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가는 길...
1.
지루한 장마가 몸과 마음을 습하게 만드는지 자꾸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비우면 불안해지고, 찾지도 않는데 자리를 지켜야할 것 같은 강박과 관성이
무슨 질긴 동아줄에 매인양 편치 못한 나날인데
해가 없어 그런 것이라 위안만 삼기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는 채근이 멈추질 않는다.
해를 보고 싶다. 파란 하늘도 보고 싶고, 바짝 마른 공기를 탐하고 싶다.
오직 그 하나? 비운만큼 서운해지는 관계들이 있음에도 몇 번 마음을 다지며 나서기로 했다.
<전라북도 만경평야 인근일까? 간만에 바라본 녹색 평야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발해로 가는 뱃노래'님 말씀처럼 백제석탑의 지붕돌은 이런 들판을 형상화한 것이고, 통일신라 석탑의 지붕돌은 그곳 자연환경을 닮았을 거 같다...>
쉬지 않는 시간을 노니는 것... 비울 수 없는 자리에서 떠나는 것...
자랑하지 못하는 일탈이라도 꿈꿔야 뭔가 제자리를 찾을 것 같다는 유혹에 몸을 맡기기로 마음먹고
멀리 광주로 출발했다.
모처럼 서울에도 빛이 보이더니, 경기도를 벗어나자 구름이 보이고, 충청도에 들어서니 하늘이 보인다.
습습한 바람에서 벗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끈거리는 열기를 접하니 이제사 여름임을 실감한다.
바짝 마른 탱볕에서 트렁크를 정리하고, 잠시 전주박물관엘 들렀다.
<국립 전주 박물관... 광주박물관과 비슷한 느낌일까? 엔타시스 기둥에 차분한 맛배지붕... 아무래도 박물관은 맛배지붕이 어울리나?>
<우리 조경에 포인트는 아무래도 소나무다... 가만 보고 있으면, 백제의 전돌에서 느끼는 잘잘한 리듬과, 백제의 금동대향로의 겹겹의 산봉우리는 이런 소나무 잎파리에서부터 친숙해진제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물관을 거니는 신혼부부? 참 보기 좋지?^^>
보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미륵사지 석등의 복원된 모습도, 왕궁리탑 사리갖춤, 남원출토 사리구도 보고 싶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고싶었던 것들에 만족 못하고 생각 않았던 것들에 의한 이벤트를 기대한다.
사람 살아간다는 것이, 목적한 것에서만 만족이란 개념이 충족된다면 너무나 무미건조한 거 아닐까?
역시나 생각지 못했던 많은 개념들이 구체적인 형상과 실물의 참신함으로 다가오니
적절한 선택이 주는 극대 효과 - 조금 준비하고 많이 수확한 기쁨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등과 석당간과 석등 화사석 부재... 백제 석등의 출발이면서, 우리나라 석등의 시원이 아닐까? 아무튼 백제석등의 특징을 모두 갖췄다... 두툼한 단엽에 우아한 선으로 처리된 복련과 앙련,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두터운 괴임, 마름모꼴로 만들어진 화사석과 낙수면 전각부분에서 밑에서부터 반전된 처리와 옅은 우동까지... 미륵사 박물관에도 한 기가 있는데 백제계 석등의 원형이라 생각해 참고할만 하다...>
<부안 죽막동 제사관련 유적... 근초고왕에 의한 산둥지방과 요하일대의 대륙식민지 개발 이전부터 죽막동은 국제적 교류와 서해 뱃길을 여는 제사의 장소였던 거 같다... 백제 유물들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가야의 유물들이 모두 출토되었으니 가히 국제적이었다고 평가 받을 수 있다... 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신목이 신선했다...>
제석사지 유물들도 보이고, 죽막동 제사 유적과 관련한 유구들을 만나니 즐거웠고,
여기에 공자묘와 관운장 그림까지 만났으니 기대 밖 성과인 듯 내심 뿌듯하다.
그러나 전주에 본을 둔 이성계의 본관인 만큼 조선왕조와 관련된 유물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영조관련 물품 외엔 특별한 게 없으니 이건 예외였고,
강진과 함께 고려청자를 주도했던 부안의 진서지와 유천리 도요지들이 있음에도
그 명성을 살리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웠지만,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중 사리내함... 앞선 글 사진도 바꿔야 할 듯...^^ 우리나라 사리병 중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리병과 백제의 금속공예 수준을 확인시켜준 사리내함이다...>
<그리고 이 사리함은 앞선 글에서 내가 주장했듯이, 왕궁리 오층석탑의 백제 제작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전 남원출토 사리갖춤/통일신라시대... 우리나라 사리장엄구 중 가장 독특하며, 감은사탑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보각형 사리함이다..>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마한과 가야, 백제로 이어져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이 덧씌여진 이 지역
역사를 일목요원하게 정리하면서 전북의 역사와 생활문화까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집대성했으니
지방에 있지만 국립박물관다운 면모를 제법 갖췄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 손 붙잡고 한여름 불볕더위 식히며 박물관 그늘에서 노니는 아이들까지 정겹게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일까?
박물관은 어렸을 적 노는데 매우 좋은 공간임이 분명하다.
<201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청자특별전에 출품했던 포도덩쿨무늬 표주박모양 주자는 이곳 부안쪽에서 제작된 청자다... 강진 도요지에서 만들어진 청자와는 또 다른 은은하고 옅은 초록빛을 띤 청자로, 매우 아름다운 색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주박물관의 생활풍속과 관련된 전시실은 매우 정갈하면서도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물들과 뒷 배경이 잘 어울린다..>
바로 옆, 전북의 근대사와 관련해 동학농민운동 흔적이 배인 역사박물관이 있었지만,
시간을 핑계로 충분히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친다는 게 못내 꺼림칙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타이밍은 타이밍이고 해서 다음으로 미뤘다.
아니 미룰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 지금의 처지를 합리화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들 중 미루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시간을 이유로 미루고, 여유를 조건으로 미루고, 몸을 핑계 삼아 또 미루고...
한번 놓친 기회를 다시 잡으려면 수천 수만번의 인연이 누적되어도 채워지지 않는 법인데
우리는 인생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서 우연히 다가오는 기회들까지 외면할 때가 많다.
<국립전주박물관 바로 옆에 역사박물관이 함께 있어, 편안한 동선으로 구성됐다... 꼭 별개의 건축이 필요했을까 싶지만, 중복은 아닐 거 같기도 하고...>
2.
아직은 길게 남은 해가, 경로를 벗어났던 흔적도 지워주니 여름해가 길긴 길다.
모처럼 내려온 아들을 위해 늙으신 노모는 정성스레 닭죽을 준비하셨다.
부모님은 왜 무기력해 보일까?
희망과 역할의 문제는 아닐까?
정년퇴임부턴지 언제부턴지 세상을 놓아버리고 자식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분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홀가분한 자유도 단촐한 낭만도 아닌, 노쇠해진 건강과 궁핍한 시간뿐이다.
일했던 기간보다 길게 남은, 오로지 자신과만 대면해야 하는 시간에 당신들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7~8년 전쯤 광주집... 지금은 텔레비젼이 바뀌면서 변화가 있었지만 골격은 그대로다...>
노련함을 기대하는 자식에게 보이는 부모는 철 지난 경험과 회한 섞인 과거에 머무는 노인일 뿐이며,
현명한 삶의 지혜를 엿보고자 두드린 부모님의 가슴에서 미래의 당신들 희망은 이미 충분히 말라버렸다.
그분들이 버려버린 많은 것들 때문에 늙으면 아이 같아진다는 느낌을 공유하며 위로하고
고집만 남은 집착을 아쉬워하면서도 떨어진 시간의 공백은 메워드리지 못한다.
다만 내가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곤,
박물관에 잠시 잠깐 머무르면서 간취한 여운을 오래 되새김하듯
자식들의 현재를 몸으로 껴안으며 되새겨지는 성장과 추억의 편린들이 향수가 되고
안부를 묻는 작은 정성이 건강의 불씨로나마 이어지길 기원하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발코니를 꽉 채운 화분들... 물도 주시고, 청소도 하시면서 그렇게 보내신다...>
개콘 ‘ … … ’ 컨셉처럼 남자들끼리 앉아서 할 이야기는 결코 길지 않다.
아직까지 현대사회에서 남자들이 나눌 수 있는 일상이란 일과 취미를 벗어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간에 군대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축구나 야구, 골프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니
자신에 갇힌 세상의 벽만 있지, 자신과 무관한 이야기를 나눌 방법도 매개도 남자들끼리는 찾지 못한다.
그래서 자식간의 우애와 많은 손주들이 가족평화에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거 아닐까?
부디 현대와 현재에 치열할 이유는 없겠지만, 지금에 일정한 패턴과 작은 변화들이 편안하시길 바라지만,
최근의 근황과 짧은 세상 이야기가 겉돌고, 무심한 자식은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드니
더 쓸쓸해지는 시간은 부모님만의 몫인 듯...
<이럴 때 보면 종교라는 게 참 매력적인 네트워크 공간이 된다... 어머니는 성당에 다니시면서 꽃꽂이도 하시고 정기적인 외출이 있는데, 아버지는 특별한 네트워크 공간이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 일을 잃어버린 노후의 어르신들에게 자아는 무엇일까?>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으나 새벽부터 일어나 나설 준비를 하니 밥 달라 아우성거리는 애기가 된 기분이다.
왜 이리 빨리 일어났지?
업무와 직무에서 벗어난 시간들에 충실한 자신을 볼 때가 있다.
누가 쫓아와도 잡히지 않을 수많은 변명과 회피로 무장한 방호막이 주는 긴장 때문은 아님에도
우리는 일할 때보다 더 많은 계획과 상상을 펼치며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간절함에 잠을 잊기도 한다.
자신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간섭받지 않기 때문이리라. 스스로 계획하기 때문이리라...
이 시간에도 해가 이렇게 따가웠는지 습관화되지 않은 낯섬은 모든 걸 신선하게 바꾸게 마련이다.
햇빛은 햇살이 되고, 존재하지 않았던 공기는 상큼한 기운이 되고, 늘 보던 하늘은 투명해진다.
반복되던 일상의 변화에 적응하는 낯선 심신과 자연은 그제서야 생명의 동력으로 다가온다.
3.
이미 300km 이상 멀어진 일상에서 다시 100km를 더 멀어지기로 작정했다.
먼저 한 선택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또 다른 선택을 이어가는 건가?
앞선 수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더 큰 未生馬(미생마)를 만들어 가는 게 인생일지 모르지만,
돌아서는 걸 선택하든, 더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든 지금의 나는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참 아이러니하지? 과거의 선택과 무관하게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말이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전경... 예전엔 이렇게 넓다는 느낌도, 대흥사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앞쪽이 정리되면서 두륜산까지 모두 보인다... 역시 백제 가람답게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도 이처럼 넓은 부지에 평면적으로 가람을 배치했다...>
<짧은 길 놔두고 돌고 돌아 이곳까지 온 게 꼭 다람쥐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어렸을적 체구가 작음에도 달리기 선수까지 했던 나를 다람쥐라 불렀던 친구도 있었으니까...^^>
땅끝마을 해남... 짧은 국도를 두고 신호등 없이 길게 돌아가는 고속도로를 찾아
나주, 함평, 무안, 목포 이정표들을 바라보며 월출산을 지나
강진과 미황사는 이정표로 만족하고 대흥사 주차장을 향하니, 평소의 내 모습을 보는 듯...
질주와 편안함을 찾는 본능속에서 남아있는 것은 지금 목표가 대흥사 북미륵암이라는 점 뿐이다.
늘 꼽고 있었던 마애불을 오늘도 보지 못한다면 큰 후회할거라는 암시를 주문 삼아 그렇게 내려왔다.
<대흥사 안내도... 대흥사의 특징은 하나의 가람을 삼원으로 분리해 조성했었다는 점이다... 대웅전(12)이 있는 남원과, 천불전(19)이 있는 북원, 그리고 서산대사가 중심인 표충사(35)가 그것이다... 참고로 남원과 북원은 계류를 경계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흥사는 조계종 22교구 본사의 위상에 걸맞게 대규모 사찰로 탈바꿈했다... 천불전이 있던 북원 뒤로 대대적인 불사가 이뤄지고, 성보박물관(28)과 대광명전(46) 영역까지 채워지면서 예전의 독특함을 잃어버린 것... 초의선사를 비롯, 추사와 원교 이광사 등 많은 이야기가 숨겨진 곳이기도 하고...>
그 신발로 올라가시게요?
이정표에 없는 북미륵암 위치를 물으니, 힐끗 힐끗 복장과 신발을 탐색하던 스님이 되묻는다.
자신의 걸음으로 20분 걸리니 그 차림새로 올라가면 40분이고, 그 신발이면 1시간은 족히 잡으라는 충고...
게다가 이 새벽바람 맞으면서 땀깨나 흘려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으신다.
생각해보니 내게는 새벽인 이 시간이, 그분들에게는 반나절이나 지나버린 하루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누구에겐 일상이 나에게는 특별함이 되고, 그들에겐 습관이 내게는 이를 악문 도전이 된다.
<대흥사에서...>
나이 먹어가면서 는 것이라고 요령과 눈치뿐...
이 깊은 산사에 들어와서도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빠르게 멀고 높이 올라갈 방도만 찾는다.
그게 경험이고 올림픽 정신의 실천이며 현명함이라는 위안을 대견스럽다 여기며
관음암을 거쳐 진불암(진짜 부처가 여기 있다는 표현일까?)까지 올라갔다.
해발 100m에서 출발, 450m 고지를 올라가는데 35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친 꼴이다.^^
밖은 마른장마에 따가운 햇살이 이글거림에도 그리 높지 않은 산길엔 습습하고 축축한 바람만 살랑거린다.
외에애엥~~ 기름진 땀내음에 기뻐 다가오는 모기소리에 잠시 놀랐지만
빨리 만족시키는 게 귀찮음을 떨구는 상생의 도...
여기까진 좋았는데, 역시 산모기는 아프게 헌혈해야 되고 길게 가렵다...
<두륜산 안내도... 대흥사는 같은 백제식 가람인 법주사처럼 사방이 산봉우리로 둘러처진 분지 같은 곳이다... 많이 올라왔지?>
차곡차곡 쌓인 나무 계단을 오르며 드러내지 않는 정성에 감복한다.
누가 일러준 건 아니지만, 그냥 느낄 수 있는 감사함이다.
그 혹은 그들의 노고가 기약없는 나그네 발걸음에 이정표를 주고 길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주인도 없고 객도 없이 그렇게 산 위에 놓인 흔적이 정성이 되고 디딤돌이 된다.
무엇을 위해 이런 노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자신을 위해서 혹은 남을 위해서? 혹은 누군가가 시켜서?
언제, 누구일지 모를 후인들을 위해 땀을 흘리고 정성을 쏟을 수 있다는 건 정녕 덕 된 행보일터...
그렇게 길을 내는 것도 하나의 인생이고, 그를 모르고 지나치는 것도 또 다른 인생...
그렇지만 우리들은 남이 나를 위해 깔아놓은 것들을 너무 모르고 지나친다.
<이런 산길의 계단은 한편 좋기도 하고 한편 불편하기도 하다... 누군가의 정성에 보호를 받은 기분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계단은 나의 보폭을 통제하고 강제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 힘든가? 없었으면 더더욱 힘들었을까?^^>
가파오는 숨소리에 주변이 침묵하고, 나무 그늘에 막혀 보이지 않은 두륜산을 느끼며 걷는다.
산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
금강수이부장(金剛秀而不壯)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장엄하지 않고
지리장이불수(智異壯而不秀) 지리산은 장엄하지만 빼어나지 않다.
구월불수부장(九月不秀不壯) 그러나 구월산은 빼어나지도 장엄하지도 않은데
묘향역수역장(妙香亦秀亦壯) 묘향산은 빼어나면서도 장엄하다.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일대종사로 임진왜란(조일전쟁)때 묘향산에서 승병을 일으켜 평양성을 수복하고,
선종에 교종을 묶어 한국불교의 정통 맥을 이어 사명에게 공과를 넘긴 서산대사의 말씀이다.
그런 그는 왜 묘향산, 금강산, 지리산을 놔두고 대둔산(두륜산) 대흥사에 자신의 의발을 전수했을까?
<대흥사에서 바라본 두륜산... 대흥사쪽의 화창한 여름볕과 달리 두륜산 정상의 암봉은 수시로 안개에 뒤덥힌다... 그래도 오늘은 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는데, 사실 이 두륜산도 대둔산 자락의 일부다... 때문에 대웅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대둔산을 주봉이 되고, 현재의 변형된 가람과 천불전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두륜산이 주봉이 된다... 아무튼 관광 때문인지 뭔지 대흥사는 대둔산을 비켜 두륜산을 주봉으로 삼기로 했는 듯...>
<아무리해도 그림이 안 그려져, 내 얼굴을 오른쪽으로 90도 꺾으니 와불상이 아니라 사람형상으로 보이는 거 같다...^^>
여기저기 쏟아진 바위더미와 돌무더기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듯 초록 이끼를 입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바위들도 쏟아질 수 있기에 석탑도 만들고 석불도 만들었을까?
이렇게 쌓이고 무너져서 통행할 수 있는 길이 되고, 나도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는데
나에게 바위더미들은 예비 석탑과 석불로만 보이니, 지금 정리하는 삼층석탑이 무겁긴 무거운가 보다.
그 사이사이 역시 보이지 않은 정성들이 돋우어 놓은 디딤돌을 발판삼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닳아진 표면들은 다시 방향이 되고 위안이 되며, 혼자도 낭만일 수 있는 침묵을 즐기고 있다.
<진불암에서 북미륵암으로 가는 길... 해발 고도가 있고 울창한 수림이 있어선지, 일본의 나라나 교토의 사찰들처럼 이끼를 잔뜩 머금고 있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속세에서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멀어지고 깊어진 산길에서 시간은 느려진다.
느려지는 걸음만큼 시간은 더 더뎌지고, 힘겨운 발자국 하나하나는 또 다른 시간의 켜를 쌓아가고...
일에서 떨어지고 인위에서 멀어지니, 느닷없이 태초와 원시의 감흥이 절로 만들어지고 있다.
생각해보니 산속에서 시간은 일상에서 부딪히는 속도와 다르고, 질량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혼자만의 시간이어설까? 침묵이란 말 없는 대화의 매력 혹은 깊이 때문일까?
잠깐의 몇 걸음이 최근의 몇 달이 되고, 10분 시간이 1년으로 다가오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독이며 물 한모금 목을 적시는 시간은 나의 일생이 되기도 한다.
<길을 내고 다듬는 것도 관리의 한 방법일듯... 최소의 간섭으로 만들어진 길이 오래갈까? 아예 편의를 위해 넓혀 놓은 길이 더 좋을까? 아무튼 길이란 많은 사람이 다녀야 더 윤택해지는 거 아닐까?>
역시 혼자 노니는 모든 행위에서 시간의 질량과 속도는 E=mc²이란 공식을 증명한다.
산새소리와 나뭇잎새에 묻은 바람, 그리고 그늘을 투과한 습한 빛만 존재한 숲속에서 1시간은
때론 인간의 생로병사와 버금가고, 심지어 46억년 지구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는 길고 긴 시간이 된다.
걷는 이에게도, 뛰는 이에게도, 자전거로 달리는 이에게도, 주변에서 멀어져 혼자 걷는 모든 이들에게
계량하지 못한 짧은 침묵 속에서 집중한 자기와의 대화는 그렇게 압축된 시간을 노닐게 만들어준다.
그 낯설고 마약 같은 달콤함이 있어 사람들은 건강을 이유삼아, 취미나 동호관계를 핑계 삼아,
때로는 헬스장으로, 때로는 산으로, 혹은 낚시대를 둘러매고, 공을 찾아 헤맬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바위들... 북미륵암에 다다르는 이 길에는 온통 돌길 - 아니 바위길이다... 그만큼 악산이고 암봉도 많은데다, 수해에 의해 끊임없이 사태가 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석질이나 석감이 꽤 부드럽게 느껴졌던...>
<사람이 지칠때면 늘 돌아보게 되고,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해 한다...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아야 우리는 안심을 하고,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일까? 이정표란 갈림길에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이 크지만, 이제 우리들은 남는 거리를 계량화해야만 만족한다... 층수가 표시되지 않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답답해 하는 마음을 달래주는 건, 땡 소리가 아니라 몇 층이라는 숫자이기 때문이지...>
무슨 관문도 아닌데 드문드문 바위가 열리고, 길이 뚫려 사람들의 행적이 스며드니
멀게만 느껴지던 북미륵암도 곧 지척일 듯 한상에 빠지게 만드는 숲길...
역시 목표가 있고 방향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의욕을 준다.
다만 몇 m를 걸어왔고, 몇 m가 남았는지 친절하게 써 붙인 이정표들이 침묵을 방해하지만.
계량되지 모든 것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철저한 상업적 자본주의 사회...
드러내지 않은 모든 것들을 무의하게 묻어버리는 너무나 대중적인 자본주의 사회...
말하지 않으면 애써 기억할 필요를 없게 만들어버리는 최첨단 현대 자본주의 사회...
그 속에서만 나는 내가 걸어왔던 거리와 방향을 계측하며 지친 몸을 추스르며 고개를 젖힌다.
북미륵암이다.
<이렇게 거대하고 매끄러운 바위는 언제 어디서 굴러 내려왔을까? 그리고 북미륵암 가는 길에는 이처럼 관문처럼 갈라진 바위틈새들이 몇번 나오고, 그중 가장 큰 또 제일 마지막 바위가 이거다... 생각해보니, 북미륵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도 이렇게 굴러 떨어진 바위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제 다 올라왔다... 북미륵암이다...^^ 습한 구름만 없었다면 북미륵암의 서쪽 저멀리로 진도가 보이고, 그 가운데는 강처럼 보이는 남해바다도 볼 수 있었을텐데... (오른쪽 위쪽으로 작은 섬이 보이기는 하지만) 가을쯤, 석양빛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장관이겠다 싶다...>
'전라도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3> 그 곳, 그 시간에 있어 더 아름답다...1307 (0) | 2013.07.25 |
---|---|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2> 국보308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1307 (0) | 2013.07.25 |
나주답사 3> 동점문, 남고문 - 나주읍성은 잘 복원된 것일까?...1211 (0) | 2012.11.22 |
나주답사 2> 원지반을 드러낸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을 바라보며...1211 (0) | 2012.11.20 |
나주답사 1> 문화재 복원이란 의미는 무엇일까?...1211 (0) | 2012.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