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8> 신라석탑의 시원 - 1) 국보30호 분황사 석탑...1305

 

 

 

 

 

 

 

6. 신라시대 석탑의 시원 - 분황사 석탑, 탑리리 오층석탑

 

 

   1)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 정복국가 의지를 표방한 신라 호국불교의 기념비

 

이제 백제에서 만들어진 석탑이 신라에 접목되는 과정과 양식적인 변화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시대배경부터 살펴볼까? 500년대 중반부터 영토확장을 통해 고구려 백제와 대립/교류하며 성장해온 신라는, 6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 백제 양국의 영향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는다. 그것이 중국과의 직접 교류였고, 이는 500년대말부터 수-당으로 이어지는 통일된 제국이 중국에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중국의 분열 속에서 고구려, 백제가 성장했다면, 중국의 통일은 역으로 고구려, 백제의 축소와 위협요인이 되었고, 신라에게는 양국을 압박할 기회가 됐다). 이런 노력은 선덕여왕대에 이르러 자장의 등장과 함께 가속되고, 태종무열왕 김춘추에 이르면 관제와 통치구조는 물론 복식과 궁중예법까지 신라는 완전히 당나라 풍으로 변하게 된다. 물론 이는 당나라의 강요가 아닌, 신라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이 중요하지만...

 

 

<첨성대/국보31호/선덕여왕 640년 전후/경주... 농경사회에서 사회적 생산의 기반이 되는 역력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지배층이 갖춰야할 최소, 최고의 지식이었다... 선덕여왕대의 치세는 단지 불교문화의 적극적 수용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때 조성한 게 백제 기술자 아비지와 200여 목수를 초빙하여 세운 황룡사 구층목탑(기록과 유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라의 목탑은 11사, 14기(사천왕사지(679년), 망덕사지(685년), 보문사지(883년)가 쌍목탑)였는데, 황룡사 이전까지 흥륜사지, 천주사지, 영묘사지 등 최소 3기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인데, 이 시기를 전후해 기림사와 태화사에도 목탑을 세웠던 걸 보면 선덕여왕대까지 신라는 목탑 조성이 불교장엄의 중심이었던 거 같다.

 

<황룡사 구층 목탑 복원도/마음으로 그린 꿈 역사로 이어지고/수원화성박물관 간...>

 

 

또한 황룡사 구층탑이 특별히 의미가 있었던 건, ①백제의 기술이 가미되어 지표식 심초석이 일반화 됐다는 점(544년으로 추정되는 흥륜사지 목탑은 고구려 건축기법에 지하식 심초석 방식이었다), ②계단을 통해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누각식 목탑건축이라는 점이라 생각된다. 

 

  

<황룡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백제 기술자 아비지와 200여 목공이 동원되었는데 오른쪽 같이 기름진 중국식 미감이었을까?

아니면 왼쪽 미륵사지 목탑 복원 모형같은 날씬한 미감이었을까? 예전에 올린 글 참조...>

 

 

 

또한 ③규모가 커지면서 넓어진 내부공간을 채우기 위해 제작된 불상 소재도 변화하게 되는데, 진흙으로 만든 소조상과 목조불상에 이어 분황사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규모를 갖춘 금동불과 석불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점이 이때부터가 아닐까(그 이전에는 소형금동불을 생산공급할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본다) 생각된다.

 

 

<분황사 금동 약사여래입상/조선 영조 1774년... 당시 분황사에는 이보다 3배 이상 큰 금동불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나는 황룡사에 이어 분황사가 만들어진 때부터 다양한 크기와 양식의 금동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업적 체계가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만한 크기를 만들려면 충분한 기술이 축적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니까...>

 

 

 

소백산맥이라는 지형적 한계 때문에 형성될 수밖에 없는 보수성과 폐쇄성을 극복하고, 갖은 부침과 대립속에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문물을 직간접적으로 수용/흡수하면서, 당나라의 문화가 직수입되는 구조까지 갖춰간다는 것은 신라에게 엄청난 변화였다. 또한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유역까지 확장된 영토를 통치 체계화 시켰다는 것은, 외부문물을 내부에서 소화하고 재해석하여 이를 총체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준비가 성숙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덕여왕은 그 응축된 힘을 대내외적으로 표출시킬 줄 아는 군주였다.

 

 

<560~570년경 만들어진 백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600년대 초반 만들어진 신라의 경주 송화산 석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기술적 측면이나 기교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60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신라의 미륵보살 신앙은 사회의 분위기까지 바꾸게 된다...>

 

 

 

또한 숙명적 라이벌이었던 백제에서는 거대한 목탑과 석탑을 조성하여 미륵군주와 미륵세상을 표방하는 걸 용납할 상황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여성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그만이 미륵보살의 화신이 되어야 신라의 지배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욕구와 뒷받침이 있었기에 미륵사목탑 보다 높은 황룡사목탑과 미륵사석탑에 대비할 분황사 전탑 조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백제와 동시에 그런 대규모 불사를 일으킬 재력도 준비됐다. 영토확장의 결과다. 즉 선덕여왕의 목탑과 전탑 조형은 열등감의 해소가 아니라 새로운 모색으로서 국력 과시의 일환이었다. 황룡사목탑을 통해 630~64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기로 하고 이제 분황사 석탑에 대해 알아보자.

 

 

<봉화 북지리 석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보물997호/경북대학교 박물관... 600년대 초반 혹은 670년 전후 두가지 설이 있는데, 나는 600년대 초반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현재 높이가 1.6m 정도로 상반신이 훼손되지 않았을 경우 2.6m에 이르는 거상이다... 양식적으로 아래 반가사유상과 가장 유사하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83호/국립중앙박물관... 백제와 신라 제작설이 팽팽하다... 아무튼 당대 백제와 신라의 군주는

미륵보살을 자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백제는 현재의 안정을 위해, 신라는 미래를 향한 변혁을 위해... 그 차이가 크지 않았을까?>

 

 

 

 

   2)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고구려 장례문화와 친당적 불탑조성문화의 절충

 

그러면 왜 분황사탑이 신라최초의 석탑이면서 시원적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기단부에서부터 하나씩 뜯어볼까? ①높지 않은 일단 기단부가 있는데, 일층몸돌 넓이의 4.636배에 이를 정도로 넓다.

 

 

<분황사 석탑/국보30호/경주/선덕여왕 632년... 나는 지금까지 분황사탑을 이렇게 봐왔다... 그 시선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기단부까지 봐야 이 석탑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탑의 높이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석축이 둘러진 기단부의 존재는 기술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에서 새로운 해석을 전제해야 한다... 목탑의 심초석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이제 석탑 조성을 위해서는 이처럼 기단부 위에 탑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하부 토질을 개량해야만 했다...>

 

 

또한 기단부 측면은 막돌쌓기로 마감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토탑 기단부나 백제 적석총 양식의 영향(이 때부터 목곽적석총에 외부를 흙으로 덮어 토분형식으로 만들어졌던 신라의 무덤구조가 바뀌게 되는데, 600년대 중반 선덕여왕릉 이후부터 신라왕족의 고분에도 자연석으로 만든 호석이나 석축기단이 조성되기 시작, 600년대 말 신문왕릉에서는 가공된 호석과 석축이, 다시 700년대 중반에는 무덤주위가 가공된 판석으로 둘러쳐지면서 십이지신상 장식이 부착되고, 700년대 후반 원성왕릉에 이르면 무덤주위까지 각종 석상이 격식을 갖추면서 완성 된다)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평왕릉 가는 길... 탑에서 유래한 기단부의 조성은 이제 신라문화에 가장 오랫동안 원형을 간직하며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무덤의 구조까지 바꾸게 된다...>

<진평왕릉... 600년대 초반 조성된 진평왕릉 이전 신라고분에는 이처럼 흙으로만 봉분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물론 내부의 다양한 구조는 생략하기로 하고...>

<선덕여왕릉... 물론 신라 고분에서 연표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3기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부분 傳 OO왕릉으로 불린다... 보다 후대의 무열왕릉도 진평왕릉과 같은 구조이지만, 이야기를 쉽게 풀기 위해 600년대 중반 조성된 傳선덕여왕릉에는 이처럼 하부에 자연석으로 만든 석축이 둘러처지기 시작한다...>

<신문왕릉/Daum 스크랩... 무열왕-문무왕 다음이 신문왕이지?! 600년대 후반, 7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

효소왕대부터 이처럼 봉분 밑에는 호석과 다듬어진 석재로 만든 석축이 둘러쳐지게 된다...>

<원성왕릉... 그리고 7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봉분 하부의 석축은 판석으로 바뀌고, 그 중간 중간에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무덤을 장엄하게 된다. 또한 무덤의 구조는 봉분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신상석과 석상들이 무덤을 호위하는 양식으로 고착하게 된다... 급격하면서도 매우 빠른 변화를 수용했다...>

 

 

 

②기단부 모서리에는 4마리의 사자상이 있다.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탑이나, 釋迦族(석가족-신라의 불국토사상이란, 불교를 신심으로 믿어서 신라를 불교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말이 아니라, 석가족이 다스리기 때문에 당연히 불교의 나라라는 말이 된다)을 자처했던 신라왕족들의 무덤을 만드는 일은 신라인들에게 동일한 (장례)풍습을 원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고구려, 백제처럼 무덤위에 향당건축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탑 주위에 수호석상이나 신상을 두는 전통을 만든 게 아닐까?

 

<미륵사지 서탑 석상... 사자라 하기도 뭐하고, 곰이라고 부르기도 뭐하고...^^

아무튼 미륵사탑 귀퉁이에는 이런 석상이 호위석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분황사탑 사자상... 내가 본 우리나라에서 가장 늠름하고 세련된 사자상...^^ 분황사탑에는 이처럼 기단부 위 4모퉁이에 호위석상이 장엄되어 있다... 물론 이 석상은 본래 분황사탑에 있던 것이 아니라, 주변 왕릉의 석상이었다는 주장이 있고, 그 근거로 아래 분황사탑 인왕상과 조각의 완성도와 세련미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충분한 개연성이 있지만, 가장 멋진 사자상이 분황사탑에 있었다는 점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분황사탑 일층몸돌 4면, 문틀 좌우에 양각된 인왕상...>

 

 

물론 백제의 미륵사탑에도 석수가 있어 신라만의 전통이라 보기 힘들지만, 분황사탑의 석수는 미륵사탑의 추상적 형태와 달리 실증적인 사자형상으로 만들어지고, 다보탑, 관덕리탑 등 석탑 장엄을 위한 부속물로서 뿐 아니라 쌍사자 석등과 사사자석탑 등에 이르러서는 사자좌를 형상화한 것으로 승화하는 등, 신라의 석조불상과 석탑, 석탑 장엄구에 사자상이 매우 친숙하게 사용된 시원이 된다.

 

 

<다보탑 사자상/경덕왕 750년경... 이제는 사자가 탑 위로 올라갔다...>

<법주사 쌍사자석등 간주석/경덕왕,진표율사 700년대 후반... 그 사자가 이번엔 석등의 주요 부재가 되고...>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기단부... 역시 700년대 후반으로 보고 있는데, 다보탑과 달리 이 석탑에서는 사자가 엄연한 좌대로 합체된다...> 

<천황사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역시 700년대 후반으로 보고 있는데, 이제는 새끼 사자들까지 불상의 좌대를 꾸미는데 동원되었다...

불좌상 중 유일한 사자좌다...>

 

 

③기단부와 일층몸돌이 만나는 접합부에는 재료분리대처럼 일단의 화강석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는 기술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후대 석탑의 기단부와 일층몸돌 접합부에 나타나는 괴임의 구조적 원형이 아닐까 싶다.

 

<분황사탑... 일층몸체와 기단부를 구획하는 1단의 석재가 보이는지... 건축 마감을 위한 재료분리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석재가 있어, 석탑의 괴임은 변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는 백제의 석탑에서 각층 몸돌의 괴임이 목조건축이나 목탑의 난간을 형상화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 부분... 그리고 조탑동 등에 이르면 이처럼 일층몸체 하부에는 분명하게 양식적으로 가공된 몸돌괴임으로 변화한다...> 

<고선사탑 하층 기단부와 상층 기단부 사이의 괴임... 그리고 석탑으로 오면 기단부 사이 괴임은

각형+호형의 괴임으로 양식적 정형을 이루게 된다...>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 일층몸돌 괴임... 또한 기단부와 일층몸돌에는 각형+각형의 이단 괴임이 전형화되어 모든 석탑에 적용된다...

그 출발이 분황사탑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④역시 구조적인 문제로 분황사탑은 (고구려든 당나라 영향이든) 전탑양식이기 때문에, 여러 단으로 층급받침과 낙수면이 만들어졌고,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은 반전이 없는 직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분황사탑은 지붕하부의 층급받침(5~6단)보다 낙수면의 층급(10단)이 많지만,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보다 미감의 문제가 우선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후대에 만들어진 안동 조탑동이나 동부동 전탑은 지붕하부 층급받침이 낙수면보다 오히려 만다. 즉 신라석탑의 낙수면이 백제석탑과 달리 꼭 보이게끔 조형된 것은 전탑을 시원으로 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분황사탑 층급받침을 잘 비교할 수 있어 올려본다... 지붕 하부보다 상부의 층급이 많다...>

<안동 조탑동 오층탑 부분... 그러나 분황사에서 보이는 양식은 전탑이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처럼 조탑동에서는 하부의 층급이 상부 낙수면 층급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탑 중 가장 넓은 처마를 갖추게 되었다... 즉 상하부 층급은 미감에 의한 선택적 문제라는 것이다...>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보물56호... 이제는 동부동이 아니라 운흥동이라 불러야 하는데 편하지 않다... 아무튼 이처럼 전탑의 낙수면은 기와를 올릴 수 있는 구조만 갖추면 되는 것으로 지붕 하부의 층급받침이 상부 낙수면보다 2~3배 이상 많다... 백제석탑의 지붕돌 조성과 같은 문제의식이 발현된 결과라고 보는데, 나는 이런 미감이 고구려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양식은 앞 포스팅에서 첨부한 발해의 마적달묘탑과 비슷한 양시과 미감을 갖췄기 때문이다...>

 

 

⑤일층몸돌에는 문비와 함께 좌우 인왕상이 양각되어 있다. 일층몸돌 사면에는 내부 통행이 가능하도록 비어있는 점은 미륵사탑과 같지만, 전돌 몸체에 화강암 문이라는 이질적 구성(중국전탑과 다르다)에 장식성까지 더해졌다는 점에서 고선사탑, 장항리탑 등에서 보이는 문비와 인왕상의 시원이 되고 있다.

 

<분황사탑 부분...>

<안동 조탑동탑 부분... 이 탑의 특징은 일층몸체가 분황사탑과 달리 전부 화강암이라는 점이다...>

<고선사탑 부분... 분황사탑이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삼층석탑 중 하나인 고선사탑에도 이런 문비가 자연스럽게 조형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문이 있어야 부처가 드나들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장항리 오층석탑 부분... 그리고 조금 후에 만들어지는 장항리탑에서는 이처럼 인왕상과 문비가 세트로 조형된다...>

 

 

⑥그런 장식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전탑과 달리 목조건축의 구성과 결구방식(기둥, 창방, 문틀, 공포구조 등)은 완전히 생략한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는 기술적 한계나 내공의 차이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소박 간결함을 좋아하고 모든 본체를 관념적으로 이해하기 좋아하는 신라인들의 미감에 따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조형기술과 경제력,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을 후대에 만들어지는 전탑이나 모전석탑에서도 분황사탑의 기본 양식(전돌과 화강석의 조합이나 목조구조의 생략 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보물57호... 화강암과 전돌의 조합은 이렇게 계승된다... 그리고 이 사진에서 보듯이 엄연히 분황사탑과 같은 기단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단석축 위로 보호난간이 둘러쳐저 있다는 것은, 탑의 기단부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무지의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어 먼저 이 사진을 올린다... 이때가 90년도 중반쯤인 거 같다...> 

<다행히 2000년대 다시 갔을 때 기단부 위의 난간은 사라졌다...ㅋㅋ> 

<제천 장락동 칠층석탑/보물459호... 이 사진도 옛날 거지만, 저 나난도 빨리 치워져야지?!! 아무튼 통일신라시대 만든 전탑양식 탑에는

항상 화강암과 전돌이 조합을 이루었다... 나는 이것도 고구려의 양식이 전래된 것으로 본다...^^>

 

 

이처럼 시대적 배경과 양식의 해석, 그리고 새로운 장례문화와 불탑조성문화에 대한 변화 욕구를 승화시켜 630년대 신라는 분황사탑을 조형하기에 이른다. 또한 분황사탑의 새로운 도전은 전체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세부 디테일에 대한 기술적 양식과 장식적 조형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제기까지 묶어 놓은 형태였다. 그러나 그 출발은 목탑이지만, 백제의 정림사, 미륵사탑이 아닌 고구려와 중국의 전탑의 영향에서 시작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전탑으로서 구조적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고, 벽돌생산에 익숙하지 않은 신라인들에게 전탑구조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시간과 경제적 비용이 지출되어야 하는 전돌생산보다, 백제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석불(예산, 태안, 서산, 익산 등)이나 석탑조성 등에 영향 받아 시도된 신라의 석불들(경주남산 부처골 감실부처, 북지리 미륵반가사유상, 삼화령 삼존불, 경주남산 배리 미륵삼존불, 선도산 아미타삼존불, 군위석굴 아미타삼존상 등)처럼 석재로 만든 석탑을 원하기에 이른다. 나는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탑이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이라 생각하며, 그때가 고구려가 멸망하고 백제에 설치된 웅진도독부가 무력화된 668년 전후로 본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77호... 이제 이 탑에 대해 알아볼까?>

<여기서도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저 난간이 없어져야 하며, 주변의 나무들도 제거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부 토단도 엄연히 기단부의 일부이며, 그 흔적들이 주변의 석재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변 소나무를 제거하는 것이 자연훼손일지 모르지만, 저 탑이 만들어졌을 때 지금의 나무들은 분명 없었다... 즉 관리의 부실이 문제이고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려면 일단 나무들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야 분황사의 기단부가 정확히 이해되기 때문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