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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여행> 안동 도산서원 3... 수신제가와 스케일 070901

8. 도산서당의 스케일 ...(서원의 목적)


퇴계의 이미지에, 현실 속에 살아있는 영향력을 위한 추진력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한사람의 천재를 기리기 위함이 아니라, 현실 참여적인 실천가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서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찾는 작업은 그이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실천하였고, 생각을 어떻게 실현시켰으며, 시간을 넘어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가를

찾아보고, 비판하고, 계승하는 일어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실천적이고 시대를 앞서간 분이 만든 서당의 스케일은

왜 이렇게 답답할 만큼 작고 좁고 낮을까...

몽천과 정우당... 손바닥 만 하다고 말하면 욕할 사람들이 많다.

안락재라 이름붙인 퇴계의 처소가 팔 벌리면 끝이 닿는 작고 좁은 스케일이

검소와 절제의 상징이라 불러도 나쁘지 않고,

거경궁리(居敬窮理)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한 자발적 인고의 감내라 해도 좋다.


아니면 정말 주자 말년의 무이정사를 흉내 내어,

물가와 좁은 곳에 물러 앉아 인생의 만년을 학문정진에 몰두 했을 수도 있다.

내가 이 스케일에서 보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주자와 퇴계 이황의 비교이며, 그로인한 <리학>과 서원강학의 패턴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은 서원교육을 통해 <법성현>과 <관인양성>이라는 교육목적을 가졌다.

물론 그 강조에 따라 성인군자를 양성하여 이상주의적 도덕파와

경학을 배워 과거에 응시하는 관인으로 등용되는 현실주의적 관료파가 다를 수 있지만

修己治人의 관점에서 일치하며. 居敬窮理로 법성현 한다는 점이 출발이다.


거경을 통해 덕성을 함양하고, 궁리를 통해 지식을 확충한다는 거경과 궁리는

존심양성에 입각한 극기의 심성생활을 강조한 거경과

훈고학적 유학과 입신양명식 출세위주의 교육을 위주한 궁리로 등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현을 본받아 도덕적으로 완성된다는 <法聖賢>의 두 관점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단지 초기에는 전자의 목적이 강했고, 후대에는 관인양성이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면 조선서원의 근본이 되었던 주자의 백록동서원(1180년)의 법성현 내용은 뭘까?

오교의 조목 ;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배움의 차례 ; 넓게 배우고, 살펴서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별하며, 독실하게 행함.

수신의 요구 ; 말은 충성과 믿음이, 행동은 독실, 분노를 징벌하고 욕심을 막으며,

              착한 것에 옮겨가고, 과실을 고칠 것.

처사의 요구 ; 의리를 밝게 하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를 밝히고, 공을 꾀하지 않음.

접물의 요구 ;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아니한 바를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말 것이며,

              행하여 얻지 못함이 있으면 돌이켜서 자신에게 구할 것


많이 들어 본 말들이지?

어쩌면 내 어렸을 적 교육 받은 모든 것들이기도 하고 혹은

도덕과 바른생활 교과서에서 배운 전부이기도 하다.

이 내용이 바로 800년전 주자가 송나라의 고등교육을 위해 제정한 대강이다.

 

 


사람들이 의리를 강명함으로써 각기 자기수양을 도모하고, 

그런 후에 그 결과가 타인들에게까지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주자는

어떤 사람을 배양하는가의 문제는 초기단계가 중요하다 하여 <소학>을 중시하였으며,

소학은 事를 이해하고, 대학은 이치를 궁구한다하여 소학과 대학을 구분하였다.


한당시대의 유학이 훈고사장학 중심이었는데 반해, 송대의 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나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이 중심이 된 의리학(義理學) 도학(道學)이었고

그들이 주요하게 채택한 교재도 역경과 사서였지, 육경이 아니다...

(* 사서 : 대학, 논어, 맹자, 중용   * 육경 : 역경, 시경, 서경, 춘추, 예기, 악기)

주자의 법성현은 한마디로 송대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이다.

 

 



조금 길게 살펴 본 이유는 주자에 서원교육에 대한 이황의 계승 혹은 독자성 때문이다.

소학의 강조는 이미 조광조에서부터 충분히 부각되었지만, 이황의 교육목적은

<사서오경으로 본원을 삼고, 소학, 가례를 문호로 삼아서,

나라의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을 쫓고, 성현의 친절한 교훈을 지켜,

만 가지 착한 것이 본래 내게 갖춘 것임을 알고,

옛 도리가 오늘날에도 실천될 수 있음을 믿기 (이황의 이산원규)> 위해서다.


하나하나를 뜯어 읽으면 끝이 없으나, 단적으로 정리하면

성리학 본연의 우주론이나 인성론 탐구에 그 교육의 초점을 맞추었고

과거급제를 위한 사장학보다는 선현을 존숭하고 도학을 강명하는 경학이 중심이었고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에 정주지서 등을 읽어 뜻을 넓힌다고 요약할 수 있다.

 

 


세상의 중심에 현실의 인간을 설정하면, 나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내 속의 중심은 깨어있는 마음이며, 우리의 중심은 그 속에 들어있는 도덕심이고,

그것은 욕심을 누르고 오로지 도덕에 따라 행동하는 선현들 속에서 배워지는 것이며,

이렇게 참다운 인간이 되려면 마음을 경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경건한 마음이 진리를 깨닫는 문이라고 생각한 이가 퇴계 이황이다.


인간이 본모습인 도덕성을 지키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답게 살 것을 주장한 이황의 철학은

한마디로 인성론에 근거한 심성학이 중심이 된 理학이며 敬학이다.

사장학이 아닌 經학이며, 궁리(窮理)에 앞서 거경(居敬)이 중시되고 우선시 된 학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황은 한중일 주자학의 완성자로 추앙받지만 정작 사회 비판력을 상실했다.

이황은 실천성을 갖춘 탐구자였을지 몰라도, 경세가나 비판가는 아니었다.

 

 


퇴계 이황이 담고자 했던 것은 우주만큼 넓고, 바다보다 깊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인간을 담을 그릇은 한사람이 자고, 먹고, 놀수 있는 크기와 넓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는 한사람이 거주하는 곳에 산과 강, 천과 못, 집과 책, 바람과 나무 모든 것을 갖추었다.

이 좁고 좁은 도산서당에...

도산서당의 스케일은 어쩌면 꼭 그만한 크기로 퇴계 이황을 만족시켰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마음을 담을 그릇이 너무 커서 공간을 포기했는지도 모르고...^^




9. 진도문을 들어서면서...(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대한 단상)


이제 도산서당을 벗어나 격식을 갖춘 강당영역으로 들어간다...

몇 계단 위에 작지만 당당하게 <進道門>이란 현판을 건 문에 들어선다...

도에 이르는 문... 나가는 문인가? ^^

문은 길인가? 도에 이르는 길?

이미 도통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도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하나? ^^

 

 


기왕 시작한 거, 더 나가보자...ㅎㅎ

서원과 조선 성리학에 <주희와 이황>은 핵심고리이니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보태본다.

주희와 이황은 시대적인 선후의 문제가 있지만 공통분모가 많고, 같은 계보를 가졌다.

후대의 이황이 훨씬 깊어지지만 좁았고, 완결적이지만 배타적이었다.


철학적 사유는 후대로 내려갈수록 다듬어지고 심화되면서 완결되는 게 보통이지만,

초기의 풍부함과 유연한 폭을 모두 담지하거나 해소하지는 못한다.

물론 이런 문제는 맹자, 주희, 이황을 통한 유학의 완성도가 공자의 넓이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태생적인 한계로도 말할 수 있다.

이황의 경학, 주희의 예학, 맹자의 의리학은 결국 공자의 <인간관계론>의 바다에 머문다.

 

 



주희와 이황은 도에 이르는 길로,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 평천하를 말했던 사람이다.

언젠가 이 부분에 대한 교양강좌를 들으면서 왜 <연후에>라고 강조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 <대학>의 모본 <예기>에는 절대 그런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ㅎㅎㅎ)

8조목중 이 4조목은 경중, 완급의 문제이지 내외, 본말이나 선후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주희와 성리학자들의 해석일 뿐이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한대, 공자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예기>에서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8조목을 따와 만든 게 <대학>이다.

사마광이 만든 대학은 한마디로 <예기>의 주석서이며, 주희에 의해 사서의 하나가 된다.

 

 


<관계론>의 입장에서 보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동시에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지

앞쪽의 수신제가가 없으면 치국평천하가 될 수 없다는 필요충분조건이 결코 아니다.

물론 이런 식의 접근은 보다 더 근본적인 철학적 사유를 깔게 되는데

모든 철학의 대척점이자 논쟁의 방식은 본질론, 현상론, 단계론 등의 다툼이다.


어느 것이 본질이고, 어느 것이 먼저인가와 단계적으로 발전 하는가 한번에 이루어지는가는

한국철학의 쟁점들인 교선, 태극, 사칠, 인심도심, 심설, 돈점 논쟁의 귀결이기도 하지만

서양철학의 관념론과 유물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논쟁까지 시작이고 끝이기도 하다.

자칭 <관계론자>인 나는 그런 문제를 여전히 선후, 경중, 완급으로 이해할 뿐이다...^^

 

 



아무튼 송대의 유학자들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분명하게 <수신 연후에>를 강조하였고

주희와 이황은 당대의 필요를 위해 8조목에 순서를 붙이고 수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수신을 위해 소학을 강조하고, 그 소학을 완성하기 위해 심성을 연구하였다.

여기까지가 그 두 사람의 태생적인 한계, 시대의 요구이며 공통점이다...


(우리는 지금도 대통령이 되는 조건이나 재벌로 살아야 할 조건에 <수신>을 강조한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수신이 안 되었다는 것이 결격의 본질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세종대 명재상이라는 황희는 그 자신의 청렴과 무관하게 무수한 부패고리가 있었다.

황희가 명재상이 된 것은 齊家가 잘 되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인정한 세종의 선택이다.


이 문제를 현재의 대선정국에서 거론하는 것은 특정인을 옹호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정책과 비전에 대해 정작 검토해야할 주요논제들이 방기되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한 어느 성격 급한 재벌의 자식사랑이 오랫동안 신문과 언론을 채우며 회자될 정도로

우리사회가 한가롭고 빈약한가 짜증스러웠는데, 어쩌면 修身齊家의 영향은 아닐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