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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10>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1)신라의 주요 교통로...1306

 

 

 

 

 

 

 

 

7. 600년대 초반부터 600년대 후반 문무왕대까지의 시대적 배경...

 

   1) 600년대 이후 신라의 교통로와 영주, 의성, 군위 등 유물의 상관관계...

   2) 600년대 신라에서 조성한 탑과 불상의 내용과 상관관계...

   3) 혼란스러운 600년대 중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신라유입 - 기술력과 노동력은 어떻게 확보됐을까?

 

 

* 삼층석탑을 만들 수 있는 시대적 배경 이해를 위해...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에 대해 메모하면서 처음엔 탑의 양식적 비교를 통해 시대적 흐름을 살피고, 우아함, 장중함, 정연함 등 미감만으로 가볍게 터치하려 했다. 그러나 탑을 보며 느낌을 공유하려는 분들의 글은 이미 충분히 넘치기도 하지만, 탑을 통해 답사여행을 완성해 나간다고 스스로 밝힌 나로서는 그 탑을 의도하고 만들었던 사람이 되어 상상해볼 필요를 느꼈다. 터를 잡고 완공시기를 정하고, 형상에 의미와 이야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말이다. 어쩌면 내가 역사와 대화하는 방법이고, 탑과 동질감을 느껴가는 방식일지 모른다. 그렇게 내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한번쯤은 충분히 풀어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게 앞으로 나의 변화를 자극하며 깊이를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해서 석탑이 만들어진 이유부터,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이제 통일신라로 들어왔다. 오늘은 통일신라의 석탑을 보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700년 전후의 석탑은 왜 그렇게 급격하게 양식적으로 변했을까?와 그럼에도 어떻게 한사람이 주도하듯이 일정한 싸이클을 가지며, 또 몇 사람이 만든 것처럼 균질한 수준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아보려 한다.

 

<감은사탑...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급격히 변한다... 이렇게 장중한 규모의 삼층쌍탑이 만들어진 게 682년이니 문무왕 사후 1년이 지난 시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원효대사가 있었던 고선사에도 같은 양식과 규모의 삼층석탑이 조성됐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 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대를 통해 당시 상황과 사상이 만들어낸 정서를 이해하고, 공간을 통해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유물을 찾으며, 사람들을 통해 주도세력과 의지를 느끼는 방식으로... 또 석탑이나 석불이란 신앙을 전제로 만든 공예품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점하는 시간과 공간에 사회성과 문화예술적 수준 등 더 큰 의미를 담고 있기에 역사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시대정신과 역사성은 어떻게 탑에 내포되어갈까? 결국 내가 그탑을 직접 다듬은 이들과 그들의 조직과 동원체계, 그리고 이를 기획하고 주도한 이들을 찾고 싶었다. 여기에 수요와 공급을 덧붙인다면, 석탑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입체성을 갖추게 된다고 생각한다. 출발은 문무왕대에 이르기까지 600년대 초반부터다. 왜냐하면 통일신라에 남은 고구려의 영향과 백제의 경험이 어떻게 융합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해서 신라의 교통로를 살펴보고, 그곳에 머물던 주체세력이 누군지, 당시 만들어진 주요 유물들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황복사탑... 감은사탑이 만들어진지 불과 10년후인 692년 의상대사가 출가한 황복사에 신문왕을 추복하기 위해 그 아들 효소왕이 감은사탑 보다 훨씬 규모도 작아지고, 양식적으로 정형화된 삼층석탑이 만들어진다... 어떻게 10년만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내 고민의 출발은 여기서부터였다...>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금동 아미타불좌상... 황복사탑이 만들어진지 14년후인 706년, 다시 성덕왕은 효소왕을 추복하기 위해 이 금동불을 추가로 봉안한다... 황복사탑에서 출토된 2구의 금동불이 있는데 양식적인 검토를 통해 국보79호 불상을 706년, 국보80호 금동여래입상을 692년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하며, 각각 신문왕과 효소왕의 얼굴을 모본으로 했다는 추정도 도출된다... 아무튼, 감은사탑은 한번 만들면 다시 손보기 어렵지만, 이 황복사탑은 유지와 보수관리가 매우 용이한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통일신라의 석탑은 구조와 결구가 변해간다...>   

 

 

 

먼저 교통로를 살피는 이유는 그 길이 군사적 이동통로이면서 문화의 교역로가 되며, 그런 이유로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국경지역은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변방일지 모르지만, 경제와 문화교류가 가장 빈번한 접경지였다. 오늘날처럼 비행항공로와 인터넷이 발전하기 이전 항구도시(부산, 홍콩, 상가포르, 베네치아 등)들이 이국적으로 보였던 이유도 이질적 문화들이 복합적으로 충돌했기 때문인데, 그 지역들은 경제적으로도 번성했고 문화적으로 유동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곳의 문화가 선진적이었다거나 유행을 선도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걸 판단하고 유행을 주도했던 곳은 늘 정치적 중심지인 수도권의 세력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이 중요한 것은 늘 새로운 문물이 가장 빨리 들어오고 최초로 실험됐다는 점일 것이다. 신라의 경우도 600년대 당시 국경의 최후 교두보였던 소백산맥 안쪽 봉화, 영주, 문경, 김천 등이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고, 여기서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의 안동, 의성, 구미 등은 그 문화적 충돌을 필터링 했던 곳이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홍콩/낭만의 거리에서 본 야경... 화려하고 복잡한... 도시는 어떤 이들이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색과 미감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문화적 힘만으로 도시가 일관성을 갖는다면, 그건 대단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거나, 차원을 달리할만큼 선진적이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축복일테고...>

 

 

두 번째 이들 지역에는 신라인이 아닌 타지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경제적 사상문화적 권력을 쌓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에서 들어오는 길목의 영주, 안동, 의성 등이 그럴 것이고, 백제에서 들어오는 김천, 구미, 대구 등이 그런 후보지들이다(싱가폴처럼... 상대적으로 옛 가야지역인 함안-합천-고령, 진주-의령-창녕은, 깊고 넓은 산지라는 지형적 한계 때문에 덜 발달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낙동강을 따라 세력을 형성해 나갔지만 신라는 해양세력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무역상들도 있었겠지만, 망명한 유민들과 승려, 그리고 포로로 잡힌 당나라인 등을 강제로 정착시킨 곳일 수도 있다. 특히 신라의 이이제이 정책은 가야의 왕족이었던 김유신의 조부를 영주로 강제이주 시키거나, 고구려의 안승을 익산으로 보내 고구려왕으로 봉한데서 참조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 지역에 정치적, 문화적 대표성은 군사적, 경제적 힘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그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홍콩/리펄스베이... 같은 홍콩에서 두 얼굴을 비교하기 위해 골라봤다... 우리는 홍콩에 가서까지 전통의 흔적을 찾는다... 저력을 찾을 수도 있고, 변화를 즐길 수도 있다...>

  

 

세 번째는 그 시대, 그 지역에 남은 유물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배경과 사상 정서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600년대 초반 탑보다 불상이, 불상에서는 미륵불과 미륵보살이 주류를 이루지만, 600년대 후반에 이르면 탑이 상대적으로 늘어나고, 불상도 아미타불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당시의 유구와 유물들이 몇 개라도 남아있는 백제와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다. 왜 그랬을까? 의성 탑리리탑을 설명하고, 감은사/고선사 삼층석탑으로 넘어가기 위해 나는 이런 점들이 한번쯤은 설명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기에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이 부분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럼 당시 신라의 진출로이자 교통로부터 풀어가 본다.

 

 

<사진으로 본 신라 고총의 분포/경북대학교 박물관... 늘 말했지만, 무덤의 분포와 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학의 출발은 무덤에서 시작하는 거고... 신라의 출발과 주요 영역은 결국 소백산맥 안쪽이며, 신라 무덤양식은 소백산맥을 넘지 않았다(가야가 포함되어 있다)...> 

 

 

 

1) 600년대 이후 신라의 교통로와 영주, 의성, 군위 등 유물의 상관관계...

 

신라의 진출 경로를 시대별로 살펴보면(예전 글에서도 이미 내 의견을 피력했지만), ①제일 먼저 개척된 곳은 경주-영천-대구(팔공산)에서 북쪽, 즉 군위-의성-안동-영주-제천-원주로 북상하는 진출로였고, 실제 이 통로가 신라의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고유 세력권일 뿐 아니라 백제와 대항하기 위해 연합한 고구려와의 직접 교역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②두 번째 교통로가 팔공산 서쪽과 남쪽, 즉 옛 가야 병합과 함께 완성된 지리산 방향으로의 진출이었다.

 

 

<신라 고총의 분포를 통해 당시의 주요 교통로를 추정해 본다... 크게 세갈래인데, 하나는 낙동강 유역을 따라 분포하고, 그 동쪽으로 의성-안동- 영주(봉화)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남쪽 옛 가야지역으로 이어지는 길로 구분할 수 있다...>

 

 

③세 번째는 백제로부터 한강유역을 장악한 후 주요하게 부상한 교통로이자 당나라로 향하는 교역로로, 구미-김천-상주-문경-충주(-음성-평택-화성; 당항성 방향) 방향이었고, ④네 번째는 고구려가 수-당 접경지역인 요동일대로 치중한 이후 백제의 무왕-의자왕대 부각된 전선의 성격이 강한 구미-김천-상주-보은-청원(청주) 군사이동로고, ⑤마지막이 역시 전선의 성격이 강한 구미-김천-영동-옥천-세종(연기)과 영동-무주/금산(-계룡-논산) 전선이었다. 즉 선덕여왕대를 기준으로하면, ①,②,③은 통치행정체계를 갖춘 교통로이자 교역로였다면, ④와 ⑤는 백제와의 전선으로 부상한 군사도로 성격이 강했다고 보여진다.

 

 

<이를 현대의 지도로 옮겨보면 이렇게 된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고속도로 노선과 거의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개통 시점을 보더라도 ⑤대구-김천-영동-옥천-대전의 경부고속도로만 먼저 개통되었을 뿐, ①의성-안동-영주-제천의 중앙고속도로, ③김천-상주-문경-충주-여주의 중부내륙고속도로, ④상주-보은-청원의 청원상주고속도로의 차례로 개통되듯 현대까지 그 중요도에 의해 시차를 두고 개발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 당나라를 향한 교역로는 한강유역도 아니고, 당진도 아닌 현재 시화호 아래쪽 화성과 평택 접경이다... 당항성은 한강유역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 신라의 주요 교통로를 통해 살펴 본 국경의 의미와 삼국통일의 현실...

 

이 교통로를 중심으로 600년대 초반부터 전쟁이 일차 마무리되는 670년까지의 상황을 살펴보자. 먼저 뒤에서부터 살펴보면 660년 백제 멸망은 나당 연합군은 완벽한 승리라고 생각하기에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656년 이후 의자왕의 실정이 계속됐다고 하지만(불과 4~5년이다), 백제의 군사력은 신라의 5만과 소정방 13만 해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음에도 당나라군대의 기벌포 상륙을 허용한다든지, 신라군의 황산벌 진출을 방기하면서 계백장군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등 전술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또한 신라역시 김유신의 5만 군대가 계백장군의 5천 기마병에 4차례에 걸쳐 연전연패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신라 군대는 백제의 멸망 후를 대비한 정복군으로서 최강의 전력을 보내지 못할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장악하려는 당나라의 견제를 위해 백제의 해체까지는 바라지 않을 수준에서 당나라 군대와 보조를 맞추는 정도였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600년대 중반 신라는 경주전통세력과 김춘추의 외교력, 김유신의 무력이 삼각편대를 이루며 균형을 잡았을 때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660년을 전후해서는 친당파와 배당파, 김춘추와 김유신의 갈등 등이 겹쳐 백제와 당나라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 하나는 의자왕 항복 이후에 곧바로 지금의 충남, 대전, 전북일대 등 옛 백제지역을 대부분 수복하고 3년간 저항한 백제부흥군의 활약(고구려 연개소문의 지원과 신라의 전술적 양보도 의미가 있지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660년의 백제패망은 전술적 실패에 따른 왕실에 멸망이었지 완벽한 백제의 몰락과 신라의 정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927년 후백제에 의해 경주가 유린되고 경순왕이 견훤에게 짓밟혔다고 신라가 멸망한 건 아니었듯이...). 즉 663년 내분으로 인한 백제부흥군의 몰락과 연개소문의 사망까지 ④와 ⑤ 교통로는 전선의 성격이 컸지 안정적인 신라의 국토가 아니었다.

 

 

<합천 청량사 전경... 이 석등의 조성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나는 최완수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즉 견훤이 경주까지 정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920년대 만든 것이라고 본다... 이집트가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아소카왕이 석주를 세우고, 로마가 석주와 개선문을 세웠듯 당시 한반도의 정복군주들은 탑과 불상, 석등 등을 세우지 않았을까?...> 

 

 

또 하나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645년도의 백제와 신라의 전선은 어땠을까? 그때 백제는 김천-상주, 무주-성주, 거창-고령(합천/창녕)을 넘어 대가야 지역 전체를 비롯한 낙동강 서안 일대를 점령하고 대구까지 진출해 있었다. 즉 백제멸망 불과 15년전 대구와 낙동강은 (625한국전쟁 당시처럼) 신라와 백제의 최전방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 압량주(대구) 군주로 등장한 게 김유신이고, 김유신에 의해 다시 백제는 후퇴한다. 조금 더 올라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에 대해서도 알아볼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는 언제 사람일까? 수나라와 전쟁에서 활약하고 신라접경지로 파견된 온달장군이 사망한 시기가 대략 590경이다. 그리고 그 온달장군이 축성한 온달산성이 있는 곳은 충북 단양(충주)이고... 그렇다면 서울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555년)가 세워진 이후라는 말이고, 그후 600년 전후까지 고구려 영토는 소백산맥 접경지역까지 내려와 있다는 말이 된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3호/국립중앙박물관... 555년설, 568년설, 그 이후 설 등이 다양하나, 진흥왕이 555년 11월에 북한산까지 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조선시대까지 무학대사비, 도선국사비로 불렸으나, 금석문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의 실사에 의해 신라 진흥왕비로 밝혀졌다...>  

 

  

즉 당시의 국경이란 개념은 오늘날처럼 영구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밖 백성들-특히 군사이동통로나 국경지역 백성들의 국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국토는 면적이 아니라 성과 성을 잇는 점과 선의 개념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600년대 신라의 변방지는 고구려, 백제, 당나라, 신라의 주민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경제적인 이유든, 고향이라는 의미에서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서울/경기, 강원, 충북지방 사람들에게 신라로의 복속은 살아남기 위해 강한 쪽을 선택했다는 말이 되고, 그들의 선택(이 지역이 캐스팅보드를 쥔 것은 오늘날만이 아니다)이 곧 전쟁의 결말과 직결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즉 전통적인 신라인들에게 삼국통일은 자부심이고 승리의 과정이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 전쟁의 결말은 패배와 증오뿐이었을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전쟁이 종결됐다면 신라는 한동안 내홍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야욕도 멈추질 않았다. 정복한 백제땅에는 웅진도호부를, 고구려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를 두면서 신라를 계림도호부로 격하시킨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달라져야했다.

 

 

<백제의 성곽 분포도/공주박물관... 삼국은 축성에 있어서도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고구려, 백제 등의 구분이 가능하다... 공주박물관에 있어선지, 한반도내 백제의 최대 영역을 그렸다고 보여지는데, 단일 시기로 보기는 힘들듯 싶다...> 

<진흥왕 순수비/어디 박물관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신라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시켜 그려졌다... 우리는 이런 기념비를 기점으로 당시의 영토가 고정된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당시의 국경은 유동적이었다... 당시 상황은 극히 역동적임에도 우리들 사고는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다...특히 내가...^^ 그리고 백제의 성곽과 신라의 순수비를 기준으로 두 지도가 중첩된 지역이 구분되는데, 그곳이 지금의 강원, 서울경기, 충북지역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지역들은 백제와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까지 연결되어 경상도나 전라도에 비해 무게중심이 상당히 유동적이었던 지역이고... 아래 오늘날 정당분포와 비교해보려 같이 올린다...>

<2010년 6.2 지방선거 정당분포도... 서울경기와 충청, 강원지역...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제일 힘겨운 지역일지 모르지만, 그 지역의 정서는 단지 몇년, 몇십년만에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웃어본다.^^> 

 

 

여기서 정치적 기제가 작용한다. 백제 멸망 후 17년 동안, 고구려 멸망 후 9년 동안 문무왕은 각국의 부흥군을 때로는 강제로 진압하고 때로는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 그들을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내몬다. 신라입장에서는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면서 또 한편 효율적인 이이제이 정책이었지만, 증오의 화살을 당나라로 돌리면서 내적으로 동질감을 만들어 간다. 이때부터 전쟁은 신라에 정복된 원망보다, 통일된 힘으로 당나라에 대항하는 전선으로 결집되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유민들과 고구려유민들은 당나라가 아닌 동족 신라를 선택했다. 몰락한 왕실은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부흥군 지도자들은 신라와 타협하고 투항한다. 그리고 문무왕은 이들을 이끌고 당나라와의 교전에서 승리한다. 설인귀가 이끌던 안동도호부도 평양에서 요동으로 물러나니 이때가 676년이다. 삼국통일은 황혼이 되고서야 날아가는 미네르바 부엉이처럼 지나간 전쟁을 정치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미네르바 부엉이에 빗댄 헤겔의 말처럼 우리들 이성이라는 건, 미래예측과 주도보다는 과거를 해석하고 추억을 이해하기 위해 더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그 명분을 정치와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려면 어떤 장치들이 필요했을까? 수도인 경주를 비롯해, 영천-대구까지 이어지는 지역, 그리고 ①번 군위-의성-안동라인, ②구미-김천-상주에서 이어지는 영주, 문경 지역에는 이들을 위로하고 또 한편으로는 군림을 상징할 수 있는 기념물이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부침이 잦고 유동적인 지역에서부터, 군마가 집결하고 출정했던 이동로(전시엔 군사도로, 평시엔 교통로이면서 교역로가 되는)에는 그 필요성이 더 절실했을테고... 그런 이유로 군위와 의성을 비롯해 구미까지는 신라에게 있어 가장 전통적이고 중요한 교두보가 되었고, 이는 신라의 사활과 직결된 곳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경주 6촌의 연합세력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물왕대부터 김씨 세습왕조가 되고, 스스로 석가족을 자처하며 성골이란 개념을 만들지만 선덕여왕대부터는 여왕이라는 이유로 성골의 개념도 위축(그래서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을 자처하고...)된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와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는 640년대에 중앙집권체제는 흔들린다(647년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때 김유신과 김춘추의 연합이 완성된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전장으로 출정하는 군대의 집결은 어디에서 이루어졌을까? 과연 경주에 군마가 집결하여 출정할 수 있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로마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군대집결지는 항상 수도에서 반나절 이상 떨어진 곳이었고, 또 그곳에서 해산했다. 즉 어느 시대, 어느 권력도 군사력에 대한 신뢰와 견제는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무장군대의 왕도입성은 반역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군대의 집결해산지는 항상 왕도(수도)와 일정거리를 두어 마지노선을 설정하는 것이 왕실전복을 방어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비책이었다는 말이다.

 

 

<미륵반가사유상/국보83호... 출토지와 양식적 변천, 시대적 의미에서까지 백제와 신라 제작설이 끊이지 않는 금동불좌상이다...^^ 아무튼 신라제작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이 미륵보살상은 당시 선덕여왕이 모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시 백제는 나라의 개념에서 미륵정토를, 신라는 개인적 관점에서 미륵보살을 각각 자처했다...>

 

 

결국 원정을 떠나는 신라군대는 최초 중앙군이 모이는 집결지가 있고, 중간 중간 거점에서 병력이 증강되어, 마지막 최전방부대와 합류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각종 물류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중간거점들이라는 게 안동-영주, 김천-상주 등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간 전쟁이 한창이던 600년대 신라의 중앙군이 집결한 곳은 경주가 아닌 ①번 라인의 기점인 군위나 의성이었을 것이고, 650년대 전후 김유신에 의해 대구가 완전히 수복되고 660년 백제멸망(및 백제부흥)과 함께 진행된 당나라와의 갈등이 표면화 되면서부터 ③번 라인의 구미로 무게중심이 바뀌게 된다(특히 출정 횟수가 많아질수록 낙동강을 통한 군수품 보급이 용이했을테니 대구-구미-선산-상주-문경-예천-영주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고)고 생각한다. 또한 전시체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들은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고, 화랑들의 수련통로와도 일치했을 것이다. 그런 체제에서 이들 지역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상징적 기념물을 만들 개연성이 충분하며, 문무왕대 마지막 전선이었던 고구려에서 경주까지 내려오는 교통군사로에 집중적으로 탑과 불상을 조성했을 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군위 삼존석굴 원경... 팔공산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고갯길. 그 끝지점 혹은 시발점에 서 있다...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문무왕의 주도로 만들 게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