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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6> 2)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은? 국보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양식과 배경...1305

 

 

 

 

 

 

 

4.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은 무엇일까? 미륵사지 서탑일까? 정림사지 오층석탑일까?

  -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미륵사지 서탑 세부양식 비교를 통해 본 추론 

 

 

그리고 마지막 정림사탑과 미륵사탑의 양식적 변화 비교에서 어떤 게 더 시원적인 형태인가 하는 점이다. 두탑의 가장 큰 차이는 정림사탑이 목탑을 번안한 석탑이라면, 미륵사탑은 석재로 만든 목탑 즉 모목석탑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했다는 원칙을 확인하기 위해서 완벽한 모목석탑인 미륵사탑이 최초의 위치로 설정되어야 한다. 사실 이를 근거로 정림사탑이 시원이고 미륵사탑이 두번째라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우현 선생이 반론을 제기했고, 해방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신라석탑의 변천을 봐도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에서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변화는 갑자기(!)(우현 선생은 이걸 풀기 위해 경주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이 감은사탑보다 먼저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계보를 이어가는데,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건 나중에 살펴보자) 발생한 것이다.

 

 

<감은사탑과 나원리탑... 어느 게 먼저 만들어졌을까? 고유섭 선생은 탑리탑에서 감은사로 과정에는 필히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리하게 나원리탑을 감은사보다 선행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결구방식은 감은사탑이 목조식인데 반해, 나원리탑은 누적식이다... 내 생각에 우현선생은 5층에서 3층으로 변화한 계기를 찾고, 신라석탑은 5층이 먼저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나원리탑을 끼워 놓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마찬가지로 목탑에서 정림사탑이 갑자기 만들어진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선생의 지적처럼 탑의 발전이란 결코 직선적이거나 평면적으로 획일화 될 수 없고, 현존하는 모든 탑들을 발생기-발전기-전성기-쇠퇴기란 공식에 끼워 맞추는 게 미술사의 흐름도 아닐 것이다. 때문에 미륵사탑이 모목석탑이기 때문에, 정림사탑이 미륵사탑보다 먼저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은 논리적인 비약이며, 가정을 결론으로 대체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추정이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역으로 정림사탑이 미륵사탑보다 목탑이나 목조건축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이제부터 그걸 찾아보려 한다.

 

 

<정림사탑과 미륵사탑의 일층몸돌... 단순한데서 복잡한 것으로가 맞을까?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가 맞을까? ㅎㅎㅎ 지금까지 정설은 복잡했었기 때문에 단순해질 수 있었다는 말의 반복이었다...^^>

<스크랩... 미륵사탑은 부분 부분을 찍어 놓은 게 없어 이렇게 스크랩 할 수밖에 없다... 미적감감을 동원해서는 해독이 불가했던, 특히 백제의 미감을 찾을 수 없던 나의 답사여행 초기(90년대)엔 세부 사진을 찍을 생각자체를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지만...ㅎㅎ>

 

 

미륵사탑이 시원이라는 추정들에 하나씩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시대적 배경과 寺名(사명)검토, 그리고 이론적 논거에 대해 살펴봤다. 이젠 석탑의 양식적 측면에서 하나씩 살펴보자. 내 생각이지만 정림사탑이 미륵사탑보다 앞설 수 있는 양식적 증거가 오히려 더욱 선명하다. 그 하나가 지붕돌 층급받침이고, 또 하나는 처마끝의 반전, 그리고 석탑의 체감률이다. 먼저 지금까지 미륵사탑의 층급받침이 간화, 경화되어서 정림사탑식의 층급받침이 탄생했다고 하지만, 그 반대로 처음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 시작해 나중에 복잡해졌다라는 설명이 오히려 편하다. 당시 만들어진 호류지 오중탑을 보더라도 백제의 하앙구조는, 오늘날 사찰의 일주문이나 1600년대 만들어진 통도사나 무량사 극락전처럼 복잡하고 화려했던 것이 아니라 담백하고 간결했다.

 

<법륭사 오중탑... 당시 백제인들이 만든 목탑은 주심포 양식에 하앙구조였다... 때문에 요즘 생각하는 포작은 노출되지 않고 하앙구조의 단면만 보였을 것이다...>

<화암사 극락전 구조도... 1605년 건축된 화암사 극락전에는 하앙구조 밑으로 포작구조가 노출된다... 이는 법륭사 오중탑이 만들어진 때로부터 1,000년 후 일이다...>

<수덕사 대웅전... 1200년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수덕사 대웅전에서도 석탑의 층급받침과 같은 구조의 포작은 겉으로 노출되지 않았다... 그냥 일층몸체와 '창방', 그리고 잘해야 '뜬장혀'나 '별장혀'만 보였을 뿐이다... 만약 위(↑) 법륭사 오중탑의 '별장혀'가 석탑의 층급받침으로 형상화 됐다면, 나의 지금까지 상식은 바뀔 수밖에 없다. 다만, 별장혀는 입체가 아닌 평면적 선에 불과하며, 법륭사에서 3단에 불과하던 별장혀가 보다 중층화된 형식으로 나타나면서 뜬장혀가 2단이상으로 나타난 것은 송대(1,100년대)건축에서 부터라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

<수덕사 대웅전... 석탑의 층급받침을 포작구조가 아닌 '뜬장혀'나 '주목도리' 등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당시 깊은 처마와 주심포 양식이 주류였다면, 지붕처마 하부의 '주목도리'나 무량수전의 '외출목도리'를 보려면 이렇게 올려볼 때나 가능한 일이다... 90년대 수덕사 대웅전은 늘 이렇게 올려봐야만 할 정도로 아늑한 앞마당을 갖추고 있었지. 그래서 대웅전 맛배지붕이 더 장중해 보였고...>

<불국사 무설전... 1973년 건축된 무설전도 주심포 양식이기 때문에 별도의 포작이 없다... 즉 어느시대에 지어졌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구조인가가 우선 확인되어야 하는데, 600년 전후의 백제건축엔 하앙구조에 주심포 양식이 주류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석탑의 층급받침이 당대 목조건축의 포작을 차용했다면, 1200년대 건축된 고려의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과 1390년대 숭례문의 다포계 공포구조의 비교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듯이, 6~700년대 조성된 법륭사 오중탑 하앙구조와 같이 주심포 양식의 층급받침을 3~5단으로 복잡하게 번안할 이유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층급받침이 간결하고 단순할수록 고건축에 속하고, 층급받침을 세분화하면서 다단으로 만드는 건 후대의 일이 되며, 그건 지붕돌 처마를 깊고 높게 만들기 위해 백제의 하앙구조나 주심포양식이 아닌 다른 포작이 개발되었거나, 혹은 석탑이 정형화되면서 화려한 장엄을 표현하기 위해 전탑구조를 차용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역으로 석탑이나 전탑(처마를 빼내기 위해 구조적으로 층급을 나눌 수밖에 없는 구조)의 영향을 받아 목조건축에서도 포작이 발전하게 된 것은 아닐까?

 

 

<무량사 극락전... 1650년을 전후한 조선중기 다포작의 공포구조를 엿볼 수 있다... 즉 이렇게 포작구조가 겉으로 노출되어 석탑의 층급받침을 표현하려면 동시대에도 이런 건축양식들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있었을까?>

<직지사 일주문... 우리 머리속에 들어있는 지붕처마를 받치고 있는 포작구조는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번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목조건축의 포작구조를 석탑에서 차용하여 층급받침으로 형상화했다는 말은 잘못됐거나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부분(예전 신세동으로 익숙했는데 공식명칭이 바뀌었다고 해서...^^)... 당시 목탑이라 할 수 있는 법륭사탑을 보니, 통일신라 석탑의 층급받침은 목조건축보다 전탑에서 간화, 경화, 약화됐다는 생각이 더 들더라는 말이다...>

 

 

 

결국 처음 정림사탑을 만들 때는 당시 목탑 공포(하앙)구조처럼 매우 간략한 형태로 층급받침을 표현했지만, 수십년이 지나 처마를 깊고 길게 빼내기 위해(석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구조적으로 해결한 것이 층급받침이며, 이를 실험적으로 정형화하여 3단이상의 중층구조로 만든 것이 미륵사탑의 층급받침일 수 있다는 말이다.정림사탑에서 창방+두꺼운 부재 모서리를 斜角(사각)으로 딴 주두식 1.5단으로 시작했다가, 미륵사탑에서 3~4단으로 추가 변형되었고, 왕궁리탑에서 3단으로, 신라에 와서 5단으로 정형화 된 다음 800년대 중반 이후 3~4단으로 변하게 된다. 결국 층급받침만 살펴보면 백제는 5층 석탑에 3단 층급받침인데 반해, 신라는 3층 석탑에 5단 층급받침을 정형화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게 발생기-발전기-전성기-쇠퇴기로 유형화되는 미술사학의 보편적 흐름에도 타당하다. 정림사탑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말이다(층급받침에 대한 글도 같이 첨부하려 했는데 너무 긴 거 같아 별도 챕터로 소개하고자 한다).

 

 

<정림사탑 층급받침... 밑에는 목조건축처럼 창방을 만들고, 그 위로는 하앙구조의 단면을 굵고 단순하게 표현했다... 이 말이 맞을려나?ㅎㅎ>

<미륵사탑 층급받침... 탑의 규모에 걸맞게 처마를 길게 빼내려는데 정림사탑식의 층급받침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백제건축의 처마는 하앙구조를 써야 할 정도로 깊었잖아... 고민과 실험의 결과는 뜬장혀나 별장혀를 차용하여 층급받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야 지붕돌이 처지는 것을 막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길게 뺄 수 있으니까...>

<왕궁리탑 층급받침... 사실 미륵사탑에서는 층급받침 외에도, 몸돌 탱주들이 돌출되면서 별개의 창방식 횡선부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몸돌을 단순화한 왕궁리에서는 별도의 창방이 아예 생략되고, 3단의 층급받침으로 통일된다. 백제식 3단 층급받침이 정형화 되는 순간이다...> 

<감은사탑 층급받침... 그러나 신라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미 분황사 전탑에서 경험한 바도 있고, 특히 탑리리탑에서 3단과 5단을 실험한 바도 있어 층급받침의 정형화가 필요했다... 백제식의 얇은 지붕돌을 허용하지 않았던 신라인들은 새로운 지붕돌을 고안하게 됐고, 백제의 5층을 포기하는 대신, 5단의 층급받침을 정형화했다... 나는 그 출발이 나원리탑이 아니라 감은사/고선사탑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양식적 검토는 지붕돌 처마 끝부분 처리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목조건축을 석재로 만든다는 게 쉬운 발상이겠는가?! 그 무모한 도전의 완결태가 미륵사탑이라면, 그 출발이 정림사탑이라는 게 이 글의 주제다. 왜냐하면 파편화된 부재와 복잡한 결구도 문제지만, 아무래도 가장 어려운 점이 곡선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처마의 곡선이다. 그러면 과연 당대 백제 목조건축물의 처마도 그랬을까? 호류지 오중탑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아니었다 ! 조선말기 최고의 건축 기술자들이 만든 경복궁과 기념비각에서 보이는 '안허리'가 백제건축에서 보이지 않음은 당연한 결과다. 왜냐하면 시각적 불편함을 보정하려는 적극적인 건축의지가 부족했다기보다 발달하기 이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 우리 눈에 익숙한 지붕선은 단순히 조선이 선호했던 미감 뿐만 아니라 과학적 요구에 의해서도 개선되어야만 했다... 즉 시각의 보정이다. 물론 이 점도 나중에 첨언하기로 하고...>

<기념비각... 처마의 '안허리'를 설명하기 위해 살짝 옆에서 찍은 건데, 지붕의 처마는 정사각형이 아니라, 저렇게 안으로 들어가 있다... 처마의 선이 휘어져 보이거나,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건축적 고려 때문이다...>

<안허리, 안쏠림, 귀솟음... 그외 엔타시스를 비롯한 시각보정 장치들이 있지만, 석탑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귀솟음은 석탑 지붕돌의 반전으로 적극 수용됐고, 초기 석탑에는 돌출된 기둥이 민흘림으로 처리되거나, 정림사탑처럼 일층몸돌 자체를 안쏠림으로 만들었다... 특히 안쏠림과 엔타시스 등은 동양건축만이 아니라 파르테논 신전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정림사탑은 석탑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목조건축의 미감을 최대로 수용했다...>

 

 

 

또는 그런 점들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호류지 오중탑처럼 뻗뻗하고 긴장감 넘친 미감을 선호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절단면(목조건축의 겹처마나, 막새와 서까래까지를 포함한 부분으로, 석탑 지붕돌에서는 낙수면과 지붕돌 하부가 만나는 부분이다)을 직선으로 처리하다가, 모서리 전각부분에서만 지붕돌의 하부부터 반전이 시작되는 정림사, 미륵사, 왕궁리 석탑들은 당대의 목조건축 처마를 가장 충실히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전각 하부까지 반전을 도모했다는 점이 석탑/석등/부도 등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백제계 석조예술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정림사탑 처마선... 아래(↓) 법륭사 오중탑과 비교해 보길...>

<법륭사 오중탑 처마선... 내 눈에는 비슷하게 보이는데...^^>

<건천궁/백제 문화단지 재현... 당시 건축들은 꼭 이만큼 직선이었고, 또 꼭 이만큼 귀솟음을 두었을 것이다... 그들이 선호했던 미감이거나, 당시 기술로 표현 가능한 최대치였을지도 모르지만...>

<기념비각 처마선... 이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처마선일 것이다... 그리고 이 처마선과 포작의 노출이 고려시대 석탑의 지붕돌 전각의 과장된 반전과 낮고 깊게 숨은 층급받침의 비밀이 아닐런지...>

 

 

그리고 목조건축의 처마곡선과 기와의 막새 부분을 석탑에서 표현한 게 절단면과 전각의 반전이다. 이 지붕돌의 전각과 반전처리를 시대별 역순으로 본다면, 신라석탑 지붕돌은 절단면과 전각 하부가 완전히 직선이다. 시각의 보정은 낙수면에서의 반전을 통해 해소했다. 그에 반해 639년 직후 왕궁리탑 절단면은 거의 일직선으로 오다가, 전각 맨 끝부분에서만 들려있다. 그러나 639년경 미륵사탑은 절단면을 직선으로 만들다가 마지막 지붕돌 전각의 두께를 변화시켜 반전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전에 만들어진 정림사탑은 지붕돌의 1/10지점부터 완만하게 반전이 시작된다.

 

<다보탑 상층기단부 지붕돌 처마선... 통일신라시대부터 백제로 거꾸로 가보면, 이렇게 신라의 석탑 지붕돌 절단면의 하부와 전각부분은 완전히 직선이다... 그게 신라계 석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다보탑 상층기단 지붕돌 앙시도... 앙시도란 위에서 투영된 구조를 도면화 한 건데, 다보탑 지붕돌의 크기는 무려 4.3m나 된다... 그걸 저렇게 두부 자르듯 직선으로 깨끗히 잘랐다...>

<왕궁리탑 처마선... 왕궁리탑은 완전한 직선에 맨 끝부분 전각에만 반전을 두었다... 백제석탑 지붕돌의 완성이자 끝이 되었지... 아래 사진은 나중 기단부 설명할 때 쓰려고 아끼려 했는데, 전각부분이 잘 나타나는 것 같아 할 수없이 먼저 올린다...^^> 

 

 

 

정림사탑이 당시 목조건축의 처마선을 가장 사실에 가깝게 구현했다면, 미륵사탑은 긴 처마선이 처지게 보이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이고 세련되게 지붕돌과 절단면의 두께까지 조정하면서 반전을 살려냈다는 말이 되고, 왕궁리탑은 세탑 중 가장 석재건축의 지붕돌답게 직선으로 처리하면서 끝부분에만 반전을 표현했다는 말이다. 결국 석탑의 지붕돌 절단면은 목조건축의 영향을 벗어날수록 직선으로 정형화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중 정림사탑은 그 변화가 시작되기 전, 당시 목탑에 가장 가까운 곡선을 갖추었기 때문에 최초의 석탑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미륵사탑 일층 지붕돌 처마선... 한변이 12m가 넘지만, 절단면은 직선으로 잘 갈무리 됐다... 마지막 반전이 세련되게 보이지?>

<미륵사탑 지붕돌 해체 후... 정확한 수치가 없어 장담할 수 없지만, 낙수면과 지붕돌 하부가 만나는 이 지점을 절단면이라 부르고 싶은데, 코너 전각 부분을 보다 두툼하게 처리하여 반전을 완만하게 처리했음이 보인다... 그리고 낙수면이 만나는 부분은 정혜사지 등에서 보이는 내림마루 즉 우동의 흔적이 전혀없다... 목조건축의 마루선이나 망새나 망와 등을 표현할 의지가 전혀 없음도 확인할 수 있다...> 

 <정림사탑 절단면과 전각부분 반전... 끝 부분을 자세히보면 같은 두께로 나가다가, 전각부위에서 급격한 반전이 시도되고 있다... 우동 혹은 마루선과 망와의 표현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지만, 미륵사탑 보다 훨씬 강조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정림사탑...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다시 탑의 처마와 지붕돌을 보면 미륵사탑이나 왕궁리탑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즉 정림사탑은 목조건축의 미감과 이미지까지 살리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체감이다. 역시 기준은 호류지 오중탑이다. 왜냐하면 호류지탑은 쇼토쿠태자대인 600~607년 사이에 만들어진 목탑으로 미륵사탑보다 최소 30년 이전 백제목탑(금당내부의 삼존불 등에는 제작자인 백제출신들 이름까지 새겨져있다)이다. 그러면 호류지 오중탑과 정림사탑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35cm가 1척인 고려(고구려)척을 사용한 정림사탑은, 이미 각종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지만 7척을 기본단위로 한 등할적 원리(1층 = 2+5층 = 3+4층 높이와 너비가 같은데, 각각 7척이다)로 만들어진 매우 수리적이고 과학적 비례를 갖춘 탑이다. 그런데 이 정림사탑의 비례는 호류지탑과 완벽하게 일치(등할적 원리뿐만 아니라, 1+2+3+4+5층 너비 합 = 탑 전체 높이까지 일치)한다. 우연일까?

 

 

<정림사탑과 법륭사탑의 비례와 체감 비교도/NAVER 스크랩... 이 그림 외에도 기단부와 높이의 비례 등이 나온 그림이 있는데 찾지를 못했다...ㅠㅠ 그랬으면 더 좋았을텐데...>

 

 

물론 각층의 체감비례나 등할적 원리 수용여부는 시대적 연관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타의 조건 등이 충족된다면, 체감비례는 관련성뿐만 아니라 당대의 표준 혹은 전형화 된 규준으로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즉 시대적배경과 양식적 선후 조건까지 고려한다면 500년대 중후반부터 600년대 초반 만들어진 백제의 탑은 이 비례를 선호했을 뿐만 아니라, 목탑과 석탑 제작의 기본 모듈로 정형화/전형화 돼있었다는 말이다. 실제 호류지 오중탑 이후 미륵사탑과 왕궁리탑에서 이 비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630년대에는 이미 이런 미감과 기준이 사라지거나 바뀌었다(백제멸망으로 여지가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7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림사탑은 호류지와 동일 시점(600년대 초)이거나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게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일부 역류현상도 있을 수 있지만, 백제멸망 이후까지 백제 문물이 온전히 일본에 전수됐다는 보편적 흐름을 고려하면, 정림사탑이 607년 만들어진 호류지탑보다 빠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말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내가 본래 이런 사각 프레임은 좋아하지 않는데, 아래(↓) 사진과 비교하려고 할 수 없이...^^ 아무튼 위 NAVER 그림처럼 일층몸돌만 빼고 비교해 보시길...>

 

 

 

 

단, 이 가정에서 우려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법륭사의 화재와 중건, 즉 법륭사는 670년 화재로 전소되고, 708년 중건됐다는 점이다. 즉 지금의 오중탑과 금당은 708년 건축물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되지?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서는 수많은 거짓말이 새끼를 쳐야하듯, 가정은 수많은 가정을 낳는다?^^ 두가지만 검토해보자. 하나는 복원의 문제고, 또 하나는 전소의 상태다. 오늘날 황룡사탑 복원도 그렇지만, 황룡사탑은 현대적 미감의 누각목탑건축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원형복원을 전제한다. 광화문이나 남대문 복원이 그렇듯 규격도 미감도 원형을 찾아야 제대로 된 의미가 부여되니까 시간이 걸리는 거고. 즉 불과 40여년 후의 복원이 원형을 크게 훼손했거나 변했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법륭사(호류지) 서원 들어가는 길...>

<670년 화재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렇게 새까맣게 탔을까? ㅋㅋ>

 

 

 

 

그런데 한편에서는 법륭사 오중탑이 중건건축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600년대 초반 건축보다 양식적으로 퇴화 되었다거나, 고구려 건축구조와 신라인의 기술이 가미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상황은 어땠을까? 백제멸망과 함께 휘몰아치는 일본내부의 체제정비는 진신의 난(672년) 등 국가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극심한 권력투쟁을 동반하게 되지만, 헤이죠코 천도(710년)와 장원제도입(743년) 등을 통해 안정되기 시작한다. 또한 일본의 신라정벌과 본토수복을 위한 절치부심(오죽했으면 문무왕이 동해바다에 묻혔겠는가)도 754년을 정점으로 사그라들고(762년 4만 신라정벌군 준비를 최후로 포기하는데, 이때가 경덕왕대니 백제멸망 100년 후 이야기다), 고서기(712년), 일본서기(720년)를 통해 일본의 정통성을 재정립하면서 헤이안코(교토)천도(794년) 이후 신라정벌은 국가정책에서 완전히 잊혀진다(왜구의 시작은 생계를 앞세운 해적활동이 아니라, 국가적 감정을 앞세운 군사적 행동이었다).

 

즉 헤이죠코와 헤이안코로의 천도가 완결되기 전까지 신라나 당과의 관개개선을 통한 기술제휴 방식으로 추가될 수 있는 후기 건축적 요소가 끼어들 틈이 없었고, 기록에도 남아있지만 법륭사 화재이후 복원과 대체부지 선정에 고심(승려들이 생활하기 어렸을 뿐일까? 완전 폐허가 됐기 때문일까?)하면서 백제승과 백제인들이 3곳의 사찰을 새로 조성하는 등 백제의 건축과 불교미술 영향은 유지되고 있었으니, 백제식 원형복구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고 지속됐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역으로 708년 건축에까지 고구려식 결구방식이 남아있다는 말은 초기 건축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법륭사 금당... 이 건축물도 오중탑과 똑같은 시기에 만들어지고 중건된 것이다...>

<법륭사 금당 벽화 중 일광보살도... 월광보살과 함께 우산을 쓰고 있지... 담징 作일까? 傳 담징作 일까?>

 

 

 

그리고 두 번째가 전소 상태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금당벽화는 610년 담징에 의해 그려졌다. 그런데 전소됐었다면 708년 중건했을 때도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온전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 점 때문에 금당벽화는 담징作이 아니라 傳담징이란 부연이 붙지만, 내 생각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원형이 남아있었다는 말이 된다. 앞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구려 미술은 한중일 삼국만이 아니라 당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 그랬으니 금당벽화를 운강석굴, 석굴암과 함께 동아시아 3대 걸작으로 꼽았겠지.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670년 화재와 708년 중건으로 인한 원형훼손은 심각하지 않았거나, 완벽한 복원이 가능한 복합적인 근거들이 남아있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 두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아도 오중탑의 비례와 체감 등은 화재 이전인 607년 완공된 원형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즉 법륭사 화재 이후 708년 중건은 신축이 아니며, 중수에 가까운 보수거나, 원형이 유지된 중건이란 의미가 클 수도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오중탑의 비례와 체감이 607년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결국 정림사탑의 체감과 비례를 참조하는데 여전히 유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3) 최초이면서 시원적 형태에 담긴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원형질

 

이제 정림사탑이 미륵사탑 보다 앞섰다고 말할 수 있을까? 500년대 중반 백제와 일본의 관계에서부터 거꾸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동성왕과 무령왕 이후 성왕과 위덕왕대 백제의 상황은, 잠재력이 무궁했기 때문이 아니라 산만했던 역량이 결집되었기 때문에 석탑조형은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축소된 지형만큼 변화를 완결했어야 할 시기였다. 사실 강력한 중앙집권체계와 대제국을 경영할 정복국가에 걸 맞는 사상을 지니기에 백제는 너무 상업적이었고, 철저히 현실적이었던 한계가 있다. 게다가 유교의 체계와 불교의 정신이 있었지만, 도교의 허허로움도 충분히 보장되어 있었지. 그래서 찾았던 구실이 사비로의 천도(538년)와 일본의 재구성이었다고 보는데, 일본(야마토정권)에서 불교를 공인한 시점도 공교롭게 538년이다. 그러나 백제이름으로 지은 일본 최초의 사찰 飛鳥寺(비조사)는 50년 후인 588년에 이르러 이루어지고, 600년대 초 다시 익산천도를 검토해야만 했다. 이는 그 기간 동안 내부체제와 일본을 완전히 재정비하지 못한 백제의 한계를 반증하는 것이며(결국 590년대부터 일본은 서서히 자생력을 갖추며 백제와 동거하는데, 그 출발이 쇼토쿠태자의 집권이다, 이 때 飛鳥寺(아스카데라)에서부터 시작해 40여개 사찰이 동시에 창건되면서 태동하는 일본문화를 나라시대, 아스카문화라 부른다). 500년대 중후반, 백제는 보다 확고하게 변했어야 했지만 내가 보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예전에 올렸던 사진들인데, 그 포스팅까지 찾는 분이 없을 거 같아 다시 올린다...^^ 아래 법륭사 동원의 종각(역시 국보다) 하부의 기단부와 실루엣을 비교해 보려 올린다...>

 

 

 

물론 그 이후의 진행이야 우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생략하지만, 한편으론 백제시대 정림사탑 비밀의 단서도 찾을 수 있었다. 즉 600년대 아스카문화가 만든 인류문화유산 법륭사 오중탑 보존 덕분이다. 내 생각이지만 비조사의 목탑역시 정림사탑 비례로 만들어졌을 거라 생각한다. 어딘지 낯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처마선과 체감을 가진 나라시대 일본의 목탑들은 정림사탑의 등할적 원리가 모듈로 조형됐기 때문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륵사탑보다 정림사탑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단순할 수밖에 없는 층급받침 구조와 부드럽게 반전된 처마의 곡선도 남겨져 있다. 완전히 중층적 누적식으로 쌓아 올린 신라식 석탑이 아니라 가구식 결구로 조립된 백제석탑의 원시적 형태에 말이다. 때문에 신라의 석탑이나 미륵사탑과의 비교만이 아니라 일본 목탑을 통해 정림사탑의 체감과 양식, 그리고 미감을 검토했던 것이다.

 

 

 

 

사실 정림사탑과 미륵사탑 중 어느 것이 최초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석탑의 최고 정점에 놓인 석가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두 탑뿐만 아니라 분황사탑과 탑리리탑이란 시원적 형태를 같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사탑을 제외한 세 탑은 각각의 완결적 형태로서 독자적인 계보를 가지고 시대를 초월해 아류를 재생산해내는 생명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최초의 석탑보다 중요한 것은 시원적인 양식의 탑임에 이견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석탑을 찾고자 하는데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석탑의 원형질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기 때문이다. 즉 최초이기 때문에 최후의 변천까지를 담보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림사탑은 석탑이 탄생해 발전하고 전형화 되고 전성기를 맞이한 다음 쇠퇴하는 모든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모목석탑에서 출발해, 석탑의 질감을 살리면서, 간화, 경화, 공예화, 장식화, 모형화 될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거 말이다. 이에 반해 미륵사탑은 유일한 실험으로서 목탑을 석탑으로 바꿔나간 백제인들의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유물로 남겼고, 적극적인 실험과 징검다리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 했을 뿐, 최초의 석탑으로서 최후의 석탑으로 변화할 수 경향성까지 내포하고 있지 못하다.

 

 

<미륵사탑 복원도... 자세히보면 해체전 6층 지붕돌 층급받침은 4단이었는데, 복원도에서는 전층 층급받침을 3단으로 그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6층부터 4단 층급받침을 사용한 이유가 시각적 보정을 위한 장치라 생각했는데, 복원은 그렇게 안 될 모양이다...^^>

 

 

또한 지금까지 미륵사탑이 최초의 석탑으로 평가받는 근거는 결구방식 등 구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 때문이다. 즉 지극히 실증적이고 건축적 측면이 강조된 시선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탑은 전체 결구를 목탑식으로 재현 했을뿐, 세부처리와 마감에서는 정림사탑보다 석재탑에 맞게 부재를 재조정하면서 층급받침을 세분하여 장식적 요소를 가미했을 뿐만 아니라, 지붕돌 전각부분을 두텁게 가공하면서 반전을 시도하거나, 층이 올라갈수록 층급받침을 추가하여 상승감을 구현, 착시를 교정하는 등 진일보한 면들도 많다(물론 우리에게 시대와 사상적 미감을 담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전체적인 미감과 실루엣이 목탑을 따라가지도 재현하지도 못한 한계와 복원된 동탑의 이미지 때문이지만). 그에 반해 정림사탑은 몸돌의 안쏠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당시의 목탑 처마선과 공포구조를 간략하게 표현하는 등 목탑의 미감을 훨씬 충실하게 재현했다. 더군다나 두툼한 지대석을 깔고 시작하는 번안석탑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도 명확히 드러냈지. 즉 석탑으로서의 구조와 한계뿐만 아니라, 목탑과 석탑의 전체적인 이미지와 미감의 관점에서도 시원적 형태는 검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사찰의 수요와 공급측면을 검토해 볼까? 정림사탑은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었고, 1탑 1금당식 가람배치에 보다 많은 대중들을 끌어 들이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능사 재현/백제문화단지... 왜냐하면 1탑1금당식 가람배치에 목탑이 들어가면 이렇게 좁고 답답한 구조가 된다... 정림사지와 동시대로 동일한 구조가 가질 수 있는 대중적 포용, 열린공간을 위해 목탑은 무조건 선호할 수만은 없었다. 즉 사찰구조와 대중적 수요를 고려한 변화가 필요했는데, 그 때가 500년 중반이라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흐름과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른 사찰건축의 수요와 공급측면도 주요한 검토대상인데, 사비로 천도할 당시 백제불교는, 계율종 중심에서 아미타사상과 미륵사상, 관음사상을 통해 더 이상 사찰은 귀족을 중심으로 학술과 외교적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급속히 대중화 되고 있었다. 즉 왕실이나 귀족가문들이 선호하는 원찰형식의 소규모 사찰들이 사비천도와 함께 급속히 유행했을 뿐 아니라, 사찰내부로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한 넉넉한 공간이 필요해 사찰 전체면적의 1/12씩이 차지하던 목탑보다, 1/100의 면적으로도 만족할 작은 규모와 시공기간을 단축할 석탑 수요는 절대적으로 증가했다고 생각한다(중국에까지 寺塔(사탑)이 많다고 소문난 백제이니만큼, 천도 후 13만호가 넘는 사비에는 얼마나 많은 사찰과 탑이 조성됐겠는가? 그러나 사비지역에 사료가 남아있는 절터는 대부분 법왕(599년) 이후로 7개에 불과(익산으로 분산)하지만,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사지 등 사료기록은 없음에도 주요한 유구와 유물들이 발견된 곳만 21곳이상 이듯, 대부분 사찰은 500년대 조성된 걸로 보인다. 즉 천도와 함께 진행된 사비지역의 사탑 건립은 신라나 저자(삼국사기의 김부식, 삼국유사의 일연)의 필요에 의해 고의로 누락될 수도 있었지만, 한편 기록에 남길 필요가 없을 만큼 일상적이었고 급속하게 증가했다는 말도 된다. 1탑1금당으로 간략화 되면서 7당가람제가 정착된 시기도 이때가 아닐까 싶다). 또한 그때는 이미 불상들이 본격적으로 불교의 상징을 탑과 나눠 갖던 때였고, 정림사지 규모의 사찰과 석탑은 이에 충실히 조응했다. 나는 그때가 타력신앙이 부흥하던 538년 천도부터 500년대 중후반이라고 보지, 600년대 초반이나 중반까지 늦춰보질 않는다.

 

 

<저 정도 공간에 사람들이 들어갔다면 이런(↓) 느낌이었겠지?>

 

 

 

최초의 석탑이 정림사탑임을 주장하기 위해 길게 돌아온 면이 없지 않다. 미륵사탑과 관련된 삼국유사와 서동요설화를 비롯, 왕궁리탑을 설명하기 위해 관세음응험기를 끌어들이고, 심지어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태두인 우현선생까지 동원한데다, 어줍잖게 백제와 일본의 정치지형 변화와 석탑의 양식, 그리고 불교문화의 수요공급까지 고찰하려 했으니 욕심이 많았음은 인정한다.^^ 다만 미륵사탑, 왕궁리탑, 법륭사탑 등을 보면서 왜 정림사탑이 최초가 아닐까? 하고 시작했던 고민을 한번은 정리하고 싶었기에, 시대배경과 불교의 흐름 등을 폭넓게 들추게 됐다.

 

사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백제는 너무 초라했었지. 신라엔 금관과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승자의 노래가 있었고, 고구려는 유물은 없었어도 광할한 만주와 무적철기병이란 아이콘이 너무 선명한데 반해, 백제는 정림사탑 하나로 ‘우아한 미’를 모두 감당해야 했으니까. 그 후 서산마애불 ‘온화한 미소’와 무령왕릉의 ‘대외교류’와, 금동대향로의 ‘사상적 깊이’ 등이 추가되고 일본 속 백제문물의 관련성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외연이 확장고 문화강국으로 위상을 높이게 되면서 조금씩 위안을 삼았었다. 정림사탑에 담긴 그 시대적 배경 전부를 읽고 싶었던 욕심과 내 언어로 풀고 싶었던 오랜(?) 생각 때문에 길어진 것이다...^^

 

 

        <서산 마애불...>

 

 

우리는 때때로 불교교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성철스님의 한마디에 감동하면서도, 정작 사물을 보는 눈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개념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돈오돈수, 돈오점수... 깨달음은 갑자기 일어난다는 말을 숱하게 들으면서도, 원효의 파격보다는 권력지향적이던 자장과 의상의 체계적 교육과 성실함을 더 신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백제에서 석탑이, 그것도 가장 세련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탑 중 하나인 정림사탑이 ‘갑자기’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말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고의 사리장엄구로 꼽히는 감은사탑의 사리갖춤은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으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만들어지지 못했다. 또한 신라석탑의 시원이라 꼽히는 탑리리 오층석탑은 아무런 양식적 연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창조된 감은사와 고선사 삼층석탑의 돌연변이 같은 탄생을 문제 삼지 않는다.

 

왜 삼층석탑이 만들어졌을까?의 내용은 사라지고 이전의 연원이 있었다는 주장의 증명에는 인색하면서 목탑의 번안에서 출발했다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 정림사탑은 갑자기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의 문화를 활용하지 못하고, 선진문화라고 생각하는 중국과 고구려에서만 연원을 찾아 남방전래설/북방전래설에 매달리고, 그게 안 되니까 석재로 만든 목탑-미륵사탑을 통해 설명해야 안심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 것들을 벗어나, ‘頓悟(돈오)’, 갑자기 시대의 명품이 만들어졌다는 말의 의미를 석탑조형에서 되살려봤다. 정림사탑이 미륵사탑보다 먼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지금까지 이유들은 합당할까? 나는 감은사/고선사탑 정도의 수준과 품격을 갖춘 완성태, 최초의 모습이면서도 완결적인 모습을 만들 수 있는 준비가 600년대 중후반 신라에 잠재되어 있었듯이, 정림사탑을 만들 수 있는 역량과 의지가 500년대 중후반 백제에는 충분히 잠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라고 믿는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여기까지 오는데 참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