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고문, 동점문, 영금문... 나주읍성의 복원은 잘 된 것일까?
- 화성을 비롯한 여러 성곽건축의 비교를 중심으로...
3-1.
동점문(東漸門)... 동쪽으로 나가는 문이라...
하긴 조선시대 한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대문은 방향을 중심으로 이름을 붙이기 마련이다.
<나주읍성 동점문...>
우리의 선조들이 단순해서 편하게 부르기 위해서 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천하사방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 이해해도 결코 틀리지 않을 것(물론 고구려, 백제가 가졌던 천하사방 중심사상과는 그 내용과 깊이가 다르다)이다.
왜냐하면 임진왜란과 명나라 멸망을 전후해 겪은 병자호란 이후부터 이땅의 사대부들은 유학의 정통이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믿었으니, 조선의 정체성이 아닌 중화의 정체성으로 세상사물을 이해하려했다. 주나라의 고향이 오랑캐에 짓밟혔다 생각했던 조선 사대부인지라, 소중화의 정통성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지는 세상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에서도 나타났으니, 동쪽 바다는 동해가 되고, 남쪽은 남해가 되듯이 동서남북 방향의 사대문은 당연히 동문, 서문 등이 될 수밖에 없었지.(이점을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유학을 평가하면서 사대주의 사상이나, 관념적 예학으로만 치부하고 있지만, 조선 사대부들에게 중화사상은 사대주의가 아니라 성스런 의무요 본질이었다)
<서울 흥인지문... 보물1호다... 공식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대문이라 부르지? 본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거나 또다른 애칭처럼 공용된 이름이 있다면, 그건 편하다는 거 외에 우리들이 공감하는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사진은 오래된 거다...^^>
아무튼 나주읍성의 동문 이름은 동점문... 금시초문이었다.
나주에도 성이 있었나?^^
후후~ 생각해보면 우습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다는 얼지 않는다’는 상식은, ‘부동항’ 즉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동쪽으로 진출했던 러시아와 대륙진출을 꾀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충돌이 빚어낸 1904년 동해상에서의 ‘러일전쟁’이란 역사적 사실에서 무참히 깨진다. 즉 상식과 과학적 진실은 별개란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삼국쟁패 과정에도 수백개 城(성) 중 하나로 나주읍성은 존재했을 것이고, 더 멀리가면 익산 등과 함께 마한의 근거지로, 후삼국시대 왕건이 견훤을 도모할 역전의 승부수가 이곳 나주였음을 생각하면 城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비역사적인데, 나는 지금까지 나주에 성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나주 동점문... 앞의 반월처럼 생긴 부분을 옹성이라 부른다...>
게다가 전봉준을 잡아 한성으로 압송한 그 출발지가 나주읍성이었음에도, 나는 나주에 성이 존재했을 거라는 역사적 실체를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했다(그 흔적이 금성관 내에 파손된 채 남아있는 금성토평비다).
왜 그랬을까?
때때로 눈으로 보지 못하고 충분한 역사인식과 상상력이 없다면, 인간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허상을 진실로 왜곡시키는, 너무나 편리한 뇌를 이성이라 치장하며 마음을 닫아버리는 거 같다.
<나주읍성의 객사인 금성관 안에 있는 금성토평비... 아래쪽(↓)을 보면 비석이 고의적으로 파손된 체 방치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호불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도적인 훼손이 역사의 사실을 왜곡시킬 수는 없지 않을까?>
3-1-1. 참고 : 나주성의 공식명칭은 무엇일까?
그건 그렇고 나주답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하나 있다.
‘나주성’이 맞을까? ‘나주읍성’이 맞을까?^^ 이 명칭에서부터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기에 바로잡는 의미에서 잠깐 몇가지만 메모하고자 한다.
처음엔 읍면동의 행정체계가 만들어진 이후에 각지역 마을에 있는 걸 편의상 ‘邑城(읍성)’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가, 혹시 ‘산성’의 반대말로 생긴 게 아닐까도 생각했었지. 그리고 그 시초는 일제 강점기쯤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平地(평지)성’과 일부 ‘평산성’(이 명칭은 지형에 따른 3가지 분류방법에 따른 것으로 나머지 하나가 ‘山城(산성)’이다) 등 179개를 읍성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화성... 화성은 산성일까? 평산성일까? 그리고 화성(=수원성)은 읍성이기도 하지만, 행재성(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이경의 궁성)이기도 하다...>
내가 이상하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행정체계인 ‘도(관찰사)-부(부윤)-대도호부(부사)-목(목사;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생각해 볼까?)-도호부-군(군수;지금도 사용되고 있지?!)-현(현령(종5품), 현감(종6품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또’가 현감이지?!)’에는 邑(읍)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학계(?)에서도 언제부터 읍성이란 명칭이 정착되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읍성이란 명칭은 이미 조선초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다는 말이니, 읍성을 산성에 반대되거나 읍면동의 행정체계에서 편의상 부른 게 아니라 고유명사였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거 같다.
그리고 邑城(읍성)의 반대말은 山城(산성)이 아니라 ‘都城(도성)’이다. 즉 宗廟(종묘)와 社稷(사직)이 있으면(조선시대를 다룬 TV 사극에서 신하들이 읍소하던 장면에 빠짐없이 등장하던 “종묘사직을... ...”란 대사의 종묘와 사직(단)이 바로 그것이다) 도성이고, 종묘와 사직을 모시지 않는 곳의 성들은 모두 읍성이라 불렀다는 말이다.
<경복궁은 도성 내에 있는 궁성이다... 즉 한성(서울)을 통털어 도성이라 부르고, 그 내부에 왕이 거처하는 경복궁은 궁성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고려시대까지는 목책성(행주산성), 토성(백제 풍납토성, 신라 반월성, 고려 천리장성, 조선 한양토성 등)이 주류를 이루다가(토석혼축성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성(남한산성, 공산성 등), 전축성(강화산성, 화성)이 만들어졌고, 오늘날 유구가 남아있는 고창읍성, 해미읍성, 동래읍성, 낙안읍성, 진주읍성 등 대부분 읍성들은 여말선초 왜구 침략에 대비한 해안지방에 주로 축성, 보강되었다고 한다.
<사극 광개토태왕에서... 진짜 고구려의 성들은 이런 목책성 구조였을까? 드라마 제작 예산 때문이었을까? 객관적인 고증의 결과일까?>
<공주의 공산성... 구조적으로는 토석혼축성(외부는 석성, 내부는 토성)이 될 거고, 지형상 분류는 평산성이 되겠지?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읍성의 형태... 물론 백제시대에는 도성이고 궁성이었겠지...>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런 읍성의 형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그렇다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는 말인가??) 우리나라 고유의 양식이고 형태라 하니 고유명사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해서 앞으로는 <나주읍성>을 공식명칭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읍성이라 할 수 있는 화성... 행정과 생활과 국방의 기능이 겸비되어 있고, 일부 궁성의 역할까지 포괄한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이런 걸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
<로마 포로임페리얼리... 참고로 고대 로마에도 성벽(우리 읍성 개념처럼)이 있었다. 4m가 넘는 두터운 두께의 성벽이... 그러나 그 성벽이 무너지게 된 것은 로마가 함락되어서가 아니라, 도시 확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허울어졌다...>
<이태리 피렌체... 화성의 공심돈과 비슷한 기능이었으리라 싶어 올려본다... 그 성벽 사진을 아무리 찾아도 없기도 하고...^^ 로마는 완전히 평지고, 피렌체는 주변 여건과 어우러졌다는 차이가 있지만...>
3-2.
햇살아, 저 성벽에 한 번 올라가봐~~
굳이 공성용 사다리가 필요 할까 싶을 정도로 성곽이 낮아 보이기도 하지만
적당히 다듬어놓은 막돌들로 쌓은 거 같아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성벽을 오르는데 어렵지 않을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이래서 도둑이라도 지켜질까?^^ 동점문을 보며 깜짝 놀래 과거의 복원이 현재에 얼마나 유용한가 긍정하다가, 이 대목에서쯤에서부터 내가 삐틀어지기 시작했다...ㅠㅠㅎㅎ>
전쟁과 방어를 위한 마지노선이나 다름없던 성벽을 이렇게 쌓았다면 이건 올바른 복원이 아니리라. 게다가 조선인들의 순박함을 미화(?)시키기 위해 그랬는지, 가공을 최소화한 막돌을 적당히(?)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은 “성벽/성곽의 역사적 복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실망했던 부분... 물론 이게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겠다... 오랜 세월 풍화되고, 갖은 민란과 왜구들 때문에 깨어지고, 동학 농민군들의 피로 문드러지고... 어느 시점의 복원인가도 중요하지만 성벽/성곽 보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면 과연 읍성의 역할은 어디까지였을까? 역으로 이런 점들이 끊이지 않는 민란을 재촉하지는 않았을까? ㅎㅎ 어느덧 나도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ㅎㅎㅎ>
이런 생각은 비단 동점문에서만 아니라, 나주읍성의 주문이었을 남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 듯 생각에 숭례문(서울 남대문)의 축소판 같은 남고문은 꼭 모형(?)을 보는 듯한, 조금 심하게는 말한다면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주관적인 표현일까?
동점문과 남고문은 수려하거나, 단아하거나... 그리고 너무 작거나...
그래도 전주와 함께 조선8도를 이루는 전라(전주+나주)도의 명칭이 연원된 게 벌써 600여년이 넘었는데 나주의 성문 규모가 이 정도에 불과했을까?
<나주읍성의 주문이라 할 수 있는 남고문... 건실한 느낌도 있지만 너무 단정하다는 느낌이 자꾸 거슬렸다...>
<서울 남대문... 화마로 훼손되기 얼마전... 1400년대 전후 만들어졌으니 조선 성들의 모본이 되었겠지만 남고문은 성문의 복원이 아닌, 조선건축의 복원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닐까 싶었다...>
하긴 조선팔도라 이름 붙여진 조선초부터 전라도의 감영은 전주에 있었고, 1896년에야 북도와 남도로 정비되면서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나주가 다시 부각되었다지만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모습이다. 혹시 전라남도는 나주를 비롯 광주와 영암, 영광, 순천, 제주와 함께 조금은 이완된 연합적 체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전 세계에 유례없는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던 조선에서, 또한 상하 수직적 권위에 익숙한 유교적 지배체계에서 한 지방의 정치적 행정적 패주의 위용을 드러내기에 나주읍성의 성문들은 너무 점잖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남고문과 화성 팔달문의 비교... 읍성과 행재성의 차이일까? 규모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이층전각의 지붕이 크냐 작냐에 따라, 건축은 권위적이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기도 한다... 남고문은 경쾌함과 상승감을 살리려다 성문의 권위를 놓쳐버렸다... 그리고 결정적 차이는 남고문은 팔작지붕이고 팔달문은 우진각 지붕이라는 점... 참고로 광화문도 우진각지붕 구조다...>
<화성 팔달문... 최근 사진과 16년전 사진... 측면에서 보면 반원형의 옹성이 제대로 보인다... 그리고 가분수처럼 보이는 지붕도...>
물론 1800년대 전후 만들어진 경기도의 중심지 수원 화성도 성곽둘레가 5.5km 남짓... 훨씬 전에 만들어진 나주읍성의 규모가 3.7km라면 작은 것만은 아니다 싶지만, 그 모습이 1913년까지 유지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나주읍성의 규모는 나의 상상과는 별개였음이 분명하다.
3-3.
그렇더라도 현재의 규모와 성벽의 마감... 나주읍성의 남문과 동문은 올바르게 복원된 것일까?
이웃 일본의 현존하는 성들을 보신 분들은 최소 두가지에 놀랄 것이다. 하나는 중국이나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유럽의 장원경제와 비슷한 구조)에 놀라고, 또 하나는 그 규모(해당시기의 세계최대 규모)에...
<오사카성 모형... 해자와 내성과 외성, 그리고 천수각이 있는... 완전한 행정과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유럽 중세성들보다 규모가 넓다...>
<오사카성은 1590년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성으로 대략 400여년 일본 정치의 중심지로 우리나라의 도성같은 역할을 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세키가하라 전쟁이후 쇼군 칭호를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당시 일본의 변방이나 다름없는 에도성(도쿄)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인 '에도막부' 시대를 열었다...>
<1614년 이미 대세는 기울었지만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은 함락되지 않았지... 오랜 기간 대치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꾀임에 빠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은 이 해자를 흙으로 메우게 되고, 결국 오사카성은 함락된다...>
그리고 조금 더 꼼꼼히 보셨다면 그 성벽을 쌓기 위해 채석된 석재의 크기와 정교함, 그리고 구조적 안정감에 건축적 미감이 살아난 부드러운 곡선을 갖춘 석축의 위용에 한번 더 놀랄지도 모르겠다. 해자가 있든 없든 어지간히 숙련된 군사나 도둑들도 결코 오르기 힘들 거 같이 잘 다듬어진 매끄러운 모습에 말이다.
<천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무력으로 점령하지 못했던 오사카성...그럴만 한가?>
<오사카성 천수각 하부의 석축기단부... 성벽이든 기단부든 똑같은 방식과 미감이다...>
굳이 일본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원 화성만 보아도 그렇다. 석축은 석축대로, 전돌은 전돌대로, 벽돌은 벽돌대로 정교한 가공과 합리적인 배치, 그리고 공수의 전술들이 읽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보면 성과 성문, 그리고 성벽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 답안들로 잘 복원(일본의 오사카성 등은 2차대전 이후에 복원된 것 중 하나다)되어 있다.
<수원 화성... 가장 모범적인 복원이 아닐까 싶다...>
<화성의 성곽은 석재만 있는 게 아니다... 이처럼 벽돌로 만든 부분도 있다... 성곽이 갖춰야할 기능적인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석재가 가질 수 없는 질감과 미려한 곡선, 한마디로 아름다운 건축의 향연을 느끼게도 만든다...>
그런데 나주읍성의 동문인 동점문과 정문이나 다름없는 남고문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다.
그냥 잘 지어진 목조건축과 적당한 높이의 성벽, 그리고 충분할 거라 생각되지 않는 옹성 구조...
나주읍성에 불량한(?) 마음과 살상 무기를 들고 와야 했던 이들은 누구였을까?
어쩔 때는 견훤과 대치하던 왕건의 병사들이었을 것이고, 탐관오리들을 향해 죽창을 들어야만 했을 분노한 민초들과, 호시탐탐 조선 백성들의 재물과 인명을 노리던 왜적들이었을텐데, 이 정도의 크기와 규모의 나주읍성이었다면 성내 백성과 군인들은 온전히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수 있었을까?
<나주읍성 서성문 자리에 있는 영금문... 비단이 비친다는 의미일까? 나주평야를 물들인 드넓은 곡창지대가 비단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참 한가롭지?^^ 여기에서 옹성이 복원되어 있다... 근데 저 사이로 마차랑 큰 수레들은 지나다닐 수 있었을까? 기마병은 아예 없었을까?>
성은 성답게, 성문은 성문답게, 성벽은 성벽답게 복원되었어야 옳다.
상대방이 그 누구이든 성내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해야하고, 성을 침탈하는 이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어야만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은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고, 고립된 상태에서는 힘을 비축해야만 하는 진지일 수도 있고, 공격을 위한 최선봉의 거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주가 마한과 백제를 뛰어넘어 기록된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보고 시대부터 후삼국 시대의 왕건, 그리고 최영과 이성계가 활약했던 여말선초와 민초들의 민란에 뒤이은 동학농민군의 함성을 그려보기에 나주읍성 남고문과 동점문은 너무 <건축적으로만 복원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남고문, 동점문, 영금문... 굳이 팔작지붕으로 복원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건축적 미관 보다는 성문이라는 목적과 기능이 우선했어야하지 않았을까?>
3-4.
왜 이렇게 나는 나주읍성의 규모와 크기에 집착하지?
잠시 동점문 옹성 위에서 나주읍성의 바깥쪽을 바라본다.
흙먼지 자욱하게 성을 향해 달려왔을 두 부류의 군대를 상상해 본다.
하나는 영산강을 통해 나주평야 깊숙이 침투했을 왜적들과, 또 하나는 분노의 죽창에 피로감이 역력한 동학농민군들이다... 어쩌면 나주읍성은 꼭 그만한 용도 외에는 더 높이, 더 견고할 필요가 없었을까?
중국과의 국경을 생각하면 나주는 전방도 후방도 아닌 전쟁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세상(그랬으니 가장 유력한 귀향과 유배의 고장이 되었겠지)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마병들이 휩쓸고 지나갈 길도 아니었고, 임진왜란 당시 화력과 기동력을 갖춘 수만명의 조총부대가 일시에 밀어닥칠 길목에 있지도 않는 곳... 거기에 권력암투의 정점에 서 본적도 없는 나주지방은 어쩌다 기습적으로 요동쳤을 민란과 왜적들에 긴급히 대항할 수 있는 체계에 만족할 수 있던 지리적 위치가 아니었을까?
<나주읍성 영금문... 나주로 유배를 왔던 정도전은 여기에서 고려말기 백성들의 실생활과 행정적 폐단을 몸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그 기록에 나주읍성 등을 남겼다...>
어쩌면 꼭 그만한 크기가 나주읍성의 필요충분조건이었을 거 같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전쟁과 당대의 전쟁 규모와 스케일이 달랐음을 부정함으로 인한 혼란은 아닐까?
아니면 나의 뇌리에 각인된 십자군 전쟁이나, 반지의 제왕 같은 중세유럽풍의 공성전의 이미지 때문일까?
여기에 덧붙여 최근 대국굴기를 위해 만든 장대한 스케일의 삼국지식 중국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그러고보니 나는 나주읍성, 또는 나주읍성과 비슷한 유형의 성에서 벌어졌을 전투장면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윈저성... 영국의 도성이나 다름없는 윈저성... 유럽여행을 다녀오신 분들도 많이 보셨겠지만 지금도 그들의 복원공사는 진행 중이다... 물론 이 사진은 20년 전 거지만...^^>
<반지의 제왕 3편 - '왕의 귀환'에 나오는 인간세계의 중심지, '미나스 티리스 성'... 어쩌면 유럽인들이 상상하던 가장 이상적인 성의 모습을 이렇게 영화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동경을 가졌던 나의 의식도...^^
유럽의 성들은 한눈으로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성에서 성밖을 넓게 바라볼 수 있을 뿐이지... 아무리 찾아봐도 성 전체 윤곽과 볼륨을 드러낸 사진이 없어 이걸로 대체한다...^^>
기껏 사극에서 나오는 전투장면이란 산성을 중심으로 한 작은 스케일의 공성장면에 불과하고, 정작 이런 평야지방의 성에서는 어떤 식으로 전투가 치러졌는지 그려지지 않는다. 진법은 있었는지, 기마병의 활용도는 높았는지, 궁수와 포와 창 등 전술적 배치는? 그리고 숙련된 병사와 불시에 동원된 백성들의 위계는 어땠는지...(그런 의미에서 영화 ‘황산벌’이나 ‘평양성’ 그리고 TV 사극의 전투장면에 나오는 공성전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있지?)
<영화 '평양성'에서... 수, 당나라와 함께 천하패권을 좌우하던 고구려의 도성 평양성의 규모가 이정도였을까?? 1900년대 1,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였던 전무후무한 전쟁(로마군이나 십자군 전쟁, 칭기스칸의 정복전쟁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 바로 고수전쟁이고, 그 최전방에 요동성, 안시성, 평양성 등이 있었는데 평양성의 성곽이 이 정도였을까? 나는 왜 만족하지 못하지???^^>
<TV사극 광개토태왕에서 요동성... 이런 산성이었을까? 만주 벌판을 생각하면 얼른 수긍하기 힘들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1400년대 후반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에는 전란에 준비해야 할 조선전체 병사의 군량미로 10만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660년대 요동성의 일년 군량미가 10만석이었다... 참고로 당시 요동성의 성벽 높이는 30m였다는데...>
결국 이야기가 없고, 경험이 단절된 외향의 복원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게 아닐까?
궁핍한 상상력과 단절된 이야기가 자꾸만 나주읍성문들을 건축쪽으로만, 전시행정으로만 보이게 만든다.
나는 알게 모르게 조합된 이미지와 세뇌된 상상력으로 역사적 사실이었을지 모를 실체를 바라보며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다. 이게 우리의 스케일인데, 이게 우리의 규모인데, 그리고 이 복원이 진실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의 성들이 이런 목책성이었을까?^^ 그들의 토목기술과 건축기술의 실체를 봐 온 나로서는 절대 수긍하기 힘들다... 문제는 이런 영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결정하고 역사의 실체를 왜곡할지도 모른다는 점... 내가 너무 진지했지??ㅎㅎ>
3-5.
사실 1913년, 일제 강점기에 헐리기 시작한 나주읍성의 자료는 그리 부족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기록은 모르겠지만 사진도 남아있었을 것이고(전봉준이 나주읍성에서 압송되던 사진까지 있으니, 그 배경이 된 나주읍성과 성문들에 대한 기록도 없지 않았을테고...) 아직 당대의 생존자들과 증언도 참조했을테니 지금의 복원이 크게 틀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또 성문 옆에 화재에 대비한 소화전도 있고, 성문이 갖춰야 할 최소의 양식인 옹성구조도 만들어져 있고, 곱게 단장한 화려한 단청도 나쁘지 않고, 늦게서야 가장 비싸게 토지를 보상해서 공들인 복원과정도 충분히 칭찬해야할지 모르겠다.
<나주읍성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동학농민혁명의 대미는 이곳이었는지도...>
<나주읍성 동점문 옆에 설치된 소화전... 좋아 보인다...>
<나주읍성 영금문... 길 한가운데 있는 걸로 보면 성문에는 길이 관통한 게 맞을 거라는 생각...^^ 또 그 주변은 토지 보상비를 들여 확보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다행인 것은 성문의 원지반까지 드러내서 복원했다는 점... 그런 점들도 칭찬하고 싶다... 광화문 복원 때부터 그랬지?>
그러나 성과 궐, 권력과 정치와 전쟁의 무대를 복원하는 것은 건축적 문화재 복원과는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된다. 거기에는 권위적 위계가 있고, 수직적 명령이 있고, 정복되지 않을 견고함과 적과 대치한다는 긴장감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화성 서장대와 훈련장... 성은 일차적 목적은 군사적 기능이 컸을 것... 그리고 원할한 행정집행을 위한 체계적인 건축이 다음이었을 거라는 거... 세번째가 시전 등 경제활동의 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마도 당대에는 그외 일반 백성들의 편의시설을 갖추는 서비스 정신은 없을었테고...^^>
물론 성과 궐이 평화의 상징이 되고, 과학기술의 표본과 예술성이 가미된 건축적 공간으로 재탄생하면서 우리에게 사랑받는 역사적 실체로 읽힐 수도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진짜 평화와 자유의 세상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성과 궐에 벽(壁)이 쌓여야할 이유가 없다. 이미 민심이 떠난 정치와 경제상황에서는 아무리 높고, 견고한 성(城)과 성벽(城壁)도 백성들에 의해 쉽게 무너지고 함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화성의 부분... 다양한 기능과 목적의 시설들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구석구석 말이다...>
그래서 성과 궐의 복원은 반(反)문화적이고, 반(反)건축적이며, 반(反)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정치와 경제의 산물이며, 권력과 전쟁의 최첨병 도구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치와 향락, 권위주의와 계급적 지배구조의 산물이 反(반)문화적인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들은 분명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향도 없고 건축에 치우친 나주읍성의 남고문과 동점문 복원이 틀렸던지, 내 생각이 잘못됐든지 둘 중하나는 고쳐져야만 한다.
<화성 공심돈... 이런 경계의 기능이 갖춰져야 제대로 된 성곽이 아닐지...>
또한 그런 의도의 복원이 아니라면 반대의 측면에서 邑城(읍성)의 제대로 된 복원방향도 결정되어야 한다.
유럽/일본의 성들처럼 지배자와 병사들만이 군림하는 성도 아니고, 중국/고구려의 성들처럼 특별히 선택된 계급들만 상주할 수 있는 성이 아닌, 조금 더 개방적이고, 조금 덜 폐쇄적이었던 조선의 읍성들은 그에 걸맞는 특징을 충분히 살리지 않으면 백화점 나열식이거나 실체가 불분명한 비빔밥이 될 공산이 크지 않을까 싶다.
지역적 공감대와 문화가 살아있고, 고유의 사상과 전통의 기술이 융화된 경제, 정치, 거주의 공간이었을 읍성을 그리지 못한 게 아쉽다는 말이다.
읍성의 복원은 스케일과 지배의 양식, 건축적 외향이 아닌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체계, 시장경제의 유기적 관리가 가능한 도시 공동체의 복원을 목표로 삼아야 되지 않을까?
<화성의 뛰어난 점은 개별적인 건축들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하나하나가 모아져 근대 도시의 모든 기능을 갖추면서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던 조선 유학의 사상적 체계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우리의 도시 계획 수준은 이미 1800년대에 신도시를 만들 줄 알았다...>
<화성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동점문을 돌아 남고문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
남고문(南顧門)... 오를 수 없지만 남고문을 통해 지난 100여년간 들어선 나주 구시가지를 바라본다.
그리고 돌아보다, 응시하다, 관찰하다, 반성하다, 방문하다, 마음에 새기다는 의미의 顧(고)를 음미해본다.
<나주읍성 남고문... 顧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나주읍성 동점문... 漸의 의미도...>
<나주읍성 영금문... 映錦의 의미까지...>
동점문... 동쪽의 끝을 향해 동해와 태평양을 넘어가는 역발산 기개세와 진취적 기상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남고문과 영금문을 바라보면 평화로운 영산강과 풍요로운 나주평야를 응시하면서도 권력의 수동적인 지킴과 목사나 향관들의 주관적인 관찰에 머물렀던 게 나주읍성의 한계는 아니었을까? 나주지역의 스케일일까? 조선 유학의 한계였을까?
나는 무엇을 돌아보며 관찰하고 마음에 새겨야 제대로 된 나주읍성의 실체를 느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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