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600년대 초반부터 600년대 후반 문무왕대까지의 시대적 배경...
1) 600년대 이후 신라의 교통로와 영주, 의성, 군위 등 유물의 상관관계...
2) 추모와 결의를 위해 기념물이 세워진 지역들 - 600년대 탑과 불상의 내용과 상관관계...
3) 혼란스러운 600년대 중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신라유입
- 기술력과 노동력은 어떻게 확보됐을까?
3) 600년대 중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신라유입
- 석탑조형을 비롯한 신라불교미술의 기술력과 노동력은 어떻게 확보됐을까?
이렇게보면 600년대 어떻게 영주, 봉화, 군위 등지에 어떤 성격의 불상이 조성되고, 언제, 왜 의성에 탑리리탑이 만들어졌는가 설명 된다. 그러면 왜 오층석탑이었을까? 이 문제는 누가 만들었는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탑리리탑은 신라인들이 주도했지만, 그만한 크기의 탑을 조성할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을테니 당연히 외부 전문가나 기술자를 초빙해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탑리리탑은 한 개인이나 가문이 만들기에 그 규모가 장대하고, 점하고 있는 위치가 넓어 웬만한 재력으로 쉽게 조성할 수 없어, 결국 신라왕실이 주도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고유의 양식을 만들지 못한채 오층석탑을 만들기 시작했다면, 이는 기술과 경험뿐 아니라 양식과 미감까지 외부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럼 지금까지 살펴봤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불상조성과 석탑기술자가 어떻게 충원되었을지 추정해 보자.
<삼국시대 불상의 변천... 600년대 비교적 많은 유물이 남아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당시 장인그룹은 어떻게 형성되었을지 추적해 본다...>
그 외부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의 문제는 탑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600년대 중반까지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상을 조성한 실무적인 장인과 주도집단은 누구였는지의 문제와 동일한 내용이 된다. 이에 대해 먼저 내 생각을 밝힌다면 ①당시 신라에는 불상조성도 수준과 내용이 일률적이지 않았던만큼, 탑을 만들 체계와 장인조직이 형성될 상황이 아니었기에 신라인들 스스로의 미감과 계획에 근거한 탑을 조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②수시로 전선이 변하는 백제와 달리, 위에서 말한 고구려와의 교역로(①번)에는 400년대부터 정착한 고구려의 후예가 정착했을 뿐 아니라, 600년대 초중반 고구려의 잦은 전란과 연개소문의 도교부흥책에 반발한 상당수 고구려 승려들이 망명해왔으므로, 통일신라의 소형 금동불과 전탑 조성 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 ③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2등 국민으로 전락한 백제의 석공, 목공, 금속공 등 장인을 신라왕실과 귀족들은 아주 쉽게 동원하여 불사에 투입했고, 이들을 장인조직에 흡수해서 안정되고 공업적 생산체계를 갖춰 타지역에 공급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고구려의 영향 - 소형금동불 조형을 중심으로...
나는 이미 신라인들에 의해 석탑이 조성될 수 있는 조건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전제하기 때문에, 초기에는 고구려나 백제인들의 영향으로 그들이 선호하거나 경험했던 오층석탑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이유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이는 고구려 아도화상(417년)이지만, 신라에서 불교를 거부하는 세력에 막혀 경주에 정착하지 못하고 구미 선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그만큼 경주는 보수적이었다. 아무튼 이를 기려 세운 절이 도리사다). 또한 백제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고구려의 지원을 끊임없이 받았고 진흥왕대(500년대 중반)에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승려 혜량이 신라의 승통이 되는 등 공식 비공식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은 계속됐고, 수당과의 잦은 전쟁과 연개소문의 도교숭상 정책의 영향은 고구려의 불교문화 쇠퇴와 함께 백제와 신라에는 새로운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구미 선산 도리사 석탑/보물470호/고려시대 추정... 이 탑의 현재 모습이 원형인지 알 수 없으나, 모전석탑의 양식과 결구방법으로 만들어졌음을 추측케 한다... 첫 도래지인만큼 구미와 선산지방에는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찰이 도관으로 바뀌고, 법사(불교) 위에 도사(도교)가 군림했다면 고구려 승려들은 도교와 타협하거나 떠나야만 했고, 당시 기록에도 이 때문에 망명한 고구려 승려들을 받아들여 백제에서 불사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신라에도 같은 현상들이 전개됐음을 의미하는 거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 분야를 주도했던 대기업이 부도가 나면, 관련산업이 붕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관련산업의 기술적 경영적 저변이 넓어지고 기초가 탄탄해지는 상황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즉 몰락한 대기업의 전문 경영인이나 기술자들이 수많은 중소기업으로 이직하면서 해당 산업의 수준을 상향평준화 시키는 것처럼 고구려 불교교단의 붕괴는 백제와 신라에도 일정한 파급력을 가졌으리라 생각되는데, 특히 불교문화에 목말랐을 신라에는 새로운 자양분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영강7년명 주형 광배/553년/고구려... 금동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119호/539년)과 금동 계미명 삼존불(국보72호563년)과 친연성이 강한 광배로 그 중간에 제작된 고구려 광배다... 자세히보면 백제의 두광과 달리 초문양이 선명히 양각되어 있다...>
그러면 그 고구려 승려들이 곧바로 경주에 정착할 수 있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이차돈의 순교 등 우여곡절 속에서 진골세력의 반발을 무마하며 불교를 받아들인 경주의 폐쇄성에 덧붙여 600년대 초반 경주왕실의 불교교단은 자장 등 유학파가 장악했을테니, 그들이 정착했을 곳은 고향과 가깝고 고구려와 국경을 인접하거나 수시로 지배세력이 바뀌었던 강릉, 원주, 여주, 단양, 제천, 충주, 청원(청주)이나, 소백산맥 안쪽 신라의 전방 교두보나 다름없는 영주, 봉화가 후보지였을 듯 싶다. 또 신라 깊숙이 들어와 봐야 의성, 구미(선산), 안동 등이 마지막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고. 그리고 그들은 한 개인이 아닌 소규모 집단으로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여기에 목공(대목장), 석공, 금석공 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많다(우리는 당시 기술자나 장인들은 승려가 아니거나 천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책임자들은 불심이 높은 승려로서 18세기 유럽의 연금술사 같은 대접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숭례문/국보1호... 숭례문을 만들고 보수한 사람들은, 즉 목공장인들은 누구였을까? 그 구체적인 기록이 숭례문 상량문 형식으로 판재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1448년 숭례문 수리공사를 주도한 대목(대목장)은 최건⏿으로 종5품 무관이었고, 1479년 보수 때 대목은 종3품 어모장군으로 엄연한 품계의 벼슬아치였다. 그런데 1396년 숭례문 창건을 주도한 대목이 법륜사 승려 각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시대 기록이지만 당시 각분야 공사전반을 주도하고 수백명의 목공을 통솔한 최고 기술자가 승려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이를 인정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예전 승려들은 불교용품만이 아니라 궁궐건축과 각종 수공예생산 분야에서 전문성과 직위까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고, 사찰건축과 장엄용품 공급을 위한 완결적 생산과 교육체계도 갖추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으로, 고구려인들은 석탑이나 석불, 마애불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충분히 설명했지만 그들은 목건축과 전탑, 금속공예에는 뛰어난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적석총 등 고분을 조성하면서 습득한 화강암을 다루는 기술을 석탑이나 석불 조성에 투여하지 않았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석불이 2구에 그칠 뿐이고, 게다가 그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발해에서도 석등이 있었을 뿐, 마애불을 대대적으로 조성한 흔적이 없었다는 것은, 고구려에 그런 유형의 불교수요가 없었거나 선호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거 아닐까? 결국 그들은 정착한 지역에서 소규모의 금동불상조성과 전탑조성을 비롯해 사찰건축 감독 등에 참여하는 정도로 당시 확산되기 시작한 불교용품 제작 공급자로 충당됐을 수도 있지, 마애불이나 석불, 그리고 석탑조성에 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경험도 기술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금동 불 입상/고구려/600년대 전반... 한때 신라불상으로 분류되었으나, 현재는 고구려 作이 명시되어 있다...>
* 신라의 소형 금동불과 고구려 정착민들의 흔적...
이를 참고하기 위해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 소형금동불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위에서 신라에서 자체 제작한 초기 불교유물인 소형 호신불이 매우 적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삼국전쟁이 끝나기 전 신라에서 만들었다고 추정하는 소형금동불이 26구(한국미술의 역사/김원용,안휘준/SIGONGART)임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수가 많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황룡사 출토 3구를 포함하여 경주에서 출토된 5구와 영주 숙수사지 출토 10구, 안동 2구를 빼면 신라 전 영역을 확대해도 9구에 불과할 정도로 실제로 적다. 또 9구의 출토지를 보면 서울, 양평, 횡성, 영월 등 당시 유동적이었던 신라의 고구려/백제의 국경지로 신라인들이 만들었는지도 불분명하니, 혼전이 거듭된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당대 고구려, 백제의 양식적으로 차이가나면 편의상 신라로 분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또한 백제와 혼전을 거듭했던 양산, 거창 등 옛 가야지역까지 빼면 결국 소형 호신금동불이 출토된 지역은 전통적인 신라 영토였던 경주와 안동, 영주를 벗어나지 않는다(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양평, 횡성, 영월의 금동불은 고구려作으로 명시하고 있다).
<금동 연가7년명 여래입상/539년/국보119호 재현품... 이 여래입상은 고구려불상임이 명백하지만, 이 불상이 출토된 곳은 경남 의령이다. 즉 소장이 편리했던 소형금동불은 출토지가 곧 생산지와 생산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재 균열이 간 광배는 실제 금동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신고를 받은 경찰이 일부러 떨어뜨리면서 발생했다고...ㅉㅉ>
또한 소형금동불이 출토된 안동과 영주지방은 소규모였을지는 모르지만 집단적으로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이 500년대에도 이미 나타난다. 그 하나가 안동 학가산 석탑리의 적석탑(의성에도 같은 유형의 적석탑이 있다)이고, 또 하나는 539년과 593년으로 추정되는 영주 순흥리 벽화고분 2기다. 이는 명백한 고구려 양식으로 그때까지 이곳이 고구려 영토였거나, 만약 신라의 영토였다면 피수장자는 신라에 정착한 고구려인(승려였다면 화장했을테니 승려는 아니었을 듯)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수장 당시의 국적이 어디였든, 해당 지역엔 어떤 형식으로든 고구려의 문화가 자리잡을 인적네트워크와 경제 문화적 토양이 충분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주 순흥리 벽화고분/539년/모형관... 영주에 2기의 벽화가 그려진 고분이 있는데, 백제에도 일정시기 존재했었다...>
<안동 학가산 적석탑... 무덤인지 탑인지 불분명하지만 고구려 적석총 양식의 돌탑이 안동에 1기가 있고, 같은 양식으로 의성에도 1기가 있다... 늘 말하는 것이지만, 무덤의 양식은 가장 오랫동안 보존되고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문화전통 중 하나다...>
장인들이 포함된 소규모 그룹들은 고구려의 후예들이 집단적으로 정착한 지역을 찾았을 것이고, 600년대 이후 망명한 고구려 승려들은 이 후인들과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주나 안동지역에 정착(중국 길림성, 일본 오사카, 미국 LA 한인촌처럼...)하게 된 거 아닐까? 또 우리나라에 정착한지 100여년이 지난 화교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전통을 확산시키듯, 당시 신라에 정착한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했다. 그리고 자장율사에 의해 불교교단이 체계화되고 의상대사에 이르러 전국적인 형태를 갖추기 이전까지 해당지역의 불교용품 수요를 감당하는 장인의 역할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경주를 벗어난 지역의 600년대 전중반기 소형금동불과 전탑, 목조건축조성에는 고구려의 양식과 기법들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통일신라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데, 신라지역으로 유입된 유민들의 경험과 역사적 전통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문화의 영향력 차이를 결정했다고 본다.
<이불 병좌 상/중국 지린성 훈춘현 반라성지 출토/동경국립박물관 소장/발해/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모형... 고구려의 금동불이 상당한 예술성과 완성도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재로 만든 불상은 2구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영향이 금동불 조형의 보편화와 횡렬식 석실의 고분 벽화의 영향으로 별도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한 발해의 동경연원부에서만 이런 이불병좌상이 8구가 발굴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어 같이 올렸는데, 양식은 평남 원오리 출토 소조불과 비슷하다고 한다...>
(2) 당나라 포로와 백제 유민들의 역할
또 하나 특이한 점으로 전탑(모전석탑 포함)은 분황사탑이 있는 경주(600년대 중후반 만들어진 석장사지, 사천왕사지, 삼랑사지를 포함, 덕동, 인왕동사지, 모량리사지 등 7곳)를 제외하면, 칠곡(송림사 700년대중)-군위(남산동)-안동(조탑리(700년대중), 법흥사지, 임하사지, 운흥동(826년), 금계동, 옥산사지, 개목사, 대사동 등 8곳)-영양(산해리, 삼지동, 현2동 등 3곳)-제천(장락동)-여주(신륵사, 고려시대 조성설이 정설이지만 현재는 1724년 모습이고, 일부 전돌에서 신라시대 당초문 발견됐다)-정선(정암사) 등 고구려와의 교통로 및 교역로에 집중적으로 분포되고, 그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에서(그외 울산 농산 중산사지(680년), 운문사 작압탑(865년), 창녕이 있다)부터 고려(중초사지가 있는 안양사)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전탑들은 삼층이나 소형으로 만들어진 청도 불영사(700년대초) 등을 제외하면 중후장대한(임하사지는 밑변이 5.6m로 법흥사지 6.4m에 버금간다) 5층이상 전탑이 상당수 만들어졌다.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보물56호... 왜 안동지방과 그 위쪽에는 전탑이 많이 조성되었을까?>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안동지방에 화강암이 없어 전탑이 일찍 발달했다거나, 백제지역에서 교전 중 포로가 된 수천인의 당나라 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했기에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근거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탑 조성에는 경제력 있는 주체가 있어야 하고, 보는 사람들이 좋아해야하며, 정치적 명분이 분명해야 오랜기간 보수 관리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미 분황사탑, 산해리(봉감)탑 등 돌을 잘라 전탑을 만들었던 신라인들이 전탑을 만들기 위해 벽돌생산이 용이한 지역을 따로 찾았을리도 없고, 포로로 잡힌 당나라 군인들이 설혹 이곳에 집단 거주하면서 벽돌을 생산하는 노역에 참여했을 수는 있지만 그들이 탑 조성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 조탑리 오층전탑이 있는 안동의 조탑리가 造塔里이듯이, 이곳이 탑을 만들기 위해 운영된 전돌 생산지(누가 운영했든 그런 기술자들이 공업적 생산체계를 갖추고 정착한 지역이란 의미)였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당나라 포로들이 정착했다는 것으로 비약될 근거는 없다는 말이다.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부분... 이 전탑은 단순한 벽돌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처럼 초문양식의 벽돌로 조성되어 있다... 그 문양이 다 살아있었다면 이 전탑의 미감도 지금과 달리 보일까?>
또, 정치적인 의미에서 당나라 사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안동 등 지역에 전탑을 조성했을 이유도 있지만(신라에서는 그런 의미로 조성한 망덕사지 등이 있는 걸로 보면 개연성이 있다) 당항성에서 넘어오는 교통로는 안동쪽 보다 김천에서 구미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분황사탑을 만든 이후에도 한동안 공업적 체계를 갖출 수 있었던 경주와 안동지방에서는 전탑이 200여년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이는 당나라 포로들의 집단 거주 때문이 아니라, 이 길목이 고구려와의 교통로에 치중한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미감을 선호했던 고구려 유민이나 승려들이 이곳에 꾸준히 정착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40호/700년대 중반... 기록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십삼층탑은 망덕사지 목탑이 유일하기 때문에, 이 정혜사지석탑 역시 망덕사지 목탑을 모본으로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중국황실의 안녕을 위해 지은 망덕사(덕을 우러른다) 쌍목탑은 말 그대로 당나라에 잘보이기 위해 문무왕-신문왕 사이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래 일층몸체 아래로 1~2단의 토단이 있었는데, 최근 정비공사를 하면서 기단부가 없어졌다... 잘못된 보수가 아닐까?>
내 생각이지만 그보다는 당시 상황이 당나라 기풍을 쉽게 받아들이고 정착시키는데 거부감이 없었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백제/고구려와 전쟁에서 당연히 당나라의 영향력이 컸고, 또한 신라 내부에서도 친당파가 엄연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만큼 친당을 상징하는 전탑은 신라에 무리없이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704년까지 이어진 측천무후의 치세는 소위 ‘성당양식’을 만들어 당나라 불교문화가 황금기를 누리는 단초를 열었고, 자장 이후 불교교단에 화엄종의 새바람을 일으킨 의상의 예에서 보듯 선진적인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들인 유학파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된만큼 그들의 영향은 지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700년대 후반 당나라의 불교탄압과 함께 시작된 불교교단의 해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의 급속한 유입과 함께 불교양식과 미술사조까지 바꾼 걸 보면 그들의 영향은 언제나 신라와 불가분 관계에 있었다. 즉 6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당나라의 유풍은 신라에 ‘사실주의’ 경향을 고착시킨 것으로 그들의 영향을 평가해야지, 포로들의 양과 질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전탑 모형/심천... 중국인들이 직접 만든 모형이니 축소된 형태지만 미감은 그대로 살렸다는 점을 전제하고... 동일한 소재를 사용했는가 보다, 그 탑의 미감이 누구에게 친숙한가가 더 중요한 게 아닐런지...>
세 번째는 백제인들의 영향이다. 우리는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백제는 그냥 해체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백제지역은 676년 11월 설인귀(당태종을 연개소문으로부터 구한 거란출신 당나라 대장군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선봉장이다. 중국 경극에서 5개의 검을 잘 쓰는 검은 얼굴의 연개소문으로부터 하얀 얼굴의 당태종을 구한 빨간 얼굴의 활을 든 장수가 그다)가 기벌포에서 신라군에 22차례에 걸쳐 마지막 패배하면서 격퇴당할 때까지 백제부흥군과 당나라 웅진도호부(도독부), 신라의 각축장이었을 뿐이다. 또 671년 설인귀와 문무왕이 서답으로 설전을 벌릴 때도 설인귀는 백제땅이 자신들이 정복한 당나라땅임을 강조(백제 의자왕과 고구려 보장왕을 비롯한 왕족과 주요 포로들은 모두 당나라로 압송되었지, 신라에 망명한 게 아니었다)한데 반해, 문무왕은 대동강 이남을 신라땅으로 인정하기로 한 당태종의 약속을 지킬 것을 강조했던 걸 보면 애초부터 신라는 고구려땅에 대한 욕심은 없었고(김유신과 문무왕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전투에 참여했지만, 문무왕과 당나라군의 전투도 대동강 이남으로의 진출 저지에 있었을 뿐이다), 백제정복을 최종 목표로 삼았음도 분명하다.
<고당전쟁... 중국의 고서화로, 당태종과 연개소문, 그리고 설인귀가 그려져 있다... 생각해보니 2007년 5월에 이 그림을 올렸었다...^^ 아무튼 644년부터 676년까지 진행된 삼국전쟁에 설인귀는 빠지지 않는다. 결국 안동도호부가 평양성에서 요동성으로 밀려나고, 웅진도독부가 웅진에서 발해만 건안성으로 옮겨 간 마지막 전투를 장식한 게 설인귀다... 고구려의 후예답게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수대에 걸쳐 오랜 기간 백제에 대한 신라의 원한이 높았던 만큼, 당나라와의 각축은 백제땅에 한정 됐음을 의미한다. 또 일본으로 피난하지 못한 백제인들은 끝나지 않은 전란 속에서 내부의 결속도 붕괴된다. 게다가 신라의 백제정복지에 대한 처우는 통일된 한민족으로 대우했던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정복자로서 군림만 있었다. 즉 백제인들은 백제인도 신라인도, 당나라인도 아닌 무국적 난민으로 전쟁포로에 불과했고, 당나라가 물러난 677년부터는 신라의 백성이 아닌 만년 2등 국민에 불과한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 백제후예들의 고통을 대변한 게 진표율사(줄에 꿰인 30마리 개구리를 보며 백제인의 처지를 한탄했던 그는 끝까지 백제인임을 표방했는데, 900년경 송나라 기록인 <송고승전>에도 진표율사는 신라국인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은 백제국인으로 표기된다)의 미륵신앙인데, 그에 의해서 옛 백제지역에는 금산사와 법주사 등의 대대적인 불사(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덕왕은 막대한 재물을 진표율사에게 하사했다)가 이루어진다. 이때가 760년대로 백제멸망 100여년 후의 일이니 얼마나 철저하게 신라인들에 의해 억눌려왔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부여 박물관/백제인 얼굴... 웃음일지 슬픔일지...>
<법주사 전경... 백제에서 만개한 미륵신앙과 신라화랑들이 주도했던 미륵신앙은 그렇게 달랐다... 너무나 달랐던 미륵신앙의 내용을 통합하는 것도 전륜성왕을 자처하려했던 성덕왕과 경덕왕의 주요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를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즉 신라인들에게 백제지역의 유물과 각종 기술자들은 무한 동원이 가능하고 수탈할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석가탑과 영지석불의 설화가 무얼 의미할까? 백제인이라면 누가 뭐라든, 언제든지,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 그걸 불교의 감성을 빌려 애틋하게 설화로 각색했을 뿐이다. 그만큼 백제의 후예들은 전쟁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급속히 요구되는 각종 불사에 동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멸망 당시 고구려(69만7천호)보다 인구가 많았던 백제(76만호, 638년 당나라 인구는 304만호였음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전성기 수,당이 900만호였음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거 같고...)는 당나라로 호송된 포로의 숫자에서는 20만 고구려인의 1/10도 되지 않은 적은 수였기에 사회 지배층과 전문직종 장인들 상당수는 백제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수당대 인구 변동/고등학생 역사부도... 새 왕조 개창과 전성기, 그리고 몰락기의 인구 변동 추이를 볼 수 있다... 영토의 확장 문제도 있겠지만, 호구조사를 위한 행정력도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 그런면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비롯 신라의 경주 인구 호수를 고려할 때 다양한 해석의 근거로 생각한다...>
또한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일대에서 670년을 전후한 비석 형식의 석불비 등 7구가 동시에 조성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불교교단을 비롯한 목공, 석공, 금속공 등 나라에서 관리한 전문장인조직이 해체되지 않고 특정지역을 근거로 활동을 계속했을테니,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인들에 비해 훨씬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동원이 가능했고, 특히 석불과 석탑에 있어서는 유일하게 숙련된 장인조직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계유명 삼존 천불 비상/국보108호/673년/공주박물관... 삼존불과 함께 그 뒤 배경으로 천불상이 조각된 비석이다... 이런 비상이 7구가 발견되었는데, 모두가 충남 연기군 출토품으로 백제인들의 염원이 기록된 670년 전후 작품들이다...>
<삼존불 비상/보물742호/동국대박물관... 역시 연기군 출토품이며, 홀로 동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자료를 위해 사진을 다 올리려다 흔들린 것들도 많아 2점만 올리는데, 최근 청주박물관에서 비상 7구(국보2점, 보물5점)를 동시에 전시하고 있다니 참조할만 하다...>
(3) 백제, 고구려 유민들이 흡수된 새로운 생산 시스템과 영향
600년대에서 문무왕에 이르는 600년대 후반까지 시대배경을 통해 당시 불상과 석탑조성과 관련된 내용을 요약하면, ①200여년에 걸쳐 신라에 정착하거나 망명한 고구려인들은 소백산맥 북쪽 충주, 청주, 영주 등과 안동, 구미, 의성 등 교역로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전탑, 목탑, 소형금동불 조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②그러나 고구려인들은 고분조성과정에서 석공예 장인들이 양산되었겠지만, 마애불을 포함하여 석불을 만든 유물이 거의 없었던 걸 보면, 신라의 석불이나 석탑을 만드는데 미친 영향은 미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③신라국경과 인접한 지역 백제인들은 600년대 초반부터 어수선한 전란 속에서 파편화되고 지방화된 양식의 문경 사불산(대승사 사방불), 청원 비중리(일광삼존불), 중원 봉황리(마애불상군. 그외 익산 연동리, 태봉리, 정읍 신천리) 등 석불(마애불)을 조형했을 것이다.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 전경...>
<실측도... 제작연도보다 누가 조성했을까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나는 백제 제작설에 한표를...>
<청원 비중리 일광삼존불상... 고구려, 백제 제작설 논란이 많지만, 고구려에서 제작된 석불이 거의 없다는 점을 근거로 역시 나는 백제 제작설에 한표...>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보물45호... 제 얼굴이 아닌 이유로 온전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현재 광배만 4.5m로 완전한 모습이었을 경우 5m 크기의 광배를 세웠을 정도로 백제의 석공 기술은 완숙한 경지에 있었다... 고구려의 두광(원형광배)과 비교하면 백제의 광배는 특별히 원규형(円圭形/圓圭)이라 부르는데 종첩된 원호와 햇살을 유형화한 추상적 도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륭사 삼존불 광배도 그렇다...>
④당시 신라인들은 경주와 안동을 중심으로 석불과 전탑, 목탑 등 조형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해당 기술자들이 양산되기 시작했지만, 석불과 석탑조성의 경험이 없어 백제 사방불 형식을 답습한 영주 신암리 마애불을 조성하는데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영주 신암리 마애불상/보물680호... 처음엔 고구려와 신라설에 방점을 두고 검토했으나, 신라 제작설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석불이 없기도 하지만, 신라의 패수 이남의 영유권을 당나라가 인정한 다음, 성덕왕과 경덕왕이 곧바로 추진했던 것이 사방불이기 때문에, 신라에서 백제의 사방불 신앙을 추종했던 가장 초기작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더 컸다...>
<생각보다 작은 크기지만, 현재는 농토의 복토로 인해 애초의 기단부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래에서 올려보면 비교적 안정된 자태를 갖추고 있고, 봉화 북지리 마애 아미타불좌상 느낌과 비슷하다..>
⑤그리고 급속한 친당정책과정에서 金(금)공예가 급속히 후퇴하고 새롭게 소형금동불과 관련된 수요가 촉발되면서 고구려계 장인들을 흡수하면서 대응했을 것이다. 실제 신라의 금속공예는 600년 전반까지 고분에 봉안되던 出자형 금관이 사라지고 사리장엄용 금동불 조형으로 흐름이 바뀌는데, 그 출발이 692년 순금으로 만든 황복사탑 출토 금불이다. ⑥또한 불상조성에서도 전쟁의 종식과 함께 화엄종이 대세를 이루고 성당양식의 사실주의 흐름이 유입되는데, 이는 추상성과 함께 자연스러운 미소를 갖춘 불상이 사라지고 엄격한 격식과(삼도 등) 권위를 드러낸 근엄한 얼굴과 이상주의적 비례를 갖춘 경향으로 바뀜을 의미한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136호... 7세기 중엽 경덕왕대 조성된 불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양식으로 조성된다... 추상화된 신체비례는 사라지면서 인체비례와 같게 되고, 목에도 삼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래(↓) 서산 마애불과 비교하면 뚝 튀어나온 눈두덩이도 없어지고, 미소와 눈매도 달라진다... 그나마 권위적이지 않은 가장 편안한 불상 중 하나다...>
⑦670년대 연기일대에 집중적으로 조형된 비형 석불조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백제 장인들은 일정지역을 근거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영주 가흥리나 봉화 북지리, 의성 탑리리와 군위 등 불상과 석탑 조성을 위한 신라의 강제 동원체제에 흡수되어 갔을 것이다.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지금은 붕괴 위험 때문에 올라갈 수는 없지만, 90년대까지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여원인을 한 왼손을 보면 정읍 신천리 불상과 나는 거의 같다고 봤다... 해서 백제인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봉화 북지리 석조 미륵반가사유상 부분... 상당한 크기의 거불임에도 세부 마감은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어 있다...>
⑧그러나 백제말기 석불 조형도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석탑 조형도 정림사, 미륵사, 왕궁리석탑 등 3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600년대 후반 만들어진 통일신라의 최초석탑 의성 탑리리에는 백제의 경험을 주축으로 신라(분황사 전탑)와 고구려(목탑, 토탑)의 전통이 복합적으로 조합된 오층형식의 석탑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⑨결국 백제의 미륵하생 신앙과 신라의 왕즉불 사상이 결합된 통일신라의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600년대 후반부터 미륵신앙보다 아미타신앙을 강조하면서 이상적이면서도 근엄한 불상과 중후장대한 석탑을 요구하게 됐고, 이를 왕실이 주도하는 일관된 체계로 정립하기 위해 장인조직과 집단을 직접 관리해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조성은 분명하게 양식적 변화가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백제 장인에 대한 소규모 동원이 663년부터 시작되고, 솜씨있는 고구려인들이 포함된 신라의 장인집단에 677년 이후부터 대규모이자 지속적으로 동원되고, 700년대 초반부터는 왕실에서 직접 흡수하면서 경주에 정착하면서 석탑과 불상 등을 공업적으로 제작 생산하여 각 지방으로 보내는 구조가 완결됐다고 생각한다. 이는 늘어나는 사찰의 수요에 대한 공급체계를 신라왕실에서 주도하면서 특히 전쟁 이후에는 가람건축과 불상, 탑 등을 경주에서부터 확산시겨 나갔다는 말이 된다. 결국 탑리리탑에서 황복사탑까지 엄청나게 짧은 시간에 석탑은 구조적이나 양식적으로 완전히 탈바꿈되고, 초기 석탑들이 지속적으로 개선 개량되는 추이가 몇 년 사이마다 곧바로 반영되며, 또한 이런 조직이 있어 전성기 700년대 석탑은 한사람이 만들듯이 균질한 양식과 일정한 미감을 갖추고 한정적인 지역으로만 확산됐다고 생각된다.
<백제얼굴/부여박물관... 불상이든 석탑이든 시대상황과 정신, 그리고 기술이 뒷바침 됐을 때 이를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양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서산마애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작은 소조불에서부터 금동불과 목불 등 다양한 형태의 불상들 조성 경험이 누적됐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의 석탑도 그런 기술력이 어떻게 축적되고 변화해 나갔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불상조성의 변천을 살펴본 것이다...>
<서산 마애삼존불/국보84호... 백제의 얼굴을 대변하는 이 마애불의 미소는 600년대 중반 이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백제가 멸망한 이유도 있겠지만, 불상이 담아야 할 시대의 정신이 변했기 때문이며, 보다 강력한 불교사조의 변화가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얼굴과 미소의 변화도 입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말... 아무튼, 삼화령에서 보이던 신라의 천진난만한 미소도, 이 서산마애불의 천연덕스럽게 환한 미소도 영원히 사라진다... 이제는 근엄한 권위를 갖춘 석굴암 본존불의 미소만이 남게 된다...>
또한 600년대 초반까지의 양식적이면서 경직되거나 천연덕스러운 고졸한 미감이나, 800년대 중반이후 추상적이고 장식성이 강조되면서 섬약한 미감에 반해, 사실주의와 이상주의가 가장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700년대 전후(선덕여왕-경덕왕 다음 혜공왕-선덕왕까지) 통일신라의 미술사조의 전성기에는 백제 장인들의 투입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절정에 있는 것이 경덕왕대 불국사와 석굴암이며, 이후 전제왕권이 와해되는 원성왕대부터 이 조직도 함께 해체돼 나간다고 판단된다. 물론 폐쇄적인 신라인들과 보수화된 고구려인들 다음으로 3등 국민의 지위밖에 얻지 못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만족해야만 했던 백제인들이지만, 그들의 조직적인 동원과 체계적 관리가 있어 황금기가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점들이 삼국문화가 하나의 색깔을 띠며 통일해 나가는 기본적인 조건들이 아니었는가 생각하고 있다.
'탑여행-趣,美,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시대 삼층석탑 14>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5)감은사탑의 진정한 의의...1306 (0) | 2013.06.25 |
---|---|
신라시대 삼층석탑 13>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4)불교의 변화와 감은사탑의 의미...1306 (0) | 2013.06.22 |
신라시대 삼층석탑 11>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2)기념물이 세워진 지역...1306 (0) | 2013.06.04 |
신라시대 삼층석탑 10>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1)신라의 주요 교통로...1306 (0) | 2013.06.04 |
신라시대 삼층석탑 9> 신라석탑의 시원 - 2)국보77호 탑리리 오층석탑...1305 (0) | 2013.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