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도 여행...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3> 그 곳, 그 시간에 있어 더 아름답다...1307

 

 

 

3.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다시 생각하며...

 

 

 

 

 

 

 

 

6.

 

 

용화전 바로 옆 탑은 비교적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며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다.

돌출이 심한 기단부 갑석의 부연과 층단은 정교하지 못한 호형으로 가공되었고,

하층기단부, 상층기단부 면석은 정돈되지 못했으며, 일층몸돌도 4매의 판석으로 짜여 있다.

그래도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뭘까?

아마 대흥사 응진전앞 삼층석탑 등과 함께 소백산맥을 너머 옛 백제지역까지 파급된 몇 기 되지 않는

전형적 양식의 통일신라석탑 분포와 고려초기 변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일 거 같다.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301호... 기분 좋은 볕이다...>

 

 

<대흥사 응진전앞 삼층석탑/보물320호/높이 4.3m... 똑같은 규모에 같은 절에 있으면서도 미감은 완전히 다르다... 응진전 앞 삼층석탑이 단아하고 세련된 미감에 화사한 느낌을 갖춘 800년대 중반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특징을 완전히 갖췄다면, 불과 몇십년 편차를 가진 북미륵암탑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무튼 괜찮은 비례와 적당한 체감률을 갖추면서 조금은 낯설고 이채롭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과장이다 싶을 만큼 넓고 얇아진 지붕돌 때문이니 대흥사 응진전 앞 석탑과는 완전히 다른 미감이다.

만약 1~3층 지붕돌의 체감이 조금만 더 긴장감을 가졌다면 필히 정림사탑 계열 설명도 붙었을법한데

각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급히 줄어들면서 상승감과 경쾌함보다 안정감을 위주로 구성되면서

불편한 동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이 극단의 미감을 조화롭게 통일시켰다면, 이 탑은 타협과 절충의 산물이다.

그 차이가 아닐까?

 

 

<북미륵암 삼층석탑이 옆으로 활짝 날개를 펼쳤다면, 응진전앞 삼층석탑은 위쪽으로 날개를 올렸다... 남성적 여성적의 차이일까?>

<응진전앞 삼층석탑... 하층기단부는 탱주가 2개, 상층에는 1개가 있고, 상층기단부 갑석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돌출되었고 부연이 너무 약화 간화되었다... 층급받침은 4단으로 간소화됐고, 지붕돌에 비해 일층몸돌이 너무 작고, 3층 몸돌에 비해 노반은 너무 넓은 게 흠이다... 아무튼 소백산맥을 넘어 온 전형적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어떤 것들이 있지? 장성 보림사, 순천 금둔사, 보령 성주사, 구례 연곡사, 여주의 창리와 하리... 그 정도인가? 신라말 고려초로 이어지면 광주 춘궁리, 구례 태안사, 강진 금곡사, 안성의 죽산리와 죽림리, 그리고 양평 사나사... 비슷한 시기 소백산맥을 넘어온 삼층석탑들을 하나하나 비교해봐도 부분적인 특징만 닮았을 뿐, 대흥사 탑과 비슷한 미감은 없는 거 같다...> 

 

 

 

 

 

 

동탑에 비해 괴임이 극히 얇아졌고, 시대가 떨어진만큼 약화되고 흐트러진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가볍지만 불안하지 않은 안정감에 깊은 처마의 경쾌함은 충분히 살린 탑이다.

또한 특이한 것은 상륜부인데, 새 부재로 복원한 동탑의 노반도 이 탑을 모본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3층지붕돌 위 노반이 2단으로 구성됐다. 아무리 봐도 노반 위 부재는 복발이 아니며

내가 눈여겨보던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에서 보이던 양식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 어느 연간에는 노반을 2단으로 올리는 게 유행이었다는 말일까?

탑평리탑 조성시기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800년대 초반이고, 800년대 중후반부터 이런 양식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특별한 이유없이 이 두탑의 편년을 고려초기까지 내리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추정이 아닐까?

 

 

<노반이 분명 2단으로 구성됐지? 동삼층석탑도 그렇다... 이것도 유행이었을까?>

 

 

 

 

 

일층괴임의 약화, 지붕돌의 4단 층급받침, 기단부 갑석의 돌출 등은 이미 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변화다.

그리고 하층 기단부가 높아지지 않은채로 4.5m 전후 규모의 석탑들은 오히려 9세기말을 넘지 않는다.

또한 통일신라석탑의 느낌을 잃지 않고 양식적으로도 완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면

늦어도 900년 전후의 탑이 분명한데 굳이 고려초까지 내려갈 이유가 있을까?

통일신라 석탑의 완성도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면 대흥사 응진전 탑과 너무 차이가 나니까?

조성시기가 뭐 그리 큰 문제도 아니고, 통일신라말기나 고려초가 많은 시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양식적 전통과 미감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어 딴지를 걸어 본다.

 

 

<상층기단부 갑석을 보면 확실히 고려냄새도 나지만, 응진전 앞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상층기단부에는 탱주 1주를 양각하였다... 넓은 지붕돌이 백제풍을 풍기지만, 전체적 미감은 완전한 통일신라 미감이다...>

 

 

 

 

사실 파란하늘과 푸른 산하, 그리고 신선한 바람이 함께 하는 공간을 지키는 역할만으로 충분한데

이넘의 뜯어보고 분석하는 습관은 볼 때보다 쓸 때, 찍을 때보다 다시 정리할 때 더 많이 발동하면서,

이리 말도 길어지고 쓸데없는 생각들이 넘치는 것이니 이해하시기 바라고,

이 깊은 산중턱에 통일신라말기 삼층석탑 2기가 얌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다시 동호회분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남지 않은 필름을 갈아 끼워 용화전으로 들어갔다.

 

 

<이 볕에 상큼한 바람까지 분다면, 저 탑은 가볍게 날 수 있을까?>

 

 

 

 

 

 

 

7.

 

 

눈에 거슬리던 주존불의 어색함이 하나씩 사라진다.

하나가 아닌 전체, 부분이 함께 얽힌 전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장엄하고 활기찬 느낌이 살아난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 빛의 차이일까?

허걱거리는 기분에 치우친 감상이 진정되면서 찾은 여유 때문일까?

고맙고 다행스럽다면, 이 용화전은 음침하고 어두운 기존 전각을 헐어내고

내부공간을 포기하는 대신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2중구조로 편법을 써 만들었다.

마애불 바위를 비닐하우스 온실처럼 조립한 경량 철구조물로 씌워 유리로 마감해 빛이 투과되는 구조로 바꾼 것이다.

 

 

<다시 용화전 안으로 들어왔다... 저 불단만 치웠더라면...ㅉㅉ>

 

 

 

 

 

무엇보다 이 마애불이 국보로 존중받기에 충분한 이유는 규모에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반을 다듬어 이 깊은 산중에 무념무상의 정성으로 무생명 바위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또 하나를 이유를 꼽으라면, 전체적인 구성의 독창성과 조각과 회화의 탁월한 배합에 있지 않을까 싶다.

주존불과 중앙을 최대로 간소화하고, 주변을 공양비천상과 화염영기문으로 꽉 채운 구성은 정말 탁월하다.

그리고 어쩌면 디테일과 세련된 구성은 주존불 주변에서 더욱 살아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조금 부족하고 충만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700년대 중후반까지 통일신라 불교미술을 주도했던

이상주의적 사실주의를 최고로 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상적인 조화와 이상적인 상호,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디테일과 사실적인 비례...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한 때 지나간 유행에 불과했던 양식이다.

중국의 성당양식도 700년대 초중반을 넘어서지 못했고, 일본의 덴표양식도 비슷한 시기에서 멈췄으며,

통일신라의 이상주의적 사실주의도 800년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 후, 시대정신과 양식적 변화는 또 다른 미감과 유행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걸 변호하고 찬양했을 터.

현재가 최고의 기준도 아니지만, 과거가 최선의 궁극도 아닌데 나는 나도 모르게 하나의 기준을 잡고 있었다.

 

 

 

 

 

 

 

 

 

호불호와 미추, 성속의 기준도 나만의 주관이거나 구도자의 완성을 부정하려는 의도적 착각인지도 모른다.

이상적 사실주의라는 것도 한편 생각하면 엘리트주의에 대한 선망이며,

결과적 목적론을 보편주의로 대체한 전체주의적 경향이거나, 국가주의를 근거로

가변적이고 양면적인 사물을 나만의 잣대를 들이밀며 교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려는 편협함 때문일 수 있다.

이미 종교의 이상향이란 시비와 선악,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님에도 말이다.

그럼으로 인해 나는 무실체와 무아적 개방성에 입각한 불교의 상대주의적인 평화와 화해, 통섭의 길을 놓쳤다.

이미 이 마애불을 다듬고 조각한 구도자의 불심은, 바라보고 선망하는 불특정 자아들과

구원의 길에서 이타적이며 대승적 화해를 열어 놓았거늘, 나는 왜 나만의 기준으로 그 여지를 좁혔던 것일까?

 

 

<중앙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벌어진 앙련과 복련... 어디서 봤지?>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의 석불대좌/국보58호... 그래~ 장곡사였지... 장곡사편 글에서도 소개했지만, 복련에 이렇게 기교를 부린 것도 흥미로운데, 그 세련됨과 완벽한 조화는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다...>  

<또 이렇게 좌우방향으로 벌어져 가는 것도 하나의 양식적 편년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월광사 원랑선사탑비(890년)의 비석받침에 있는 복련도 이와 같은 양식이다... >

 

 

 

 

 

최근의 내 심지가 그러할까?

희망과 비전이란 맥을 미뤄놓았거나 놓치면서 움추러든 내 시야의 또 다른 장벽이 세워져서일까?

어쩌면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은 종교의 세속화된 권력에서 스스로 멀어져,

정말 실천적이며 호소력 깊은, 그래서 더 대중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성스러움을 완성한 거 아닐까?

무엇보다 이 마애불의 진정한 힘은 박제화 되지 않은 생동감과 친근한 호소력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부족함은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으로 채우고, 말하지 않은 것은 바라보는 이들의 염원으로 완성되는,

그래서 넘치지 않고, 철저히 상대적이며 객관적인 거리에서 대화를 가능케 하는 너그러운 포용을 갖췄다.

 

 

<마애여래좌상 부분... 주존불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매우 여성스럽다는 느낌이 컸다... 이런 육감을 표현하려면 20대는 그렇고, 50대 이상이면 힘이 없었을 거 같고,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평상심이 잘 갈무리된 중성성을 선호하는 마음을 소유한 석공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저 간절한 구원의 손길은 깊은 산속에만 머물렀다고 표현되는 것은 아니었을 터... 이 마애불을 조각한 석공은 인생의 쓴맛 단맛을 모두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지...>  

<투박하면서도 간결하고, 대충 그어 놓은듯 거칠지만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이 살아있고, 시원시원한듯 싶으면서도 순간을 포착한 생동감도 넘치는 게 이 공양상들의 매력이 아닐지...>

 

 

 

 

 

모처럼 국보다운 국보를 만난 기분이다.

그래~ 이런 맛이 있어 국보는 또 다른 차원과 경지를 열어주는 영감의 촉매일지도 모르지.

자아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면서(觀), 그칠 줄 아는 것(止)...

그게 원효가 말하고 통일신라가 추구하고자 했던 구원이자 완성일지 모르지.

깊은 양감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주존불과 치밀하고 세련된 회화적 느낌의 비천상들...

그 절묘한 조화와 통일이 바위를 꽉 채우고 내 마음을 채운다.

용화전을 꽉 채운 것들이 다시 두륜산 넓은 조망과 시선을 따라 다시 텅 비워지고,

그렇게 향기가 되고 여운으로 남는다면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더 많은 것들을 이 산속에서 얻었는지 모른다.

 

 

<보면 볼수록 마음을 꽉 채우는 충만감이 있다...> 

 

<앞글 안내도를 참고하면, 오른쪽 봉우리 기슭에 북미륵암이 자리잡고 잇다...>

 

 

 

 

 

산을 내려오는 발길에 생각이 머물 여지는 없다. 항상...

우리 부모님들처럼 혹은 우리들 삶이 그렇듯, 오르는 길목의 많은 상념들은 내리막 길에서 재생되지 않는다.

똑 같은 거리와 똑 같은 길, 우리가 지나쳤던 그 길을 다시 되돌아 걷는데도 생각은 똑 같지 않다.

길었던 시간도 짧아지고, 다가오는 상념의 무게들도 가볍기 그지없다.

시간의 속도가 일상으로 돌아오고, 시간의 질량도 깊이를 잃어버린다.

평상으로 돌아가고, 현재로 복귀하는 비용을 우리는 그렇게 치루는지도 모르고,

또 느려지는 무게와 깊이를 찾기 위해 또 다시 여행의 길목을 서성일지도 모르고...

언젠간~ 언젠가는 하며 마음에 새겨두었던,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두륜산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상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곳에 있기 때문이겠지...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바라보는 곳은 이 방향, 서쪽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엔 그렇게 이 넓은 공간까지 채우는 너그러움으로 다가오니, 마애불은 말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채워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져보기에는 너무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공양상... 이 조각상이 가장 오랫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또 다른 간절함을 그렸기 때문이 아닐런지...> 

<대흥사 연리지... 저 공양상의 염원도 이 연리지를 투과하는 빛처럼 영원히 투명할 듯 싶은데...>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어쩌면 그 곳에, 지금의 지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보인 건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