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늘 지나쳤던 의성 탑리 오층석탑과 빙산사지 오층석탑을 드디어 다시 보러가는 길...
언 듯 스치는 길목, 규격화된 모습이지만 왠지 참해 보이는 사당 같은 건축군을 본다.
저 정도면 상당한 정성이 깃들어졌을 거 같은데?
일개 문중이 관리하기엔 제법 규모가 있고, 그렇다고 서원으로 보기엔 너무 형식적이고...
빙산사지 석탑보고 내려오는 길엔 꼭 들러야지 마음먹고 차를 세우니 누각도 멋지다.
<빙계서원 전경... 예전 빙산사지 갔을 때는 기억하지 못했던 건축... 물론 그때 이 서원이 있었다하더라도 나는 외면했을지 모른다... 보물급 건축이 없다는 이유로, 서원건축이라는 이유로... 아무튼 휙 지나가는 길이었지만, 이렇게 한눈에 서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참신했다 ...^^>
<빙산사지 오층석탑... 빙계계곡 내에 있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모전석탑의 힘과 위용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이 탑을 굳이 아래(↓) 탑리 오층 국보탑과 비교하는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의성 탑리 오층석탑... 99년도였을까? 처음 이 탑을 보면서 참 힘들었다... 도대체 무얼 봐야하고 무얼 느껴야할지 생경했던 기억... 아래쪽 기단을 지워버리면 전혀 다른 느낌이지? 정림사탑의 기운도 느껴지고?? 모전석탑과 함께, 이 탑의 기원에 대해 언젠가는 다뤄보고 싶다...^^>
영월루(永月樓?)
무심코 읽으면서도, 달맞이 하며 노닐기엔 건축물들의 배치와 짜임새가 정연하고,
흐르는 길목과 너무 인접한데다, 불필요하게 육중한 다리난간(빙계2교) 때문에 번잡해진 면도 많은데다,
왠지 이곳의 풍광은 한판 술자리를 펼쳐놓고 음풍농월하기에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가라앉은 곳이었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머물기엔 포근한 맛이 없고, 장쾌한 호연지기를 논하기엔 조금은 좁고 낮은 곳...
<지나가면서, 떠나면서 다시 봤던 비석... 경북 8승 중 "하나"(처음엔 8승중 "제일"로 읽어보다가 "하나"로 수정했다^^)라는... 엄밀히 경북 8승은 빙계서원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서원이 접하고 있는 계곡을 의미한다... 그리고 빙계계곡에서의 8경에도 이 서원이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빙계계곡의 신기함 혹은 아기자기함 보다, 내게는 이 곳 빙계서원이 오래동안 기억에 남는다...>
<사족; 저 가로등과 다리의 둔중한 난간은 무척 눈에 거슬렸다... 문화재 복원 따로, 하천 정비 따로, 교각 건축 따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일관성을 갖추면서도 종합적으로 개발계획을 기획 추진하는 안목있는 집행이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는 비빔밥 문화일까?>
2.
영월루? 영월루?
무식하면 용감하다던데, 자신이 없으니 큰소리도 못치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혼자 뇌까리며
빙계서원이라 쓰인 안내판 앞에 턱하고 서니, 허걱~ 영(永)월루가 아니고 빙(氷)월루네??!!!
저 꼭대기 삐침( ′ )이 언제 옆으로 미끄러졌다냐?
그래~ 음기(陰氣)보다는 숙기(淑氣)가 강한 이곳에서 달을 길게 길게(永) 품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이곳은 빙계(氷溪)계곡, 저 빙자가 이 빙자구나!!!^^
<저게 왜 영월루로 보였을까?^^ 차곡차곡 쌓여진 위계와 권위의 공간... 문득 부석사가 생각난다...>
<부석사... 만약 빙계서원의 빙월루가 부석사 안양루만큼만 작았다면 또 어떤 느낌이었을까?>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졌고,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이전됐다가 1871년 전국서원 철폐령때 훼철되었다고 한다... 대원군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고려시대까지 전국을 꽉 채웠던 사찰이, 조선시대 들어와 유생들과 민초들에 의해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훼철되었듯이 비단 대원군이 아니었더러도, 조선말기 서원은 민초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혹은 강제적으로 훼손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키득키득, 홀로 무식에 장단 맞추며 빙월루~ 빙월루~ 옹알옹알해보는데 도통 맛이 안 난다.
팥빙수도 아니고, 꽁꽁 얼어붙은 달도 아니고, 여기에 빙계서원~ 빙계서원~ 읊어봐도 금시초문이 분명하다.
얼음골이니 석빙고는 알겠지만, 빙계계곡에 빙계서원이라~ 그리고 그 누각이 빙월루~~??
그럼 사시사철 폭염에 뜨거운 바람만 부는 화양(火陽)계곡에 있으면 염일(炎日)루가 되나?^^
허허~~ 차가운 머리와 냉철한 이성을 강조하기 위해 氷(빙)자를 사용했는지,
아니면 도동서원의 수월루(水月)를 본 땄는지는 몰라도 氷月(빙월)은 너무 차갑지 않아?
<나의 무식함을 탄로시켰던 빙월루...^^>
3.
아무튼 잘못 끼운 첫단추 때문에 더 조신해지고 진지해졌지만,
빙월루~ 적절한 크기에 갖출 것은 다 갖춘, 참신하고 의젓하게 잘 지어진 누각을 통해 서원으로 들어간다.
1576년 초창 되었다면 도산서원과 비슷한 시기, 그래서 그런지 2006년 복원했다고 하지만
빙계서원 명교당은, 서원건축의 특징을 잘 살려 장식적인 (다)포작을 금하고 익공계에 낮은 지붕을 두어
현판이 땅을 향할만큼 비스듬히 걸어 놓은 게 도산서원 전교당과 비슷한 느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이라지만 원칙과 규범에 충실했다는 생각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빙계서원, 명교당... 왜 도산서원 전교당이 생각났을까?>
<도산서원 전교당... 정면 4칸과 5칸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보면 명교당의 석축/석단의 원형은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항교 이후, 중소도시와 경사지에 지어진 서원답게 빙계서원은 전학후당의 규범을 준수해 배치되었는데,
학습 공간의 주 전각은 <明敎堂(명교당)>이고(이 부분은 “경상도 여행> 안동 도산서원1을 참조바람)
좌우의 東齋(동재), 西齋(서재)의 당호가 <學而齋(학이재)>와 <時習齋(시습재)>다. 재밌지?
학이시습~~~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서 따왔음은 이미 눈치채셨을 거 같고,
그렇다면 왜 서원 / 문묘 / 향교건축의 2대공간 중 하나인 학습공간, 강당을 겸한 주건축물 당호에는
빙계서원의 명교당이나 명륜당(서울문묘, 강릉/장수/영천향교, 소수서원 등)처럼 明(명)자가 많이 들어갈까?
(그 외 5대서원 등 주요 서원의 강당 건축물 당호는 도산서원이 전교(典敎)당, 옥산서원이 구인(求仁)당,
병산서원이 입교(立敎)당, 도동서원이 중정(中正)당, 필암서원은 청절(淸節)당 이다.)
<명교당 내부... 저 가운데 글자가 敎자 맞지? 틀리면 또 한번 무식이 탄로날텐데...쩝>
<우측의 시습재...>
4.
明(명)자와 敎(교)자... 음미하고 음미하면서 또다른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솟을삼문을 지나 사당영역의
崇德祠(숭덕사)를 접해본다. 역시 대부분 서원처럼 德(덕)자가 붙어 있으니 이것도 성리학의 관념.
그리고 빙계서원의 사당영역 주건축이 大成(대성)전이란 현판을 걸지 못한 것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런 이유로 향교나 서원건축에서 자주 보이는 동무, 서무가 없을 수밖에 없었겠고,
지형적 조건 때문도 있었겠지만, 좁지 않은 공간에 석축까지 한단을 높이고 강당건축에 대비해서 비교적 큰 사당건축이 지어져선지 생각보다 권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복원과정에서의 증축때문이겠지?
(대부분 서원건축엔 대성전-명륜당의 구조를 가지는데 이것도 殿(전)과 堂(당)에 대한 교조적 해석 때문이다. 즉 예술의 전당이 예술의 당전이 될 수 없고, 대웅전도 대웅당이 될 수 없듯이 우리는 참으로 교조적이다!^^)
또 층층이 쌓아올린 담장의 균질한 배열도 한편으론 장난스럽고 또 한편으로 인위적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고저장단의 음율처럼 유쾌하게도 보이는 건 공간과 건축 디테일에 담겨진 정성 때문이 아닐까?
<숭덕사에 오르는 길목의 또 다른 위계공간을 구획하는 산문...>
<숭덕사... 이 석축과 석단도 막쌓기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많았다... 고찰은 물론 일반사찰의 석단은 물론 탑까지 다 뜯어다 사당을 지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이건 오히려 작위적인데다 어울리지도 않는다... 전통을 가늠할 시점이 어디인지... 충분히 검토되었어야 했다... 아무튼 좋은 건축에 어울리지 않는 기단부...>
우선 숭덕사 세칸 문은 정자살(우물살)에 아래쪽은 합판으로 마감해 한편 일본식 같기도 하고 이지적이지만,
정연하고 한편으론 장식적으로 보이면서도 검박한 느낌이, 만든 이의 고심을 읽는 거 같아 나쁘지 않았고,
다시 강당공간으로 내려와 바라본 학이/시습재는 담장밖 빙계천 물소리를 듣기 위해선지 한칸을 터버린 게
개방감도 키우면서 맛배지붕의 엄숙함을 상쇄시키는 거 같아 즐겁기도 하고 상큼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 문화재를 복원하려면 이정도 고심과 눈썰미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 계획도 없이, 별 생각없이 들렀던 빙계서원에서 문화재 복원의 기준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저 문의 문양이 조금 낯설지? 하지만 근엄함 속에 약간의 변화를 준게 그리 나쁘게만 보이진 않았다...>
<명교당 내부의 문살... 사실 이 팔각창에 빗살문은 중국식 느낌... 천하사방... 언젠가 고구려와 백제의 천하관과 사방불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내 의견을 피력했지만, 8자는 왠지 중국 혹은 고구려 등 북방의 느낌이 강하고, 나는 4字가 백제와 조선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숫자 "4"를 싫어했던 것은 일본이었고, 그래서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에게 4자는 死와 동음으로 터부시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복원의 디테일 하나 하나가 내 맘에 든 것은 아니었다...>
<학이재... 그렇지만 시습재와 학이재의 이 측면 공간을 터 놓은 배려는 정말 탁월했다... 무량사의 청한당 만큼이나 세칸 건축물로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싶다...>
<무량사 청한당... 예전에 무량사 소개하면서 이 사진도 올렸었나?>
5.
명교당을 서성이다 잠시 앉아 텅빈 강당의 공간을 바라보며 다시 조선의 서원과 성리학을 생각해본다.
육중하진 않지만 권위적인 숭덕사가 뒤편 어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고,
나는 다시 좌우로 학이재와 시습재를 거느린채 빙월루 텅빈 공간이 감싸앉은 빙계천과 주변 산하를 본다.
고요하고 편안해지니 절로 가벼워진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참으로 좁다는 느낌...
다시 수월루에 올라가 끊일 듯 끊이지 않고 흐르는 빙계천에 가슴을 열고 하늘을 바라본다.
<명교당에서 바라본 빙월루... 역시 누각건축은 트여 있어서 모든 걸 담을 수 있다...>
<빙계서원 전면... 빙월루와 학이재, 시습재의 누각은 담 밖으로 흐르는 이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 비워놓은 게 아닐까?>
이 좁은 공간, 이 외진 공간, 이 작은 공간...
4백여년전,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전 만들어져, 다시 조일전쟁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옮겨진 빙계서원의
학이재와 시습재에 머물 수 있는 유생이 얼마나 되었을 것이며,
명교당과 전국의 명륜당 등에 앉아 공맹을 논할 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 작은 공간에서 울려퍼진 경전의 무게는 반도의 민초들에게 지식의 리더로 5백년 조선의 역사를 이끌었고,
그들 사상 철학의 근간과 경륜의 네트워크가 이런 곳에 존재했고, 다시 4백여년을 지나 明, 敎, 德...
그리고 학이와 시습이란 개념으로 박제화 된 현판과, 문화재란 이름으로 복원된 서원을 내가 만나고 있다.
수월루에서 다시 명교당을 보며 그들은 왜 그렇게 明(명)자에 집착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중국보다 더 명분과 개념에 집착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건축물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정말 중요했으리라... 그렇게 성리학의 明은 도교의 名과 연결된다... 道란 개념을 매개로...>
6.
내 지금까지 누누이 이야기하기도 했고, 지난번 <맹자> 양혜왕장구편에서도 소개했지만,
나는 어떤 경전이든 그 사상의 정수는 첫장, 첫구절에 모두 드러나 있고 그 걸 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공자>사상의 정수는 학이시습 불역열호에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듯이,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노자의 도덕경,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중용도 마찬가지)
문묘(서울의 성균관)와 향교를 비롯한 많은 서원들에 明(명)자가 들어간 것도 성리학의 정수를 대변한다.
바로 禮記(예기)의 한편이었던 것을 주자가 정리한 <大學(대학)>의 첫구절이 明明德(명명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大學(대학)의 첫구절에 대해 간단하게 감상(?)해 볼까?
<사람들이 충분히 조심하고 존중하지 않아선지 신발 신고 올라간 사람들이 많았다... 역시 서원건축물들은 지속적인 관리가 없다면 언제든지 죽은 공간이 돼 버린다... 안타까운 일... 아무튼 저 마루에 앉아있었던 유생들의 입에서는 이(↓) 구절이 낭송되었을 터...>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큰 학문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과 하나가 되어, 궁극의 선에 머무는 데 있다.
知止而后 有定 (지지이후 유정) 머무름을 안 후에 정함이 있고
定而后 能靜 (정이후능정 ) 정한 후에 능히 고요해 질 수 있으며
靜而后 能安 (정이후 능안) 고요해진 후에 능히 안녕이 있고
安而后 能慮 (안아후 능려) 평온해진 이후에 능히 생각할 수 있으며
慮而后 能得 (려이후 능득) 생각이 있는 후에 능히 얻을 수 있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물유본말 사유종시)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知所先後 則近道矣 (지소선후 즉근도의)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까워진다...
<명교당에 앉아서, 빙월루에 앉아서 머무름을 안 후에 능히 정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어째든, 유물과 유적과 문화재는 몸으로 즐겨봐야 제 맛을 알 수 있고, 특히 누각이나 마루는 그때를 생각하며, 그 자리에 앉아봐야 감상에 젖어들 수 있다...>
<숭덕사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 빛이 나쁘진 않았지만, 필름이 너무 거칠었지?>
7.
그들이 밝히고자 했던 明德(명덕)... 그 명덕을 정말 그들의 신념만큼 밝게, 民(민)에게 환하게 밝혔을까?
그래서 그들은 至善(지선)의 道(도)로 大學(대학)을 완성했을까?
과연 그러했고, 그 근간과 뿌리가 있어 지금의 우리는 역사의 부침과 역경을 딛고 오늘에 다다랐을까?
무엇이 이루어지고 무엇이 단절되었으며, 무엇이 길을 만들고 무엇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일까?
짝이 있어 춤을 추는지, 짝을 잃어 빙빙거리는지 한 마리 두루미가 유난히 머리 위를 자주 날아든다.
빙월루에 서서 빙계천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돌려 빙계서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머무르기에 아쉬움이 없고, 물소리 바람소리마저 고요함으로 능히 차분해지는 마음을 읽어본다.
본말과 시종을 생각하며 선후경중, 완급과 시시비비를 학습하지만 아직 정함이 없음도 함께 느껴본다.
지선은 무엇이고, 친민은 무엇이고, 명덕은 무엇인지를 정해야 도에 이르지 않을까?
빙월루~~~ 그 차분하고 고요한 기운이 있어 이만큼 생각할 수 있었다면, 빙산사지 오층석탑이나
원효와 요석공주, 설총을 끌어들인 빙계계곡을 들추지 않더라도 경북8경지일로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눈으로 보고 느껴보지 못한 빙혈과 풍혈의 맑고 고요한 기운이, 빙계서원 빙월루를 함께 감싸 돈다.
<빙월루에 앉아 명교당도 보고, 빙계천도 보면서 한참동안 바람소리, 물소리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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