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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7> 백제석탑의 완성 - 국보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1305

 

 

 

 

 

 

 

5. 백제석탑의 완성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 백제(정림사)계와 신라계 석탑의 특성 비교

   2) 왕궁리 오층석탑 - 백제석탑의 완성과 석탑의 기단부 탄생...

   3)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를 통해 본, 백제 석탑의 한계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

 

 

 

2011년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라는 글을 통해, 삼국시대의 가람배치 특성 등을 정리하면서 백제에서 왜 방형(사각형) 오층 양식을 가진 정림사탑을 만들게 되었는지는 공간17~20>의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후, 오늘(2013년)서야 구체적으로 탄생 배경 등까지 설명했으니 참 오래 걸렸다. 이제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백제(계) 석탑의 양식적 특성이 미륵사탑을 거치면서 어떻게 왕궁리탑에서 완결되는지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정림사와 왕궁리탑 등 3기의 석탑을 통해 백제계 석탑이 갖추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자.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나는 이 탑이 백제가 만든 마지막 석탑이라 생각한다...> 

 

 

 

1) 백제(정림사)계와 신라계 석탑의 특성 비교

 

 

백제(정림사계) 석탑의 가장 커다란 특징인 지붕돌(옥개석)의 형상을 통해 통일신라의 삼층석탑과 비교해보면, 1)기단부보다 넓은 처마를 가졌다는 점. 이는 60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진 신라의 분황사, 탑리리탑 기단부가 처마보다 훨씬 넓다는 점과 분명한 차이를 가진 것이며, 2)지붕돌이 각층 몸돌보다 상대적으로 깊고 넓어, 지붕돌이 두툼해지면서 몸돌의 안정성이 더욱 부각되는 신라계 석탑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3)지붕돌 전각 하부에서부터 반전이 시작된다는 점. 역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지붕돌 절단면과 전각 하부가 일직선으로 마감되고 낙수면에서만 반전이 시작된 것과는 미감에서 절대적인 차이를 보인다(물론 신라시대에 이처럼 얇게 판석을 가공한 예는 다보탑으로 왕궁리탑 등과 거의 비슷하지만 역시 전각아래쪽은 일직선으로 마감됐다).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정림사계 석탑이지만, 백제계 석탑으로는 드물게 삼층이다...>

<장하리탑 부분... 정림사탑의 특징을 잘 계승했지만, 낙수면 하부-전각부분에서의 반전이 거의 보이지 않는는 특징도 보이는데, 이탑의 미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사진을 올린 이유는 ; 일층 지붕돌이 직선으로 마감되고 반전이 적을 경우, 지붕돌은 양쪽으로 처지게 보인다는 설명을 부연하고 싶어서다...^^> 

 

 

또한 4)지붕돌의 두께가 얇아 판석으로 만들어져 실제 건축물의 지붕 비례가 적용돼 두툼해진 신라의 지붕돌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 내 생각이지만 이런 점들은 시각적인 형상(아래서 보이는 지붕선)을 조형화했는지, 실증적인 실체(실 건축물의 지붕 낙수면으로, 엄밀히 생각하면 완전히 관념적 실체일 수도 있다)를 공예화 했는지의 차이일 수 있다고 보인다.

 

 

* 목조건축 지붕과 석탑 지붕돌(옥개석) 연관성에 대한 짧은 메모...

 

<수덕사 대웅전... 사실 목조건축 지붕의 시각적 형상과 실체적 진실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들의 시선과 눈높이에 따라 건축물의 미감도 달라질 수밖에 없고... 백제석탑의 지붕돌이 시각적 형상을 중시했다면, 신라석탑은 실증적인 실체를 관념적으로 풀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이제 하나씩 살펴본다...> 

<가까이서 본 수덕사 대웅전... 위 사진보다 낙수면은 훨씬 좁고 낮아 보인다... 이런 시각적 형상을 강조한 게 백제계 석탑의 지붕돌 형상이 아닐런지...> 

<멀리서 바라본 수덕사 대웅전... 멀어질수록 실체에 가깝고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지붕은 커지고 몸체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데, 이에 착안한 게 신라계 석탑의 지붕돌이 아닐런지...> 

<수덕사 대웅전 수리전후 도면... 그러나 이를 계량화해 도면화 시킬 경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덕사 대웅전 지붕의 두께는 건축물 몸체보다 훨씬 두텁고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목조건축물 지붕의 두께는 실증적인 실체대로 보일 경우,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모든 비례가 깨질 수밖에 없다는 말... 이 문제를 충분히 인지했을 백제인과 신라인들은 석탑의 지붕돌도 그들이 선호하는 미감에 맞춰 재해석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것이 내생각...^^>  

<미륵사지 구층목탑 모형... 5~600년대 당시 유행했을 거대한 목탑의 지붕은 어떻게 보였을까? 이 모형처럼 지붕 하부의 처마만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정림사탑 등은 그 시각적 모형을 더 중시했다고 생각한다...>

<법륭사 오중탑 실제... 뿐만 아니라 이처럼 목탑의 지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붕낙수면과 처마의 경계를 이루는 절단면(막새와 부연 등)만 보이지 않았을까?>

 

 

 

 

<왕궁리탑... 그런 이유로 백제인들이 만든 석탑의 지붕돌은 이처럼 얇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당시 가람배치에서 탑을 바라보는 위치는 회랑과 중문 등으로 인해 훨씬 가깝게 보일 수밖에 없어, 그들은 법륭사 오중탑처럼 지붕돌 하부를 보며 장중함과 위압감을 함께 느꼈을 수도 있다...> 

<경주 천군리 삼층쌍탑... 이에 반해 신라석탑 지붕돌은 낙수면이 확실히 보인다... 그들이 실체에 훨씬 가까웠단 말이고, 그만큼 신라인들은 유형화, 정형화, 관념화에 익숙했다는 말이 아닐까? 신라석탑에서 느끼는 정연함은 그런 실체적 진실에 가까웠기에 가능한 미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탑의 몸돌과 각층 기둥을 자세히 살펴보면, 5)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층몸돌이 실증적으로 높아, 사람들이 계단을 통해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누각형태 목탑이 아닌, 내부 통층형 목탑(능사 오층탑-법륭사 오중탑-법주사 팔상전)이 백제의 주류였음을 확인시켜주는데, 일층몸돌은 탑의 규모와 체감, 그리고 미감에 따라 달라지지만 석탑 비례와 조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음은 지적하고자 한다.

 

 

<부여 능사 오층목탑 모형... 일층 몸체 한가운데 심주가 보인다... 물론 당시에는 이 심주를 가리기 위한 벽면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 사방불이 모셔져 있었겠지... 그 불상들도 500년대 전반까지는 소조불상이, 6~7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금동불상(일본에서는 목불상, 이 때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을 생각해 볼 것...)이, 800년대를 넘어서면 석불상이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금산사, 고달사지, 성주사지를 생각해볼 것)...>

<능사 오층목탑이 만들어진 때가 567년... 그래서 우리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제작된 시점을 이때로 본다... 이로부터 40년 후에 만들어진 게 법륭사 오중탑이었다...>

<경주 마동사지 삼층석탑 부분... 불국사를 창건한 750년 전후 김대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전각의 풍경구멍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700년대 후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일층목탑의 기형적 크기는 능사탑이나 법륭사탑 등 내부 통층형 목탑 전통이 석탑에 계승된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삼층석탑의 체감과 비례를 위한 조치였을 수 있지만, 선행하는 실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비례라는 말이다...>

 

 

* 목탑의 구조에 대한 짧은 메모...

 

 목탑의 구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먼저 심주 구성방식에 의해 ①지하식, ②지표식, ③지상식으로 구분할 수 있고, 실용적 측면을 기준으로 하면 ①겉모습만 고루형일뿐 실제 내부는 일층만 사용이 가능한 내부 통층형과 ②계단을 통해 상층으로 통행할 수 있는 누각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목탑의 심주가, 석탑에서는 찰주가 된다...

 

백제를 기준으로보면 500년대 전후 웅진(공주)시대까지는 지하식 심주였을 것으로 보이고, 사비(부여)시대에는 지표식이 주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심주가 지하에 있을 경우 지하수 등으로 인해 심주는 쉽게 부패하거나 부식될 수밖에 없어 목탑이 무너지는 빈도가 많았을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반을 다듬고 지표면에 심초석을 둔 다음 심주(찰주)를 올리는 방식으로 개선됐을 것으로 보인다...

 

500년대 중반 조성된 능사탑 역시 지표면식으로 심초석에 사리장치를 만들고, 그 위로 심주를 세웠다... 바로 이런 심초석이 석탑에도 차용되는데, 미륵사지 서탑과 왕궁리탑 기단부에서 발견된 심초석이 그 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사라진다... 또한 내부공간 활성화 필요와 건축기술의 발달로 600년대 이후, 특히 800년대 이후 만들어진 목탑의 심주는 지상식으로 목탑의 일층 지붕 위에서 심주가 시작하게 된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능사 오층목탑 구조도... 심주가 지표면에 만들어진 심초석 위에서 시작하였다... 이는 지반을 개량할 노동력과 기술력의 확보가 선행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1600년대 전반기에 만들어진 법주사 팔상전 단면도... 이 목탑 역시 지표식 심주로 조성되었다... 일본과 달리 곧은 목재 수급이 어려웠던 한반도에서 목탑이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배경으로 일본에서 쉽게 목재를 조달할 수 있었던 백제의 해상 네트워크가 깨지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팔상전과 비슷한 시기, 1600년대 전반기에 만들어졌던 화순 쌍봉사 대웅전... 이 전각은 완벽한 지상식이었다... 목탑의 하중과 규모에 따라 지표식과 지상식은 자재 수급과 내부 공간의 활용도를 염두에 두고 기획됐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일본 목탑 사례를 살펴보면 1100년대 이후부터는 지상식이 주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너무 익히 알려진 6)탑 몸돌 기둥들인 우주나 탱주에는 민흘림 기법이 적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유섭 선생 등 석탑연구의 선구자들은 이 기둥의 특징을 <엔타시스 기법>이라고 불렀지만, 엄밀히 엔타시스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강릉 객사문에서 보이는 배흘림기법에 가깝고, 백제시대 탑과 탑리리탑의 기둥은 민흘림기둥이라고 규정하는 게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몸돌과 각층 기둥에서 보이는 차이는 초기 석탑의 사례에 국한되고, 통일신라석탑뿐 아니라 고려대에 조성된 백제계 석탑에서도 사라진다.

 

 

<부석사 무량수전 기둥... 이게 제대로 된 엔타시스 - 배흘림 기둥이다...> 

<탑리리 오층석탑 일층 우주(기둥)... 정림사탑이나 미륵사탑의 우주/기둥은 배흘림 기법이 아닌 민흘림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강릉 객사문 부분... 그리고 배흘림 기둥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좌우 벽면으로 꽉 찬 곳에서는 시각적 보정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착시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배흘림 기둥은 강릉 객사문처럼 개방형 건축, 좌우 벽면이 없는 열주식 건축에서 제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미륵사지 서탑 부분... 미륵사탑 역시 주요 부재들에는 민흘림 기법이 완벽하게 살아있다...> 

<의석 탑리리 오층석탑 부분... 탑리리탑의 기단부 역시 민흘림 기법이 확실히 살아있다...

물론 최근 교체된 부재들에서는 민흘림 기둥이 사라져버리고 몽땅한 직사각형으로 바뀌었지만...ㅠㅠ>

 

 

 

 

그 외 몸돌과 지붕돌의 디테일을 살펴보면, 정림사탑은 일층몸돌이 우주 내부에 2매씩의 판석으로 구성하여 탱주 없이도 칸 구획이 자연스럽게 유도되어 시각적으로 시원한데 반해(사실 이 점 때문에 정림사탑은 늘 미륵사보다 다음에 만들어졌다는 오해를 받아왔다. 너무 세련되고 간결했기 때문이다), 왕궁리탑은 일층몸돌에도 탱주가 남아있다. 그러나 판석의 연결이 간결하지 못해 복잡하게 보이고, 이층몸돌에도 탱주가 양각되어 있는데 현재 한쪽에만 탱주가 남아있다. 이는 본래 2층 몸돌까지는 탱주가 있었다가 고려시대 때 보수하면서 삼면의 탱주는 사라진 게 아닌가 추측하게 한다.

 

 

<정림사탑 일층 몸돌 부분... 일층몸돌은 민흘림 기법이 살아있는 좌우 우주내부에 2개의 판석으로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왕궁리탑 일층몸돌 부분... 이에 반해 왕궁리탑은 민흘림 기법이 사라진 좌우 우주 사이에 탱주가 한주 양각되어 있는데, 판석의 조합이

말끔하지 못해 복잡하고 어지럽게 보인다... 그리고 하부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층몸돌에도 탱주가 한주 양각 되어 있다...> 

 

 

 

그리고 목탑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림사탑이나 왕궁리탑은 최상층 지붕돌이 실제 목탑보다 얇고(미륵사탑은 최상층이 없으니까 모르겠고), 목탑에서는 가끔 최상층 몸체가 생략되기도 하는데 반해(팔상전 단면구조도 참고) 비례와 체감을 고려하여 최상층 몸돌까지 충실히 살렸을 뿐만 아니라, 미륵사탑에서는 상층부부터 층급받침을 오히려 한단 추가(팔상전도 오층 공포구조가 가장 많다)하여 전체적인 체감을 고려했다는 점도 메모할 필요가 있다.

 

<왕궁리탑 도면... 위(↑↑↑) 팔상전 도면이나 법륭사 오중탑 사진과 비교해보면 최상층 지붕의 두께를 비교해 볼 수 있다... 목탑의 실제 비례와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왕궁리탑 오층 지붕돌과 상륜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 스크랩했다... 왕궁리박물관 도록 참조...>

 

 

 

 

이상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를 중심으로 정리 해본다면, 미륵사탑은 법주사 팔상전처럼 지나치게 안정된 체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석재로 만든 결구의 구조적 한계 때문인 듯싶고, 왕궁리탑은 지나치게 긴장된 체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점이 오히려 석탑의 미감을 풍성하고 기름지게(중국의 목탑과 비슷한 체감) 느끼게 만든다. 이에 반해 그 중간쯤에 있는 정림사탑은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경쾌하고 세련된 상승감을 구현하고 있다. 이를 고유섭 선생의 말을 빌려 정리하면 ; 미륵사탑이 철저히 구조와 결구 ‘방식’에 치중해있다면, 정림사탑은 구조와 결구의 특질을 최대로 간소화하는데 성공했고, 왕궁리탑은 구조와 결구 형식의 완결에서 벗어나 조각적으로 변형시키는 과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이 세탑의 비교를 통해 석탑은, 실용가능 건축적 형태가 비실용적인 장식적 조형으로 변할 수밖에 없으며, 축소화, 모형화, 장식적, 공예적 조각적으로 퇴락할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고 고유섭 선생은 정리한바 있고, 나도 동의한다. 100여년 사이, 백제는 단 3기의 탑으로 석탑의 양식적 변화와 완결의 경향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왕궁리탑... 낮지만 확실한 기단부, 두터운 일층몸돌, 기단부보다 돌출된 넓은 지붕돌, 그리고 급격한 체감에 갑자기 멈춰버린 오층몸체... 정림사탑, 감은사탑과 왕궁리탑을 비교해보면 백제와 신라탑의 가장 큰 특징들이 비교된다...>

 

 

 

 

 

 

 

2) 왕궁리 오층석탑 - 백제 석탑의 완성과 석탑의 기단부 탄생...

  

나는 미륵사지 서탑과 관련한 글에서 왕궁리탑의 백제 기원설을 믿는다고 밝혔고, 조성편년은 639년(익산왕궁 원찰의 전소)에서 늦어도 의자왕의 실정이 시작된 655년 이전이라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는 640년 전후에 조형됐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중복되는 내용이지만) ①감은사탑부터 정형화된 노반의 유형은 통일신라를 비롯한 모든 석탑에 구현되었고, 심지어 이형석탑이라 할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탑, 정혜사탑에서도 수정하지 않았던 방식인데 통일신라초기를 비롯해, 고려시대에 만들었다면 현재 왕궁리탑의 노반은 설명할 수 없는 퇴화와 원시적 후퇴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맞지 않고, ②석탑 기단부에 사용된 미륵사탑과 동일한 심초석은 전형적인 백제석탑의 양식이며, ③최근 활성화된 사리갖춤에 대한 연구결과, 왕궁리탑 사리내함에 사용된 연꽃 문양은 백제 무왕대 유행했던 양식이었다는 점이 밝혀진 점, ④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단층기단부의 양식과 결구방식, 넓이와 높이의 비례가 그 구체적 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왕궁리탑 노반/왕궁리박물관 도록에서... 현재 백제탑에서 노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왕궁리탑과 정림사탑 뿐이지만, 최상층 지붕돌 위에 두겁석을 낮게 놓고 그 위로 상륜부를 만든 것은 똑같다... 이런 양식은 통일신라 이후 조성된 사례가 없는 가장 고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왕궁리탑 사리내함/전주박물관에서... 왕궁리탑보다 먼저 국보로 지정된만큼 조성시기에 대한 표기가 중요했겠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통일신라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왕궁리 사리장엄구에 대한 설명/전주박물관에서... 같은 사리내함에 대해 다른 이견이 있음을 박물관측에서도 밝히고 있다... 아직 왕궁리탑의 백제조성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석탑이나 사리갖춤의 조성편년은 하나의 유물이나 기물로 판단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당대의 시대상황, 가람배치, 석탑의 결구와 양식, 사리갖춤, 기록 등 종합적인 판단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의 내 글이 나의 전문적 영역을 벗어나 심도있는 분석까지 이르고 있지 못하지만, 현재 각종 논문에서는 탱주를 별석으로 만든 것은 백제석탑뿐이라는 연구결과와, 통일신라 석탑 기단부의 판석과 귀틀석, 우주, 탱주에 대한 분석까지 모두 이루어진 마당에 왕궁리탑 조성편년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성화 되길 기대해 본다... * 2013082 추가...>

 

 

  

 

결국 왕궁리탑에 이르러 백제탑은 석탑으로서 완결성을 갖추는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기단부다. 그리고 이점이 초기 석탑의 가장 주요한 특징인 일층몸돌과 기단부의 비례관계를 결정하게 된다. 정림사탑이나 미륵사탑과 달리 왕궁리탑은 일반 목조건축에서 보이는 기단부를 석탑에 적극 차용했다. 자세히보면 선행 두탑은 두툼한 지대석에 목조건축과 비슷한 비례의 낮은 기단부 위로 일층이 시작하지만 왕궁리탑은 일층몸돌의 1/2이 넘는 높이의 확연한 기단부를 갖춰 새로운 양식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신라석탑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낮고 넓은 기단부가 여전히 어색해 보이지만, 탑 몸돌의 괴체감만큼 강조된 기단부를 새롭게 조성했다는 점은 당시로서 엄청난 변화이자 모험이 아니었을까?

 

 

<왕궁리탑 부분... 기단부를 꽉 채운 일층몸돌... 그것이 주는 미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감은사탑 부분... 역시 기단부를 꽉 채운 일층몸돌... 왕궁리탑에 비해 기단부가 조금 더 높아졌고,

일층몸돌은 조금 더 작고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이 점들이 우리나라 초기석탑의 특징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사실 왕궁리탑을 제외한 선행하는 두기의 탑 기단부는 일단인지 중층인지 불분명하다. 정림사탑과 미륵사탑 일층몸돌 아래엔 엄연한 기단부가 있지만, 그 밑 아래쪽은 기단부로 볼 수도 있고 지대석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백제 석탑들은 초기에 기단부를 일단으로 만들려 했을까? 이단으로 만들려 했을까? 내가 기단부를 중시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석탑이 모목석탑에서 시작했기에 발생기 형태와 발전기, 전성기, 쇠퇴기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기단부에 있고, 또한 지붕돌과 함께 백제계와 신라계석탑의 가장 큰 차이점이 기단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당시의 건축물에서 찾아야만 한다.

 

<법륭사 금당 모형/화성박물관... 백제시대 목조건축의 기단부는 이처럼 이단으로 만들어졌었다...>

<감은사탑 기단부... 그리고 백제건축의 특징인 이층 기단부는 감은사탑에 와서 완벽하게 재현된다...>

 

 

 

 

여기서 참조할 기단부 역시 600년대 건축인 법륭사 오중탑과 금당이다. 원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걸로 모든 게 결정될까? 아니다. 백제계와 신라계의 가람배치에 따라 기단부가 달랐다는 점도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백제계 평지가람과 신라식 산지가람의 기단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단부 문제만으로도 하나의 글이 만들어지겠지만, 여기서는 백제탑과 관련해서 국한해 이야기하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법륭사 오중탑과 금당을 보면 목조건축의 기단부는 엄연히 이단이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600년대까지 신라의 가람들은 역시 산지형이 아닌 평지형 가람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목조건축의 기단부도 역시 이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모목석탑에서 출발한 백제의 세탑 기단부는 이단을 목적하지 않았을까?

 

* 적석총 묘상건축(향당)을 통해 본 기단부의 변화와 특징에 대한 짧은 메모...

나는 앞 글에서 석탑의 기원을 홍산문화와 고조선의 고인돌에서부터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일차 완결적 형태가 고구려의 적성총이라 말했고... 왜냐하면 우리들 정서에 부처의 분신인 사리를 모시는 탑과 시신을 안치한 무덤은 똑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는 유구만 남아있지만, 적석총 위에는 이처럼 묘상건축 즉 향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석탑 기단부 역시 이런 문화적 원형이 있어 차츰 정형화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 부분만 설명해도 한 챕터가 될 거 같아 짧게 몇 장의 사진으로 설명해 본다...

 

 

 

<고구려 태왕릉 추정도... 적석총 위로 향당이 있었다...>

<서울 석촌동 백제 적석총... 석촌동이란 지명이 말해주듯, 한성백제 시대 이곳에는 고구려 떼무덤처럼 수많은 적석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적석총에 비해, 초기 백제 적석총은 무덤 본체라 할 수 있는 적석총이 급격히 낮고 넓어졌음(50m가 넘는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낮아진 기단부가 목탑과 석탑의 기단부에 차용된 거 아닐까? >

<중국 훈춘시 마적달묘탑 복원 상상도/한국고대문화의 비밀/이형구 지음/김영사 간에서 스크랩... 중국 훈춘시는 두만강 중하류에 위치한 곳으로, 발해 동경용원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이 마적달묘탑이란 마적달이란 사람의 묘 지상에 있었던 탑이란 말이고... 즉 고조선에서부터 이어져 고구려-백제로 내려온 장례풍습은 발해까지 전승되었다는 말이 되고, 결국 고구려, 백제 문화에서는 탑과 무덤은 같은 풍습이 습합(불교의 필요에 의해서든, 전통양식의 필요에 의해서든)된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즉 (백제)탑의 기단부는 이런 묘실건축의 전통을 차용했지만, 차츰 그 의의와 의도는 잊혀지고 건축적 실용성과 구조적 안정성만으로 해석되면서 (신라에 이르러) 본래의 의도가 사라졌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아무튼 그 양식적 완결은 발해에 의해서 완성됐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이 묘실과 탑은 정효공주 무덤과 비슷한 792년경으로 추정되며, 이 탑이 무너진 연도가 1921년임을 감안하면 복원 상상도는 매우 구체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법륭사 금당과 오중탑... 하부 기단부를 보면 완벽한 이층 기단부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산사 미륵전... 평지식 가람배치를 특징으로 한 백제식 건축 기단부는 이처럼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옛 백제지역의 금산사, 보림사, 무위사 등등 건축 기단부는 이처럼 낮다...>

<동화사 대웅전... 그에 반해 산지형 가람을 선호했던 신라 건축물 기단부는 이처럼 높다... 건물 위계와 품격을 위한 장식적 측면만이 아니라, 공간 조성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징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신라건축의 기단부는 이층으로 조성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존하는 통도사 대웅전이나 수덕사 등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데, 산지형 가람이 본격화 되는 800년대에 이르면 이처럼 건축물 기단만큼 석탑의 기단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 거 아니었을까?...> 

<인정전... 같은 궁전이라 해도 근정전과 인정전의 기단부는 다르다... 그리고 기단부의 폭도 달라지고... 여기서 기단부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목조건축을 바라볼 때, 목조건축만이 아니라 기단부까지 같이 봐야 양식적 완성태를 갖출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서울역 앞... 그리고 오랫동안 기단부에 익숙한 우리 시선에는 저처럼 현대식 건물에도 기단부 형상을 차용해야 안정감을 느끼게 각인시켜 왔다... 굳이 사진은 생략하겠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 아파트 건축에서도 기단부 형상의 석재마감 등을 통해 우리의 미감을 만족시킨 현실도, 경제적 조건의 충족과 장식성의 선호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기단부의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 대우빌딩이었던 서울 스쿼어와 그 옆 경창서, 그 옆 건물까지 비교해 보시길...>

<63빌딩... 그러나 최근 유리 커튼월로 만들어진 신축 건물들에는 기단부가 없다. 무역회관, 타워팰리스 등 역시 마찬가지다... 정림사탑 처럼 땅에서 불쑥 솟아 오른 느낌처럼 만들어졌다는 말인데, 기술적인 문제일까? 미감의 문제일까? 원 설계자들이 서양인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높지 않은 기단부를 정형화했던 백제계 평지가람에서 하부 기단부는 대지와의 경계, 그리고 목조건축에 가장 치명적인 지표면과 땅에 내포된 수분의 차단이라는 실용적 이유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이에 반해 산지형 가람이 정형화된 신라의 목조건축 기단부는 상대적으로 훨씬 높지만, 완전한 단층이다. 왜냐하면 목조건축의 기단이 아니라 경사진 토지의 평탄작업과정에서 만들어진 석축의 개념이 강했기 때문에 목조건축물을 위한 이층의 기단부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석탑의 기단부에서도 상대갑석보다 훨씬 두꺼운 석재를 사용하여 하층기단부를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단 양식적으로 독립적 형태를 띠지 않았을 뿐이므로, 이를 지대석으로 보는 것보다는 이층 기단부를 형상화 하려는 결과로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정림사탑... 이런 이유로 나는 정림사탑의 기단이 이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양식적으로 독립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왕궁리탑에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목탑이나 목조건축 기단부의 구조적 비례를 벗어나 석탑의 조형성에 맞게 상층기단부를 일층몸돌의 1/2이상으로 높이게 된다. 물론 (신라석탑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넓고 안정적인 석탑 조형의 새로운 양식을 갖춘 기단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일본의 목탑이나 중국의 전탑과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 석탑만의 미감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기단부가 되는 것이며, 왕궁리탑의 역사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모형 같은 탑, 공예 같은 석탑의 양식이 정형화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왕궁리탑의 기단부 높이와 비례 등은 감은사탑 기단부로 이어져 이층 기단부로 전형화 된다. 탑리리탑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지만 그 출발은 왕궁리탑이라는 말이다. 구조에서 모형으로, 결구에서 조각으로 변화되는 석탑의 치열한 고민이 왕궁리탑 기단부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왕궁리탑... 오늘은 왕궁리탑의 의의에 대해 여러가지로 뜯어 보고 있다...^^

그러면 왕궁리탑의 성과가 통일신라시대에는 어떻게 전승, 변화, 발전, 퇴화해 나갈까?>

 

 

 

 

 

 

3)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를 통해 본, 백제 석탑의 한계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

 

 

왕궁리탑은 완전히 독립적인 기단부를 갖춤으로 인해, 그렇지 못한 구조의 정림사탑, 미륵사탑과 달리 땅에서 그냥 솟아 오른 거 같은 어색하거나 낯선 감을 많이 해소한 석탑다운 석탑, 석탑을 위한 석탑으로 만들어진 초기형태의 탑이라 생각된다. 단 완전히 목탑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일층몸돌의 크기와 넓이다. 즉 당시의 목조건축들처럼 일층몸돌의 폭은 기단부의 1/2가 넘고, 평면 넓이도 1/4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일층몸돌이 기단부를 꽉 채우게 보인다. 즉 양식적으로는 독립했으나 기본 비례까지는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비례는 통일신라에 와서도 수십년의 세월동안 감은사/고선사탑, 나원리탑, 황복사탑, 장항리탑 등 수많은 석탑들이 만들어진 이후 석가탑이 만들어진 700년대 중반에 와서 일층몸돌은 1/2이하로 가늘어지면서 석탑의 미감도 바뀌게 된다.

 

 

<고선사탑...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 그리고 장식성을 중심으로 시대적 변화를 살펴보자... 먼저 600년대 후반...>

 

 

 

아무튼 왕궁리탑은 기단부에 비해 크고 높은 일층 몸돌로 인해 장중하고 여백이 없는 기름진 미감이지만, 상대적으로 낮고 넓은 기단부로 인해 가분수 같은 불안정함과 짓눌린 듯한 느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백제 석탑을 비롯해 초기 석탑(감은사탑/나원리탑/황복사탑 등)들의 가장 큰 숙제는, 공예적으로 석탑의 특성을 살리는 문제 외에도 미학적으로 무거움을 상쇄하기 위한 요소의 개발과 시각적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는 체감률의 획득이었고, 그것이 일층몸돌과 기타층 몸돌의 비례를 비롯, 지붕돌 처마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두께를 결정하게 됐다. 왕궁리탑을 비롯한 백제 석탑들은 목탑 등 목조건축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체 진화가 중단됐지만 결국 그 실험은 신라로 이어지고, 700년대를 전후하여 신라인의 미감으로 완성되게 된다.

 

<경주 황복사탑... 700년 전후, 고선사탑으로부터 1~20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단부는 높아지고 좁아진다... 그러나 여전히 일층몸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경주 남산리 서탑... 700년대 후반~800년 전후... 크기가 급격하게 줄지 않았지만,

이미 석탑의 장중함과 괴체감은 사라지면서 안정성과 함께 장식적 요소들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석탑이 모형화 되고 공예적으로 완성된 800년대 이후 석탑들의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변화를 정리해보면,

안정된 미감에 도취된 신라인들은 기단부를 키웠을 뿐, 더이상 낮고 넓은 기단부와 크고 높은 일층몸돌을 만들지 않았다. 어색함도 사라졌지만 석탑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생동감이 사라지면서 장중함도 함께 사라졌다.

 

<진전사탑... 800년대 초반... 내가 이탑을 남산리서탑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하층기단부, 상층기단부, 일층몸돌을 꽉 채운 조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붕돌 전각의 풍령(풍탁) 구멍 때문이다... 즉 이 시기 석탑에는 청동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다... 탑도 작아지고, 기단부는 더 높아지고, 일층몸돌은 작아지면서 더이상 장중함과 긴장감이 배일 규모도 분위기도 사라진다... 즉 공예적 완성도가 미감의 척도가 된다는 말이다...>

 

 

 

하층 기단부는 불필요하게 높아만 가고, 상층 기단부는 더 이상 넓적한 직사각형 형태를 띠지 않게 된다.

일층몸돌처럼 정사각형 모양으로 높아진 기단부에 탑신은 자꾸 가늘어지고 아담하게 변해갔다.

석탑은 높아질 수 없었고, 규모도 키울 수 없었을 뿐더러 상반된 미감을 갖출 구조를 상실해 버렸다.

남는 것은 장식... 그때부터 삼층석탑 기단부와 몸돌에는 장식이 첨가된다. 비천상, 팔부신장, 사방불...

그러나 석탑의 공예적 완성은 불탑의 품격을 높인 것도 아니었고, 미학적 완결을 뜻하지도 않았다.

불신(사리)이고, 법신이었던 신앙의 중심 석탑은, 가람배치의 다양한 구성요소 중 하나로 의미가 축소됐다.

 

 

<의성 관덕리탑... 그리고 시대가 더 늦어져 800년대 중후반이 되면 층급받침도 줄어들고, 불상으로 채워졌던 일층몸돌에는 보살상까지 등장하게 된다... 또한 아래 사진처럼 기단부 갑석에는 사사자까지 등장하면서, 석탑의 장식성은 최고조를 발하게 된다... 운문사탑이나 화달리탑 처럼 판석이 넓어진 이유, 그건 또 다른 장식공간의 필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관덕리탑 사사자상/대구박물관... 그리고 이 때의 사자들은 분황사탑에서 처럼 기단부의 네 귀퉁이를 지키는

정중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닌, 새끼사자를 안고 있는 암사자처럼 모성애와 부드러움을 더 중시하게 되고...>

 

 

 

 

 

860년대 신라의 복고주의 열풍 속에서 마지막 몸부림을 친후, 석탑은 더욱 유약해지고 장식적으로 변한다.

긴장감을 유지하던 지붕돌 낙수면은 곡선으로 변하면서 인위적 반전은 심해지고, 최초의 석탑인 정림사탑처럼 일층괴임까지 부각된다. 구조와 형태, 실루엣이 미감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인 조작을 통해 석탑이 장엄되기 시작한다. 결국 풍탁이 걸리고, 문비에도 청동장식이 달리는 등 수많은 군더더기가 붙기 시작한 석탑은 더 이상 불교신앙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미감을 가리고, 규정된 것들이 규정되지 않는 것과의 대화를 차단하게 되고...

 

 

* 석탑 몸돌 하부의 괴임에 대한 짧은 메모...

 

신라석탑 각층 지붕돌 위에는 2단의 낮은 괴임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두툼한 괴임으로 변하게 되고... 나는 그 괴임이 목탑의 각층 난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형태는 역시 정림사탑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정림사탑을 시원이자 최초로 생각하는 이유는, 이처럼 최후의 양식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륵사탑 모형... 이 목탑이 누각형이었다면 자연히 난간은 충분한 중요성과 함께 장식적 요소를 갖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양식이 있어 내부통층형으로서 이층 이상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없는 고루형 목탑에서도 난간만은 꼭 만들었다... 법륭사 오중탑처럼...>

 

<정림사탑... 각층 몸돌을 보면 괴임돌이 매우 충분한 크기로 만들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탄사탑... 그러나 통일신라로 내려오면, 각층 몸돌 밑에 괴임은 매우 작은 2단으로 정형화된다... 석탑으로서 완결성을 갖춘 전형적 양식이면서, 장식적인 형태의 난간은 신라인들 입장에서 정연함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햇살이 어렸을 적...^^>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부분... 그러나 목탑 형식의 석탑을 만들 때, 이처럼 분명하게 난간을 표현하였다... 이 난간의 문양이 법륭사 오중탑 난간과 똑같고, 임해전지에서 발견된 난간문양과도 동일하다... 그런 연관성이 밝혀진 이후 미륵사 목탑이나 황룡사 목탑의 모형은 항상 이 문양을 사용하고 있으며, 부여 능사 재현탑 역시 마찬가지다...>

<담양 읍내리 오층석탑 부분... 그리고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다시 각층 몸돌의 괴임은 강조된다... 정림사탑보다 더 넓고 높게...>

 

 

 

 

 

700년대까지 탑들은 그런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과 구조만으로 상반된 미감을 통일시켜 긴장감을 만들었다. 내가 전성기 신라석탑에 주목하는 이유가 그것이며, 그 출발에는 일층몸돌과 기단부의 비례가 숨어있다. 목탑의 구조와 석탑의 질감이라는 병립할 수 없는 것이 융합되고 공존한 완결태... 생동감의 원천이었다.

 

 

<석가탑... 우아함과 장중함... 그 이질적 미감이 조화롭게 통일된데에는 이질적 양식을 소화해낼 수 있는 사상적 완결성과 정신적 풍요,

그리고 문화적 안목이 충만했기 때문이 아닐까?>