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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11>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2)기념물이 세워진 지역...1306

 

 

 

 

 

 

 

7. 600년대 초반부터 후반, 문무왕대까지의 시대적 배경...

 

   1) 600년대 이후 신라의 교통로와 영주, 의성, 군위 등 유물의 상관관계...

   2) 600년대 신라에서 조형한 탑과 불상의 내용과 상관관계...

   3) 혼란스러운 600년대 중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신라유입 - 기술력과 노동력은 어떻게 확보됐을까?

 

 

 

 

2) 600년대 신라에서 조형한 탑과 불상의 내용 및 상관관계

  - 추모와 결의를 위해 기념물이 세워진 지역들...

   - 불상이 탑보다 먼저 만들어진 이유

   - 삼국시대 소형 불상과 신라 마애불의 특성... 

 

 

이 같은 생각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할까? 물론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라인들이 중시했던 만큼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유구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기념물들이 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어떤 상징물이든 기복적인 성격, 권위의 과시, 그리고 네트워크의 형성이란 목적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것이 평상시라면 개인 혹은 조직의 안전과 행복, 그리고 자유를 상징했을 때 대중성을 획득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유동적으로 급변하는 전시상황이었다면 대중을 겨냥한 상징적 기념물은 결의 혹은 추모나 위로의 성격을 추가할 수밖에 없다. 그걸 담당했던 것이 신라불교가 해야 할 중요역할이었을 것이고, 그곳에 신라인들은 승리를 위한 결의나 살아서 돌아 올 수 있다는 의지를 모으거나, 전몰장병을 추모하면서, 전란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기념물을 세웠는데, 그 지역이 첫째가 왕도인 경주였고, 그 다음이 위에서 설명한 주요 교통로의 중간 거점과 최후 방어지였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199호/경주/미륵불... 아무래도 신라의 본격적인 불상 조성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 같다... 610년 전후, 아직 경주에 입성하지 못한 김유신의 염원이 담긴 곳이 아닐까?> 

<동쪽 바위에 조성된 마애불은 관음보살로 추정되고 있다... 그외 남쪽바위 마애불은 지장보살로 추정되고... 내 생각이라는 점을 전제로 이곳 신선사 석굴사원을 풀어보면, 남향이 기준일테니 북쪽에 있는 미륵불이 본존불이 된다. 그리고 들어가는 방향 서쪽이 트여 있어 협시불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북쪽면 바위에 다섯구의 불상이 있고, 그중 가장 동쪽(미륵불과 가까운쪽)에 있는 불상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그렇게 되면 본존불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이 있는 셈이고, 미륵불 앞에는 지장보살이 세워진 구성이 된다... 미륵불이 주불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기복과 추모의 의미보다 결의를 우선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북쪽 바위 아래쪽에 새겨진 공양상... 당시 신라 화랑들의 복장은 저 모습이 아니었을지...>

 

 

 

실제 600~700년까지 조성된 신라의 유물을 불상부터 살펴보면 경주의 남산 불곡 감실부처(500년대 후반), 단석산 마애불상군(600초), 송화산 미륵반가사유석상(600초), 삼화령 생의사 미륵삼존상(644), 분황사 금동약사여래(640전후), 남산 배리 미륵삼존상(640전후),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660전후), 선도산 서악리 마애삼존불(660전후) 등과 봉화 북지리 미륵반가사유석상(600초 또는 중반)과 마애아미타불좌상(670전후),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670전후), 군위 아미타삼존석굴(670전후) 등이 있다(그외 신라제작으로 보기 힘들지만 국경지대로 보이는 곳에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600초), 청원 비중리 마애일광삼존불(600초), 영주 신암리 마애삼존불(600중) 등이 있고...). 여기에 탑을 추가하면 목탑으로는 황룡사(645)외에도 천주사, 영묘사, 기림사, 태화사, 사천왕사(679), 망덕사(685), 전탑으로는 석장사, 사천왕사, 삼랑사 등이 600년대 중후반 경주에 만들어졌고, 600년대 후반 의성 탑리리탑부터 석탑이 본격적으로 조성되는데 감은사탑, 고선사탑, 나원리탑, 장항리탑, 황복사탑 등이 있는데, 그 당시 조성된 불상과 탑은 경주와 특정 지역에만 집중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국보6호/14.5m... 700년대 초 조성설과 785년 원성왕대 조성설로 나뉘는데, 원성왕대에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설화가 있는 걸 고려해야 하는데, 그래서 세운 것이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추가설화인지 고민스럽다... 5층 지붕돌까지 나원리탑, 황복사탑과 달리 감은사탑 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상층 기단부 갑석의 부연이 작은 점들은 고식에 속하나, 하층 기단부 갑석의 돌출이나 지붕돌 전단부위에 풍령을 달았던 흔적은 700년대 후반 양식이어서 혼란이 있는 게 사실이다... 분명한 건 신라의 주요 교통로에 기념비적 목적으로 세웠다는 점이 아닐지...>

 

 

 

이걸 찬찬히 뜯어보면 ①경주를 제외하면 군위, 의성, 구미(선산), 영주, 봉화, 충주 등 매우 한정된 지역에 분포하며, 이는 모두 교통로의 중간거점이거나 최후 방어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②초기에는 석불이 대세를 이루다가 후반기에 들어 탑 조성이 늘어났으며, ③초기 불상의 주류를 이룬 것은 미륵신앙에 따라 미륵불과 미륵보살상이지만 후기에 아미타불로 바뀌고, ④불상도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초기부터 석불상이 주류를 이루며, ⑤탑 조성도 처음에는 목탑과 전탑이, 후반에서는 석탑이 주류를 이루며, ⑥석탑도 초기에는 5층탑과 3층탑이 혼재되다가 600년대 후반 삼층탑이 대세로 정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삼국시대 불상의 변천과정과 신라의 특징

   - 통일신라시대 탑보다 석불이 먼저 조성된 이유

   - 삼국시대 불상조성 변천과정과 신라 마애불의 특징...

 

 

 

그러면 왜 신라는 탑보다 석불이 먼저 조성 되었을까? 이는 신라의 불교 수용과정이 매우 복합적이며, 고구려/백제와 달리 그만큼 일관되지 못하고 응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강국으로 군림해왔던 고구려가 신흥사상인 불교에도 의연하고 도도하게 반응했다면, 백제는 신생종교인 불교의 문화까지 비빔밥식으로 융합시킬 줄 알았고, 이에 반해 후발국이던 신라는 1800년대 후반 일본처럼 매우 조급했다. 그런만큼 불상 조성과 관련해 600년대 삼국을 보면, 고구려는 이미 300년대 후반부터 벽화에 이어 500년대 초반 소형 금동불까지 양식적 완결성을 드러내고 불교를 외교와 정치의 도구로 학술적으로 정립한 이후 문화의 주도권을 도교로 넘겼다면, 백제는 모든 양식을 문화적으로 재수용해 500년대 중후반 불상조성에서도 목불, 금동불, 석불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였다. 이에 반해 토대가 미약했던 신라는 고구려, 백제, 수당의 불교문물을 직수입해 모방하기에 급급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고구려 불상의 특징/국립중앙박물관... 먼저 삼국시대 만들어진 소형 불상들을 통해 각국의 불상조성 변천과정을 사진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소조 보살 입상/평남 평원 원오리 절터 출토/6세기... 딱히 고구려 석불이라 지칭할 석불은 없지만, 현존하는 금동불 등을 통해 매우 세련되고 아름다운 고구려의 조예수준을 엿볼 수 있으며, 희귀성 등의 이유가 겹쳐 상당수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연가7년명 불상 사진은 자주 올렸으니 그렇지 않은 불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먼저 이 불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형 소조불이다...> 

<금동 보살 입상/보물333호/고구려/6세기... 대개 불상의 양식은 좌대와 구슬, 천의, 신체비례 등을 우선적으로 검토하는데, 저렇게 뾰족뾰족 튀어나온 천의는 북위양식으로 보고 있고, 백제, 신라에도 같은 유형의 불상들이 있다...> 

<금동 불 입상/국보186호/고구려/경기 양평 출토/7세기 전반... 한때 신라 불상으로 불렸으나, 정정되었다... 자신감 있는 표정이라고 설명하는데 잘 모르겠고...^^ 북제, 북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백제에서 만들어지는 불상의 흐름을 보면, 초기 전래된 불교가 개인의 기복적 성격에 소극적으로 전파되면서 호신불 형식의 소형불상(목불-석불-금동불)이 만들어지다가, 국가권위를 표방하기 위한 대규모 불상(소조불-금동불-석불)이 조성되고, 이후에 금력을 가진 귀족층들의 소장품으로 가정용 중간규모(소조불-금동불-목불-석불)가 공업적으로 대량생산되고, 마지막에 공업적 체계가 깨지면서 지방화 파편화(석불-마애불)되는 과정을 거치는데(우리나라 기독교전파 과정을 생각해보라. 개인용 십자가-집회용 성당납품-가정용 용품으로 확산해 나가는...), 600년대까지 신라에서는 그런 보편적 흐름이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백제 불상의 특징... 이제 백제 불상으로 넘어갈까? 여기서도 백제의 소형 불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금동 불 좌상/서울 뚝섬 출토/400년대 초반...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지 얼마 후 금동불로 엄밀히 백제에서 제작된 것인지, 중국이나 고구려 제작인지 모르지만 출토된 지역을 가지고 분류했다... 이 작고 작은 불상이 가진 의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라는 점... 불교가 전파되면서 처음에는 이처럼 작은 호신불이 유행했을 것이라는 걸 상기하기 위해 올린다...> 

<뚝섬 출토 불상 확대... 확대해도 이만큼이지만, 복식과 좌대에 대한 단초들은 읽을 수 있다...>  

<납석제 불 좌상/보물329호/백제/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500년대 후반... 특별히 이 불상을 올린 이유는 불상을 만든 소재의 다양함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현재 목불은 국내에는 없고 일본 법륭사 등에 남아 있으나 석불도 다양한 소재를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남산 불곡 감실부처와 같은 선정인 양식이니 복식과 좌대를 비교해 볼만하다...> 

<금동 반가사유상/보물331호/백제/600년대초... 흔히 대좌의 독특함 때문에 '방형대좌 반가사유상'으로 불린다... 이 시기 백제의 반가사유상은 매우 사실적이면서 정교하지만, 극도의 추상성을 함께 갖췄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600년을 전후해 선도산과 단석산 등에서처럼 대형 마애불이 만들어지고, 분황사에서는 대형 금동불을, 북지리 등에서는 미륵보살석상이 동시에 조성됨에도 고구려, 백제에서 유행했던 소형 금동불(호신불 혹은 사리장엄용)의 수준이 낮거나 국경지역에 한정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기복적 성격 → 국가정책으로서 체계화 → 사회문화로 확산 → 개별적 이해와 타력신앙으로 후퇴하는 불교정착의 보편적 흐름과, 중앙을 통해 각 지방으로 확산되는 일반적 흐름에서 비켜나 있거나, 각각의 단계가 충분히 완숙되지 못한 상황에서 동시 복합적으로 중첩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 미스 백제(부여) 선발...^^

 

 

<금동 보살입상/국보184호/구미 선산 출토/대구박물관... 1976년 선산 봉한2동의 한 야산에서 3구의 금동불이 한꺼번에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다. 곧이어 이 불상들은 각각 국보 182,183,184호로 지정되고... 구미 선산 출토이기에 당연히 신라의 불상이라 명명되어 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른다...^^ 개인적으로는 이와 거의 같은 양식의 불상이 부여 규암리에서도 비슷한 수가 발견되었는데, 나는 이중 183,184호 금동불은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만들어진 백제불상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즉 소형불상은 그만큼 소장과 이동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내 사진은 맘에 안들어 이건 스크랩했다...>  

 

<금동 보살입상/국보183호/구미 선산 출토/600년대 전반/대구박물관... 정말 아름답지 않는가? 이제부터 부여 규암리에서 출토된 불상들과 비교해 본다...> 

<금동 보살입상/국보293호/부여 규암리 출토/부여박물관... 오래전에 찍은 사진이지만, 정말 맘에 안 든다...ㅎㅎ 아무튼 위 183호와 비교하면 틀린 점들보다 공통점이 많다... 물론 183호가 훨씬 세련됐고, 특히 세번 꺾인 자세의 자연스러움은 어디 따를데가 없는데, 이 입상은 상당히 경직돼 보인다... 그럼에도 이 불상의 얼굴을 찬찬히 보면 그럴 수 없이 평온함과 온화함이 함께 살이있다... 내 카톡스토리 프로필 사진이다...ㅋㅋ>  

 <금동 보살입상/부여규암리 출토/소재지 미상이라 하는데, 예전 확인된 자료로는 이치다쓰기로라는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꺾임은 더 요염해 보는 이를 더욱 즐겁게 한다... 그래서 국보183호 관음보살상이 선산에서 출토됐다는 정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규암리라 굳게 믿으면서, 3불상 사진을 놓고 늘 생각한다... 미스 백제는 누구일까 하고...ㅎㅎㅎ>

 <그리고 일본 법륭사에는 이들보다 시대가 약간 더 떨어졌지만, 매우 뛰어난 미감을 가진 금동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어 같이 스크랩해 올린다...>

 

 

 

 

또한 사족을 붙인다면, 신라에서는 인도나 중국의 석굴을 차용한 보다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양식도 초기부터 수용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라는 진흥왕대인 500년대 중후반에 최초의 석불을 선정불좌상으로 경주남산 불곡에 조성했는데 하나뿐이지만 이는 분명 석굴양식이었고, 이후 김유신의 주도로 만들어진 단석산 마애불좌상도 석굴사원 양식일 뿐만 아니라, 문무왕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역시 옅은 석굴형식이며, 다시 군위삼존불상 완전한 석굴사원식 구성이다(결국 이런 경험이 있어 경덕왕대인 700년대 후반 동북아시아 대승불교, 최후의 꽃인 석굴암은 가장 완벽한 인공석굴사원 양식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일관성을 잃지 않은 오랜 전통의 계승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신라의 석굴 조성 변천과정...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198호... 나는 이 불상이 신라 최초의 석불이라 생각하는데, 그 조성시기를 늦어도 500년대 후반으로 보고 있다... 즉 최초의 석불이 석굴양식으로 조성됐다는 말이다... 위에서 소개한 보물329호 부여 군수리 납석제 불상과 비교해 보시길...>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199호... 600년대 초반 만들어진 이 불상군도 석굴 양식이었다... 특히 황수영박사가 강하게 주장하는데, 상부에 목조건축 유구가 있었다는 말도 있고... 아무튼 나는 자연지형을 이용한 석굴사원 양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주 삼화령 생의사 미륵삼존불/644년... 발굴 기록에 의하면, 이 삼존불  역시 인공석굴 속에 안치 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라인들의 석굴조영은 끊이지 않은 염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봉화 북지리 마애 여래좌상/국보201호... 불상을 바라보면서 왼쪽이 유실되었으나, 오른쪽을 보면 깊이 파 들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석굴의 양식을 살리려는 흔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군위 삼존석굴/국보109호... 600년대 후반 문무왕이 조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삼존불은 석굴에 안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화강암을 뚫어 석굴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일임에도 신라인은 그 걸 고집했다... 본존불 뒤쪽의 광배를 확인할 수 있어 이 사진을 골랐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국보24호/700년대 후반... 경주 남산 불곡에서부터 보면 대략 200여년의 시차가 있다... 석굴암은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담아 가장 근원적인 꿈을 구현한 최후의 이상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충주 미륵사지... 고려시대 조성된 이 미륵사원이 우리나라 석굴의 최후 형태이 아닐까 싶다... 석불 주위 석축을 보면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둥굴둥굴한 자연석이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재로 횡렬을 맞춰 조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화재로 인하여 훼손된 석재로 인해 그런 느낌을 얼른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지만 감실까지 규칙적으로 조성된 걸 보면 대단한 공력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초기부터 수용된 마애불에서 그 연원을 추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는 자연석굴을 활용하거나 만들기 어려운 우리나라 기후와 지질구조에서 신라인들은 석굴을 대신하여 그 형식을 차용한 마애불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혹서기나 장기적 우기가 없는 우리 기후조건에서는 굳이 석굴이 아니어도 화강암 재질로 만들어진 마애불은 석굴과 같은 영구적 보존효과와 수행공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며, 조금 비약한다면 경주 남산은 인도의 아잔타, 엘로라석굴이나 중국의 돈황, 운강, 용문석굴과 같은 의미로 조성된 거대한 석굴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312호... 얼마전까지 보물이었는데 국보로 승격됐고, 경덕왕대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서 남산을 한 눈에 보기 어렵고, 정작 남산에 오르면 남산을 볼 수 없다...^^ 해서 골라본 사진인데, 다음에 가면 거대한 석굴이라 생각하고 경주 남산을 다시 카메라에 담아봐야겠다... 아무튼, 누가 국보지정을 추진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남산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꿰뚫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경주 남산을 한마디로 정의하고 그 중 대표적 유물을 추천한다면 주저없이 이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꼽는데 의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뒤쪽 바위 봉우리 끝에 유희좌를 갖춘 마애불이 한기 더 조성돼 있다)... 남산의 특징도 살리면서, 자체의 품격도 높이고... 멋진 제안이라 본다... >

 

 

 

 

 

아무튼 이런 신라의 불상조성 변천의 특성은 탑과 불상 조성의 상관관계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가람배치의 특성으로 고구려는 1탑 3금당, 백제는 1탑 1금당, 신라는 2탑 1금당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에서 한기의 탑이 차지하는 비중은 3금당에 안치된 불상의 위상과 맞먹는다(1:0.33)는 말이 되고, 백제에서는 탑과 불상이 있는 금당은 1:1의 비중이었음을 의미한다(그것이 법륭사의 경우처럼 중문을 막 들어서면 탑과 금당이 병렬적으로 배치된 이유, 백제에서는 이미 538년 이후 사비시대부터 직렬적인 1탑1금당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중국적 수직체계가 수용된 다음에는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는데, 이는 수직서열에서 불상이 있는 금당이 탑보다 중요한 위상으로 부각됨을 의미함을 뜻하다. 그리고 신라는 문무왕대부터 2탑 1금당(0.5:1)으로 가람을 배치한다. 물론 이 단순비교를 역으로 해석하면, 통일신라 초기에는 하나의 금당에 두기의 탑을 세울 정도로 탑의 비중이 막강했으나, 전반적으로는 탑이 중시되다가 탑과 불상이 동급의 위상으로 수정되고, 마지막엔 불상이 탑보다 주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 신라의 가람배치 변화... 

<황룡사 가람배치도... 황룡사는 100여년에 걸쳐 조성되면서 마지막에 구층목탑이 645년 완공 되는데, 가람배치가 계속 바뀌었음이 확인되었다... 그 최초의 형식은 고구려식의 1탑3금당에서 출발했다...> 

 <법륭사 가람배치도... 600년대 초 법륭사 가람배치로 탑과 금당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백제식 1탑1금당의 초기형태라 생각한다...>

 <경주 나원리 발굴조사도... 나원리 오층탑에 가보신 분들은 금당이 어디였을지 궁금해 했을 것 같다... 그리고 현재 도로를 통해 진입(도면의 오른쪽 위)하면서 계단 위의 탑을 보면, 그 뒤로 금당이 있을 수 없음도 확인할 수 있고... 어쩌면 이 도면이 그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즉 나원리사지의 금당은 바로 진입하는 그 곳이고, 만약 이 절이 남향을 향하고 강당이 북쪽에 있었다면, 이 절의 가람배치는 법륭사와 같은 병렬식 구조가 된다... 어째든 600년대 후반에서 700년을 전후해 조성된 이 곳은 1탑1금당 방식이다...>

<감은사지 가람배치도... 682년 조성연도가 확실하고, 2탑1금당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 금당과 불상을 노출시키기 위해 정면의 탑을 두개로 나눴다는 접근도 있지만, 그만큼 탑의 비중이 낮아졌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설명이 가능하다...> 

<감은사지 전경...>

 

 

 

 

또 이를 비약시킨다면, 인도에서 유래돼 불신사리의 묘제로 출발한 불탑은 가람건축과 무관하게 대중들의 통행이 빈번한 사거리에 독립적으로 조성되었으나, 차츰 승원이 탑원에 유입되고 강당의 구조까지 갖추면서 독자성이 조정되기 시작하고, 차츰 인간적 모습의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탑은 홀로설 수 없지만(통일신라에서 가람과 무관하게 불탑만 조성된 경우는 팔공산 선본사 삼층탑, 영동 망탑봉 삼층탑 등 극히 일부다), 불상은 독립적으로 조성되어도 완결성을 갖춘다(송광사에는 탑이 없을 뿐만 아니라, 탑이 없는 사찰은 많지만 불상 없는 사찰은 없다. 그리고 불상이 없는 사찰을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탑과 불상이 혼용된 사리계단이 존재한다)는 인식으로 변형됨을 의미하게 된다.

 

이때부터 불상은 외딴 곳 깊은 산중에 홀로 조성되는데 이의가 없어지면서, 백제에서는 예산-태안-서산 등에 마애불이 500년대 중후반부터 조성된다. 이에 반해 뚜렷한 불탑관과 불상에 대한 교리적 심화와 관점이 없었던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가람배치가 정립되기 이전인 600년대 초반부터 경주 남산이나 단석산, 선도산, 영주 신암리 등에 마애불이 먼저 조성되기 시작, 1탑3금당(황룡사) 가람배치에서 2탑1금당(감은사, 고선사, 장항리 등)양식으로 변화하는데 채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문무왕대에 시작된 새로운 불탑관의 수용(조탑공덕경과 다라니신앙 등)과 정착은 통일신라에 있어 매우 획기적이며 급작스러운 변화라는 말이다.

 

 

<팔공산 선본사 삼층석탑... 생각해보면 탑이 홀로 존재하는 경우는 경주 남산 늠비봉을 포함해 3곳을 넘지 않는다...>

 

<영동 영국사 망탑봉 삼층탑... 비록 홀로 서 있다 하더라도 넓게 잡은 절의 영역에 포함될 수도 있고... 부연해서 탑과 불상의 비례관계를 생각해본다면 ; 탑골과 부처골은 있다. 탑리는 있어도 부처리는 없다. 00산 00불은 있어도 00산 00탑은 없다. 다만 00봉00탑이 있을뿐이고... 이 말은 무슨 의밀까? 마을에 탑과 부처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부처리가 따로 없고, 탑리만 있다는 말은 탑이 그만큼 귀하거나, 일상생활과 가까운 곳 위조로 조성됐다는 말이 된다... 또한 00산 00불이 일반적이란 말은 부처는 그 산을 대표하는 산신과 동격으로 취급되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탑과 부처는 상호보완적이지만, 위계도 분명 달랐다는 말이 아닐런지...>

 

 

 

이는 신라의 불상조성과 가람배치의 변화과정은 보편적 발전경로를 이탈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면서 근본을 잃지 않는 방향에서 일관성도 갖췄음을 의미한다는 말이 되는데, 600년대 중반 경주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목탑과 전탑을 만들면서(현존하지 않을 뿐 분명 존재했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곧바로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즉 가람과 탑은 경주에, 불상은 지방이라는 이원적 체계가 유지된 것으로, 조성한 주체는 탑과 불상을 동시에 만들었지만, 만들어진 공간이 달랐기에 우리에겐 불상조성이 우선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게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탑과 조합을 이루거나, 가람의 부속으로 불상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독립적 완결성을 갖춘 마애불과 석굴이 여러 곳에 동시에 조성됐다는 말은 그만큼 응축적이고 복합적으로 삼국의 문화를 수용한 통일신라만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왜 이렇게 신라의 불상조성은 탑 보다 선행하고, 불상과 탑의 양식은 혼재되거나 급격하게 변할까? 그건 한마디로 신라와 삼국(백제,고구려,당)간의 전쟁 추이가 급하게 요동쳤음을 의미한다. 먼저 불상양식의 변화부터 살펴본다. 미륵불이라는 것은 미래에 도래할 부처를 상징한다. 때문에 600년대 초반 신라가 그려낸 것은 미륵불이 아니라 젊음을 간직한 미륵보살이고, 이는 추모나 위로의 성격이 아닌 결의의 의미를 갖는다. 즉 앞으로 성장하여 신라를 이끌어 나가는 동량들에게 꿈과 희망의 상징인 것이다. 이에반해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주불로 사후를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죽은 이들의 추모와 위로의 성격이 강하다. 결국 6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백제, 고구려, 당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할 신라에서는 미륵보살 신앙이 대세를 이루다가, 670년경 삼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죽은 이들을 위로할 아미타불 조성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적 배경이 된다는 말이다. 이는 600년대 초반 신라의 화랑을 이끈 원화로 선정된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미륵보살을 자처했다는 점이나, 화랑을 미륵선화로 불렀다든지, 화랑을 따랐던 낭도들을 용화향도(미륵불의 상징인 용화수에서 유래했고, 그들 중 가장 유명한 게 김유신을 따르던 낭도들이다)로 부르는 근거가 되고, 그들이 신라일대를 순회하면서 수련하는 주요지점엔 미륵보살이나 미륵불을 만들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 석불을 통해 본 신라의 미륵불과 미륵보살상... 

<충주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 중 미륵보살상... 윤곽을 확인 할 수 있는 사진이 없어 탁본한 사진을 스크랩했다... 이 마애불은 신라인이 조성했을지, 백제 혹은 고구려인이 조성했을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600년을 전후해 이 지역에는 여러 형태의 마애불들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경주 송화산 출토 미륵보살상/경주박물관... 그리고 600년대 초반이 되면 이렇게 완전한 양식의 석조미륵보살상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 불상 역시 김유신과 관련 있는 것으로 많이 설명되고...>  

<경주 삼화령 생의사 미륵삼존불/644년... 선덕여왕대다... 이 미륵불 역시 좌상이다...> 

<경주 남산 배리 석불입상/보물63호/역시 선덕여왕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불도 미륵불로 본다...>  

<봉화 북지리 석조 미륵반가사유상/보물997호/경북대학교... 아마 석조 반가사유상 중 가장 크면서 세련된 조각기법과 안정된 자태를 보여주는 반가사유상이 아닐까 싶다... 온전한 모습이었다면, 삼국을 통일한 미륵신앙의 완성태를 담은 모습이었으리라 상상하게 한다...>

 

 

 

또 하나는 불상이 현재와 미래, 과거 등을 표현하는 다양한 상징체계를 갖춘 완결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면, 탑은 부처의 사리봉안과 전통적인 장례풍습이 습합된 결과임을 감안한다면 자연스럽게 추모와 위로의 성격이 새롭게 추가되면서 불탑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불상은 미륵불과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으로 나눠부르지만, 해탈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장치인 탑에는 부처의 생애를 그린 팔상전이나 붙일뿐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X층탑, X각탑 등 형태로만 부른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600년대 초중반 신라에서는 주요거점이기는 하지만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서 왕실이나 국가차원에서 공력을 들인 탑을 만들 이유도 여력도 없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내 생각이지만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분황사탑을 비롯해 기록에만 존재하는 목탑과 전탑을 제외한다면, 660년대 이전에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 탑을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거나 끝날 무렵에 전몰장병을 위로하기 위해 군대의 첫 집결지인 의성 탑리리에서부터 석탑을 만들기 시작해 이때부터 탑 조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 문무왕이 주요 교통로에 만든 기념비적 유물들...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 당나라와의 교전에서 승리한 문무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주로 들어가는 길을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고자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아미타불이 필요했겠지... 그 첫 출발은 이곳이 아니었을까?> 

<봉화 북지리 마애아미타불좌상 부분... 그리고 오랫동안 김유신과 연관이 깊은 이곳 북지리에도 거대한 아미타불을 같이 조성했겠지...>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그리고 군마가 가장 활발하게 집결했던 이곳에 역시 추복의 의미에서 탑을 세웠겠지..> 

<군위 삼존석굴... 지방의 병사들과 의성에서 해산한 이후, 중앙군만 이끌고 내려오던 길, 이제 팔공산만 넘으면 경주가 지천인 곳이다... 그 마지막 여정에 만든 게 이 군위 삼존석굴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