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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여행> 안동 도산서원 4... 조선 성리학의 흐름과 이황,이이,주희

 

 

 

 

 


10. 조선 성리학의 흐름과 이황과 이이...


물론 같은 성리학자이면서도 이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차이를 주장한 이도 있다.

바로 <율곡 이이>를 필두로 한 조선 성리학의 또 다른 흐름이다.

자칭 유물론자들(그들이 진짜 유물론자인지는 모르겠다...^^)인 북한쪽이나 중국학계,

그리고 국내의 일부 학자들이 소위 <객관적 관념론자>에 가깝다고 말한 일군의 그룹이다.

이규보에서 시작하여 이색, 권근, 김시습, 서경덕, 실학파, 최한기, 김옥균 등이 그들이다.


이쯤에서 한 번쯤은 조선 성리학의 흐름과 정치적 흐름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조선의 정치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정도전의 왕권중심 중앙집권제에서 권근의 관학파로,

조광조의 향촌성장에 바탕을 둔 신권중심의 자치주의 도덕정치에서 다시 훈구학파로,

이이의 서인이 등장하다, 화담학파와 남명학파 중심의 북인에서 다시 기호학파의 서인으로,

서인에서 분화된 송시열의 노론에서 세도정치로 변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색당쟁은 조선 성리학이 절정기를 맞은 조선 중기의

서경덕의 화담학파, 이황의 퇴계학파, 조식의 남명학파, 이이의 율곡학파를 지칭한다.

사견으로 조선 정치의 계보를 정리하면 정도전 - 율곡이이 - 송시열의 흐름이다.

그러나 그 정신사는 안향 - 정몽주 - 조광조 - 이황 / 조식의 맥으로 이어진다.


물론 조선 성리학이 <한국철학>의 한 뿌리가 되는데 이색-권근-이언적의 역할이 작지않고

이이와 이황의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에 다양한 계통과 분파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사실 조선 성리학의 정점은 이이와 이황에 의해 심화되고 분화되고 고착된다.

이황과 이이가 희미해진 송시열 이후 18세기 후반 영정조대에 조선은 다시 꽃피운다.

 

 



여기에서 그들을 논하거나 맥을 찾자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유학을 거론 한만큼

기억만 상기시키고, 여기에서는 이이에 대해, 살짝... 조금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주자와 이황, 이이를 같이 묶어서 서원교육과 관련하여 단순하게 몇가지만...


주자와 이황, 주자와 이이, 이이와 이황을 곧바로 비교하는 쉽지 않지?...

이황은 부차적으로 생각했지만 주자가 무시하지 않았던 역경을 이이는 강조하였고,

이황이 거경에 방점을 찍을 때, 주자는 균형을, 이이는 궁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황과 주자는 理론에 바탕을 두었다면, 이이는 氣론을 중시했다.

이황과 주자가 강학과 학습에 몰두했다면, 이이는 정치와 경세에 대안을 만들었다.

공자의 유가에 주자와 이황은 주서를 만들었지만, 근본의도를 실천한 이는 이이다.

 

 


죽기 3일전, 압록강으로 파견되는 관리를 쫓아가 북방외교와 관리에 대해 논한던 이이와

죽으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매화에 물을 주어라고 당부했던 이황은 그렇게 차이가 난다.

삶의 행적에서 이황이 주자를 닮았다면, 이이는 젊은 공자(!?)가 꿈꾸던(?!) 모습이었다...


이들은 서원 교과목 선정도 다른데 이황이 소학, 근사록, 효경, 대학, 주자대전, 심경을...

이이는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예경, 서경, 주역, 춘추, 사기, 성리지서를,...

역경,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주교재로 육경전체를 포함시키지 않고 사기를 넣은 주희...

서원과 독서교과목에서부터 나타나는 이들의 차이는 사상과 생활, 실천의 차이이기도 하다.


(중국과 조선서원의 교과목에서의 차이는 소학과 역경의 비중과 오경의 포함여부다...

조선서원은 소학을 중심에, 송대 중국서원은 역경을 필수로 넣었다는 점이고.

양국 공히 사서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조선서원이 오경을 넣어 학문영역에서 포괄적이다.

이에 비해 송대 서원은 역경과 사기가 들어가 변화와 사회적 요구가 강조된 편이다.)

 

 



이황은 현실세계의 중심인 인간의 본성에 중심을 두었다면,

이이는 현실세계의 인간관계와 현재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중심을 두었다.

이황은 개인 생활의 물적토대를 국가로부터 지원받아 학문에 정진했지만

이이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개인 생활을 포기한 극도의 궁핍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기를 중시한 유학자들이 대체적으로 현실 참여적이었고, 개혁적이었다는 점은

공자의 유가가 사회 변혁적이었다는 기본 성격에 오히려 더 부합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관념론인 유학과 성리학자들이면서 명쾌한 대립을 설정하기 어렵지만 그들과

이이에게 도로 나아가는 길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균형과 조화>가 아니었을까?




11. 전교당에서... (어떻게 공부 했을까?)


비교적 잘생긴 전교당이 화사하게 자리를 잡고

동재와 서재에 해당하는 박약재(博約齋)와 홍의재(弘毅齋)가 단아하게 앉아있다.

이황 사후 도산서당, 농운정사 위에 자리 잡기 시작한 서원의 영역은

크게 전교당 / 상덕사-전사청 / 장판각-동서 광명실 / 상고직사-하고직사로 나눌 수 있다.

 

 


전교당이 강학공간이라면, 상덕사는 이황과 그 제자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전사청은 상례 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다.

장판각과 진도문 좌우의 동서 광명실은 서적을 보관하는 곳이고

상고직사, 하고직사는 서원 관리인들이 기거하며 음식 등을 만들어 주던 곳이다.


생각보다 많은 건물들이다.

여기에서 18세기 서원의 폐단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나

18세기 중반 이언적을 모신 월성의 옥산서당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장인이 226명, 노비가 190명이 공부하는 유생들을 위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서원의 규모와 국가지원의 물량, 그리고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충분히 느낄듯...

이들이 있어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다>는

한석봉의 글씨가 걸린 무변루도 있고, 옥산서원도 있지 않았을지...

 

 



오늘은 서원....이 중요하므로 다시 돌아가, 그 당시에 유생들은 어떻게 공부 했을까?

고려말 목은 이색,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구미의 금오서원 장학당에 이런 글이 ;

책을 망가뜨리는 자 / 창과 벽에 낙서하는 자 / 놀면서 공부 안하는 자 /

함께 살면서 예의 없는 자 / 술이나 음식을 탐하는 자 / 난잡한 이야기를 하는 자 /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은 자...

이미 어긴 자가 있으면 돌아가고, 오지 않았으면 오지 말라는 <칠조>가 있다 한다...

재밌지 않나? 지금 도서관이나 독서실 어디쯤 붙여놔도 충분히 즐거울 것 같은...^^


글 뜻을 명백히 하고 응용에 통달할 것, 한갓 장구에 얽매어 문의를 견제하지 말 것,

사서, 오경과 경사를 읽되 장,로,불,잡류 및 백가, 자집은 읽지 말 것...^^

제술은 간엄하고 정공하게 사의를 달하면 되고(음~~~ 내가 반성할 점이 많네...ㅎㅎㅎ)

불미한 문체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글씨는 해서로 할 것...

암기 위주였지만 강독, 강회, 질의 문난논변(問難論辯), 자습 등 여러방법이 체계화 되었다. 

 

 


주자는 독서의 여섯가지 원칙까지 정했는데

정성된 마음으로 성실함을 지니고    <거경지지(居敬持志) -持자는 보존하다 유지하다는>

순서를 지켜 차례차례로 진행하고    <순서점진(循序漸進) -循자는 쫓다>

정독하며 깊이 사색하고             <숙독정사(熟讀精思)- 精자는 자세하다, 면밀하다>

마음을 비우고 넉넉한 마음으로      <허심함영(虛心涵泳) -涵자는 잠기다 적시다>

실제생활에서 몸소 체험하며         <절기체찰(切己體察)>

문제에 부딪쳐 힘쓰는 <착0용력(着0用力) -堅자에서 받침(土)이 糸로 바뀌면? 모름...ㅠㅠ>

 

 




12. 전교당에서 생각하는 주희와 이황... (교수방법의 차이)


무슨 책들을 읽었고, 어떤 방법으로 학습하고, 또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자료가 많다.

물론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주자와 이황의 다른 점, 송대서원과 조선서원의 다른 점이다.

내 생각에 다른 점은 교과목이외의 <교수방법>인데

조선의 서원은 오는 유생 말리지 않고... 인데 반해,

중국 송대 초기 서원은 선생이 돌아다녔다...는 점이다 !!!

<쫓아다니며 배우는 것과, 돌아다니며 가르치는 것>은 엄청난 차이 아닌가?

 

<전교당... 정면 4칸의 문제다... 현판을 중심으로 잡자니 치우치고, 기둥을 중심으로 잡아도 이상하고...> 


이 점은 발전과 진화가 근친상간에 의한 돌연변이에 의해 변화되는 가

아니면 다양한 교접을 통한 점진적이고 풍부한 진화를 담보하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물론 진화론의 두 입장을 대변한다면 말이다...^^)

내가 너무 확대해석하는 가?


우리나라 대학 경쟁력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스승과 제자의 권위적 위계보다는 <학문의 근친상간>이다.

조선시대 서원의 근본적 한계와 병폐는 그대로 현대의 대한민국에도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대학의 문제는 어떤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을 선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양성과 개방성을 확보하여, 시대의 변화를 선도할 기획이 있느냐의 문제다...)


근친상간과 교접은 학문의 발전이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분파를 지향하는 가,

아니면 개방적이고 포용력을 갖춘 유연함을 지향하는 가의 차이가 아닐까?

(단지 닫힌사회와 열린사회의 비교가 아니라 사적유물론에 근거하든 정치경제학에 근거하든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차이가 단순한 문명의 형식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부각되는 것은,

두 사회의 성향이 안정, 보수적 평화와 변화, 진보적 개혁에 지향이 달라짐을 포함한다...)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게 비약일까?

 

 



주자에 의해 발흥한 송대 초기 서원운동에서 이황이 미쳐 배워오지 않은 것은

<강회식 강학>이었으며, 서원담장을 벗어난 송대서원은 훨씬 다양한 논쟁이 벌어진다.

주자의 성리학은 숱한 논쟁(심지어 위에서 말했던 독서의 방법까지도 육구연과 논쟁)속에

사회 전반에 대해 진취적이며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며 담론과 집회를 형성해 나갔다.


학문의 건강성과 구체성, 그리고 비판성은 다양함, 포용력, 유연함을 잃는 순간,

현실에서의 생명력을 상실한다...

<오는 학생들에게만 개방>된 조선의 서원은 그만큼 폐쇄적이고 고립적이고 독단적이다.

후지와라에 의해 일본에 안착한 이황의 경학이 메이지 유신교육의 뿌리가 되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적 개발비전을 갖지 못했을 때는 분파적이고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독소다.

 

 



조선시대 사림들과 유학자들의 논쟁과정을 추적하면 재미있는 게 많다...

이황과 이이는 가장 대립적인 접점에 있으면서 평생에 딱 한번 만났단다...ㅎㅎㅎ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은 8년동안 서간으로 주고받은 논쟁이다...^^

이이와 성혼의 인심도심 논쟁도 9차례의 서신왕래에 불과하다... ...


그 논쟁들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영향을 주었다지만 논쟁의 결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오늘날의 학자들에 의해 평가되고 판단되었지, 늘 무승부였다...ㅎㅎ

논쟁이 구체성을 띠었는가, 생산적이었는가 보다도 혹시 그들만의 논쟁은 아니었는가가

나의 불만이고 의문이고, 회의다...

 

 


얼마나 안 바쁘고 더딘 세상이 조선사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하는 거 아닌가?

하나를 보고 열을 아는 혜안들이 넘치고,

행간의 의미에서 충분히 깊은 뜻이 전달되는지 알 수 없으나

상호존중과 예의를 넘어서 일부의 책임방기도 있지 않을까?

마음으로 흠모하고 사모한다고 말하면서 만나지 않는다면??? 나는 싫다...ㅎㅎ^^


그런 점에서 이이와 성혼의 인심도심 논쟁에 대해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지적한 말이 의미심장하다...(강좌 한국철학/1995/예문서당)

“ 끝내 주희 학문의 문턱에서만 맴돌고 만 데에는 이이 자신에게 일말의 책임이 남는다 ”

(이이가 조금 더 오래살고, 학문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면 과연 달라졌을까?^^)

 

 



서원의 강학방법이 머물렀는가 돌아다녔는가에 의해 학문의 질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법론의 폐쇄성은 조선 유학의 도통론에 얽혀서 다양성을 상실하고

스승 위주의 법성현은 학문의 창조적인 변화나 유연함을 거세시켰고

교류가 한정되고 비판을 위한 비판에 매몰되면서 현실의 구체성을 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조선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에 의해 완결되고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들은 조선 유학의 태두이면서 정점이자 최고봉이며, 또한 마지막이었다.

그들 사후에 조선 유학은 200여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소위 실학파로 불리는 개혁파들이 등장할 때까지...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이상 소학과 가례에 입각한 심성론이 아니었다.

이제야 대학의 <格物致知>와 <窮理>가 요구되었다고 유학자들이 판단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