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마음에 쏙 드는 인연을 만나는 걸 행운이라고 하나?
보고싶다 혹은 봐야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앞선 나의 답사여행길에서도
가끔 생각밖에 좋은 걸 보면 괜시리 뿌듯해지는 팁이 있을 때 더 즐거워진다.
합천 백암리 석등을 보러 간 길에 함께 만난 이름없는 석불좌상이 그 주인공이다.
<백암리 석등과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보물급 이상으로 지정됐거나 좋다고 이름난 석등들은 빠짐없이 찾아다녔지만,
백암리까지 오는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이때까지는 백암리 석등만 목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창녕이나 의령에서 합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어렵지 않았을텐데,
내가 참조하는 답사여행 길잡이에 표기된 백암리 석등 위치는
가야산과 경남 권역의 경계에 있어 늘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루기만 했었다.
<합천 주변 문화재 분포... 합천을 중심으로 북쪽 고령, 동쪽 창녕, 서쪽 함양, 서북쪽 거창이 자리잡고 있는데 각각 주변의 주요 문화유적들을 살펴보면,
1-해인사와 청량사, 2-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 3-법수사지 삼층석탑, 4-개포동 석조관세음보살좌상, 그리고 그 위쪽에 고령대가야박물관과 지산동 당간지주가 있고,
5-대견사지 삼층석탑, 6-봉기동 삼층석탑, 7-덕양동 삼층석탑,
8-소태리 오층석탑, 9-관룡사, 10-술정리 동서 삼층석탑을 비롯 만옥정 공원에 창녕 진흥왕척경비와 퇴천 삼층석탑,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등이 있고,
다시 서쪽으로 가면 A-영암사지, B-상동 석조관세음보살입상, C-양평동 석조여래입상,
E-승안사지 삼층석탑, F-함양 석조여래입상,
G-수승대, H방향에 가섭암터 마애삼존불상과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등이 있다...
백암리 남쪽으로 함안(방어산 마애불, 주리사지 사사자삼층석탑, 대산리 석불)과 의령(보천사지 삼층석탑)이 있기는 하지만, 백암리 석등 자리가 외진 곳에 동떨어져 있는 건 분명하다...>
합천에서 창녕 쪽으로 보기엔 동남쪽, 의령 방향이라고 말하기엔 서북쪽에 치우쳐
낙동강변에서도 많이 떨어졌고, 완벽한 산중 분지인 적중면에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왕래가 빈번한 길도 아니고, 막다른 길에 있어 한번 계획하기가 여간 수고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어지간한 보물보다 더 좋은 선물을 만난 거 같아 한없이 즐겁다.
<뒤쪽으로 저수지가 있고 산너머 적산면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한곳으로만 입출입이 가능한 호로곡 형식의 완전한 분지내 평야다...>
2.
석불좌상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보물381호로 지정된 백암리 석등을 살펴볼까?!
<석등 입면도... 홍선스님의 [석등]에 보다 자세한 도해가 나와 있지만, 여기서는 솔뫼님 자료를 스크랩해 올린다...>
사진에서도 충분히 느꼈지만 어딘지 가녀리게 보이는 팔각 간주석과
가는 간주석에 비해 넓은 옥개석, 또 이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화사석 때문인지
실물로 직접 봐도 안정감과 힘을 느끼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백암리 석등... 뭔가 아쉽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튼실하고 당당한 간주석으로 이만한 석등이 있을까? 지붕돌이 좁기도 하지만 화사석을 비롯한 상부가 간주석에 비해 너무 약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두 석등을 비교하면 여러 가지 상반된 미감이 보인다...>
간주석이 규모에 비해 길어서일까? 옥개석이 지나치게 넓어서일까?
그보다는 앙련으로 이루어진 상대석이나 지붕돌에 비해
화사석이 너무 좁고 가늘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작은 화사석에 비해 넓고 얇은 옥개석은 석등의 힘을 더욱 유약하게 만든다.
<백암리 석등의 상부...>
그러나 법주사 사천왕상 석등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는 백암리 석등은 화창 사이사이,
법주사에 비하면 약간 경직되어있지만 부석사는 물론 해인사나 청량사 석등에 비해서도
충분히 자연스럽고 활달한 사천왕상이 격식에 맞춰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고,
<백암리 석등 화사석의 사천왕상... 자태와 각종 기물의 세부표현 등 나무랄데 없다...>
불국사 대웅전앞 석등에서부터 부인사, 보림사 상륜부 받침으로 이어저온
연화관이라 불리는 옥개석 상부의 연화문으로 새겨진 괴임과
상대석과 하대석의 2단 괴임 등 통일신라 석등의 전형을 온전히 살리고 있다.
<백암리 석등 상부... 윤곽이 뚜렷하지 않지만 연화관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원형으로 가공된 하대석은 백장암 석등 유형과 비슷하지만
<원형으로 가공된 백암리 석등 연화 하대석... 별도의 기대면 혹은 기대석이 없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기대면과 간주석 괴임까지 연화문 또는 독특한 문양으로 구성되었고, 화사석 괴임에도 난간 문양을 두는 등 매우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석등이다...>
사각형의 기대석을 갖춘 부인사나 부석사 무량수전 사천왕상 석등을 비롯
팔각형의 기대석으로 구성된 법주사 사천왕상, 경주 박물관내 읍내리 석등과 달리
별도의 문양이나 기대석이 없는 불국사 대웅전 석등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특징이 있고,
<백암리 석등 하대석은 우리나라 석등의 시원 형태인 백제의 미륵사지 석등 양식을 따르고 있다...>
<법주사 사천왕상 석등의 기대석은 별석이며 팔각형이다. 그 밑으로 사각형의 지대석이 보인다...>
<팔공산 부인사 석등의 연화하대석과 기대면... 법주사보다 후대 것으로 보이는 부인사는 안상이 새겨진 사각형 기대면으로 조형되었고, 두 석등의 간주석 괴임은 전형적인 2단이 아닌 3단으로 구성된 특징이 있다...>
팔각간주석이 가늘기로는 불국사 극락전 앞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중간쯤인 거 같다.
<백암리 석등 하부... 가늘다...>
<통일신라의 팔각 간주석 유형 석등 중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 간주석이 제일 가늘지 않을까?...>
<부석사 무량수전 사천왕상 석등... 백암리나 불국사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이 규모 있게 자리잡아, 매우 안정적이며 균형 잡힌 비례를 보이고 있다...>
3.
그러면 이 석등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안내문에는 8세기 후반, 홍선스님은 9세기 후반... 어느쪽이 사실에 가까울까?
먼저, 이미 살펴보았듯 사천왕상 조각만 비교하면 합천 해인사나 청량사 석등보다 앞선다.
<백암리 석등 안내문... 아무리 생각해도 700년대 후반은 아닌 거 같다...>
또한 하대석과 지붕돌에 있는 귀꽃의 유무와 형태는 석불대좌나 석등, 승탑 등의
제작편년을 가리는데 매우 주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일단 하대석에 귀꽃이 없는 백암리 석등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과 보림사 중간쯤에 위치해,
대략 780년 이후 870년을 넘지 않는 시점에 만들어진 것으로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법주사 사천왕상 석등... 780~800년 전후에 만들어진 석등으로 귀꽃이 없다...>
<보림사 석등... 삼층석탑과 함께 870년 만들어져 869년 만들어진 개선사지 석등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 석등, 불상대좌, 승탑의 편년설정에 주요한 잣대가 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지표가 각종 연화대좌나 지붕돌에 나타나기 시작한 귀꽃의 탄생이다...>
다만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설명하듯 지붕돌에 훼손된 걸로 추정되는 귀꽃의 흔적은
800년대 중후반 이후 제작설의 유력한 근거가 되는데, 사실여부와 크기가 문제인 거 같다.
지붕돌 모서리 전각 위에 조형되는 귀꽃은 우동이라 불리는 귀마루의 마감장식으로
기와로 말하면 수막새나 귀면장식에 해당하며 그 크기와 규모는
지붕돌의 두께를 넘지 않을뿐더러 귀마루의 넓이와 높이에 조응할 수밖에 없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의 지붕돌... 목조건축을 그대로 축소한 듯한 정교한 가공으로, 부연과 서까래는 물론 수막새와 귀마루의 형상까지 그대로 조각하였다... 868년 작이다...>
<고달사지 전 원감국사 승탑의 귀꽃... 이렇게 귀꽃이 솟아오르려면 지붕돌이 그만큼 두꺼워야 한다... 목조건축의 격식과 세부비례에서 탈피하여 석조조각으로 완전히 탈바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팔각 간주석 유형의 석등에서
귀꽃이 본격적으로 조형된 예는 사실 보림사 석등이 유일하며,
<보림사 석등 지붕돌...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을 비롯해 고복형 석등의 귀꽃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귀꽃은 귀마루의 귀면을 마무리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
(참고로 합천 청량사를 제외하면 고복형 석등에는 대부분 귀꽃이 강조되어 있다 ;
무등산 개선사지(868년), 지리산 실상사, 영양 선림원지(886년), 임실 진구사지, 화엄사)
<임실 진구사지 석등의 지붕돌... 거침이 없으면서도 세련되고, 장중하면서도 우아한 가장 아름다운 석등 중 하나다...>
귀마루가 장식성을 띠며 의도적으로 강조된 예도 부인사 석등 정도이다.
<팔공산 부인사 석등의 지붕돌... 귀꽃이 없는 지붕돌 중 적극적으로 귀마루를 매우 세련되게 표현한 유일한 예일 거 같다... 상부의 연화관도 매우 정교하면서 깔끔하다...>
또한 8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승탑에서도
지붕돌에 귀꽃이 확연하게 드러난 예는 883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 정도일 뿐
844년 흥법사 염거화상탑에서 893년 실상사 수철화상탑까지 승탑의 귀마루는
실제 건축물의 형상을 따를뿐 귀꽃이 의도적이거나 본격적으로 조형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고달사 전 원감국사탑의 귀꽃은 매우 특이한 예에 속한다)
<전 염거화상 승탑... 844년 만들어진 승탑으로 진전사 도의선사 승탑 이후 통일신라 승탑의 효시이자 전형이다...>
<태안사 적인선사청정탑... 861년 만들어진 승탑이며 역시 귀꽃이 없다... 이런 이유로 고달사 전 원감국사승탑 편년을 고려시대 초기로 보는 시선이 유력해졌다... 물론 900년대 전후로 후퇴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까지 신라말기로 주장한다...^^>
이런 점과 매우 미약하거나 수수하게 처리된 백암리 석등의 귀마루를 같이 고려한다면
이 석등의 귀꽃은 매우 형식적이었거나 특별한 형태가 없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붕괴나 도괴 등으로 파손된 석탑 지붕돌의 전각과 비슷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백암리 석등 지붕돌은 보림사 석등 조형이후 900년대 전후의 매우 퇴화한 형태이거나
불국사나 원원사 이후에서 부인사 이전으로 끼워 맞출 수는 있지만,
이건 지나친 짜맞추기식 추론에 불과할 뿐 특별한 증표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된다.
<경주 원원사지 석등... 지붕돌이 깨졌다고 귀꽃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 하대석과 간주석, 지붕돌까지 매우 담백하면서도 우아한 선을 가진 석등으로 내가 아주 좋아한다...^^>
<팔공산 부인사 석등... 팔각간주석 유형 중 매우 화려하면서 정교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석등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바로 앞쪽의 단아한 삼층쌍탑과 동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1~3층 지붕돌에 각각 5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상층기단부의 1개와 하층기단부의 2개의 탱주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조성된 시점은 800년 전후를 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한가지, 하대석과 상대석에 새겨진 연화문의 문양을 주요한 지표로 삼을 수도 있는데,
단엽 초입에 작게 새겨진 둥근 꽃문양은 백장암 석등과 양식적으로 유사할 뿐,
여타 석등을 비롯 여느 석불좌상 좌대와도 비슷하지 않아 특별히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
<백암리 석등 연화 상대석... 익숙한 거 같지만 똑같은 문양을 찾기 힘들다...>
<보림사 석등 연화 상대석...>
정리해보자면, 화사석 사천왕상의 양식, 연화하대석과 상대석의 유형, 지붕돌의 형태,
그리고 간주석 상하 괴임 등을 고려하여 법주사보다 1세대 이후, 보림사보다 이전인
830~840년 사이쯤이 적당하지 않을까 결론 내려본다.
<백암리 석등과 같이 출토된 석등 연화 하대석...>
<보림사 석등 연화 하대석... 연화하대석에도 귀꽃이 솟아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사천왕상 석등 연화 하대석... 역시 연화하대석에 귀꽃이 솟아 있고, 각부재 사이의 괴임을 빠뜨리지 않았을뿐더러 간주석 괴임은 어느 석등들 보다 복잡하게 가공하였다...>
4.
물론 백암리 석등이 원래의 제자리에 있고, 인근에 석탑 혹은 승탑이나 석불 등
공점하는 유물들이 같이 있었다면 석등 편년 설정에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의 석불좌상도 대동사지 출토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만큼 좌표로 삼기 어렵고,
통일신라 전성기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약간 흐트러진 석등의 현존 모습과
왠지 막다른 길에서 만난 처연한 기운이 느껴져 830년대 이전으로는 올려잡지 않았다.
<백암리 석등... 편년이 중요한 건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 시대 언저리에서 이 석등을 만든 석공과 이를 기획한 사람을 상상하려고 한다...>
어딘지 부족하지만 전체적인 균형과 미감에서 눈에 크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고,
복련과 앙련, 사천왕상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는 정성스럽지만
완벽한 조화와 빼어난 완결성을 갖추었다고 칭찬하기엔 아쉬운,
간주석이나 화사석, 또는 옥개석을 조금씩 덜어내거나 조금만 보탰으면 싶은데도
어설프게 손댔다가는 그나마 이뤄낸 완성도가 깨질 것 같은 미묘함...
어쩌면 막다른 길까지 밀려난 늦은 중년 혹은 이른 노년의 체념이 보인듯 싶어
뭔가 허전한 느낌...
격식은 갖췄으나 생동감까지 만들지 못한 아쉬움으로 백암리 석등은 내게 읽혀진다.
<백암리 석등... 유약한? 아쉬운? 그 보다는 뭔가 허전한 느낌... 늦가을, 가을비까지 내려 내마음이 더 허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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