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통일신라 불교의 출발과 경주 감은사/고선사탑의 진정한 의의
1) 감은사와 고선사지 삼층석탑(682년)
자, 이제 통일신라가 전성기의 토대를 갖춰가는 600년대 상황과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기본 조건들을 살펴봤다. 정리하면 정림사, 미륵사, 분황사탑 등 목조건축의 번안과 전탑의 모방에서 시작했던 우리나라 석탑 역사는 ; 왕궁리 오층탑에서 백제식 양식을 갖추고, 탑리리 오층탑에서 신라식 실험을 거친 후, 이 모든 경험과 전통을 계승하여 통일된 나라답게 새로운 유형의 석탑을 정립해 나가는데, 그것이 앞으로 살펴볼 감은사(고선사)탑으로 백제에서 오층 정림사탑이 문득 만들어지듯, 통일신라는 갑자기 삼층석탑으로 그 구조와 양식적 기틀을 완성한다. 그리고 곧바로 황복사탑에서 신라석탑은 정형화되고 750년 석가탑, 다보탑에서 최고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는 목탑과 전탑의 구조와 결구, 체감과 미감 등을 융합하면서, 점차 대담하고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추상화, 점차 작아지고 단순해지는 모형화, 그리고 갈수록 간결해지는 구조로 공예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인해 부재 수가 줄어들고 담백한 석탑 고유의 질감을 살리면서 완성돼 나가는데, 신라의 감각과 백제 기술의 조화 덕분이다. 그러면 과연 감은사(고선사, 이렇게 고선사탑을 함께 표기한 이유는 동시기 동인물이 세탑을 만들었다는 가정 때문이다)탑은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열어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삼층석탑이란 의미만 있는 것일까? 그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의미들을 되살려야 하지만, 나는 삼층석탑을 정형화한 시원적 형태를 넘어선 보다 크고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은사지 전경... 감은사탑 앞에서 뛰었던 가슴을 생각하며, 늘 물었던 물음이 있다... 과연 이 탑은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시원이란 의미만 있는 것일까? 하고... 오늘은 이 물음에 답을 내려보고 싶다...>
왜냐하면 670년 전후까지 목탑과 전탑을 제외하고 석탑이란 걸 만들어 본 경험도 없던 신라는, 의성 탑리리탑을 만든 자신감을 바탕으로 감은사쌍탑, 고선사탑을 만든 이후 불과 1~20여년 사이에 경주 나원리오층탑, 황복사삼층탑, 장항리오층쌍탑을 조성한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 가장 아름답고 미려한 석탑들을 폭발적으로 만들면서 석탑이 불교예술을 주도하는 700년대를 열었고, 이후 신라는 불상 조형을 정형화하면서 석불좌상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경주남산을 마애불과 석불, 석탑이 어우러진 불교의 성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석등과 석당간지주에 이르기까지 돌로 만든 모든 것 - 가히 석조예술의 전성시대를 열게 되는데, 그 신호탄이 바로 감은사(고선사)탑이기 때문이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이 탑을 보면서 늘 생각했다... 감은사탑과 비교하면 어는 탑이 먼저였을까? 그리고 누가 이런 탑을 기획했을까? 하고... 오늘, 이 의문에 대한 답도 찾아보려 한다...>
이는 (1)첫째, 당시 불탑을 만드는 양식과 소재에서 목탑과 전탑보다 신라인에게 가장 대중적이면서 효율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소재로 <돌로 만든 불탑>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630~670년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중국, 일본, 한국 모두가 참전한 동북아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양상이었던 만큼 신라의 시야는 넓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해 신라는 대외적인 정치적 독립성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율성과 정신사상에서의 정체성 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점이다. 때문에 당시 삼국을 주도하던 불교문화의 상징인 불상뿐만 아니라 불탑 조성에서도 목탑과 전탑, 석탑은 신라내부를 비롯 국제적으로도 치열한 경쟁체제(?)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때 신라는 독자적으로 석탑을 선택했다는 말이 된다.
<보탑사 삼층목탑... 현재 30m 이상 규모로 복원된 목탑이 두개 있는데, 하나가 보탑사 목탑이고 또 하나는 부여의 백제문화단지내에 있는 능사 오층모탑이 그것이다... 보탑사는 신응수, 능사는 최기영 대목장이 주도했고, 이 분들은 각각 우리나라 궁궐건축과 사찰건축 대목장의 맥을 잇고 있는 분들이다. 서로 경계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경쟁체제에 있는 분들이라는 말... 현재 우리나라 동종을 생산하는 회사도 역시 2곳으로 경쟁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렇듯 분야 내부에서도 경쟁체제가 있는데, 700년대 전후 전탑과 목탑, 그리고 석탑조성에서는 경쟁체제가 없었을까?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치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신라에서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석탑제작 그룹이 당대의 불탑조성 프로젝트를 수주한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신라는 어떤 이유에서 그들을 선택했을까?>
중국 전탑은 목탑을 번안하여 자신들의 미의식에 맞게 중후장대한 괴체성을 띤 전탑을 창조했다는데 의미가 있고, 일본 목탑은 동북아 최초의 불탑인 목조양식을 지속적으로 계승하면서 순수성을 지키는데 만족했지만, 신라는 오랫동안 전승된 거석신앙을 불교에 융합하여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많은 양을 대중들에게 보급할 수 있는 석탑을 선택했다. 실제 중국의 전탑, 일본의 목탑이 적지 않지만 신라가 선택한 석탑양식은 많은 수량뿐 아니라 천년을 넘어 오늘날까지 지속적이고 전국적으로 분포하지 않는데서 차이를 보인다. 물론 고려의 팔관회나 야단법석을 통해 역으로 신라 사찰의 폐쇄성을 추측하고, 사찰의 부속 장엄으로 조형되는 불탑이 불상에 비해 개방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있지만, 통일신라 석탑은 가장 쉽고 가장 지속적으로 대중과 친숙하게 교감할 수 있는 상징으로서 생명력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그 출발이 680년대 감은사(고선사)탑이 아닐까 싶다.
<영월 주천강 인근의 작은 삼층석탑... 이렇게 우리 주변에는 이름없는, 파손된, 그리고 규모없는 석탑들이 많다... 또 쓰러지고 도괴돼도 다시 마을사람들은 형식과 미추를 따지지 않고 다시 탑을 세웠다... 그 강하고 질긴 생명력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
또한 (2) 둘째, 감은사(고선사)탑은 부처의 무덤(사리봉안), 국가의 상징적 기념비, 왕실 혹은 개인의 추모와 기복을 담았던 여러 의미들을 하나로 통합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만들어진 불상이나 불탑 등은 석가의 공덕으로 포교의 확산(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가족의 건승, 왕실의 안녕(미륵사탑), 국가의 부국과 평화(황룡사탑)를 기원하는 등 조성목적이 분명했던만큼 감상하고 소유할 수 있는 주체가 한정적이었고 그만큼 양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목적에 부흥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불상과 불탑을 생각할 수 있는데, 불상의 복장유물에는 탑이 들어가지 않지만, 탑의 사리구에는 불상뿐만 아니라 본원의 목적인 사리와 불경, 발원문, 심지어 탑(소탑)까지 함께 봉안된다. 즉 불상 복장유물이 부처의 형상이라는 소극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데 반해, 불탑에는 부처의 공덕과 국가의 안녕, 그리고 개인의 추복이라는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여지가 불상보다 넓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감은사 서탑 사리구/국립중앙박물관... 사리장치는 단순한 함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금당 내부의 축소판으로도 만들어졌다... 분명 불탑은 불상 보다 함유할 수 있는 의미와 상징성이 훨씬 크고 넓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봉화 서동리 동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 99소탑/9세기/대구박물관... 그리고 탑 사리장엄물에는 탑도 있었다... 탑 속에 탑은 들어가도, 불상 안으로 불상은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의미들을 통합하는데 불탑은 불상보다 상징성을 높일 수 있었고, 이는 불탑의 신성을 강화하는 것임과 동시에 불탑의 가치를 더욱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특히 600년대 후반에서 700년대 중반까지는 국가의 상징적 기념비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필요한 시점이었고, 복합적 의미가 통합된 불탑의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또한 변화된 불탑의 의미에 걸맞게 국가의 상징적 기념비로 불탑을 조성하려면 금전적 능력만이 아니라, 국가나 왕실의 통제를 받아야 했을 거라 생각된다. 역으로 생각하면, 국가나 왕실이 직접 관여하지 않을 경우에는 불탑의 규모나 높이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감은사(고선사)탑은 황룡사탑 이후 나라에서 조성하는 기념비에 가장 적합한 소재로 선택되면서 호국불교의 요구가 강할수록 불탑조성은 장려되었으며, 이렇게 복합적이고 상징적 의미를 수용한 불탑의 정체성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수요만큼 불탑은 쉽게 확산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불탑을 조성하려면 금전적 능력만이 아니라 진신사리를 봉안해야 하는 만큼, 이를 보유한 국가나 왕실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황실이나 교단의 지도층과 직접 교류가 가능한 진골그룹만이 일정량을 수급할 수 있었을테니, 왕실을 제외하면 불탑 건립은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그리고 첨언하면 고려시대부터 숭유억불을 주창했던 조선시대에는 불탑조성 열기가 급속히 침체되는데, 불상과 승탑조성으로 무게중심이 이동되는 불교내부의 변화도 있지만, 이런 국가의 기념비란 초기의 상징성이 오히려 제약의 요인이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신복사지 삼층석탑... 생각해보면 고려시대 불탑조성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급격히 저하된다... 물론 사찰건축의 변화와 선종의 영향도 있었지만, 석탑이 갖춰야할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예산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지출이 필요했을 것이다... 불탑조성이 어려워진 외적 요인도 있었다는 말이다...>
<낙산사 칠층석탑/조선, 세조... 낙산사 화재 이후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것은 역시 석탑이었다. 목조건축도 불에 타고, 동종도 화마에 녹아내렸지만, 석탑은 건재했다... 그 영원성이 내포된 소재로 석탑은 질긴 생명력에 신성을 얻을 수 있었다...>
2) 통일신라 불교와 원효대사
- 불교공인과 중앙집권체제 완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짧은 메모
- 원효대사와 전륜성왕신앙이 불탑조성과 가람배치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3) 세 번째, 감은사(고선사)탑은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는 통일신라 불교체계의 변환점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신라의 불교는 왕즉불 사상과 미륵신앙으로 대변되는 호국적 실천불교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 불교의 겉옷만 걸쳤을 뿐 내용이 없었다. 고구려 불교는 현학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인식론적 체계를 갖춘 삼론종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겸익의 율종으로 대변되는 백제 불교가 자력 수행이란 소승불교의 특징을 살리면서 왕실과 타협했다면, 신라는 왕이 곧 부처라는 기형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미륵선화를 자처하는 화랑을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로 무장시켰음에도, 큰 틀에서 보면 변형된 무속신앙과 기복을 추구하는 타력신앙의 어설픈 타협을 벗어나지 못했었다는 말이다. 그후 자장의 등장으로 율종에 입각한 불교교단을 정립했다고 하지만 사상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때 등장한 이가 바로 원효다.
<분황사 원효대사 진영/1956년 박봉수 作/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박태원, 한길사, 2012년 간에서 스크랩... 앞으로 스크랩된 몇몇 자료들은 동 책에서 촬영한 것이다...>
* 불교공인과 중앙집권체제 완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짧은 메모...
불교가 전래되면서 고구려 등 삼국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다는 통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당대의 권력과 왕실이 국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금보다 나은 미래의 희망을 갖는 변혁 의지를 수용하기 위해 타협한 것이 중세까지 종교의 역할이었고, 이를 정립한 것이 철학적 사상이다. 때문에 불교공인 시점과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시기가 비슷해 오해할 수 있지만, 인간성을 회복하고 정신적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의 본질은 중앙집권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
사실 중앙집권체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율령이 반포되어 있는가? 이를 통치할 지방관을 파견할 제도(과거제)와 그들을 균질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관료육성체제(고구려 태학, 통일신라 국학, 발해 주자감, 고려 국자감, 조선 성균관 등)가 확립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외부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정규군의 보유와 이를 관장할 수 있는 상시적인 행정체계, 그리고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조세권의 확보는 일관된 행정조직과 이들의 행동지침이 담긴 율령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권위와 명분으로 제시되는 게 공통된 역사의식(국사편찬)과 국가의 정체성인데, 정체성은 각국의 신화와 신앙으로 확립될 수 있지만, 그 체계를 담당했던 것은 중세까지의 유럽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고전적 공화주의)이었다면, 한자문화권에서는 공자와 맹자의 군주론(유학)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
<서울 성균관... 1289년 고려의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시대까지 최고 학부기관으로 계승됐다... 저 좁은 한칸방에서 수학했던 이들은, 옆의 나무처럼 나라를 떠받드는 동량으로 입신했을 것이다...>
또한 신정이 통합된 정치제도는 독재적인 전제정치화 되거나 폐쇄적인 전체주의화 될 수밖에 없고, 이는 관념적인 교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지금까지 역사다. 즉 국가의 통치체계는 종교지도자나 사상사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경륜가를 요구한다. 때문에 불교를 공인했던 군주들은 당시 국제적이면서 진보적인 불교사상에 개방적이었고, 이미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 종교를 통치에 활용할 줄 아는 현명한 경륜가들이었기에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던 것이지, 불교를 수용했기 때문에 중앙집권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일례로 고구려에서 불교를 공인한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과 율령 선포를 통해 중앙집권 체계를 정립한 군주였고,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역시 율령을 반포했던 왕으로, 이 제도들은 불교가 주도했던 게 아니라 국사편찬 등에 승려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뿐이다.
오히려 백성들의 요구에 부흥하는 진보성과 개방성을 잃었을 때 불교는 중앙집권제의 가장 강력한 독이 되었던 게 역사의 진실이다. 즉 불교의 본질과 종교의 역할을 망각하는 순간 왕실은 전복되고 시대는 바뀔 수밖에 없으니, 남북조시대 중국의 많은 왕조가 그랬고, 당나라 멸망에도 선종과 미륵사상은 큰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660년대 신라는 미륵신앙을 통해 통일을 완수하지만, 900년대 신라는 선종과 미륵신앙에 의해 몰락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듯, 불교의 진보성과 원심력은 중앙집권제의 약보다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화엄사 석등... 견훤이 조형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등은, 통일신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미륵신앙의 상징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종교와 사상은 늘 그렇듯 양면에 날을 갖춘 칼과 같은 게 아닐런지...>
게다가 중앙집권을 통한 지방의 통제가 간접통치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늘날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이나 독일이 칠레의 정치문화보다 후진적인 것도 아니고, 15세기 당시, 유럽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외에는 꿈도 못 꿨을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갖췄던 조선의 통치양식을 선진적이라 칭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통일되지 못한 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이나 피렌체, 베네치아 공국보다 효율적이었거나 국력이 강했는지는 애초 별개의 문제란 말이다. 즉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정치발전의 수순이나 완성태로 이해할 이유가 없는데, 그 역할을 위해 불교공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는 거나 같은 게 아닐까?
<피렌체 두오모 성당... 1296년 착공해 175년만인 1471년에 완공됐으니 고려멸망과 조선건국 시대를 관통한다... 고려나 조선도 이만한 것을 만들었느냐의 문제는, 통치와 집권의 효율성과는 분명 관계가 없는 별개의 문제다... 딱 그만큼만 생각하자...^^>
결론적으로 부국강병의 방도나 통치를 위한 철학이 아닌 불교는, 중앙집권제 확립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다만 국가정체성 확립과 통합의 명분을 제공할 수 있는 불교를 활용한 것은, 그 속성을 간파한 군주들의 몫이지 불교의 역할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670년대 전쟁이 일단락된 이후 원효와 의상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원효만 살펴보더라도 그의 활동은, 전란이 지속되는 과정부터 꾸준히 신라의 불안전한 정치구조를 안정시키고, 통합의 구심이 되면서 신라의 정체성확립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지만, 그것은 왕실이 이용할 수 있는 선택이나 교단의 후원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신라왕실에 뿌리내린 전륜성왕신앙은 원효의 불교사상이나 행적과 충돌이 있었을 것이고, 문무왕은 자신의 여동생이자 사돈인 요석공주를 동원해서라도 원효와 타협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가 중앙집권체제로 9주 5소경을 정립한 때는 문무왕 사후 원효가 열반에 들기 1년 전인 685년에서야 가능했고, 의상의 화엄십찰 중 하나인 해인사 창건이 802년까지 내려가는 사실을 보더라도 화엄종 교단이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통일신라 전역에 조직적 체계를 정착시키는데도 100여년이 넘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점을 감안하면, 원효나 의상의 활동을 왕실이나 교단이 중앙집권제 확립을 위해 활용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들의 활동범위를 통제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직접적 관련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애초부터 검증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5소경하면 고구려나 백제의 5부족 연합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금성까지 포함하면 엄연한 6경체제가... 신라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5라는 상징적 숫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리고 자세히보면 한주, 삭주, 명주의 북쪽, 즉 북한강 이북과 임진강 너머는 실제로 직접통치가 이루어졌는지 의문스럽다... 이는 삼층석탑의 북방한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강원도 북부와 황해도 위쪽은 발해와 완충지대의 역할에 불과한 통치공백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문화성숙과 확산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왕실과 교단, 그리고 대중들의 삼각관계가 일정한 긴장과 견제가 있었을 때 상호 발전하는 게 아닌가 싶고(왕실과 교단의 목소리가 클수록 공동체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대사상가의 출현은 어렵다는 말도 된다), 원효는 이를 적절히 정립시킬 수 있는 경륜가였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원효와 그의 영향력이 주요했던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통치구조 확립에 도움이 되었고, 불교교단을 어떤 종파로 정립했는지에서 찾을 게 아니라, 얼마나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그 시대에 맞는 인간의식 고양이라는 진보성을 갖추면서, 이전의 불교를 한차원 변화 발전시켰는가에 대한 평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건 한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 신라와 백제는 모두 미륵신앙을 신봉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달랐다. 신라의 미륵신앙은 왕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미륵보살이 될 수 있고, 미륵보살이 통치하기 때문에 신라가 미륵정토라고 요약된다. 이는 무속신앙에서 출발해 부족 조상신을 대리하는 제사장(법흥왕 이전에 최고통치자를 불렀던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 등의 호칭이 있는데, 이중 차차웅은 ‘무당’이라는 의미였다)이 미륵보살로 대체된 원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제의 미륵신앙은 왕이 미륵보살을 자처할 것인가라는 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백제가 미륵정토를 표방할 수 있는 국격과 조건을 갖추었는가라는 점이었다.
즉 신라의 미륵신앙이 통치자의 신성을 정치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도구로 작용했음에 반해, 백제는 훨씬 대중지향적이고 선진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통일신라 불교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전승되던 무당이란 허울을 벗고, 진정한 의미의 불교로 탈바꿈하면서, 왕실과 귀족의 소유가 아닌 대중과 공유되고 대중과 함께 호흡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다면 통일신라의 불교는 밀교화 되거나 개인 기복을 위한 종교의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했을 것이며, 여전히 왕실에 강하게 뿌리내린 전륜성왕신앙을 앞세운 전제정치의 질곡과 폐해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원원사지 삼층석탑... 원원사는 김유신의 원찰이면서 밀교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때 원효는 신라의 왕즉불신앙과 백제의 미륵정토신앙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아)미타정토신앙을 제기한다. 미륵정토인 도솔촌은 정토가 아닌 예토에 불과하고 신라야말로 극락정토(=미타정토)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미타정토가 미륵정토보다 왕생하기 쉬운 7가지 이유까지 덧붙인다. 또한 삼품삼생 중 가장 낮은 구품왕생자까지 서방극락정토로 갈 수 있다면서 모든 민중들까지 포괄하려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 즉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만으로도 극락정토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미타신앙을 포교하면서 정토신앙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게 된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고 정치적 요구에 부흥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철학적 담론을 살려낸 원효의 정토종은 그렇게 통일신라 불교의 기초가 된다(이 기초가 흔들리고 근본적 문제의식에서 멀어질 때 통일신라의 불교는 이완되고 사치로 전락하면서 무속으로 후퇴하고, 통치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운문사 전경... 주변의 호거산 호위를 받은 넓은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래 보이는 수레바퀴 두개가 전륜성왕의 상징이다... 인도신화에서 파생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자이나교, 힌두교에서도 공유하는 개념인데,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치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전륜성왕이라 하고, 무력이 아닌 정의/정법과 자비로 세계를 정복지배한다고 상정되고 있다... 철륜왕의 등장부터 차례로 동륜, 은륜, 금륜왕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전륜성왕을 자처했던 진흥왕은 아들들 이름까지 동륜, 금륜 등으로 지었다... 즉 신라왕실의 전륜성왕신앙은 뿌리가 깊은 숙원같은 것이었다는 말...>
* 원효대사와 전륜성왕신앙이 가람배치와 불탑조성에 미치는 영향...
원효의 정토종이, 율종에 갇혀 출가한 승려들만을 위한 불교를 대중적으로 개방하기 위한 수행방법으로 염불을 제시했다면, 가람배치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종교는 자력과 타력신앙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건강성과 확대재생산 능력 및 자기회복력을 갖추게 된다. 즉 스스로의 수행과 기복적 성격을 함께 갖췄을 때 도덕성과 파급력을 함께 갖출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종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 방법을 실현하는데 기독교가 외부의 자극에 주목한다면, 불교는 내부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완성된 인격이라는 것도 기독교가 외부 즉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천국으로 가는 것을 그린다면, 불교는 내부의 집착을 버림으로서 깨닫는 해탈을 통해 정토로 왕생하는 것을 그리게 된다(그러면 유교는? 내세가 없어 종교적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천리를 배워, 배운대로 행할 줄 아는 군자쯤으로 정리되지 않을까?).
또 같은 해탈을 말하면서도, 인도가 시(공)간의 무한성을 강조한다면 중국은 (시)공간의 제약과 유한함을 강조한다. 이는 각국이 불교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자리잡고 있던 브라만교와 도교 영향이라 생각되는데, 브라만교가 무한한 윤회를 통해 언제가 도달할 수 있는 신들의 세계로의 진입을 추구했다면, 도교는 내세가 없는 공간적 이동(동굴을 지나, 즉 걸어서 갈 수 있는)을 통해 도달 가능한 무릉도원의 현실적 실현이 중요했다는 점에서 파생된 걸로 생각된다. 생사(生死)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현재를 벗어나 깨달음을 통해 신(혹은 신선)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개개인의 한계를 시(공)간의 무한성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인도불교가 죽어서 해탈을 이룬다고 말한다면, 현실적 한계를 (시)공간의 변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 중국불교는 살아서 복을 누리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영광 법성포, 불교 도래지의 고행상. 석가모니가 해탈할 때의 모습인데, 수행의 과정을 중시했다는 의미가 있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앞의 포대화상... 아무리 찾아봐도 포대화상 사진이 없어서 이걸로 대체한다...^^ 석가모니처럼 중국의 포대화상도 실존인물로서 수많은 선행을 배풀었던 승려로 알려졌는데, 왠지 인도와 중국이 그리는 불교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에서 올린다...>
이에 반해 인도, 중국보다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제례의식이 강하지만, 무속신앙(샤머니즘) 외에 뚜렷한 사상적 대립없이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 불교는 어떤 특징을 띠며 출발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백지상태였을 수도 있던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중국의 영향을 깊게 받았을 것이다(고구려, 백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한 거 같고). 때문에 노장사상으로 불교를 설명한 격의불교 영향에서부터 시작해, 수행보다는 기복에, 영생보다는 극락왕생에, 해탈보다는 연기에, 결과보다는 과정에, 그리고 각성보다는 통치에 집중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그리고 최고 정점에 도달한 게 경덕왕대인데, 김대성의 설화에서 신라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김대성의 탄생비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취약했던 인도 전통의 ‘윤회’까지 수렴했으니, 이때 통일신라불교는 중국적 전통뿐만 아니라 인도불교의 본질까지 수용했음을 의미하는 거 아닐까 생각된다).
<불국사 전경... 나는 김대성 설화가 인도의 윤회사상까지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 생각하고 있다... 결국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 때쯤 통일신라의 대승불교는 궁극에 달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면에서 김대성은 건축적 천재일 뿐만 아니라 불교사상에서도 도통한 천재가 아니었을지...^^>
아무튼 어떤 방법을 통하든 해탈은 내부의 집착과 외부의 무지를 깨뜨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불교의 가르침이란 선악(기독교식 이분법에 근거한)의 분별에 있는 게 아니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불교는 참과 거짓, 호불호, 미추를 구별하는 반야(지혜)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으며, 인식론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종교이지 세상의 현상과 법칙을 정립하는 과학도 아니며, 통치철학을 위한 왕도가 아니다. 때문에 어리석음이 존재하는 한 불교의 포교는 사라지지 않으며, 이를 선도하고 교화할 수 있는 수단과 상징을 필요로 한다. 불교를 체계화한 경전(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 수행 지침서인 률, 경률의 주석서인 논을 묶어 삼장이라 부른다), 수행자들을 하나의 공간에 결집시킨 사원(이와 함께 교단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부처의 상징인 불탑과 마애법칙 등이 그것인데, 이 순서는 인도에서 불교가 정착해 가는 500년 동안 만들어진 것들이다.
<화엄경 부분/리움미술관... 고려시대에 오면 경전의 신성을 높이기 위해, 이제는 금과 은으로 직접 필사본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석가모니는 이런 일을 예상했을까?>
진정한 의미의 불교의 본질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통일신라에서도 필연적으로 그 과정들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이를 집대성한 이가 바로 원효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원효는 통일신라 불교뿐 아니라 한국불교의 토대를 갖춘 이로 평가된다). 원효에 이르러서야 신라는 신라인에 의해 경률에 논과 소, 기를 만들어내면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갖추게 되고, 또한 승단과 왕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가장 전문적이면서도 가장 대중적인 방법으로 양극을 오가며, 그의 사상처럼 화쟁을 통해 원융무애의 포교를 하는데, 먼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방대한 양(신라의 태현, 중국의 규기나 법장의 4배 정도)의 저술을 최고의 수준으로 집필(그의 저술은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강론되고 있다), 강론(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지었고,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을 강론했다. 그래서 초기 가람배치일수록 강당은 탑, 금당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하면서, 한편으론 가장 대중적이면서 간단한 수단까지 강구 제시하니 그것이 염불이었다.
<원효/한길사 같은 책 P59... 1899년 중국에서 간행된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 합본으로, 현재 우리나라 강원의 표준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원효의 저술은 중국과 일본에서 끊임없이 인쇄되며, 오늘날에도 가장 주요한 텍스트로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원효는 이 당시 신라왕실을 풍미했던 전륜성왕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유연성과 현실적 감각도 뛰어났다고 생각된다. 전쟁이 끝나면서 미륵신앙을 대체할 아이콘이 법흥왕때 제기된 전륜성왕신앙이다. 그리고 전륜성왕의 이상형은 인도의 아소카왕이다. 당연히 문무왕이후 신문왕, 성덕왕, 경덕왕까지 아소카왕은 신라왕들의 멘토가 되었을지 모른다. 인도전역을 통일하고 마우리아 대제국을 건설한 아소카왕은 불교의 자비정신을 전국각지의 돌에 새기고(마애법칙), 8만4천기의 불탑을 세웠다. 전륜성왕을 자처하려면 신라왕들도 이를 따랐을 것이다. 이를 원효가 놓칠리 없다. 그는 중국식의 권위적이며 직선적인 가람배치를 수정하여 불교교리를 담은 사찰을 욕심을 냈을지 모른다. 주변지형에 순응하면서 비대칭적인 배치의 가람에 백제식 기법을 혼용하니 그 출발이 고선사의 가람배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불상이 가람배치의 중심이 되기 전, 통일신라는 불탑이 중시된 불사에 총력을 기하며 통일신라의 독창적인 가람배치를 갈구했으니, 강론과 염불 외에 원효는 불탑조성과 사원건축의 확산에도 기여했으리라 생각된다.
<고선사 가람배치 복원도/경주 고선사지 가람배치와 삼층석탑 연구/박보경/동국대학교 석사논문 P37...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가람배치로 불탑이 중문을 지나 금당과 일직선상에 있었던 백제의 가람배치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람배치는 600년대 후반 나원리사지, 황복사지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나는 이 가람배치가 당시 유행했던 미타신앙을 가람배치에 구현한 것이라 생각하며, 여기에는 원효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국분사도 비슷한 가람배치인데 탑원의 방향이 동쪽이다...>
이미 태종무열왕의 딸이자 문무왕의 남매인 요석공주와 설총까지 낳았으니, 엄밀히 그는 왕실의 어른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그가 설씨였다는 말은 경주6촌의 한세력으로 신라의 강력한 가문의 후손이었음도 분명하다. 결국 원효는 권력의 속성과 금력의 지출 방향(전쟁의 피폐를 극복할 큰 정책은 생산활동의 장려였고, 대규모 불사는 일자리 창출-아소카왕은 의료와 복지시설을 먼저 확충했다-과 직결된다. 임진왜란 이후 곧바로 진행됐던 대규모 불사나 625한국전쟁이 끝난 후 진행된 우리나라의 산업정책을 생각해보라)을 불교전파에 충분히 활용할 줄 알았다는 말이 된다.
<원효/한길사 같은 책... 원효의 저술과 기행은 당시를 비롯해 국제적으로도 매우 유명했던 모양이다... 이 그림은 1206년 일본의 고잔지 창건자인 모애의 부탁으로 조닌이 그린 것으로, 화엄종조사회전-일명 화엄연기-에 실려있는데, 호랑이, 독수리, 이리 등 산짐승에 둘러 쌓여 목숨을 내놓고 수행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왕실과 승단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최고의 대우를 받았겠지...>
게다가 궁극에 달한 그라면 당대의 정치와 불교의 한계를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다. 때문에 신라 5교9산 중 법성종의 개창조이면서도 금강삼매경론을 지을 정도로 우리나라 선종의 기틀을 잡았고, 화엄사상의 대가이면서도 교학에 집중하지 않았으며, 이를 대승선으로 묶어 정토종을 주창할 줄 알았으며, 또한 당시의 모든 불교분파를 화쟁사상으로 종합하면서도 승단과 왕실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대에 맞는 삼원귀일과 원융무애를 설파하면서 삼국통일의 명분을 살리고 불교의 친밀함과 대중성을 살려나갔으니, 원효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신라 5교중 하나인 법성종을 일명 '분황종'이라 한다... 원효와 분황사의 인연 때문이겠지... 그렇게보면 고선사탑만이 아니라, 분황사, 황룡사는 그 누구보다 원효의 기운이 짙게 드리운 곳들이 되나?>
이건 커다란 의미가 있다. 미타신앙(서방극락정토로 왕생)이 전쟁이 끝난 다음 백성들을 위로하고 전몰장병들을 추모하는 역할에 가장 적합하기도 했지만, 신라가 곧 미타정토이며 불국토라는 사상으로 승화되면서 불교가 통일신라란 공동체유지의 구심점으로 본격 등장했고, 또한 가장 품계가 낮은 일반 백성들까지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야 불교가 통치의 수단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띤 평등성을 회복하는 변화였다. 결국 원효로 인해 개인 혹은 사회의 안전과 행복, 그리고 자유를 보장해 줘야하는 정치의 본질에 신라왕들의 전륜성왕의 욕구가 결합되면서 통일신라는 불탑조성을 중심으로 한 사찰건축을 확산시켜 나가게 되고, 여기에 그의 넓고 깊은 사상적 뒷받침이 있어 인간성을 회복하는 불교의 본질을 가미할 수 있었으며, 통일신라 불교는 체계를 갖추면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선사지 발굴도면/박보경 같은 논문... 이 도면을 기초로 위 가람배치가 추정되었고, 박보경씨는 이를 미타신앙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원리사지와 황복사지 가람배치도/박보경 같은 논문... 이렇게보면 동시대에 만들어진(황복사는 692년으로 연표가 분명하고, 고선사 주지로 있었던 원효는 686년 입적해 고선사탑 조성 하한선은 686년이 된다) 세 절의 가람배치는 똑같다... 나는 박보경씨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 출발에는 미타신앙에 입각한 불탑과 사찰의 조성인데, 원효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를 비롯, 선대왕을 추모한다는 기록이 분명한 감은사와 황복사, 그리고 나원리(사지), 부석사(676년 문무왕대 창건된 부석사를 맨 처음에 놓치 않은 이유는, 창건 당시 부석사는 매우 단촐한 가람에 불과했고 원효가 입적한 이후 690년대부터 의상에 의해 체계를 갖추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등이 그것이다. 또한 처음부터 탑을 조성하지 않은 부석사를 제외하면, 고선사, 나원리(사지), 황복사 등은 서탑원 동금당이란 동일한 양식을 갖췄는데,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석탑이었으니(그리고 이런 비대칭성을 신라인의 미감에 맞게 바꾼 출발이 감은사가 되는 것이고) 미타신앙을 접목한 가람배치가 되는 것이고, 이렇게 변화된 통일신라불교는 고선사(감은사)석탑조형과 함께 시작했다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부석사... 오늘날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언제 완성될까? 그 주요한 기준이 무량수전과 석등, 그리고 동쪽의 삼층석탑이다... 내 생각이지만 ; 처음부터 탑을 조성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600년대 후반에는 무량수전 자리에 금당만 있었을 거 같고(왜냐하면 무량수전 서쪽에 부석이 있으니까 의상대사 창건시에는 작은 움막이라도, 이 자리에 금당이 있었을 거라 생각), 그 다음 화엄십찰이 완성될 때 쯤 800년을 전후로 삼층석탑이 만들어지고(삼층석탑 앞의 석등부재는 무량수전 앞 석등보다 이른 시기라고 추정하기 때문), 마지막 860년 경에 중창하면서 오늘날 보는 석단과 석등이 세워진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오늘날처럼 석단을 갖추며 부석사 가람배치가 완성된 시기는 860년대다. 또 부석사는 화엄종찰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창건당시 출발은 원효의 미타신앙이었다. 때문에 중창시기에서도 부석사의 본당은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대적광전(=비로전)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주석하는 무량수전(=극락전)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차분히보면 석등이 무량수전의 정면이 아닌 오른쪽(동쪽)으로 비켜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안양루를 통과해 가파른 9품의 석단을 올라오면 맨 먼저 무량수전 지붕을 보지만, 우리는 곧바로 오른쪽에 세워진 석등을 대하게 된다... 시선은 오른쪽 삼층석탑에 이름에도, 우리몸의 동선은 석등의 왼쪽 넓은 마당으로 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한번 무량수전을 바라보고 뒤돌아 넓게 펼쳐진 산하를 굽어보게 된다... 정중앙을 살짝 비켜선 석등과 무량수전과 평행하지 않은 안양루의 배치는 우리들의 시선과 동선까지 배려한 기막힌 기획이며 연출이 아닐까 싶어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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