시 고구려 고분군...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말로만 듣던 떼무덤이 뭔지, 1만3천여기의 고분이 어떻게 존재했는지... 경주의 고분들을 보면서는 신라를 상상하는데, 나는 아직 고구려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눈으로 보고싶다...^^>
고구려의 묘제를 살펴보면, 고인돌, 돌널무덤, 독널무덤, 널무덤 등 청동기를 거쳐 출현한 철기시대의 돌덧널무덤(석곽묘), 목관묘 등이 돌무지무덤(적석총)과 돌방무덤(석실묘)으로 발전하는데, 이걸 건축적으로 완성한 것이 횡혈식 석실분이다.
<장군총/같은 카페에서 스크랩... 그리고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님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장군총 주변 부(部)총/같은 카페에서 스크랩...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장군총 주변에는 이렇게 5기의 딸린 무덤(부총)이 있었다고 한다... 부총 상부에 고인돌의 형상을 주목하면 쉽게 이해가 될런지... 고조선과 부여의 탁자식 고인돌은 어느날 갑자기 사리진 것이 아니라, 적석총 상부로 올라갔다는... 즉 고인돌의 기단 - 토대를 만들기 위해 적석총이 생겼다고 이해하면 맞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고구려의 고분들은 완성태가 아니라 상부가 유실된 한 부분이며, 묘제의 전통은 면면히 답습되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 석촌동, 방이동 백제 초기 적석총... 즉 이 적석총의 상부에는 목조건축물이 있었고, 그 건축물이 있었을 때 이 무덤은 완성된 것이었다... 현실, 제실, 묘실 등으로 불리는 목조건축물의 형상까지를 그려봐야 백제와 고구려 적석총은 완결태를 갖추는 것이다... 사리신앙에서 출발한 탑이 고구려, 백제에 융합될 때, 자연히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의 조화는 필연적으로 많은 실험과 정착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의 탑이 석탑으로 고착된 것은 결코 우연이나 돌연변이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즉 홍산문화에서부터 이어진 거석숭배사상과 돌과의 깊은 친밀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고구려인들은 이미 높은 수준의 석재 가공 기술을 갖췄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답습된 건축적 기법과 결구에서도 충분히 완숙한 경지(그들은 천장을 말각조정 방식을 이용 궁륭식으로 만들었지만, 완벽한 아치형태는 만들지 못했다. 후대 백제의 무령왕릉과 신라의 석굴암이 그걸 극복한 대표적 사례가 된다)를 이뤘음을 보여준다.
<고분 내부/조선일보... 조선일보를 좋아하지 않지만, 1994년(벌써 20년??) 조선일보사에서 개최한 고구려 고분 벽화전은 참 인상적이었다... '아! 고구려...'로 시작했던 전시였는데, 이 전시를 위해 조선일보 문화1부에서는 많은 고분벽화를 촬영하였고, 그 노력들이 있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모사도까지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고분벽화에 대한 이야기는 '아! 고구려/조선일보 문화1부/1994년3월1쇄/조광출판인쇄(주)'를 참조했다.>
<물론 지금은 고분 내부의 구조를 살펴볼 시간... 이렇게 상륜부를 만드는 방식을 말각조정법이라 부른다...>
<덕흥리 고분 투시도/남포시 덕흥리/408년... 고분 내부 구조는 무령왕릉이나 신라고분 처럼 단조롭지 않고, 완전하고 안정적인 건축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런 결구와 기법들이 있었으니 석탑을 만드는 것도 그리 낯선 시도가 아니었을 터...>
<무령왕릉 내부/재현... 고분과 고분벽화의 보존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발굴과 동시에 재매설하고, 대신 이렇게 실측 크기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찬성... 물론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가볍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최선이라 생각한다... 500년대 전돌로 만들어진 무령왕릉 상부는 아치로 만들어졌다. 기둥이 없어지면서 내부가 넓어지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필요는 변화를 만들고, 새로운 구조는 발전된 기법을 요구한다...>
<석굴암 내부/재인용... 700년대 후반 만들어진 석굴암에 이르러 한반도에서는 초기 인도의 석굴을 재현해낸다. 그것도 인공석굴로... 석굴암과 김대성의 위대한 점은 단순한 모방과 소재의 재결합이 아니라, 고유한 전통의 문화로 재해석하고 융합한 독자적인 발전성이 아닐런지... 여기에는 문화가 있고, 과학이 있으며, 사상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판테온 내부... 기원전 27년에 석고상으로 유명한 '아그리파'가 만들고, 120년경 '아드리아노' 황제가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했다. 높이 43.2m, 상부에 뚫린 구멍의 지름이 9m, 그리고 벽두께가 6.2m나 되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건축이 구조가 되고, 구조가 미가 되는...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보고 싶어 하는 구조물로, 모든 신들의 전당이란 이름답게, 모든 건축하는 이들의 영감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사진을 다시 들춰본 이유? 고구려인들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판테온처럼 완벽한 구형 돔은 만들지 못했기 때문... ^^ 단, 1천5백년이 지나 사람들은 다시 돔구조물을 만들었지만, 석굴암처럼 석실을 만들고 그걸 흙으로 덮어 석굴을 만든 케이스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같이 비교해봤다...>
그런 기술과 사회문화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석탑도 조성했으니, 기록 유산으로만 남은 삼국유사의 영탑사 팔각칠층석탑이 그것이다. 즉 광개토왕 시절부터 다수의 목탑을 보유했던 고구려인들은 사상적으로나 기술적인 측면, 그리고 창작예술의 의지에 있어서도 독창적인 양식의 탑을 실험했을 것이고, 전탑, 토탑 등 다양한 시도 속에서 고유한 양식의 석탑도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안학궁 모형/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같은 책에서 스크랩... 400년대 고구려는 군사력만 강했던 것이 아니다... 건축을 비롯해 사상과 행정체계, 그리고 경제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충분히 완숙되어 있었다...>
3) 석탑이 탄생한 이유와 고구려 석탑이 단절된 이유
그러면 목탑, 토탑, 전탑 등에 이어 석탑이 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시현되고 고유문화로 정착했을까?
초기 탑건축을 주도했던 목탑에는 한계가 많았다. 비용, 시간, 부지확보... 즉 경제성이 첫번째 문제였다. 본래 누각건축의 전통이 오랜 역사를 가졌던 고구려와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이라 하더라도 목탑신축에는 토지구입비용과 건축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이런 폐단 때문에 446년 북위의 태무제, 574년 북주의 무제 등에 의한 법난이 있었고, 841년 당의 무종은 4600여개의 사찰을 폐쇄하고 26만명의 승려를 환속시키기도 했다). 또한 사람이 올라가서 사용하는 실용적인 건축이었으므로 당연히 건축공기도 많이 걸렸을 것이고, 장엄을 위해 올릴 수 있는 층수에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주 한산사... 초기의 사원들은 인도의 saṃghārāma를 음역했던 승가람마로 불렀는데, 400년대 구마라습의 구역불교 이후 중국식으로 불교가 바뀌면서 차츰 ‘가람’으로 정착했다... 불교는 외래로부터 수입된 종교인만큼 초기에는 전형화된 건축이 만들어질 수 없었고, 대신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공공기관이던 xx사(寺)를 사원으로 사용하였는데, 인도의 승려들도 처음엔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중국/한국/일본/대만 등 동아시아 불교사원은 xx사(寺)란 명칭이 고착된다... 아무튼 그런 寺(사)였으니 당시의 모든 절은 당연히 도심에 분포했을 것이고, 새로운 사원을 세우려면 도심 한가운데 부지를 확보했어야 했던 만큼 토지구입은 나라가 반강제적으로 주도하거나, 귀족들만이 조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제적 이유가 중국의 초기 불교 성격까지 좌우했을 테고...>
두번째로는 소재의 한계인데, 내구성에서 화재와 습기, 병충해에 약한데다 당시 전란도 많았으니 목탑이 영구적으로 보존되기엔 한계가 많았고, 마지막으로 후한시대에 전래돼 후기 위진남북조시대에 중국식으로 습합된 불교는 신흥종교와 사상으로서 갑자기 많은 사찰건축이 동시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기존건축물의 개량이나 리모델링을 통한 공급으로는 신축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 자명하다(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6세기 중국의 낙양은 1/3이 사원건축이었고, 탑의 최고 높이는 200m였다고 한다). 즉 비용과 소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마련이 시급히 요구되던 40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 고구려 등에서는 목탑 외에 전탑, 토탑, 그리고 석탑 등이 본격적으로 모색되어(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석탑은 많다. 다만 양식적으로 전탑의 양식과 모형을 벗어나지 않은 모전석탑이기에 별도로 구분하지 않을 뿐이다), 500년대 초반부터 그 결실이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흥교사 현장법사 탑/669년/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최완수/대원사에서 스크랩... 물론 이 전탑은 초기 형태가 아니며, 탑이 부도로 변화하는 최초의 형태이기도 하다... 중국에 전돌이 생긴 이유는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가장 친숙한 건축소재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목탑/재인용... 일본이 목탑의 나라라 불리는 이유는, 목탑 이외의 탑은 만들 수도 없었고, 만들어도 보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진을 자세히보면 나라시대를 전후한 탑은 4~6m에서 30여m까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목탑도 모두 황룡사 구층탑처럼 높고 컸던 게 아니라 사천왕사 등처럼 소규모 목탑들도 만들어졌었다...>
또한 초기 불교의 중흥과 함께 활성화된 가람건축(인도엔 탑원과 승원만 있었다)에서 탑은, 사리봉안의 무덤(사리신앙에 근거한 묘제건축)이자 불/법/승 3보의 상징이었던만큼 가장 핵심적인 구성요소였고, 각국의 사회문화적 전통 및 종교사상적 필요, 그리고 해당지역의 자연지형과 기후의 영향을 고려한 건축적 관성과 접합하면서 탑파건축은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인도에서 불교탄생 이전의 브라만교와 베다에서 언급되듯이, 우주목(宇宙木), 황금의 언덕, 신성한 불꽃, 천지의 중심축 등을 형상화한 스투파(탑)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1)영구적일 수 있는 자재를 사용하여, 2)장엄을 위해 다양한 모양과 층수로 높이와 양식 등 규모조정이 가능하며, 3)짧은 공사기간 동안 4)적은 비용으로, 5)당장에 필요한 수량을 동시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소재와 공법에 많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시도를 했을 게 분명하다.
<영태사 십일층전탑/602년... 우주목, 신성한 불꽃... 중국, 고구려, 백제 등에서는 그걸 어떻게 형상화해 나갔을까? 중국과 한국, 일본의 비교적 가장 초기 형태의 전탑, 석탑, 목탑을 골라봤다...>
<정림사지 오층석탑/백제... 불꽃... 그러니까 정면 사진이 더 어울린 거 같아 내가 좋아하는 각도의 사진을 빼고, 이걸 골랐다...^^ 내 생각에는 500년대 중반, 위덕왕대 만들어졌다고 확신하고 있다... 즉 미륵사지 서탑보다 최소 60년 이상은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이에 양자강 유역과 황하 중상류지방을 중심으로 비교적 생산이 풍부하고 오랫동안 사용했던 <벽돌로 만든 전탑>이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양질의 화강암이 고르게 분포했던 한반도에서는 <돌로 만든 석탑>이 쉽게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국토의 1/4이 화산분출암인 안산암 계열로 덮여있어 양질의 석재를 구하기 힘들고, 잦은 지진으로 전탑이 유지되기 어려웠던 일본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600년 전후 쇼토쿠태자 섭정시 백제인들에 의해 사찰건축이 본격화되면서 유행한 <목탑 전통>이 그대로 고수된 것이다. 또한 중국을 모방했던 신라에서 전탑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지 못했던 이유도 벽돌제작 기술의 한계와 더불어 생산의 비경제성 및 건탑의 비효율성을 인식했기 때문이고, 석탑을 선택한 이유 역시 다른 나라들처럼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었던 셈이다.
<법륭사 오중탑/아스카(비조)시대... 일본의 국호가 백제 멸망후인 670년에 붙여졌으니까, 이때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아무튼 600년 전후 쇼토쿠태자 시절에 만들어졌고, 610년 담징은 금당에 벽화를 그린다... 600년대 후반 금당이 불에 타고, 710년 다시 재건축되고... 아무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 중 하나다...>
<영양 산해리(봉감) 오층모전석탑/신라... 물론 신라 최초의 석탑은 분황사탑이지만 부분적으로만 보수된 완성태가 아닌데다, 전탑 양식의 탑중 가장 아름답고 장중한 느낌이어서 이걸 골랐다... 아무튼 통일신라에서는 600년대 후반부터 석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지만, 모전석탑 전통은 쉽게 끊기지 않았고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진다...>
5)
아무튼 오늘날 세계2,3위의 곡창지대인 만주지방은 토탑이 유행(토성(土城)은 목성(木城)의 임시성을 극복한 본격적인 건축이었다. 또 토성에 대한 기술이 축적되면서 벽돌이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이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발해의 주요성이 토성이었다는 말은 소재의 풍부함과 기술축적, 그리고 선호도 때문이라 생각한다)했고,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기 400여년 전(당시 백두산은 지금(현재 우리나라의 공식 높이는 2,744m이지만, 북한은 2,750, 중국은 2,749.4m로 기록한다. 각국의 해발 기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보다 1,000여 미터나 낮았다고 한다)이기 때문에 당시 북한지방의 지질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광개토대왕에서부터 장수왕, 문자왕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불교문화를 주도해나갔고, 석조고분이 대대적으로 활성화 되어 있던 만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500년대 초중반에는 충분히 석탑을 만들 수 있는 객관적, 주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 왜 그런 개연성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서는 석탑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유물과 유구가 남아있지 않을까? 외침으로 멸망당한 백제처럼 시간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부적 요인, 즉 신앙체계의 변화가 더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불상의 변천/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세히보면 539년 연가7년명 불상부터 719년 감산사 석조아미타불, 미륵보살 입상까지 불상조성을 주도했던 것은 소규모의 금동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중국식 도포를 걸친 소규모 석불좌상과 백제의 예산사면석불,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불, 익산 연동리, 신라의 부처골 등에서 석불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이 시대는 석불이 주류를 이루었던 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660년대 가흥동 삼존불, 삼화령 미륵삼존불, 봉화 북지리 등에서 시작하여 740년대 경주 남산 칠불암과 토함산 석굴암에서 양식적 완성을 이룬 이후 옛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문제는 6세기를 전후한 시기를 주도했던 금동불과 소형 석불의 용도다... 하나는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부적같은 호신불이거나, 집에 모실 수 있는 사적 용도, 그리고 황복사탑에서나 볼 수 있듯이 석탑 사리함에 넣었을 크기라는 점이다... 앞의 두가지 용도는 충분히 활성화 되어 있었겠지만 금동이란 점에서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만약 탑의 사리함에 넣었다면 당연히 이 크기가 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황룡사탑처럼 사람이 올라다니는 목탑에 이렇게 작은 크기의 금동불을 안치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6세기, 고구려와 백제에서 이런 크기의 금동불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말은 그만한 수요가 있었다는 말이고, 그런 크기들이 안치될 목탑이 아닌 탑도 충분히 만들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북한 국보 8호...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맞새김무늬 꾸미개'라 이름이 붙여져 있지만, 북한에서는 '금동 해뚫음무늬 장식품'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강우방 교수가 '영기문'이라 부르는 이 문양은 생동감 넘치는 고구려의 기본 문양이 된다... 그리고 이 장식품에서 보듯이 그 중심에는 불교와 무관한 삼족오, 또는 봉황이 중심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이때가 5세기 전후(북한에서는 4~5세기로, 우리는 5~6세기로 설명하고 있다)였다...>
<연가7년명 금동불/재현품/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 고구려의 불꽃 혹은 영기 문양은 불상 조성에서도 적극적으로 차용되었고, 백제의 예산 사면석불에도 나타난다... 불교조각과 전통문양의 융합이다...>
<광배/국립중앙박물관... 역시 551년 만들어진 고구려의 광배다... 어느나라건 국가의 중심 사상은 하루 아침에 일어났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아닐터...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에서 불교가 정착했더라도, 그 저변에는 불교의 대중적 확산과 믿음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에서 석탑이 만들어진 것도,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불교와 유교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도 오랜 역사적 전통이었음이 분명하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하나의 문화가 완숙된 경지에 이른 후엔 당연히 피로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사상의 한계나 시시비비와 무관하게 현실에 비판적이거나, 진보적인 혹은, 진보를 자처하는 무정부적인 사상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500년대 중후반이면 372년 소수림왕대에 전래된 불교가 150년을 넘어 200년이 된 시점이다. 즉 고구려에서 불교는 전성기가 지나 진보성은 물론 신선도까지 사라진 노회한 구습이었다. 또한 삼론종에는 화엄학적 계보와 선종적 경향이 공존했기에(그래서 삼론종은 후대 고려의 천태종으로 이어진다) 고구려의 불교는 사상적으로 변화할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사상적 주도권은 내부개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외부의 충격에 의해 결정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주작도... 도교 역시 연개소문에 의해서 고구려에 수입된 것이 아니다... 도교의 가장 대표적인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사신도는 이미 4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6세기 후반에는 고분벽화의 중심이거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생활상, 풍속, 설화 등 대부분 벽화그림의 소재는 사라진다는 말이며, 도교는 연개소문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이한다는 의미다...>
<통구 사신총/현무도/길림성 집안시/6세기 후반... 그리고 현무도 하나만 추적해봐도, 강서대묘와 똑같은 사신도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양식과 형태의 변화를 이루면서 활성화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보다 1~200년전부터 불교를 수용해 이미 몇차례 폐불 홍역까지 겪었던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 혼란기를 수습한 통일제국 수나라가 불교를 비판하면서 도교가 통치체계를 주도하게 되고, 그 변화를 연개소문이 직수입하면서 시작한 도교진흥책이 그것이다. “솥에는 발이 세 개가 있고, 나라에는 삼교가 있는 법인데, 우리나라에는 불교와 유교만 있고 도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결국 사찰은 도관으로 바뀌고, 법사와 유사 위에는 도사가 자리하게 된다.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로웠던 게 아니라, 도교로 인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불교가 한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건축과 탑파건축은 종교적 필요성에서 외면되고, 사회문화적 전통은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는 도교에서는 위엄 높고 장중한 불탑조성을 적극적으로 조장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개선과 실험이라는 창작의지는 소멸되고 새로운 소재 발굴은 중단됐다. 석탑이 발전할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도사들을 보냈던 수나라도, 도교를 국교의 지위로까지 승격시켰던 보장왕대에 이르러 고구려도 멸망하게 된다. 개인의 수양에서 노장사상은 약이 됐을지 몰라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체계로서 도교는 너무 자유방임이었고 무능력, 무기력했다. 독이었던 것이다.
<까마귀 조각/고구려/국립중앙박물관... 삼족오는 분명 아니지만, 형상은 비슷한가? 사실 까마귀는 도교의 대표적인 문양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상징이었다...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솟대가 그 표상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전령으로서 '새 토템'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즉 고구려에서는 불교가 신앙과 믿음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이 되나? 전통과 신흥 사상이 공존하고 융합하며 새로운 양식이 창작되는 거... 그게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내부에서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독이 되기도 한다...>
<김홍도 군선도/호암미술관/짱돌님 블로그에서 스크랩... 도교하면 뭐가 생각날까? 가장 대표적인 아이콘이 불로장생과 신선 아닐까 싶어 스크랩했다... 불교가 중국에 뿌리 내리는데 도교는 사상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불교의 '공'개념은 도교의 '무'로 이해됐고, 자연으로 귀속한다는 도교의 '무위자연'이 있어 불교의 '열반'은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신선들만 산다는 무릉도원과 극락은 같은 의미가 되지... 즉 중국전통의 사상이 있어 중국인들이나 고구려인들이 불교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불교가 그런 도교적 교리와 습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구려에는 석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했고, 삼국 중 가장 빨리 시도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600년대를 전후해 그런 의지와 시도는 사라지면서 고구려 석탑도 잊혀졌다. 물론 지역적 전통과 사회문화의 예술적 DNA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고구려 양식의 석탑은 3~400여년이 지난 신라말, 고려초를 전후해 다시 부분적이나마 재현된다.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거란족의 부흥과 946년 백두산의 화산폭발의 전조현상으로 시작된 동요로, 서남쪽 신라경계로 이동하던 발해민들에 의해 소규모로 유입되던 옛 고구려의 전통과 문화적 양식은, 926년 발해의 멸망으로 고려에 귀순한 왕족과 귀족층에 대대적이고 본격적으로 재해석 시현되는데 그 지역이 현재의 평양일대와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일부다(그 외 지역은 화산폭발과 함께 화산재에 묻히거나-개마고원을 만든 화산재의 최대깊이는 1500m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바뀌었을테니까). 고려시대 평양 영명사 팔각오층석탑과 대동군 원광사지 육각칠층석탑, 광법사 팔각오층석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을 비롯하여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과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등이 그때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만들어진 석탑들이다.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eskang님 블로그에서 스크랩... 고구려의 탑 양식은 이렇게 고려시대에 재현된다... 완벽한 부활이기 위해서는 석탑의 세부기법까지 전승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형식만 남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1007년... 수종사 오층탑과 함께 몇 기 없는 남한의 고구려 양식 석탑이다... 이것 역시 고구려의 형태 + 신라의 기법 + 고려의 미감으로 만들어진 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존한 고구려시대 석탑이 없어 세부기법과 특징들은 확인할 수 없고, 백제와 초기 통일신라기의 석탑 등과 비교할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고려시대 옛 고구려 지역에 조성된 석탑들을 통해 우리는 신라의 기법을 전승하고 고려의 미감으로 다듬어진 고구려의 석탑을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같은 고려시대라 하더라도 개성의 남계원 칠층석탑이나, 현화사 칠층석탑처럼 방형(사각형)이 아닌, 고구려 양식의 팔각/육각 다층형인 탑(목탑/토탑/석탑 등)은 훨씬 화려했을 것임을 추정할 뿐이다(금산사 육각다층탑을 한 다섯 배쯤 키우면 어떤 모습일까?^^). 외부의 충격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 시도와 기억들은 많은 영감을 주며 부활할 수 있지만, 내부에서 스스로 포기해버린 과거는 쉽게 지워지고 복원도 완전할 수 없다. 고구려 석탑이 백제 석탑과 다른 이유가 그거 아닐까? 신라가 멸망한 후 고려시대, 백제의 석탑은 양식까지 부활하지만, 고구려 석탑은 형식만 재현된다. 스스로 잊어버린 고구려석탑 양식은 부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금산사 육각다층탑... 팔각형을 유독 좋아했던 고구려인들... 월정사탑이나 이 탑을 옆으로 위로 몇배 튀기면 고구려 석탑이 부활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끝내 고구려 양식의 석탑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스스로 기억에서 지워버렸으니까...>
<비인 오층탑/고려시대... 그러나 정림사 계열의 백제계 석탑은 몇백년이 지나서도 끊임없이 재생되고 전승된다... 옛 백제지역에 한정되지만... 아쉬웠기 때문일까? 한스러웠기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시대와 문물, 그리고 사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잊으려 하지 않는 전통은 끝없는 완성을 향해 나간다는 점이다... 비록 그것이 퇴화와 경화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 변하고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아직 진행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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