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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여행> 안동 도산서원 2... 유학도통론과 퇴계... 070831



5. 조선시대 서원에는 어떤 인물들이 배향되었을까...

   유학 도통론을 중심으로...


도산서원은 퇴계이황을 배향하는 곳이다.

조선 서원의 최초라 할 만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주장처럼

<성현을 본받아 성현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거경으로 존심양성하고 격물치지로 궁리하고자 세운 것>이 서원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떤 이들을 성현으로 받들었을까?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낮은 담장으로 밖에서 내부의 창과 문이 보인다... 내부에서도 보였을 것...> 

 

 

공자 / 안자, 자사, 증자, 맹자 / 정자와 주자를 비롯한 7분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립,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18현>이라 하여 배향하고,

이중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동방오현>이라하는데

1610년 광해군 때에 이 다섯분을 정몽주에서 이어져온 道通論의 계보로 숭상하고 있다.


사실 서원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중국의 7현과 조선서원의 18현,

그리고 <도통론>에 대해 검토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고 부족할 수도 있다.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등 조선을 벗어난 인물들이 왜 봉헌 되었는지부터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말한다면 끝이 없겠지?

 

<신권지폐... 정선의 계상정거도... 도산서당만 그려져 있다... 역시 그의 그림은 좋다...^^> 


 

한두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유학의 도통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그 개념 자체가 朝鮮産이 아닌 中國産이라는 점이다.

요-순-우-탕 임금에서 문왕-주왕-주공의 정신이 공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주장한 이가

도통론의 원조 맹자다.


1000여년을 넘어 당대의 유학자 한유는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맹자까지를 포함하여 유학의 도통론을 부활시켰고, 다시 400여년이 넘어

이정형제(정명도-정이천)를 거쳐 주자는 한유를 포함하여 유학의 도통론을 완성시킨다.

또 다시 400여년 후 이제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동방오현을 칭하며 도통론을 제기하고...

 

도통론의 완성이란, 조선서원이 주창한 정신의 뿌리가 중국임을 선언한 것이며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이상향이 바로 요순시대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의 확인이다.

 

<도산서당 옆 매화나무... 가끔 소설이 존재감을 풍부하게 해줄때가 있다... 유림이라는 책이 생각나는...> 



또 한 가지, 주자의 신유학을 고려에 보급한 안향이 18현으로 배향된 것은 이해하지만

정작 도통론의 근본이해를 전제로 불씨잡변을 통해 배불론과 도통론을 제기한

조선건국의 이데올로그인 <정도전>은 왜 빠졌을까?

그리고 고려시대 말기의 삼은 중 정몽주는 왜 들어가고...?

사실 이 두 사람간의 아이러니가 조선시대 유학의 한계와 직결되는 것은 아닐지...


조선의 건국을 역성혁명으로 바라본 정몽주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실천의 표상이다.

시대변화에 따른 경중과 선후의 문제에 앞서 忠과 義를 중시하고 죽음으로 실천한 포은...

조선의 사림들이 받든 정몽주의 선택은 조선의 뿌리를 부정한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살면서, 현존하는 조선의 실체를 부정한 조선의 사림과 서원이

조선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려 했을까?

 

 



두 번째 의문인 정도전까지 여기에서 이야기한다면 이 이야기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은 고려시대의 동력인 불교를 무장해제 시키고 주자학의 도통론을 주창했다.

정도전이 기획하고 체계를 잡은 조선은 동시대 지구상의 나라중 가장 긴 역사를 이어갔다.

세계 역사에서 사상을 무기로 세워진 국가는 극히 드물고 20세기에나 가능한 일임에도

14세기 말 조선은 분명한 마스터플랜과 한계를 지니고 태동한 이념지향적인 국가 체계다.


중요한 것은, 정도전과 <기화>간에 있었던 당대의 유불논쟁이 찻잔속의 폭풍일지 모르지만

중국 중심주의와 진리의 보편주의, 입세간(현실중시)주의와 출세간(현실부정)주의,

이의 연장인 윤리주의와 종교주의, 그리고 유학 독존주의와 유불 조화주의의 대립은

려말선초의 사상적 갈등의 실체와 조선 도통론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했다는 점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내적으로 독창성을 잃고 당파간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외적으로 현실 권력에 밀착하여 사회윤리의 규범적 역할을 하지 못한체 신앙으로 전락하고

정치 경제적 영향력 확대과정에서 각종의 사회적 폐단을 초래했다...>

이 말만 들으면 조선 말기, 서원과 주자학을 비판한 말이라 생각하는 분도 계실듯...

 

그러나 이 말은 고려말기 실상을 근거로 불교의 폐해를 비판한 정도전의 말이다.

사대교린, 숭유억불, 농본민생의 기치를 걸고 정도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의 말기는?

고려시대 말기에 대한 정도전의 비판의 핵심은 조선시대 말기에 그대로 노정된다...


선종과 교종의 갈등이 훈구파와 사림파,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대체 되었을 뿐이고,

신앙화 되는 예학 논쟁과, 사찰의 폐단이 서원의 폐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정도전이 주장했던 고려시대의 폐단과 한계는 불교의 한계가 아니라,

생명력을 잃은 이데올로기와 독존적 폐쇄적인 유일담론의 건강하지 못한 실태일뿐이었다.

 

<상진도문에서 바라 본 도산서당...> 



정도전의 도통론은 이쯤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 왜 배향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

정도전의 주자학은 실학으로서의 유학이었고, 경세가로서 중앙집권 관료제를 주장한

정도전의 사유는 기론(理론이 아니다)에 근거한 유학의 합리주의와 현실주의자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같은 동문이었던 정몽주를 암살한 주도자였다는 점이 아닐까?


이에 비해 정몽주는 동방 리학의 비조로, 명분의식의 화신으로, 영원한 승리자로 남았다.

비단 정몽주의 영향은 조선 유학에 그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화장이 매장으로 바뀌고, 주자가례에 근거한 제사를 지낸다.

오늘날 우리들의 제사 관습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정몽주는 그렇게 살아 있다.

사상에서는 이색에 떨어지고, 개혁에서는 정도전에 밀렸지만 아직까지 승리자는 정몽주다.

 

 



숙종대 서원의 남설기에는 위에서 지칭된 선현들 외에 배향자도 남설(?) 된다.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이 44개소나 되고, 송시열의 유언으로

조일전쟁때 조선에 군대을 파병한 명나라 황제나 명의 마지막 황제까지 배향되고,

조금 더 후대에는 당쟁 중에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

일개 유생을 비롯해 심지어 자손이 귀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추향되는 사례까지 발생한다.


배향자의 남설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기능의 왜곡이나 본질이 흐려지는 문제가 아니다.

조선 건국이후 150년 전후에 건립되기 시작한 서원은

다시 150여년이 지나 선현을 배향하여 가르침을 얻고, 관학을 대체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향학을 통해 향촌사회를 교화하며, 수기치인의 방편으로 유학을 생활화 하고자했던

조선 유학(주자학)이 생명력과 초심을 잃고 현실의 기득권자로 군림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 작고 단촐한 곳이다...> 




6. 도산서당의 스케일...


한참 걸어왔는데 이제 산문을 들어섰고, 길은 여전히 멀다...ㅎㅎㅎ

역시 내 글은 길다...

스쳐지나 가는 바람소리에도 민감한 얇은 귀를 가졌거나

생각나는 모든 것을 한눈에 보고 싶어 하는 과욕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깐의 핑계를 삼는다면, 급하고 중요한 일들까지 겹치면서 집중하기 쉽지 않다.

잘못된 정보는 부적절한 전략과 전술을 만들고

잘못된 한 번의 판단은 몇 년이 지나, 그리고 앞으로도 수년 동안의 족쇄가 된다.

내가 할 수 있었던가 없었던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조직의 결정은 모두의 의무이고 책임이니까...


자꾸 흐트러지는 글들을 살펴보며 드는 생각이다.

또한 지금까지 이황에 대한 충분치 못한 자료와 정보 때문에

그의 이미지를 편협하게 생각했거나 왜곡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철학사나 사상사 책을 보다가 이황이 나오면 건너뛰기도 했었음...ㅉㅉㅉ^^)


아무래도 이글은 완결된 상태에서 다른 분들의 의견을 구하기 어려울 것 같다... ㅠㅠ

이 와중에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머리 따로, 손 따로, 마음 따로... 인수분해된 느낌...

근데 이런 방식으로 지금 정리해 보지 않으면 가능하기나 하겠나? ^^

아무튼 글은 마음에 안 들고, 마음은 이제야 도산서원의 문고리를 잡고 들어간다...

 

<도산서원에 들어가는 문... 동물반입금지... 그 커다란 글씨를 한참 봤다... 나는? 반입? 너무 크지?> 



일반 서원들이 삼문으로 외문을 삼는데 반해 도산서원은 일문(?)이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누하진입이나 누각을 갖추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 하진도문으로 불리던 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눈에 띄는 곳이 도산서당이다.

도산서원의 영역 중 퇴계 생전에 있던 것은 도산서당이지 전교당이나 상덕사가 아니다.

그 차이는 천원권 지폐, 신권(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과 구권의 차이만큼 현격하다.

 

<신권지폐에 대해 말이 많았었던 것 같다. 도산서당이 아니라 계상서원이 아니냐는... 그렇지 않다는...> 

 

 

도산서원의 성역화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고 변질되었다지만

덩그러이 앉아있는 건물 한 채가 바로 퇴계가 거주하던 도산서당이다.

부엌 한 칸에, 온돌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칸은 암서헌(巖棲軒) 세칸 건물이고

방과 마루 기둥사이에는 귀여운 형상의 도산서당(陶山書堂)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유정문(幽貞門)이라 불리는 토담사이의 싸리문 앞에 몽천(蒙川)이 있고

서당 바로 앞에는 정우당(淨友塘)이라는 작은, 정말 작은 연못이,

그리고 오른편 산기슭에 매화, 대, 소나무, 국화등 몇그루를 심은 작은 뜰이 절우사(節友社)

퇴계 생전의 도산서당을 구성하는 공간과 건물, 이름들이다...

 

<도산서당 앞은 이렇게 뜨여있다... 소쇄원이 생각나는 이유? 그래도 조금 인위적이라는 느낌...> 



작다... 정말 작다... 너무 작다... ㅎㅎㅎ

초등학교 때인가? 전남 화순에 있는 <적벽>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와 손권, 유비가 한판 전쟁을 벌였던 적벽대전의 배경지, 적벽...

물론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봉추 방통과 주유이지만, 내게 중요했던 것은 스케일...


적벽... 말 그대로 바위벽을 바라보며 물었다 ; 적벽이 어디지요?

저거잖아...  / 어디요... / 저기... / ... 저거요?????

바위벽을 보면서 100만 대군 운운하던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그려보란다...

한 일이십명 모아서 소풍놀이 하면 딱 좋을 공간이었다... ㅎㅎㅎㅎㅎ

아무튼 그때부터 우리의 스케일에 대해 유독 집착하거나 전혀 신뢰하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면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나 군량미 십만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작다.

고수, 고당 전쟁 때 안시성이나 요동성의 비축 군량미가 오십만석이라고 한다.

거의 1000년이 지난 고구려와 조선 국력의 차이다.

내가 아는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대국이지만, 조선은 생각보다 적은 나라였다???

 

<도산서당의 대청마루 암서헌... 이런데 앉아서 졸기 딱 좋다... 바위처럼 굳게...^^> 




7. 도산서당에서 생각하는 퇴계의 이미지...


도산서당 하나의 스케일을 가지고 조선과 퇴계이황의 스케일을 운운하고자 함은 아니다.

단지, 도산서당의 크기를 가지고 이황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지폐에 그려진 퇴계 이황의 초상화는 우리에게 이황의 모든 것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상상하는 모든 가능성과 자유스러움을 차단하는 기능도 있다.

 

 

 

 

 

 

 

<같은 도안이라지만 조금씩 변화한다... 얼굴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웹사이트에서 스크랩> 

 


표준영정이라는 천원권의 퇴계 이황은 그를 그린 이유택 화백을 닮았다는 설도 있지만

세종대왕이나 율곡이이에 비해 약간은 초췌하고 강단 있는 표정이다.

율곡이이가 약간 삐친 모습에 울상이라면, 세종대왕은 여유로운 미소에 졸린 눈이다...^^

율곡을 다듬은 영국 디자이너의 손길 때문이라든지, 운보 김기창의 자화상이라 설도 있고...

아무튼 퇴계 이황은 병약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나서기 싫어하는 작은 사람이었을까?

 

 

 

퇴계... 토계라는 지명에서 변형된 것 이지만, 물러나 물가에 머문다는 뜻이다.

그리고 숱한 조정의 부름도 외면하고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양성에 힘쓴 이미지...

그러나 퇴계 이황은 경세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사림의 하부토대를 정책적으로 정착시킨,

한마디로 조선유학이 일반 유생들까지도 한문의 길로 인도할 교육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다.


흔히 최초의 서원을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만든 <소수서원>이라 꼽는다...

그러나 백운동 서원으로 시작한 소수서원에 사액을 내리게 하여 국가의 공인을 받게 하고,

서원에 재정적 지원과 관노비 배정과 학전(學田), 그리고 면세와 면역을 받게 한 사람,

조선 성리학이 사원을 통해 정착하고, 선비들이 학문할 수 있는 경제를 토대를 만든 이는

바로 퇴계 이황이다.

 

<도산서당 협칸, 침실이자 서재, 공부방인 완락재... 小中現大를 한참 생각해 봤다...> 



이황의 서원 설립운동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사림에게 결정적 부흥의 계기가 된다.

15세기 권근을 중심으로 배출되었던 관학파 유학자들은 유연한 사고와 현실중시 관점,

그리고 합리적인 정책선택으로 신흥 왕조, 조선을 반석에 올려놓는다.

개인적으로 관학파 유학자들의 성향은 도통론의 입장보다는 <법가>에 가깝다고 본다.


제가백가가 난무했던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통일한 것은 공자의 관계론에 입각한 덕치도,

공자의 인(천명론과 예학)을 계승하여 민본에 기초한 사회를 꿈꾸던 맹자의 <義>도 아닌,

노자의 무위와 장자의 소요, 묵자의 겸애를 거부한 순자의 예학과 악학을 기초로 만들어진,

동양의 마키아벨리라 불리는 한비자의 <法家>다.


體로서의 法과, 그 기반 위에 用으로서 術, 법과 술을 통한 勢의 확립...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술로 신하를 다스려, 군주의 세를 얻는다는, 지금 봐도 통렬한

법가사상은 공개성, 공정성, 개혁성을 무기로 결국 진시황 - 이사에 의해 천하를 통일한다.

역대 왕 중 가장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대에 가장 많은 사람이 옥사에 갇혀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법가 운운하는 것이 비약일지 모르나, 당시 관학파에서 느끼는 것은 여전히 법가다.

 

<도산서당 앞의 정우당... 크기를 보면서, 이름을 생각하며 한참 즐거웠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나면서 권력화 되고 부패한 관학파는 보수적 기득권층으로 바뀌고

농촌의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향촌사회는 발전하고 중앙정부와 갈등이 노정된다.

이 향촌사회를 대변한 세력이 바로 사림이며, 이들은 영남을 기반으로 학풍을 이어왔고

그를 대표한 이가 조광조의 개혁정치, 도덕정치, 자치주의의 신권강화 입장이다.


훈구파에 의한 조광조의 몰락이후, 지방과 사림과 향촌의 절치부심은 계속되는데

유림이 세력화되고 선비가 계급화 되는데 결정적 역할은 사림과 향촌의 서원설립운동이다.

이들의 세력집결소 서원에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세습 기반을 만든 이가 바로 이황이다.

<백록동서원학규>를 모델로 <이산원규>를 만들어 서원시스템을 정착시킨 장본인이기도하다

요즘 말로하면 자신의 신분과 명성을 십분 활용한 활동가의 모습을 갖춘 분이기도 하다.

 

<도산서당 앞, 한단 아래쪽에 조성된 몽천... 정우당보다 더 작다... 아주 작다... 샘이라 부르기에도...> 



중국의 주자가 1183년 무이산 계곡, 무이구곡에 건립한 무이정사를 이상향으로 삼아,

주자처럼 은둔하는 행동을 미덕으로 흠모하여 상징화 한 것이, 조선의 서원이 아니다.

이황이 만든 조선의 서원은 지극히 현실지향적인 참여, 개혁적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주자의 서원설립은 결코 은둔에 있지 않았고,

굳이 조선의 사림에서 은둔을 미덕으로 삼은 이를 찾는다면, 이황보다 남명조식이 가깝다.


퇴계의 함자로 조선 사림과 유학을 은둔의 미학으로 절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선조대를 기점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림파의 이론은

<산림(山林)의 이론이 아닌, 지배의 이론>으로 조선중기를 풍미한 시대사상이었고

그 중심에 가장 왕성한 활동으로 사림의 기반을 만든 이가 바로 퇴계 이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