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 완결되었을 때만 올리는데 이번 글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겠다...^^
* 바쁘지 않은 사람들이 없겠지만, 이번 주는 유독 급한 업무들도 많고...^^
* 그래도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조금씩 쪼개서 올려 본다...ㅎㅎ
* 사진중 2편의 지폐도안만은 네이버와 다음에서 스크랩해서 올린 자료들이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1... 070829
오늘이 백중이란다.
챙겨주는 색시가 고마워 무슨 수를 쓰던 땡땡이를 치기로 했다...
5시경 원주 약속인데 시간이 애매하다.
다행히 문막 휴게소에서 약속이 잡혀 차 한 잔하고, 서류 건네주고...
봉은사 들렀다가 <판전> 글씨 감상할까, 신륵사 들러 남한강을 볼까 고민했는데
약속이 잡히면서 급하게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연스레(?) 치악산 구룡사로 방향을 정했다.
지난번 완주 위봉사에서의 천도제 뒤풀이(?) 겸이다.
비와 햇빛의 숨바꼭질이 치악산 계곡의 물을 부풀려 놓았다.
충분히 습한 곳이 불어난 녹수들이 모여 굉음으로 잡념들을 잊게 만든다.
계류가 만드는 아우성 소리쯤이라 불러보자...^^
<괜히 마음에 들어 한번더 올린다...^^ 몇개는 원본 크기로 올렸다...>
가끔 흐르는 물을 보면 내가 무엇을 보는지 자문해보곤 한다.
흐르는 물을 쫓기도 어렵고, 내가 보았던 물은 두 번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내가 보는 공간에서 멈춘 시간의 흔적을 듣는 건 아닌지...
물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귀로 듣고, 익숙한 개념으로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종이배 하나를 띄우면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태평양까지 갈까?
ㅎㅎㅎ 치악산 계곡에서 태평양을 품어 보려나 싶어 어이없다...ㅎㅎㅎ
一念三千, 三千互具... 무리다 싶은 줄 알면서도 내 생각의 자유로움은
내가 영위하는 순간(시간)의 테두리나 공간의 영역으로 한정되지 못하겠지...
늦은 시간, 햇볕도 구름 속에 시간 뒤에 숨고 남는 건 습한 기운과 물소리뿐...
익숙하지 않은 구룡사에서 안동 소수서원으로 맘을 돌린다...
1. 내가 서원을 피해 다녔던 이유...^^
나는 왜 그렇게 서원답사 혹은 서원을 피해 다녔을까?
나는 왜 서원건축을 내가 생각하는 특정시기에 대한 상징으로 바라볼까?
더 본질적으로 조선시대에 대한 어떤 편견이 나를 무겁게 했을까?
<鄒魯之鄕> 스스로 공자와 맹자의 고향임을 자처하는 경상(북)도,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를 자부하는 안동의 퇴계로를 달리면서 드는 생각들이었다.
안동과 서원하면 먼저 생각나는 게, <세도정치와 붕당, 그리고 사화에 대한 이미지>다.
그 발단과 결과의 긍부정을 떠나, 과연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생산적이고 현실적이며
한 사회의 기본인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 향상과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사실 부정적인 의견이 강하다.
정치의 헤게모니 장악과 사상의 건강한 경쟁과 당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근본과 뿌리를 빙자하는 기생성과 폐쇄적인 <유일 거대 담론>에 대한 거부감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훈구파와 사림파의 당쟁, 그리고 지방전통에 기인한 차이는
우리의 정치사와 문명사에 절대 독소적 요소가 아님이 분명하지만
민본이 거세되고, 배타적 당파 헤게모니는 <비판을 위한 비판>만이 난무하는
시대의 흐름을 관념적이고 심정적 의리에 치우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을 전후한 200년간 조선의 변화는 서원과 무관하지 않다.
두 번째는 서원이란 교육기관이 다루어야 할 내용에 대한 회의론이다.
사실 서원이란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학기관이 아니다.
수나라의 과거제도에서 파생된 중국의 서원건립은 송대에 꽃을 피웠고
그것을 대표하는 서원의 완성은 주자의 <백록동 서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과 규범을 만든 이가 바로 퇴계이황이며
이황이 주재한 강회의 시작과 끝은 <주자의 백록동규>와 <향약>이었다.
물론 초기 서원들이 소학, 사서, 오경을 근본으로 삼았고
이황과 이이가 만든 교과목의 독파순서에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후대에 만들어진 서원성격의 변화와 번창과정에서 채택된 교과목들이 변하지만
우리나라 서원에서 교육한 마지막 과정은 <중국의 역사>였다.
관학을 대표하는 향교의 몰락 속에 대두한 서원이 교육한 것은
조선의 뿌리가 되고 근간이 되는 한반도와 만주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의 역사였다.
그런 <서원>이 나는 싫었다.
오직했으면 동사강목에서 안정복이 우리 역사도 모르면서 중국의 역사만 외운다고 했을까?
(서기 2000년, 우리 신문에는 아직까지 중국의 역사를 교훈으로 하는 많은 칼럼들이 있다)
굳이 세 번째 이유를 묻는다면 건축 속에서 읽는 <조선 유학의 규범성>이다.
평지와 산지,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경험은 사찰 건축에서 가람배치의 다양성을 가져왔다.
그리고 도교적 무위와 유교적인 위계가 샤머니즘 등과 결합하면서 1000년을 버틴
한반도와 주변의 사찰건축은 유연함과 다양함, 그리고 포용력으로 질긴 생명을 이어왔다.
이에 반해 서원은 일정한 틀과 규범에 근거하여 대량생산된 맞춤형 건축양식이다.
전학후묘(前學後墓), 전당후재(前堂後齋) 모두 궁궐건축의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모방이다.
선조대에 발전하기 시작한 서원건축은 이미 성균관과 지방향교의 전도를 훼손하지 않았고
초기/ 대도시/ 평지에는 전조후학이, 후기/ 중소도시/ 경사지에는 전학후당이 정착했다는
차이 외에, 건축적으로나 공간경영에서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 완고함이 서원건축이다.
통일성과 일관성, 그리고 원칙과 규범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유로 포기되는 다양성과 포용력이 정신과 사회를 폐쇄된 공간으로 축소시키고
통제된 체계, 전일적 가치체계의 강요로 창조성과 변화의 바람을 무력화 시키고
그런 결과로 나타나는 우물 안 개구리에 자족하는 모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사족 몇 개를 붙인다면
사원은 여전히 문중 소유의 관리대상이고
입출입 시간이 통제된 죽은 공간이며
일정한 규범과 형식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대량생산(?)의 중복에다가
변화무쌍한 사회의 급류에서도 여전히 도도한 고립된 건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내가 도산서원을 찾은 이유...^^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산서원을 찾은 이유는 또 뭐지?
퇴계로를 달리면서 과연 이곳을 안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외진 곳, 끄뜨머리쯤...
뭐라 부르기 난감한 괴기한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드는 생각이다...
길도 아닌 것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상업지도 아닌 것이 도산서원 주차장이다...^^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낙동강수가 흐르고 넓은 퇴적지를 기대어 도산서원에 들어서는 길...
예전에는 결코 이 길로 다니지 않았을 것 같은 인위적인 강제가 느껴지는 길에서
엉뚱하게 일본의 축성과 법륭사 동원 가는 길이 생각난다...
일본의 축성건축과 정원을 보면 기가 막히게 조화로운 인공의 안배를 느끼곤 한다.
경사지를 잘라낸 인위적 공간에 조금은 허튼 솜씨의 경사지 축대를 비교 하는 게 아니라,
조일전쟁 당시 포로로 일본에 잡혀간 <강항>에 의해 전수돼 정착한 일본의 유학이
다름 아닌 퇴계의 주자학이며 퇴계의 경학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기 <후쿠자와 유키치 (Yukichi Fukuzawa)>와 비교하기 쉽지 않지만
일본 성리학의 원조 <후지와라 세이가>는 강항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팁으로 내가 도산서원에서 일본의 성리학을 운운하는 이유는
퇴계의 경학이 가장 밀도 있게 일상생활로 접합된 곳이 현재의 일본으로 보기 때문이다.
침소봉대? 물론 전적으로 주관적인 사견임을 전제하지만 ;
집밖에서 얻어맞고 들어온 아이에게 한국의 엄마들이 하는 말 ; 기죽지 마라...
일본의 부모들이 집밖에서의 행동에 대해 아이들에게 하는 말 ;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
에도시대 일본 유학의 시조 후지와라는 이황의 학문을 신봉하였고,
결국 이황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 때 일본 교육헌장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이나 중국에서의 이황에 대한 연구가 우리나라보다 활발할지도 모르고...
시비와 선후, 혹은 경중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퇴계의 경학은 그렇게 살아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퇴계의 경학은 經學이기도 하고 敬學이기도 하다.
사서오경, 혹은 구경, 십삼경을 텍스트로 설정한 經學은 이황에게 敬學이기도 했다.
소수서원에 새겨진 이황의 <敬>자는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드시 한다>는
修己治人으로서 주자학의 완성이며, 道通論의 완결이기도 하다.
3. 도산서원의 풍수지리적 입지에 대한 생각...
예전에 저 좁지 않은 낙동강 지류를 배 타고 건너서 도산서원에 들어섰겠지?
퇴계 이황이란 한 사람을 만나고 강학을 듣기 위해 혹은 문답을 즐기기 위해
안동에서 멀고 먼 이곳까지 조랑말 타고, 뱃길을 건넜을 유생들을 생각해보며,
그들에게 원경으로 들어왔을 도산서원 앞에 서서 풍수지리의 입지를 살펴본다.
도산서원은 어떤 이유에서 하회, 내앞, 닭실과 함께 4대 길지에 들어갔을까?
명당자리라는 도산서원은 한마디로 차분하면서도 좁고 작은 곳이다.
풍수지리하면 안동의 하회마을이 떠오르고, 이에 필적할 곳이 경주 양동마을이다.
산태극 수태극, 연화부수형이라는 하회마을이 평지에 조성 되었다면
경주의 양동마을은 勿자형으로 산지형을 대표하는 곳... 이 두 곳은 이해가 간다...
기왕 나온 말, 택리지로 더 들어가 볼까?
산은 음이고, 물은 양이라고 주장하면서 택리지는 시작(?)한다.
이중환은 복거총론에서 주택의 입지로 지리, 생리, 인심과 산수를 다루었다.
수구가 넓지 않고, 왕래가 많고, 평야에 해가 뜨고 짐이 길고,
수려한 산에 맑고 찬 샘이 솟으며, 교환이 용이한 곳...
자신과 자녀 교육을 위해 풍습이 순후하고 정신을 즐겁고 감정을 화창하게 보장 하는 곳.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의 긴 풀이다...
조금 더 가면 오른쪽으로 길이 들어가고, 왼쪽으로 물이 나가고...
내가 걷는 이 길이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좌의정 우의정과 함께 항상 되물어보는 자문이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퇴계로를 통해 안동에서 예안까지 오는 길, 그리고 이곳의 지리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양수리... 멀지 않은 곳에 정약용의 생가와 묘지가 있다...>
뱃길로 건넜을 도산서원은 이제 낙동강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계곡이 메워져 버렸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으로 들어오는 길은 주변의 풍광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도산서당에서 비교적 급한 경사로 흐르던 계류들의 물줄기와 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한다.
바람(風)과 물(水), 그리고 땅(地)과 사람(理)의 흐름을 깨뜨려버린 성역화 이후의 모습에서
풍수지리를 논하는 게 우습지만 양택으로서 길지라기보다 음택 기준의 명당처가 아닐지...
물론 이중환의 양택 기준으로 보면 태백산과 소백산이 낙동강과 만나는
안동, 봉화, 영주, 영양만큼 좋은 곳들이 없겠지만, 이는 그의 지극히 주관적 판단이고
음택으로서 우리나라의 최고 명당자리라는 정약용 묘소와 도산서원 근처를 비교하면
양평 양수리(두물머리)의 정약용 묘소는 산보다 수가 강조되어 생동감을 느낀다면
도산서원과 주변 진입로는 깊지만 무겁고, 맑지만 좁다는 느낌이 강했다.
<영양 반변천 바로 옆 봉감 오층탑... 탑의 이미지인지, 반변천 혹은 주변 들판의 이미지인지...>
낙동강을 건너면서 계곡 위, 높게 자리 잡은 도산서원을 본 유림들의 느낌도 이랬을까?
같은 낙동강변이지만 영양 반변천이 주는 온화함과 차분함과는 다른 스산한 허허로움...도학을 위해 나아가는 길, 수기를 위해 절제된 생활을 감수 하려는 유생들에게
도산서원이 갖춰야 할 풍수지리의 조건에는 그런 기운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4. 도산서원에서 생각하는 조선시대 서원건축...
천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조선의 정신을 대표하는 도산서원은 참 작은 공간이다.
굳이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에서 양택, 음택을 따지는 이유는 너무 좁다는 느낌 때문이다.
강 건너에서 보지 못하는 도산서원을 탓하는 게 아니라 게으른 나를 질책해보고
옹기종기 지붕의 처마선들이 그려내는 서원에 대해 살펴본다.
조선시대의 건축을 크게 개괄해보면 15세기 궁궐과 성곽, 성문, 향교 건축이
16세기는 옥산, 도산서원을 비롯한 서원건축이
17세기에는 각황전, 팔상전 등 옛 백제지역(충청, 전북) 일대의 때늦은 불교건축이
18세기는 수원성, 19세기는 근정전, 경회루, 덕수궁 석조전 등이 시대를 대표한다.
<강릉향교... 서원과 비교하면 권위적이면서 스케일이 다르다...>
<화엄사 각황전... >
<수원 화성 화홍문... 너무 오래되고 가물었을 때의 사진...>
<경복궁 경회루... 19세기말 건축을 대표한다... 경복궁의 건축은 인왕산과의 조화가 주요했다...>
15세기 성균관을 비롯한 서울 문묘와 나주, 장수, 강릉향교를 이어받은 서원건축은
그 시대를 주도한 건축의 주요한 양식이며 또한 16세기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5대 서원이라 불리는 소수(1543), 옥산(1573), 도산, 도동(1605), 병산(1613)서원 중
도산서원(1574년)은 서원건축의 규범이며 기준이 되었다.
성균관과 서울문묘를 규준으로 삼은 각 지방의 관학건축 향교를 모범으로 하지만
지방의 특성과 조성시대, 그리고 건립 위치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데
풍수도참사상에 따라 수세, 산세, 야세에 합당한 위치를 잡았다고 우리가 해석한다?^^
크게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이 담장(눈높이만큼 낮지만 단단한) 등으로 엄격히 구별하여
최소의 공간과 동서남북의 직교축을 기준으로 부속건물들이 배치한 것이 서원건축이다.
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며 향촌 자치운영기구인 서원은
중국을 포함하면 강학전도, 봉사, 장서, 자제교육, 과거준비, 방랑자수용 등의 목적을 갖지만
한국과 중국 공통으로 강학과 봉사, 그리고 장서의 기능이 필요했던 곳으로
유생들의 강학공간에는 대청마루와 협실을 갖춘 강당에 동무, 서무가 들어서 있고
제향공간인 사당에는 동재와 서재가 설치되며, 부속건물들은 규모에 따라 조정 되었다.
몇 가지 특징을 찾아 메모해보면, 검소함과 절제를 기본으로 삼아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익공이나 도리 등의 간소한 양식으로 화려하지 않게 꾸몄고
궁궐이나 사찰건물에서 흔히 보이는 단청과 붉은 기둥도 사당에만 한정하였다는 점...
이러한 이유로 서원의 판액(편액)은 포작이 없어 바라보기 불편하게 걸리게 되었고
(창방에서 지붕처마 끝에 편액이 붙어있어 땅을 향하게 보일만큼 비스듬히 걸려있다)
낮은 담장으로 내부 건축물의 대청마루에서 외부의 자연이 그대로 드러나며
또한 외부에서도 담장 너머로 창과 문이 살짝 보일만큼의 높이로 조성되어
통제되지만 가려지지 않고, 글소리와 바람소리가 자연스레 소통할 만큼만 높다는 점...
그리고 흰색으로 마감된 외, 내부의 벽과 검게 퇴색된 나무, 짙은 회색 지붕들의 조화는
흡사 무채색의 향연에 담백함과 검소함이 절로 느껴지는 화장되지 않은 맨 얼굴인데
작지만 쏠쏠한 재미는 면분할이 주는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천진한 구성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서원건축 답사의 묘미는 예닐곱 건물과 담장 문이 어우러진 고저장단과
창과 문이 만들어내는 빛의 분산과 그림자의 배분, 그리고 최소한의 절제된 조경과
높지 않은 담장을 통해 건물 사이사이 보이는 자연과의 교감이 감상 포인트다.
서원은 건축물의 불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협소한 스케일이
어떻게 공간을 분할하여 시선을 교류하고 빛을 끌어들이는 가에 있지 않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신라계 사찰에서 보이는 누하진입이 경상도 서원에는 그대로 적용되었고,
(외문을 겸한 누각 ; 남계, 도동, 금오, 예림서원, 누각배치 ; 옥산, 병산, 서악, 묵계서원 등)
누각진입이 정착한 옛 백제의 전라도와 기호지방에는 평지형 산문진입으로 건축된다는 점...
지역적 특성과 다른 문화의 경험은 지난한 세월에서도 건축적 양식으로 남는다.
아무튼 명종, 선조대, 사림이 정치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발전한 서원과 서원건축은
1700년쯤 숙종대에 남설되어, 대원군의 신미존치(1871년)로 47개만 남고 훼철될 때까지
서원 417개소, 사우 492개소 등 1000여개까지 늘어났지만
현재까지 원형을 유지하는 곳은 대략 10개소이고,
건축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병산서원은 엄밀히 20세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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