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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마음> 부석사 안양루에 앉아서...09041*

 

 

 

부석사 안양루에 앉아 석양을 기다린다.

내가 걸어왔던, 혹은 달려왔던 무심한 풍경들...

높고 낮고, 좁고 넓고, 길고 짧았던 길에 놓인

흙과 바위와 나무와 바람과 햇살...

 

 


이미 지나온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그 결이 차곡차곡 쌓여 구비 구비 산하가 되고,

먼 산과 낮은 하늘이 모여 바람을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과 기억하는 것들이 겹겹이 풍광(風光)을 만든다.

 

 


보잘 것 없는 풍경이 모여서,

아무 것도 아닌 길이 빼곡히 쌓여서,

작은 것들이 모여 크고 넓은 일망무제를 이룬다.

지나고 보면, 모아놓고 보면, 멀리서 바라보면, 높이서 내려다보면

그렇게 편안하고 느긋하고 여유로운 풍경이 된다.

 

 

 

지나온 기억들은 지워지고,

답답한 그림자는 사라지고,

가파른 호흡도 숨겨지고,

오로지 하나의 그림으로, 하나의 조망으로, 하나의 바람으로 사라진다.

 

 


지나고 보면,

모아놓고 보면,

멀리서 보면,

높이서 보면,

뒤 돌아서 지금 이순간을 지우면,

머리는 무뎌지고, 호흡은 느긋해지고, 마음은 비워진다.




잔뜩 헝클어진 마음...

 

삐죽삐죽 가시 돋치고,

 

삐딱해져 잣대도 잃고,

 

허와 실도 가늠하지 못 한 채 그렇게 떠 있다.

 

이젠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


달리지 않았던 답답함은 본능으로 풀고,

떠나지 못했던 무거움은 객기로 부추기고,

말하지 않았던 척박함은 기도로 내려놓고,

그렇게 걷고 바라보며 생각한다.

 

 


신록의 풋풋함은 두 다리에 담고,

봄의 향기는 두 눈으로 어루만지며,

석양의 부드러움에 얼굴을 내맡기고,

막히지 않은 바람의 시원함은 가슴으로 껴안고서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나를 지우고 나를 돌아본다.

 

 


시시해진 세상이 그리 가볍지 않음과 작아진 나의 불편한 무거움,

그리 간단하지 않은 세상과 그리 복잡하지 않은 나의 좁은 반경을 받아들이자.

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많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씩 지우자.

시시해진 것은 나 자신이고, 재미없는 것은 내 마음임을 인정하자.

그게 내가 다시 시작하는 방법이고, 내가 자리해야할 지금이 아닐까?

 

 




부석사에 가는 길은 결코 예쁘지 않다.

부석사에 오르는 길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부석사에 머무는 시간은 언제나 시원하다.

부석사가 진정 특별할 때는 부석사를 보지 않았을 때이다.

 

 


비틀린 동선과 비탈진 경사, 그리고 가파른 계단.

그런 자연에 조응한 균일하지 않은 전각과 층급으로 쪼개진 공간.

가파른 경사에 우람한 석축들이 잘게 쪼개지고,

넓고 좁은 마당에 크고 작은 전각들이 높고 낮게 나눠진다.

 

 


시원한 당간지주에 몽땅한 괘불대,

아담한 삼층쌍탑에 우람한 삼층석탑,

시원한 팔작지붕에 근엄한 맛배지붕,

아담한 선묘각에 장중한 무량수전.

 

 


하나하나 작고 큰 변화들이 눈에 익숙하고,

무질서와 불규칙이 태연하게 마음에 자리할 때쯤

우리는 안양루에 오르고 무량수전을 보게 된다.

그래서 뒤돌아서서 건축을 보지 않고, 길을 찾지 않을 때

이제야 우리는 부석사의 일부가 되고, 부석사를 느끼게 된다.

 

 


오를 때 한층한층의 석축과 계단은 층급이 되어 나를 가로막지만

내려다보면 한줄한줄 용마루 처마들은 바깥을 향하여 트여 있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시선을 가로막고 보이지 않은 변화를 추구하지만,

내려다보이는 층층의 전각들은 늘 있었던 먼 산과 하늘로 시선을 인도한다.

부석사가 재밌는 이유는 올라가는 가로선과 내려오는 세로선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석사가 즐거운 이유는 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석사가 풍부한 이유는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부석사가 시원한 이유는 부석사를 잊기에 충분한 낮은 하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석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만들지 않은 넓은 자연을 품에 안았기 때문이다.

부석사가 그리운 이유는 바람과 빛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부석사가 부석사다운 이유는, 부석사에서 부석사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만큼 텁텁한 공기,

무거운 마음만큼 둔탁한 구름,

해이한 마음만큼 모호한 햇빛,

짜증난 마음만큼 투박한 바람,

법고의 화려한 춤사위에 묵직한 북소리가 석양을 재촉한다.

 

 


북을 두드리고, 목어를 두드리고, 운판을 두드리고, 종을 때리고...

그렇게 퍼져가고, 그렇게 날아가고,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들...

그들은 사물(四物)을 때리지만, 나는 마음에 소리를 새기려한다.

그들은 하늘과 땅과 물과 사람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데,

나는 내 마음에서 흐트러진 나와 일과 관계를 되새김 한다.

 

 


재미없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안이한 마음을 되돌아보고,

시시한 세상에서 변변치 못한 무기력한 마음을 되돌아보고,

복잡한 관계에서 한없이 작고 피폐해진 마음을 되돌아보고,

그렇고 그런 삶에서 생기를 읽고 방황하는 마음을 되돌아본다.

 

 

 

부석사 안양루에 앉아 사물소리에 마음을 연다.

안양루에 앉아 내가 왔던 길을 내려다본다.

앉아서 하늘과 땅과 석양을 바라본다.

부석사 안양루에 앉아 초라한 마음을 위로한다.

안양루에 앉아 작은 나를 찾아본다.

그렇게 앉아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나를 끄집어내고 싶다.

 

 

 




석축은 호흡이 되고,

햇살은 하늘이 되고,

건축은 공간이 되고,

소리는 바람이 되고,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부석사에서는 부석사를 보지 말자.

부석사에서는 부석사를 생각하지 말자.

부석사에서는 부석사를 담으려하지 말자.

뒤돌아 볼 수 있는 너그러움과

모아서 볼 수 있는 느긋함과

내려다 볼 수 있는 여유만 생각하자.

 

 

 


그래서 울고 싶은 마음이 진정되고,

그렇게 작아진 마음의 주름을 펴고,

그렇게 반짝이는 하늘과 바람을 몸을 맡기고,

그래서 황폐해진 가슴이 무뎌진다면

잊혀지고 잃어버린 한줄기 향기가 또 다른 나를 만들 수 있다면...

 

 


부석사가 그리운 이유는 여전히 그곳에 있기 때문이고,

부석사가 아쉬운 이유는 내가 머물 시간이 짧기 때문이고,

부석사가 아련한 이유는 뒤돌아서야만 지나온 길이 보이기 때문이고,

부석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가끔씩 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부석사가 있어 나는 다시 부석사에 안길 수 있었다.

여전히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