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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9> 신라석탑의 시원 - 2)국보77호 탑리리 오층석탑...1305

 

 

 

 

 

 

 

  

 

3)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시원 -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탄생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을 위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끌어온 걸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정림사탑, 분황사탑, 그리고 왕궁리탑 등이 있어야 탑리리탑은 완성됐다고 말하려는 나의 의도를 눈치 채셨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나는 이 탑이 문무왕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며, 여기에는 정형화, 전형화 되지 않은 삼국의 미감과 체감이 뒤섞여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고구려의 토대와 형상, 백제의 체감과 경험, 그리고 신라의 구조와 의지가 조화를 이룬 통일신라시대 첫 석탑으로 말이다. 또 그래야 말이 되고...^^ 아무튼, 지금까지 이 탑을 보며 가져왔던 왜 오층탑인가? 이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일까? 그리고 왜 의성에 만들었을까? 왜 이탑을 모전석탑이라 부르는가? 등의 의문을 이제 풀기 위해 조금 복잡한 절차를 밟으려 한다. 또 탑리리탑은 신라석탑의 시원이라는 중요도에 비해 조성시기나 의도 등에 대해 충분한 자료들은 매우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았다. 때문에 탑의 양식적 특징부터 살펴보고 이를 근거로 탑 조성의 시대배경과 지역의 연관성에 대해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 방향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77호/9.6m... 이번 글에서도 이에 대한 답은 뒤로 미루려했지만, 글이 길어질대로 길어진만큼 더 이상 뒤로 미룰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 탑리리탑은 신라석탑의 시원이라는 중요도에 비해 조성시기나 의도 등에 대해 충분한 자료들은 매우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았다. 해서 이번 기회에 내 생각을 풀어 놓기로 했으니 중구난방이 되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1) 탑리리탑의 양식적 특징들...

 

 

먼저 기단부에서부터 탑리리탑을 하나씩 뜯어본다면, ①분황사탑과 달리 동일한 소재(가공된 석재)를 사용한 1단의 기단부가 만들어져 왕궁리탑과 비슷하다. 분황사탑보다는 높고, 왕궁리탑보다는 낮아졌지만, 탑리리탑이 갖춘 넓고 낮은 기단부는 초기 석탑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며, 석재 기단부를 전제로 조형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시원이다. ②기단부 사면은 왕궁리탑과 같이 2개의 탱주를 사용했는데, 기단부 갑석은 왕궁리탑과 달리 조출(부연)이 없고, 일층몸돌 밑 괴임도 1단이다. 이 점들은 왕궁리탑보다 오래된 형식으로 정림사탑과 비슷하다.

 

 

<왕궁리탑 기단부... 일층, 이층 몸돌에 양각된 탱주와 탑리리탑의 2층 몸돌부터 나타나는 탱주를 비교해 보고, 기단부의 넓이와 높이, 기단부 갑석의 구성을 눈여겨 보면서 비교해 보시길...> 

<탑리리탑 부분... 기단부 탱주가 2개인 것은 왕궁리탑과 같고 2층, 3층 몸돌에는 왕궁리처럼 가운데 탱주가 1주씩 양각되어 있다...

 기단부 갑석에는 조출 혹은 부연이 없는 1단 구조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부분 (나에게는 선산 죽장동으로 익숙하지만, 명칭이 바뀌었으니 연습이라도^^)... 낮은 형상의 기단부는 탑리리탑과 같은데, 그 밑으로 1단의 기단부가 추가됐다. 그리고 그 사이 재료분리대(몰딩)은 각형 2단으로 구성되었고, 갑석 역시 1단이다... 또 기단부와 몸체 사이 재료분리대가 탑리리탑이 1단인데 비해, 죽장리탑은 각형 2단으로 만들어졌다... 2단 기단부를 갖춘 탑과 비교하면 지붕돌 낙수면처럼 물매를 확실하게 둔 갑석으로 마감하였고, 지붕돌은 탑리리탑처럼 여러장을 전탑식으로 만든 게 아니라 감은사탑처럼 4개의 돌을 가공하여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의성-안동-원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탑리리탑과 대칭하여, 구미-상주-충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 탑리리탑 양식을 계승한 탑이기에 비교를 위해 같이 올린다...>

 

 

 

③일층몸체에는 분황사탑처럼 감실을 두었지만 전면에만 1개의 감실을 두었고, 2줄로 마무리 된 액연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방식은 후대의 고선사탑, 장항리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석탑 일층몸돌에 조형되기 시작한 문비의 시원적 형태다. 단, 1단 괴임 위로 문지방 같은 부재를 부어 목조건축 양식을 따랐고, 전체적으로 아래쪽에 위치해 가장 원시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

 

 

<탑리리탑 부분... 감실은 1단의 괴임 위에 만들어졌는데, 하부는 목조건축의 문지방처럼 별석을 가공하였고, 하부 별석에는 액연이 없다...> 

<장항리탑 부분... 조금 후대의 장항리탑에서는 감실이 문비로 조형화된다... 좌우 인왕상 연화좌 때문이기도 하지만, 감실을 상징하는 문비가 위로 올라가 있고, 후대에는 인왕상이 없어도 문비는 일층몸돌 한가운데에 자리잡게 된다. 실체와 의미는 사라지고 공예적 장식으로 전승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탑리리탑과 마찬가지로 하부에는 좌우와 위쪽과 달리 액연이 조각되어 있지 않아, 최초 목조건축에서 탑리리탑이 차용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역시 선산 낙산동이 익숙한 이름인데)... 여기까지 오면 삼층석탑으로서 정형화된 많은 양식들을 확인할 수 있다... 2단 기단부도 그렇고, 상하층 기단부 사이와, 기단부와 일층몸체의 괴임도 정형화된 양식을 따랐다... 단, 여전히 기단부가 낮고 넓어 초기 양식이 살아있고, 감실 역시 완전히 일층몸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어, 고양식이 충실히 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탑을 700년대 중후반을 넘기지 않는 것으로 본다... 아무튼 이렇게 변해 간다는...>

 

 

 

④감실이 있는 전면을 제외하면 후면은 1매의 판석으로 되어있고, 좌우면은 2매의 판석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정림사탑과 비슷하다. ⑤일층몸체 사방 우주는 민흘림기법으로 만들어졌고, 그 위로는 목조건축에서 사용하는 주두가 별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즉 정림사탑과 같이 모목석탑의 가장 기본적인 흔적이 전승되고 있다.

 

 

<탑리리탑 부분... 감실이 있는 면을 기준으로 좌우는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 정림사탑과 같지만, 후면은 1매의 판석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후면에도 감실을 만들려다 구조적 안정성 때문에 이를 수정하면서 나타난 불규칙성이 아닐까 혼자 상상해 본다...^^>

<탑리리탑 부분... 일층몸체 네 귀퉁이에는 별석으로 만든 우주가 민흘림기법으로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목조건축에서나 찾을 수 있는 세련된 모습의 주두가 별석을 가공되어 있는데, 자세히보면 지붕돌을 이루는 층급받침은 전탑식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적층한 게 아니라, 하나의 돌을 가공해서 단일석으로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층급받침에서도 전탑의 구조를 벗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석탑의 가장 큰 취약점은 상부의 자중을 각각의 부재들이 균일하게 압축력을 분산해서 받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안정성에 대한 실험과 고도의 정밀성, 그리고 수리학적인 과학적 도안이 필수적이다...왜냐하면 부재 하나의 강도가 약해도 저 정도 규모의 석탑은 쉽게 도괴될 수밖에 없고, 태풍 등 바람으로 인한 횡력과 모멘트에 가장 큰 취약점을 노출 시키는 게 석탑인데, 이를 극복했다는 것은 웬만한 구조기술자가 아니면 설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이를 경험으로만 설명하기엔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⑥주두 좌우로 창방형식의 별석이 있고, 위로는 3단의 층급받침이 지붕돌을 받치고 있어 왕궁리탑과 동일하다. 그러나 2층 몸돌부터 각층 지붕돌 층급받침은 5단으로 일관되었다. 이는 모전석탑인 분황사탑과 같은 양식이다.

 

<탑리리탑 부분... 주두와 주두를 연결하는 부재는 역시 별석이다... 석탑에서 이렇게 별석으로 만든다는 것은 목조건축에 가까운 가장 원시적인 구조이면서, 오히려 정밀성이 요구되는 가장 난해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즉 석탑은 이렇게 복잡한 구조로부터 석탑으로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부재의 단순화가 시급히 요구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게 석탑의 구조가 발전할 방향이었다... 사족을 붙이면 ; 지붕돌 전각 부분은 다른 부재에 비해 현격히 작은 벽돌 같은 석재로 마감됐음을 볼 수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커졌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일,이층 아래쪽 지붕돌에는 구조적 힘을 받는 부분이 아니어서 별석으로 끼워놓았지만, 위쪽에서는 너무 작아졌기 때문에 하나의 부재로 통합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탑을 기획했던 이는 압축력에는 강하고, 인장력에는 약한 석재의 성질을 완벽히 파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⑦낙수면은 6단의 층급받침으로 구성되었는데, 마지막 1개단을 몸돌 괴임으로 이해한다면 5단이 되어 전층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며, 이 역시 분황사탑과 같은 방식이다. ⑧이층몸돌부터는 사방으로 우주가 있고, 가운데 탱주가 1주씩 새겨져 있는데 전층이 동일하며, 왕궁리탑 2층에서 보이는 탱주와 같은 구성(별석이 아닌 양각으로 만든 점)이다.

 

 

<탑리리탑 부분... 층급받침을 이루는 부재들도 자세히보면 일률적이지 않고, 이음면을 좌우로 (과학적으로) 분산시켰다... 이 역시 상부 압축력을 분산하기 위한 필연적인 조치였다... 아무튼 탑리리탑을 만든 석공들에게 향후의 과제는 지붕돌의 안전성과 미감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했을 거 같다... 그 결과가 감은사/고선사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이 나원리탑, 마지막 정형화는 황복사탑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본다면 탑리리탑은 크게 왕궁리탑과 분황사탑의 조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감실과 층급받침으로 구성된 지붕돌 낙수면이 분황사탑과 같다면, 기단부와 각층 몸돌은 왕궁리탑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 이것 뿐일까? 아니다. 나는 위에서 세부구성을 설명하면서 의도적으로 정림사탑을 끌어들였는데,

 

 

<정림사탑과 탑리리탑의 정면 체감 비교... 탑리리탑에서 기단부를 빼고 본다면, 아마 가장 유사한 체감을 갖춘 탑은 정림사탑이 될 거 같다...> 

<탑리리탑... 기단부를 빼고 보면 완전히 모목석탑이 된다...>

 

 

사실 ⑨탑리리탑은 5층석탑으로 백제의 전통 양식이며, 특히 기단부를 빼고 보면 각층의 체감과 높이의 비례는 정림사탑, 왕궁리탑과 매우 유사함(그 중간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일층몸돌 등에 드러난 민흘림기둥과 주두의 흔적은 모목석탑이 갖춰야할 기본적인 체감과 미감을 갖췄음도 부정할 수 없다. 즉 엄밀히 말하면 전탑의 체감과 구조, 양식만이 아니라 목탑의 구조와 체감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말이 되니, 기단부를 제외하면 탑리리탑은 모전석탑이 아니라 모목석탑과 모전석탑의 조합으로 설명해야 올바른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 체감과 비례가 정림사탑과 유사하다면 이 정의가 보다 올바를 것이 아닐까?!

 

* 같은 사각에서 본 정림사탑 - 탑리리탑 - 왕궁리탑...

  세탑의 체감을 비교하기 위해 같은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비교해 본다...

  내 생각에 탑리리탑은 정림사탑과 왕궁리탑의 중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림사탑...>

<탑리리탑... 정림사탑에 비해 몸돌만 두꺼워졌다...> 

<왕궁리탑... 같은 거리에서 잡은 사진이 없어 멀리서 잡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가까이서 올려보면 지붕돌이 탑리리탑에 비해 조금 넓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탑의 석재 기단부는 1단일지 모르지만, 그 밑에는 ⑩석축으로 둘러져 있을 토단이 또 한층 자리잡고 있음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즉 현재의 석재 기단부는 분황사탑의 석축 기단부가 좁아진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높고 넓은 흙으로 만든 기단부가 있다는 말이 된다. 현재 흙으로 구성된 토단에 나무도 몇 그루 있고, 보호난간이 토단 위에 설치되어 있어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토단으로 생각되는 부위에는 자연석으로 보이는 거석들이 불규칙하게 남아있다.

 

 

<탑리리탑... 석탑 보호울타리 주변의 이 석재들은 어떤 용도였을까?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지만, 토단을 지탱했던 석재들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 토단이 분황사탑이나 영양 산해리, 현2동탑, 안동 조탑리탑처럼 직각의 단층이었을지, 아니면 아래쪽 태왕릉처럼 몇개의 단을 이루어졌을지는 확인된 바 없지만-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는 계단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앞에서 말했던 고구려나 백제 적석총 위에 만들어졌던 향당건축 양식과 매우 유사한 외형을 갖추게 되는데, 기단부가 1단의 높은 석축으로 만들어졌을지, 피라미드식으로 몇 개의 단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우리가 모를 뿐이다.

 

<태왕릉/이형구 같은 책... 적석단 위로 향당건축의 유구가 남아있고, 그곳에서 처마 끝에 달렸을 청동방울도 발굴되었다...> 

<태왕릉 복원 상상도/이형구 같은 책... 이 모습에서 탑리리탑을 연상할 수 있지 않을까?> 

<소호릉... 중국 산동성 곡부시 소호릉은 동이족의 시조가 모셔진 무덤이다...

고구려의 이 전통은 멀리 청나라까지 이어져, 현재까지 본 모습을 갖추고 있어 같이 스크랩한다...>

 

 

 

 

이를 정리하면 ①이층 몸돌 위로는 분황사탑과 왕궁리탑이 조합된 양식에 ②감실은 분황사탑, 미륵사탑과 같은 초기 양식에, 지붕돌 낙수면은 분황사탑에서 차용한 모전석탑 양식이고, ③5층의 구성과 전체비례, 그리고 일층몸체는 정림사탑과 같은 모목석탑의 양식이며, ④기단부는 왕궁리탑과 같은 1단의 석재 기단부에 ⑤맨 아래에는 흙으로 만든 기단부를 가졌다고 설명하는 게 맞지 않을까?

 

 

 

 

 

또한 ⑥이런 다양한 양식들의 조합에도 불구하고 목탑의 번안, 전탑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중국, 백제 등에서 원형을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양식의 신라 최초의 석탑이며, ⑦구미 낙산동과 죽장동, 경주 남산동과 서악동, 의성 빙산사지, 강진 월남사지, 화순 운주사 등으로 전승되는 층단으로 조형된 낙수면을 가진 석탑들의 시원이다. 결국 탑리리탑의 전체적인 윤곽과 양식은 고구려/백제에서 유행했던 적석총 위 향당건축을 모본으로 흙으로 만들어진 석축 위에 석탑이 세워진 형상이고, 전체구조는 모목석탑과 모전석탑을 혼용하여 백제에서 정형화된 5층으로 만든 (모전석탑이 아닌) 석탑이라는 말이 된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국보130호/10m... 탑리리탑을 전승한 죽장리탑...

과연 이탑을 모전석탑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걸까? 이제 그걸 살펴보려 한다...>

 

 

 

 

 

 

 

 

(2) 탑리리 오층석탑은 모전석탑일까? - 탑의 분류와 모전석탑의 개념에 대한 메모...

 

 

참고로 나는 탑리리탑을 모전석탑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석탑이라 분류하는데, 지금까지 이 문제는 논란이 많았고, 도대체 모전석탑이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지 명칭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물론 2013년 현재 공식명칭이 ‘석탑’으로 고착되었지만, 불과 얼마전까지 탑리리탑 등은 모전석탑으로 불렸고, 모전석탑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내 자신도 불분명했다는 생각이 많다. 이런 혼란과 혼동은 탑을 소재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형상을 근거로 삼을 것인가의 논란에서 출발했는데, 애초 출발이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한다(또 지금까지 이를 방치한 문화재 당국이나 학계의 게으름 때문이겠지만...).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려 한다.

 

 

① 먼저 형상을 근거로 탑리리탑을 석탑이라 부르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목탑이든, 전탑이든, 석탑이든 동아시아 탑의 시원은 중국에 있었던 중층누각형 목조건축에서 출발한다. 즉 전탑이나 석탑이나 모두 이 형상에서 시작했고, 그 형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기준이라면 전탑은 모목전탑으로, 석탑은 모목석탑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물론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역시 없을 것이다. 또한 조금 더 근원적으로, 중국의 목탑은 목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스투파와는 형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즉 탑이란 개념과 명칭은 애초 (소재와) 형상의 문제가 아닌 의미의 문제에서 출발했고, 이후 중국과 고구려, 백제를 거치고 통일신라에 이르면서 전탑은 전탑대로, 석탑은 석탑만의 고유한 체감과 양식으로 전형화 됐다. 그러니 탑리리탑이 석탑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를, 비단 형상만의 문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송림사 오층전탑/보물189호/16.13m... 사실 전탑이나 석탑이나 똑같이 목탑에서 출발했다...

형상만으로 탑을 분류한다는 것은 충분할 수 없다... 내 생각이지만...>

 

 

 

② 두 번째 탑리리탑과 낙산리탑 등 그 아류탑들을 모전석탑으로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지붕돌의 모양 때문인데, 이 점은 접근부터 문제가 많다. 즉 전탑은,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만들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지붕을 이루는 낙수면과 그 하부 받침면이 층급을 이룰 수밖에 없고, 이 특징을 차용했으니 당연히 모전석탑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층급받침은 낙수면에만 있는가? 아니다. 엄연히 낙수면을 받치고 있는 아래쪽에도 층급받침이 있다. 또한 목탑을 차용한 가장 시원적 양식을 갖춘 미륵사탑에서도 층급받침은 사용되었다. 그리고 미륵사탑과 선후의 문제가 있겠지만, 탑리리탑보다 앞선 정림사탑에도 단조롭지만 층급받침이 형상화되어 있다. 만약 탑리리탑 등을 지붕돌 형상과 구조 때문에 모전석탑으로 불러야 한다면, 미륵사탑, 석가탑을 비롯해 층급받침을 갖춘 모든 석탑을 그렇게 불러야한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될까? 게다가 돌을 하나하나 잘라서 결합한 미륵사탑이야 말로 완벽한 구조와 양식의 모전석탑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 되니, 이게 과연 합리적인 분류나 접근방법이 될 수 있을까?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보물124호/7m... 이 탑은 굳이 분류하자면 탑리리탑 유형인다.

그런데 이 탑을 분황사탑과 같은 모전석탑으로 분류했던 게 맞았을까?>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보물65호/4m... 이런 유형의 석탑도 시대가 내려가면 삼층으로 전형화되고, 크기는 갈수록 작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단부의 모습이다. 전형적인 석탑의 기단부도 아닌 매우 특이한 형태이면서도 양식화 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혹 하부 토단이나 적석식 기단을 석탑의 기단과 약식으로 합치면서 유형화된 것은 아닐까?>

 

 

 

③ 하나 더 나아가 세 번째, 비단 소재 때문에 분황사탑이나 탑리리탑을 모전석탑이라는 같은 양식으로 부를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다. 먼저 누구도 분황사탑과 탑리리탑을 같은 양식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많은 이 탑을 같은 양식으로 분류한다면, 소재로 탑을 분류한다는 기준자체가 잘못됐다는 것만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사탑의 예는 위에서 들었고, 분황사탑을 예로 들면 이 탑은 벽돌모양으로 자르고 다듬은 석재에, 화강암으로 만든 부재들이 부분적이지만 조합되어 있다. 또 전탑으로 완전히 분류된 안동 조탑리 오층탑도 일층몸체는 전체가 석재다. 그렇다면 이들을 비롯해 제천 장락동 칠층탑 등은 모전석탑이 아니라 석전탑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탑을 분류하는 기준을 소재에서만 찾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보물57호/8.67m... 소재만으로 탑을 분류한다면 이 탑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튼 화강암으로 만든 일층몸돌 아래에는 석축으로 쌓인 토단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오층탑이 되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애초 모전석탑이라는 기준 자체가 과학적이거나 양식적이거나 상식적이지도 않아 모호할 뿐만 아니라, 탑을 분류하는 요소는 소재와 형상, 구조와 체감, 그리고 미감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로 분류하면서 우리는 석탑의 나라로 분류하는 것은, 각각의 체감과 미감이 완전히 다른 점에 착안한 ‘편의적 기준’일 뿐이라는 것이고... 왜냐하면 목탑은 중국에 가장 많았겠지만 일본을 목탑의 나라로 부르는 것은 법륭사에서 시작해 중세, 현재까지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일본만의 체감과 미감을 가진 목탑들이 재생되기 때문이고, 우리가 석탑의 나라로 불리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독창적 양식의 석재 탑이, 그리고 중국의 전탑은 한국의 석탑이나 전탑, 일본의 목탑과는 완전히 다른 양식과 미감을 갖췄음이 오랜 기간 우리에게 인지되고 또 그렇게 고착됐기 때문일 것이다.

 

 

<영양 현이동 모전석탑/경북유형문화재12호/7m... 이 탑을 모전석탑이라 부르는 건 용서가 된다^^ 그런데 왜 이탑은 보물이 아닐까? 설명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기반으로 했다지만, 지금은 이렇게 기단부가 만들어졌다... 내 생각이지만, 이 석축 기단은 이렇게 깔끔하게 가공되어서는 오히려 미감을 해친다고 본다... 즉 잘못된 보수/관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목탑, 전탑, 석탑의 기준은 각각의 특징과 의미가 어우러져 정착된 개념이며, 우리가 소재와 형상의 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운 이유는, 그 기준에 맞춰 역으로 탑을 분류하면서 발생하는 - 파생적인 접근을 근본적인 문제로 오인/착각하면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애초 편의적 기준으로 출발한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개념(통칭)을, 과학적으로 디테일하게 분류하려는 시도부터가 잘못된 것인데, 여기에 모전(모목)석탑이란 또 다른 편의상 분류를 추가하면서 더 큰 혼란만 부추겼다는 말이다.

 

 

이상을 근거로 탑을 분류한다면, 크게 목탑, 전탑, 석탑이 있고, 굳이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석재로 만든 전탑을 모전석탑으로 구별하는데까지는 인정할 수 있겠지만, 나는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분황사탑을 포함해 영양 산해리나 삼지동, 현2동탑, 제천 장락동, 안동 대사동, 군위 남산동 등등이 그런 양식이 되겠지만, 대략 10여기를 넘지 못할 정도로 적고, 처음부터 전탑의 형상과 미감을 구현하고자 만들어진 탑이기 때문에 전탑의 아류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또한 탑리리탑을 비롯한 죽장동, 낙산동, 서악동, 빙산사지 등의 탑을 정암사 수마노탑과 동일하게 모전석탑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지붕돌 낙수면의 특징 하나 때문에 이렇게 분류를 한다면, 기단부가 일단인 봉암사나 직지사탑은 뭐라고 부를 것이고, 감실과 문비를 갖춘 석탑은 또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그들은 일정부분에 다른 탑의 특징이 차용된 석탑일 뿐이다.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187호/11.3m... 나에겐 봉감탑으로 더 익숙하지만 아무튼... 분황사탑을 가장 훌륭하게 전승한 모전석탑으로 그 이름만으로도 바람소리가 들릴 거 같은 장중하면서도 우아하고, 세련된 자태에 의연한 멋까지 갖춘 정말 국보다운 탑이다... 이 사진이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 사진마큼 기단부가 잘 드러난 게 없어 오늘은 이 사진을 올린다...^^>

 

 

 

 

나는 오히려 탑의 분류와 같은 문제제기들이 더 높고 넓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석탑이야말로 탑의 근원적인 원시성과 최후의 발전형태를 갖춘 가장 완결적 양식이라는 의미에서 목탑, 전탑과 비교하는 방향 말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하고 적은 수의 부재로 만들어지는 석탑에, 복잡다단한 구조와 변화무쌍한 전탑과 목탑의 특성들이 함께 포괄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독창적이면서도 궁극적인 구조를 갖췄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소재와 양식에서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 목탑과 전탑의 체감과 미감을 융합하여 표현할 수 있는 석탑이야말로 동북아시아 대승불교에서 탑이 갖춰야 할 보편적 특징을 가장 살리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거 아닐까?! 한국종처럼, 한국의 석탑도 고유명사가 될 수 있는 조건과 근거를 충분히 갖췄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탑리리탑이 무엇으로 불리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특징을 어떻게 소화하고 독창적으로 융합해냈는가, 또 하나의 모본(母本/模本)으로 후대의 탑에 얼마나 많은 영감과 영향을 미쳤는가를 찾아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탑리리탑이 중요한 이유는, 이 탑으로 인해 석탑은 석탑으로서의 구조와 양식을 가지게 됐고, 자신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아류의 탑들을 만들 수 있는 영감을 불어 넣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시원'이란 의미는 시작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최후의 양식적 완결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붙일 수 있는 게 아닐런지... > 

 

 

 

 

 

 

 

(3) 문무왕대, 탑리리 오층석탑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

 

 

 

내가 탑을 보는 것은, 공예적 완성도와 예술적 깊이를 탐독하고 우리 내면의 원형질과 내가 닮고 싶은 궁극의 美感(미감) 같은 걸 찾기 위함도 있지만, 그걸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탑을 만든 이들의 호흡을 느끼고 싶은 건, 바로 시대의 흐름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 혹은 땀과 꿈이 서린 숨결이며 기운이다. 사실 하나의 공예품에, 사상과 역사와 예술이 인간의 숨결과 함께 살아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된 선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한계가 분명한 이유는 탑을 보면서 탑을 배양한 시대의 토양은 추측할 수 있지만, 시대의 흐름이 꼭 탑의 양식과 일치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때문에 탑의 양식을 논하면서 기록에 없고 확인할 수 없는 흔적을 시대적 배경과 상상을 통해 가공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당히 위험한 발상임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탑을 그리는 것이지, 전문가적 식견과 자격이 있어 이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니, 나는 언제든 지금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다는 열린마음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탑리리탑을 말하면서 나는 이미 신라인의 의지와 고구려의 전통, 그리고 백제의 기술과 체감이 혼용되었음을 양식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했다. 이를 아주 넓게 이해한다면, 이미 이시기에 삼국의 문화는 하나로 통일되어 양식화 됐다는 말이나 마찬가진데 이게 가능했을까? 나의 결론은 간단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가 하나로 통일되어 간 것은, 신라가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치밀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과정에서 유입되고 수용된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이미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가 형성돼 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즉 삼국시대에도 인적 물적 교류가 충분히 있었지만, 각국의 정체성과 방향이 분명한 이상 그건 각국의 취사선택에 의해 재단되고 특화되어 강한 쪽으로 수렴되어 일체성을 갖추지 못했지만, 고구려/백제가 멸망한 이후 남는 것은 신라의 일관성(발해를 제외한다면)뿐이었으니, 이때부터 만들어진 모든 것은 통일된 문화로 불릴 뿐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신라는 최초의 석탑을, 의성이라는 지역에 장대한 토단을 갖춘 오층석탑으로 조성했지만, 얼마 후 이 양식을 완전히 폐기하고 2단 기단부를 갖춘 삼층석탑만 만든다. 즉 태왕릉이나 장군총에서 보이는 묘상건축식의 석탑은 완전히 폐기 되고, 백제가 좋아했던 모목석탑식 미감과 5층이란 층수도 곧바로 사라진다. 실제 660년부터 935년까지 270여년간 신라에서 만들어진 오층석탑은 탑리리탑을 제외하면 경주 나원리와 장항리, 광주 東(지산동), 화엄사(동탑과 서탑), 의성 빙산사지, 선산 죽장동, 보령 성주사지,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등 9기에 불과하다(창림사지 삼층석탑을 오층석탑으로 본다해도 10기 내외다). 그리고 광주 지산동탑은 800년대 초반 화엄사 서탑은 800년대 전반, 성주사지탑은 800년대 중반, 화엄사 동탑은 800년대 후반, 보원사지탑은 900년대 초반으로, 6~700년대 초반 구미와 경주 탑들보다 시대적으로도 한참 떨어져, 한동안 단절됐다가 다시 옛 백제지역에 살아날 뿐이다. 마찬가지로 중후장대한 고구려의 미감을 갖춘 전탑 혹은 모전석탑도 안동 법흥사와 운흥동, 조탑리, 금계동 등을 포함, 영양 산해리, 제천 장락동, 칠곡 송림사, 청도 운문사 등 십여기(기록과 파편 등 유구까지 포함하면 규모와 상관없이 20여기)에 불과하니 삼천리 방방곡곡에 깔린 삼층석탑에 비하면 그 숫자는 미미하고 특정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그 이유는 다음에...).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국보236호/9.1m... 이 탑앞에 설 때마다 나는 늘 낯설었다. 연상되는 나이도 모르겠고,

한마디로 어떤 느낌이라 단정할 수도 없고, 비교할 무엇도 없고... 그 답을 이제는 편안하게 말하지만, 너무 어려웠던 탑...>

 

 

 

 

탑리리탑은 탑이 만들어져야 할 절박한 상황에서 고구려, 백제에서 유입된 양식과 규범을 차용했을 뿐 신라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말이다. 또 완성된 양식에 일관된 미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탑리리탑을 보면서 의아해하거나, 깊은 감동을 받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신라석탑의 시원이라는 중요성에 비해, 이탑에서 우아함이나 장중함, 또는 정연함 등 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탑리리탑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공예적 불완전성과 예술적 미감의 한계는, 이미 만들어진 때부터 평가됐거나 얼마 후 곧바로 인지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또 그런 부족함을 신라인들 스스로 느꼈기에 보다 완성된 양식의 석탑을 갈구하게 되었고,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보면 신라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반성을 감추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런 열린마음과 진취적인 자세가 있어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이식된 문화와 융합하여 새로운 유형을 창출해내, 삼국의 문화를 통일한 정통성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38호/9m/686년... 탑리리탑의 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탑이 바로

감은사지탑과 고선사지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신라는 오층양식을 버리고 삼층으로 균일화 되어 간다...>

 

 

 

 

아무튼 그 이후의 발전과정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왜 이렇게 급하게 신라는 이런 양식의 탑리리탑을 만들어야만 했을까? 그건 그 시대배경을 충실히 이해하는 것 외엔 다른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데, 문무왕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661년부터 677년까지 문무왕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신라인과 이미 멸망한 고구려, 백제인들에게 삼국의 정통성이 신라에 있음을 과시해야만 했다. 실제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격하시켜 백제의 웅진도독부와 화친을 종용하다가, 결국 674년 자신을 폐위하고 친아우이자 평생의 숙적인 김인문(40여년 당나라에 머물면서 백제와 고구려 침공시 당나라 군대 선봉에 섰다. 3자 입장에서는 신라와 당나라의 가교역할을 했던 외교의 달인이라 평가 받지만,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당나라에 머물다 694년 유해가 되어 서악리 무열왕 옆에 묻힐 정도로 친당파의 수장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이를 냉정하게 활용한 건 문무왕이었을 거고...)이 당나라로부터 신라왕으로 봉해지는 치욕으로부터 권력을 지키지 못하고, 미륵보살을 자처한 선덕여왕부터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등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만파식적의 설화도 그렇게 탄생한다)을 만들지 못할 경우, 수십년 전쟁의 공로는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문무왕에게 삼국을 아우를 수 있는 정통성을 대동강이남 백성들에게 숙지시키는 것은 신라왕실과 권력을 지키기 위한 힘의 원천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친당파와 진골세력의 이반을 막고, 당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한 군사력을 배양하는 일은,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통합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말이다.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길이 3.8m, 높이 2.5m/661년... 우리나라 귀부와 이수의 시원으로 당나라 양식을 충실히 구현했는데, 신라의 '사실주의적 이상주의'를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비를 만든 건 문무왕이지만, 이 비의 비문을 쓴 이는 김인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글과 문장, 언변에 탁월했다고 한다...> 

<저 위로 비석이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 유인원 기공비/보물21호/부여박물관... 이 비석은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 이후 웅진도독부를 이끌면서 백제부흥군을 섬멸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기공비다... 때문에 당시 철저하게 당나라 양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태종무열왕릉비에 비석이 있었다면 어떤 모양일지 상상해 보기 위해 참고로 올리는데, 자세히보면 비석과 이수의 넓이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아래 월랑선사비처럼 이수가 비석보다 훨씬 크거나 넓지 않고 똑같았다... 지금 우리들 미감으로는 매우 어색했을 듯...^^>  

 

<월광사 월랑선사비/보물360호/890년/제천 월광사터/현 국립중앙박물관... 가장 아름다운 귀부 중 하나로

태종무열왕릉비에서 230여년 후 이수와 귀부가 어떻게 변하는지 한 눈에 비교할 수 있어 참고로 올린다...>

 

 

 

 

이에 문무왕이 선택했던 방향은 이후 신라의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었는데, ①부채탕감과 사병의 몰수 등을 통해 진골세력을 약화시키면서 6두품을 강화하는 등 유교적(수직적 관료체계에는 유교만큼 적합한 게 없고, 백성과 왕권을 긴밀히 하는데는 수평적인 불교만큼 적절한 게 없었을테니까) 전제왕권을 강화(이후 끊임없이 진골세력의 반란이 이어지고, 경덕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는 몰락한다)하고 ②대사면을 단행하며 전공을 후히 포상하면서 당나라와 전투참여를 독려하고, 구 백제의 관료에게 직급을 부여하는 등 포용정책을 확산(물론 백제 2등급 달솔이 신라의 5두품 10등급에 처해졌으니 차별이 극심했다)하고, 외적으로 ③옛 고구려지역과 유민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유화정책을 통해 당나라를 견제하며(결국 발해와 전쟁에서 패한 당나라는 유명무실했던 요동도독부까지 폐기하고 한반도 통치전략을 포기하니 그때가 고구려가 멸망한 90여년 후인 750년경으로 경덕왕대다), ④아직 일본열도에 웅크리고 있어 발본색원 되지 않은 백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탄압하는 방식(문무왕은 백제의 후신인 일본침략을 우려해 결국 동해바다에 묻힌다. 일본도 760년대에 와서야 신라침공계획을 완전히 포기한다)이었다.

 

 

<경주 감포에서... 바다에 왕릉을 조성한 유일한 예지? 죽어서 일본의 침공을 100년간 저지하고 신라인들을 결속시킨 문무왕은, 한번의 전쟁에서 사마중달을 쫓은 제갈공명보다 스케일이 훨씬 큰 인물이었을 거 같다... 그가 남긴 의지의 표현은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정서를 좌우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지금도 신라를 지키기 위해 묻힌 그의 릉을 바라보며, 자신의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는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목표를 성취한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정서적으로 더 중시하는 우리나라사람들에게(대통령선거도 그렇잖아!) 선덕여왕, 김춘추, 김유신보다 인지도가 떨어지고, 광개토대왕이나 근초고왕보다 지명도가 떨어질지 모르지만, 문무왕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군주로서 통일신라의 초석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정서의 방향을 설정한 인물이다. 16세기 분열된 이탈리아 통일을 바라며 마케아벨리가 모델로 삼았던 체사레 보르자는 실패한 군주임에도 <군주론>을 통해 그의 매력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정작 분열된 한반도 통일의 기반을 닦았던 성공한 군주 문무왕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관심 하다는게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닐까? 내가 보기에 문무왕은 체사레 보르자보다 훨씬 더 냉혹하거나 우아했고, 정치적 기제를 대중적 설화와 종교적 신앙으로까지 승화시키는 등 훨씬 더 입체적이고 스케일도 컸다.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그에 대해 할애하는 것이고...

 

 

아무튼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과 동시에 각각의 부흥군을 한편에선 진압하고 한편으로 직간접적으로 응원하면서 당나라와의 전쟁에 투입시킨다. 즉 복잡했던 600년대 중반의 전란을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으로 단일화했다. 전선의 단일화는 동질성을 강화시키고 통합의 정체성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신라의 시작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문무왕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세력을 보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결속하면서 지금의 경상도를 제외한 지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게 됐고, 중국에는 상대적 열등감으로 종속적 위치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되 일정한 거리를 두며,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무시하거나 철저히 배제하는 등 한반도 내부와 동북아 양국에 대해 고착될 우리의 감성을 태동시켰다고 생각된다(통일신라의 시작은 노예제가 봉건제로 넘어가는 생산양식의 문제도 아니고, 신분제의 변화를 이룬 정치적 계급혁명도 아니며, 불교가 유교나 도교로 주도권을 넘긴 사상의 문제도 아니니, 그 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한반도 내부의 문화적 동질감 형성과 대외적 정체성 통합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완전한 한반도의 동질성 획득은 고려부터 보다 확고하게 정착되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⑤내부적으로 불교를 통해 이들을 교화하니 그 하나가 원효 등을 통한 삼원귀일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정토신앙을 확신시키고, 또 하나가 의상을 통해 화엄종을 수용하여 통일된 교단을 재편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⑥당나라와의 결전에서 승리한 677년을 전후해 시급히 전란을 위로하고자 주요 교역로와 군사로에 종교적 상징물을 만드니, 영주 가흥리 마애여래삼존불상, 봉화 북지리 마애아미타불좌상,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군위 삼존석굴 석가여래좌상 등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보물221호... 그 옆에 마애불좌상이 하나 더 발견되었지만 그건 별개로 치고, 나는 이 삼존불상이 문무왕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다음편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원인을 표현한 왼손은 백제의 정읍 보화리와 똑같은 모습이어서, 나는 이 불상조성에 백제인들이 동원됐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무튼 고구려와 전쟁이 끝나고 당나라와 일차 교전이 끝난 후, 영주를 관통하여 낙동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오는 병사들에게 추모와 위로의 상징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군위 삼존석굴/국보109호...  이 삼존불 역시 경주까지 내려오는 문무왕과 그 병사들을 위로하고,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이 일단락된 677년 이후 문무왕이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탑리리탑을 비롯해 633년부터 677년 사이에 만들어진 위 유물들은,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포용과 백제 유민들에 대한 무차별적 동원을 통해, 전몰한 신라장병들을 위로하고 위문하기 위한 기념물이라는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이때에도 20만이 넘는 당나라 군대를 격퇴한 금강하구와 옛 백제지역에는 추모 기념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군 지도자였던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하고, 그 임지로 백제가 마지막 천도를 고려했던 익산에 머물게 했다). 이는 극히 개인적인 사견에 불과할 수 있으나, 당시 상황을 알아갈수록 그럴 개연성이 농후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야기를 ‘탑’에서 벗어나,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왜 의성이라는 지역을 선택했는지, 왜 오층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왜 토단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통일신라에서 본격적으로 탑이 만들어졌는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이야기가 많이 늘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거나, 다음 글은 건너뛰시는 게 편할 거 같기고 하고...^^)

 

 

<탑리리탑의 복잡모호한 형상에 대한 고민을 오늘 털어 놓았다... 명칭에서부터, 양식, 그리고 여러가지 특징들까지... 답사여행에 탑이 내게 의미가 살아나는 건 미적 완성도와 시대 정신, 그리고 장인의 숨결일 것이다... 그걸 살리려다보니 말이 길어진다...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느낌으로만 편안하게 탑과 대화하려면, 아직 채우고 비울 것들이 많다는 소리일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