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처음 찾았던 곳은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보물49호>였다.
당간지주에 대해 정리하면서 나는 비교적 다녔다고 생각했던 나주에서 석당간을 보지 못했음을 아쉬워했고, 너무나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내고장 문화재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있었다.
또한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석당부재들을 보면서 석당간의 완성태를 내 눈으로 느껴보고 싶었고...
그래야 전국에 산재한 당간지주 뿐만 아니라 용두사지 철당간, 담양 읍내리 당간 등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말이다.
결국 석당간만 보겠다는 의도가 나주읍성 답사여행으로 이어졌으니 시작이 모호하지만 하나씩 이어본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용두사지 철당간... 이에 반해 굳이 성문 밖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은 한적한 민가들 옆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시대, 비보풍수 목적으로 만들어진 나주 석당간의 의의를 느끼기엔 주변 여건이 너무 달라져있었다.
나주의 형국이 배를 형상하기에, 그 중심을 잡기 위해 무거운 돌로 돛대처럼 하늘 높이 만들었다지만, 석당간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이와 무게의 빌딩과 아파트들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데다, 석당간 주변에 촘촘히 들어선 전봇대들로 인해 더 이상 존재가치를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단지 상고시대의 솟대들처럼 마을의 안위를 비는 기원의 상징물로 그나마 제 구실을 이어가는 정도?!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
하지만 고려시대에 11m 높이의 석재 당간의 위용과 의미는 분명 각별했으리라...
이층 전각을 올림에도 수많은 공력이 투여될 수밖에 없던 시절, 4층 높이를 돌로 쌓아 한지역의 염원을 담았다면 전봇대와 석당간을 동류로 취급하는 나의 접근방식은 말그대로 불경의 극치겠지.
거기에 천여년전, 나무도 아닌 영구불변의 돌로 쌓아올린 석당간은 수많은 민초들에게 또 다른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터, 잠시 그 염원의 바람을 느끼는 것으로 주변산하와 시대의 변천을 내 눈으로 이해하며 바라본다.
<전봇대와 전선들을 최대한 피해서... 그래도 얼른 눈에 띠지 않았던 건 전봇대 때문이었다는...^^>
미륵사지에 이 정도 크기와 높이의 석당간이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26m 정도의 좌우 석탑과 그보다 3배는 높았을 중앙의 목탑 앞에 11m 높이의 석당간이라...
조금은 초라하지 않았을까? 나주 석당간을 보면서 나의 머리는 미륵사지를 상상하고 있다.
날렵하면서도 세련되고, 정교하면서도 준수한 느낌의 당간지주와 정성스레 다듬어진 부드러운 느낌의 당간에, 자색이었을지 금색이었을지 오색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장엄하게 나부꼈을 것 같은 화려한 당...
미륵사지 석당간과 나주의 석당간은 시대와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 의의와 영향력은 비슷했겠지?
<미륵사지 당간지주... 왼편의 석당부재가 보인다... 이 굵기를 추정하여 제도로 복원하면 그 높이가 대략 11m로 추정되고 있다...>
<청양 읍내리 석조삼존불상과 삼층석탑 주위에 있는 석당들... 박물관 야외 전시장 뿐만 아니라 석당 부재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언듯 보기에 석등 간주석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상부 올라갈수록 경사지게 다듬었다는 것은 연속된 부재를 쌓아 올릴 때의 가공법임을 추측할 수 있고, 그런 흔적이 있다면 그건 분명한 석당의 부재들이다...>
작년에 복원 공사가 끝난 덕에 석당간의 기단부까지 볼 수 있었음은 늦게 온 게으름 때문에 생긴 행운...
1m 정도 깊이에 묻혀있던 목조결구 같은 독특한 기단부와, 자칫 몽땅하고 투박한 천덕구러기 같이 3/5 정도만 노출 되었던 당간지주 전체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으니
몇 년전에 내가 이 석당간을 보았다면 나의 이야기는 훨씬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일찍 일어난 새가 많이 빨리 먹이를 먹는다고?? 가끔 늦게 일어난 게으름뱅이가 더 많은 걸 보기도 한다...^^>
<햇살이와 똘똘이 키가 있으니까 원지반이 얼만큼의 깊이에 있었는가가 추정된다... 이 깊이가 천년전 지반이다.>
<당간 기단부가 특이하게 목조 결구처럼 당간지주를 감싸 안고 있다...>
첫 느낌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고 서툴고 어설프고...^^
보물 49호라지만 어쩌랴... 내 눈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을 걸...
투박한 사각기둥의 모서리는 유리에 면을 치듯 각을 따놓은 정도의 가공이 있을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내가 지금까지 옛 백제지역의 당간지주에는 측면에 線(선)문양이 돌출된 양식이 전승되었다고 강조했는데, 이웃 담양읍내리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음에도 있는데, 나주의 석당간에는 왜 아무런 문양이 없지???
<모서리에 각을 따놓은 흔적 외에 특별한 문양이 없다... 아래(↓) 담양 읍내리 당간지주와 비교된다...>
<담양 읍내리 당간의 당간지주...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세워진 이후, 측면의 線문양은 백제지역 당간지주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까지 고수해 온 내 주장을 수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지 못함이 아쉬울 뿐...^^
게다가 이렇게 오랜 세월 유지된 지역의 전통을 지키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당간지주와 굳이 비슷한 느낌을 찾으라면 춘천의 근화동 당간지주가 아닐까 싶다.
예전처럼 묻혀있던 상태였다면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 느낌이었을 거 같고,
나주 당간지주를 보고 있노라니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는 아주 잘 생긴 편에 속하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런 유형의 최고형태는 아무래도 법천사지 당간지주나 거돈사지 당간지주가 아닐까 생각된다.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 나주 석당간 당간지주처럼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조로운 형태는 경상도 북쪽과 강원도에서 유행했던 형태다... 어떻게 이런 형태가 나주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 길옆 논 한가운데, 아직 자신의 뿌리인 기단부를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 굳이 유형을 분류하자면 나주 석당간과 가장 유사하지? 그렇지만 원주 당간지주를 보더라도 기단부의 독창성은 나주가 유일하다는 생각... 근데 보물로 지정했을 때 그 형태를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주 석당간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상륜부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석당간이라는 점일 것이다. 미륵사지를 비롯 경주박물관이나 청양 읍내리 등에서 석당 부재들은 볼 수 있지만, 돌이라는 재질의 특성 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형태를 보존한다는 건 극히 어렵고 드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식용 (용두)보당을 제외하고 당간에 상륜부가 남아있는 경우는 담양 읍내리 당간의 철제 상륜부와 이곳 나주 당간의 석재 상륜부가 유일하니 그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겼으리라.
<나주 석당간의 상륜부... 온전한 모습의 석당간으로도 유일하지만, 특히 상륜부가 보존되었다는 게 최고의 자랑꺼리일지도...>
<담양 읍내리 당간의 상륜부... 철제 당간으로서는 유일하게 상륜부가 보존되어 있다... 용두사지나 칠장사, 갑사, 법주사의 철당간 상륜부도 이랬을까? >
<혹시 철당간 상륜부가 달랐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참고할만한 자료가 송림사 전탑(↑)과 월정사 석탑(↓)의 상륜부가 아닐까 싶어 올려본다... 상상은 자유니까...^^>
팔각 부도(승탑)의 지붕돌 같은 형태에, 덩실덩실 둥글게둥글게 고려석탑의 미감으로 반전시킨 처마곡선에, 담양 읍내리 오층탑 지붕돌처럼 두툼하게 처리된 전각, 목조건축의 추녀나 사래처럼 보이는 음각선... 그리고 부도 상륜부의 보주에 새겨진 알듯말듯한 장식까지...
내가 봐왔던 자료에는 이 상륜부가 미륵사지 석당간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또다시 미륵사지 당간지주를 떠올리며 한참 상상해 보고 있다.
<나주 석당간의 상륜부... 고려시대 만들어진 승탑과 석탑의 곡선 냄새가 확실한가?>
<정토사 흥법국사 승탑... 이 부도가 만들어진 게 1017년이니 나주 석당간이 만들어진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개성 남계원지 석탑... 이 탑도 1280년대 중수됐으니 처마선을 둥글게 둥글게 처리하는 것은 고려인들의 로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m 깊이에서 노출된 기단부를 보면, 전라남도 쌀, 누에고치, 면화의 절반 가량을 생산했기에 3白지방으로 불릴만큼 풍요로운 나주평야와, 서남해 바다에서 들어오는 해운의 종착지 영산포를 거느린 나주는, 영산강 유역에 있어선지 천년 동안 1m 정도의 퇴적이 이루어졌음을 읽을 수 있다.
천년의 무게가 이만큼 뿐일까 싶은 생각에 세월의 무게치고는 적다 말할 수 없지만, 또 한편으론 그만큼 왕성했을 침식작용의 결과라 생각하니, 왠지 풍요롭고 넉넉한 물산지 보다는 수탈과 애환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건 또 왠 심술일까?
그래도 늦게나마 기단부를 찾고, 원지반을 그대로 살려 복원했음에 나는 감사하고 있다.
예술적 감상이나 한지역의 기개를 찾기에는 부족함이 적지 않지만, 천년전의 땅을 느껴볼 수 있으니 말이다.
단지 아쉽다면, 지금의 자태로만 상상한다면 곡창지대였던 나주평야와 나주의 특산물이었다는 나주배와 복숭아 포도 등등을 지키기에,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의 거친 마무리와 정교하지 못하고 반듯하게 솟아오르지 못한 미감은 나주읍성의 풍요로움과 강성함으로 연결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석당간 부분... 세련됐거나 매끄럽거나... 그런 미감과는 거리가 멀다...>
<당간지주와 석당간 결구... 정교하거나 강건하거나... 그런 미감과도 특별한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간을 만들었던 이들의 염원은 충분히 담아냈으리라... 그랬으니 천년을 버티고서 살아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웅변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석당간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나 신라의 당간지주와 전혀 다른 감흥을 느끼게 된다.
세련된 장인의 숙련된 손놀림보다는, 거친 농사꾼들의 투박한 손길...
막대한 사병을 거느리던 호족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안찰사나 향리 수령의 권력욕이 아닌, 농꾼들의 염원...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이것저것 재면서 준비해온 것이 아닌, 서둘러 세워야만 했을 것 같은 절박함...
권력의 상징도 아니고, 과시도 아니고, 종교의 산물도 아닌, 삶의 애환을 짜내야만 할 것 같은 간절함...
불사와 관련되지 않아서 일까?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성문 밖에 세워져서 일까?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나주 석당간... 세월의 흐름일까? 시대의 차이일까? 장인의 수준 때문일까? 미감의 차이일까? 우리에게 진정한 즐거움이 있다면 이들이 함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보풍수 운운했음을 뜯어보면 이곳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아닌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의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고, 석당간과 목당간을 함께 세웠다면 지역적으로 정서적으로 커다란 계기가 우선했을 것이고, 당간지주에 백제지역의 전통을 살리지 못했음은 관에서 주도했던 일은 아닐 것이고, 결국 당대의 지방권력과 이 지역 사람들의 타협의 산물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가 궁금해지지만, 분명한 것은 이리도 다급하게 이 당간을 세웠어야만 했을 당대의 나주사람들의 다급함과 그들이 만들 수 있었던 최선의 결과를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그러고보니 이 당간 이름이 동점문 밖 당간...
그럼 나주성, 혹은 나주읍성의 동점문이 근처에 있다는 말인데??
이젠 본격적으로 나주읍성과 나주에 대해 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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